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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갑작스러운 어둠

Author: 지호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7 06:42:19

회의실 안에는 차분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현제이를 설득하거나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사내에 아무도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입사한 지 일 년 남짓 된 스물다섯의 신입사원이었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단호한 리더십과 추진력은 노련한 임원들조차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만큼 깊이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이는 진짜 초년생이 아니었다. 회귀하기 전 실무 현장에서 이십 년 동안 묵묵히 경력을 쌓아온 베테랑이었기에, 물류 흐름의 미세한 맥을 짚어내는 능력이 누구보다 탁월했다. 상하차장의 복잡한 동선이나 저온 창고의 효율적인 관리법 등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감각들이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과거의 기억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그녀가 가진 가장 확실한 자산이었다. 이전에 겪었던 미래에서 신선식품의 당일 배송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다만 그때는 대형 업체들의 선점 경쟁이 끝난 뒤라 시장의 모퉁이에서 현상 유지에 급급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세부적인 기획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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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83. 사십 년 만의 얼굴

    정 회장의 별채, 한적한 다실.준호가 마련한 자리였다. 회사와 완전히 분리된, 오직 가족만이 드나드는 공간이었다. 창호지 문 너머로 오후의 햇살이 은은하게 스며들고 있었다.정지훈은 다실 앞에 서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다."긴장되세요?"제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지훈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평생을 상상만 해왔던 얼굴입니다. 막상 마주하려니, 긴장되는군요.""천천히 하셔도 돼요. 준비되실 때까지, 저희는 여기서 기다릴게요."정지훈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마침내 미닫이문을 열었다.방 안, 정 회장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평소의 위엄 대신, 낯설 만큼 작아진 어깨로 정지훈을 올려다보았다.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만 있었다."……많이 컸구나."정 회장이 먼저 낮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정지훈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듯 앉았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질문이, 마침내 입 밖으로 나왔다."제 어머니를, 정말 사랑하기는 하셨습니까."정 회장의 눈이 질끈 감겼다."사랑했다."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사랑했지만, 그때의 나는 이 회사를 지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얼마나 비겁한 변명이었는지는 나중에야 깨달았다.""그래서 저를, 그리고 제 어머니를 버리셨습니까.""버린 게 아니라……."정 회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오랜 침묵 끝에, 그는 힘겹게 고개를 숙였다."버린 것이 맞다. 그 어떤 말로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겠지."방 안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정지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십 년 가까이 묻어두었던 원망과 그리움이, 동시에 터져 나오려는 듯했다."그동안…… 잘 지냈느냐."정 회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박 실장님 덕분에요."정지훈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제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그 말에 정 회장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자신이 아닌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82. 두 개의 전장

    송도 펜트하우스, 늦은 밤.거실 테이블 위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서류가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하나는 임시 주주총회 소집 공고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 회장과 정지훈의 만남을 준비하기 위한 메모였다."주주총회부터 정리해요."제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실장님이 확보하신 지분 규모로 총회 소집 요건은 채우셨겠지만, 그 지분 자체에 흠이 있어요.""삼촌 몰수 지분 이전 건 말씀이시죠."준호가 서류를 넘기며 답했다."관리 권한을 위임받은 거였지, 개인 명의로 완전히 이전할 권한까지 있었던 건 아닙니다. 법무팀에 확인해보니, 절차상 하자가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그럼 그 부분을 걸고넘어지면, 총회 자체의 적법성을 흔들 수 있겠네요."제이가 펜으로 서류의 한 항목에 밑줄을 그었다."다만 시간이 문제예요. 삼 주 안에 법적으로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하면, 총회는 예정대로 열릴 거고, 거기서 표 대결로 밀리면 우리가 불리해져요.""다른 대주주들과 사전에 접촉해봐야겠습니다."준호가 낮게 말했다."삼촌 사건 이후로, 실장님의 최근 행보를 불안하게 보는 임원들도 적지 않을 겁니다. 그들을 설득할 시간이 필요합니다."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주주 명단을 훑어 내려갔다. 우호 지분과 중립 지분, 그리고 박진철 쪽으로 이미 기운 것으로 보이는 지분들을 하나하나 표시해나갔다.작업이 잠시 멈춘 사이, 제이가 다른 서류를 끌어당겼다."정지훈 씨 쪽도 준비해야죠."준호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할아버지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아직도 감이 잘 안 잡힙니다."그의 목소리에 드물게 망설임이 묻어났다."그냥 사실을 그대로 전해드리는 게, 오히려 예의일 수도 있어요."제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준호 씨가 대신 판단하고 걸러서 전하는 것보다, 회장님 스스로 마주하고 결정하실 수 있게 해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준호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아침에 찾아뵙겠습니다."다음 날 오전, 준호는 다시 정 회장의 서재를 찾았다.정 회장은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81. 두 개의 선전포고

    차는 어느새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도로로 접어들고 있었다.정지훈은 오랫동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준호도, 제이도 더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차 안의 공기는 오히려 더 단단하게 가라앉아갔다."제가 만나야 할 사람은."마침내 정지훈이 낮게 입을 열었다."박 실장님이 아니라, 정 회장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준호의 손끝이 운전대 위에서 미세하게 굳었다."저는 지금껏 실장님이 그려주신 그림 안에서만 살아왔습니다. 제가 태어난 이유도, 제가 있어야 할 자리도, 전부 실장님의 입을 통해서만 들었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오랫동안 억눌러온 결심이 담겨 있었다."제 어머니가 왜 그렇게 사셔야 했는지. 그리고 저라는 존재가 정 회장님께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제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맞는 것 같아요. 저희가 자리를 마련해드릴게요."준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운전대를 조금 더 힘주어 쥐었다. 자신의 할아버지와, 어쩌면 자신의 숨겨진 삼촌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의 첫 대면. 그 무게가 어떤 것일지, 그 역시 가늠하기 어려웠다.같은 시각, 박진철의 자택.그는 여전히 텅 빈 CCTV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지훈이 두 사람을 따라 사라진 지 이미 몇 시간이 지난 뒤였다. 몇 번이나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신호음만 이어질 뿐이었다.박진철의 얼굴에서 여유롭던 표정이 완전히 걷혔다. "이렇게 쉽게 흔들릴 아이가 아닌데."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사십 년 가까이 공들여 키워온 존재가, 단 하루 만에 낯선 두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 깊은 곳을 갉아먹고 있었다.하지만 박진철은 오래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곧 자세를 고쳐 앉으며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법무팀장 연결해."비서의 목소리가 스피커폰 너머로 흘러나오자, 그는 낮고 단호하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한다. 삼주 뒤로 일정을 잡아. 안건은 이사회 구성 변경, 그리고 신선식품 사업부 경영진 재신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80. 어긋난 약속

    인천공항 주차장, 박진철은 차 안에서 손목시계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고 있었다.정지훈의 항공편은 이미 삼십 분 전에 도착했어야 했다. 그는 휴대폰을 들어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만 길게 이어질 뿐, 응답은 없었다."이상하군."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사십 년 가까이 키워온 아이였다. 늦는 법이 없는 아이였다. 약속한 시간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반드시 먼저 연락을 주던 사람이었다.박진철은 차에서 내려 입국장 안으로 직접 걸음을 옮겼다. 전광판에는 이미 정지훈이 탑승했던 항공편의 도착 안내가 완료로 표시되어 있었다. 승객들은 대부분 빠져나간 뒤였다.그는 입국장 로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익숙한 얼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박진철의 머릿속에 서늘한 예감이 스쳤다.그는 다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회사 쪽 인맥을 통해, 공항 인근의 CCTV 접근 권한을 가진 지인에게 연락을 취했다.같은 시각, 도심을 향해 달리는 차 안.정지훈의 고백이 남긴 여운이 한동안 차 안을 무겁게 채우고 있었다. 준호도, 제이도 섣불리 말을 얹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속내를 꺼내놓은 그에게는, 스스로 다음 걸음을 정할 시간이 필요했다.준호는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정면을 응시했다. 방금 전 자신의 입으로 내뱉었던 질문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당신이 제 삼촌이라는 뜻입니까.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그 좁은 핏줄 안에 평생 갇혀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알지 못했던 또 하나의 이름이 그 좁은 원 안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회사의 미래를 두고 벌이던 싸움이, 어느새 자신의 뿌리를 뒤흔드는 문제로 바뀌어 있었다.제이가 그런 준호의 옆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수석에서 그의 팔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굳이 위로의 말을 얹지 않아도, 그 손길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한참 만에 정지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제가 여기서 두 분을 따라간다면, 실장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79. 밀폐된 협상

    정지훈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결국 캐리어를 넘기고 뒷좌석에 올랐다.차가 공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활주로의 불빛들이 스쳐 지나갔다. 백미러 너머로, 정지훈의 굳은 얼굴이 비쳤다. 그는 여전히 경계를 완전히 풀지 않은 채,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가만히 움켜쥐고 있었다.준호는 운전대를 잡은 채 이따금 백미러로 그의 안색을 살폈다. 차 안에는 낮은 엔진음과 세 사람의 숨소리만이 가득했다.침묵을 먼저 깬 건 제이였다."박 실장님이 왜 당신을 부르셨는지, 정확히 알고 계세요?"정지훈은 대답 대신 창밖을 응시했다."실장님이 저를 얼마나 오래 도와주셨는지 아십니까. 저는 그분께 빚이 있는 사람입니다.""빚이라……."제이가 나직이 말을 받았다."그런데 정지훈 씨, 실장님이 당신을 부른 게 정말 당신을 위해서일까요."정지훈의 시선이 처음으로 제이에게 향했다."실장님은 당신이 이 회사의 정당한 주인이라고 믿고 계실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건 실장님의 신념이지, 당신이 원한 삶은 아니었을 수도 있잖아요. 당신의 의사는 단 한 번도 여쭤보지 않으신 채로, 사십 년 가까이 혼자 그 계획을 짜오신 거예요.""함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정지훈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적대감이 서렸다.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제이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당신들이 뭘 안다고 그러십니까. 실장님은 사십 년 가까이 저와 제 어머니를 지켜주셨습니다. 두 분은 오늘 처음 저를 본 사람들이고요."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었다."박지훈이라는 이름, 제가 숨으려고 아무렇게나 지은 가명이 아닙니다. 실장님의 성을 딴 이름이에요. 제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자란 저한테, 실장님은 그냥 은인이 아니라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 가문 때문에 제 어머니가 평생 숨어 살아야 했다는 걸, 이제 와서 알았다는 얼굴로 저를 설득하려는 겁니까? 참 편리하시네요."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지켜주신 게 아니라, 숨겨두신 거겠죠."제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78. 세 개의 그림자

    인천공항 입국장은 오후의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준호와 제이는 게이트 근처,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기둥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준호가 미리 확인해둔 주차장 CCTV 화면에는, 박진철의 차량이 이미 도착해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잡혀 있었다."박 실장님도 이미 와 계세요."제이가 낮게 속삭이며 휴대폰 화면을 접었다. 시간 싸움이었다. 게이트가 열리는 순간부터, 누가 먼저 정지훈에게 닿느냐가 모든 것을 갈랐다.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안내 방송이 뒤섞인 공항의 소란 속에서, 제이는 자신도 모르게 손끝을 굳히고 있었다. 준호가 그런 그녀의 앞을 자연스럽게 가로막아 서며, 밀려드는 인파로부터 그녀를 감쌌다."긴장돼요?"준호가 고개를 살짝 숙여 물었다."조금요. 이렇게 대놓고 부딪치는 건 처음이라.""제가 옆에 있습니다."준호가 제이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소란스러운 공항 안에서도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확신처럼 느껴졌다.게이트 전광판에 도착 안내가 떴다.이윽고 자동문이 열리며 승객들이 하나둘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제이와 준호의 시선이 동시에 그 흐름 속을 훑었다.그리고 그가 나타났다.깔끔하게 정돈된 슈트 차림에, 캐리어 하나만을 끌고 걸어 나오는 남자. 안경 너머의 눈빛은 차갑고 건조했으며,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정지훈이었다.그는 마치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기둥 뒤편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향해 곧장 시선을 돌렸다. 놀란 기색도,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준호와 제이가 동시에 그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정지훈 씨."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지훈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정준호 실장님, 그리고 현제이 사장님. 두 분이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군요."그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만남을 준비해온 사람 같았다."죄송하지만, 저는 먼저 뵙기로 한 분이 따로 계셔서요."정지훈이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그들을 지나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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