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니가 나를 구렁텅이에 밀어 넣고 사장이 됐어? 그 자리가 얼마나 갈지 한번 보자."이영민의 갈라진 목소리가 축축한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기괴하게 울렸다. 늘 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는 헝클어져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초점을 잃고 번들거리는 눈동자에는 광기와 패배감만이 뒤섞여 일렁이고 있었다."지금 너를 벼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너는 모르지? 내가 아니어도 너는 그 자리 3개월도 못 지켜. 그럴 수밖에 없어. 나만이 너를 알아봤던 건데."이영민은 제이의 턱밑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쁘고 뜨거운 숨결이 제이의 뺨에 닿았지만, 제이는 그저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떴다. 온몸을 지배하는 약품 냄새와 욱신거리는 손목의 통증이 선명했다. 손과 발은 거친 박스 테이프로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고, 몸은 차가운 간이 의자에 묶인 채였다."니가 그리고 있는 그 아이템들…… 이 세상 그 누구한테 들이밀어도 절대 너는 인정 못 받아. 유일하게 너의 안목을 알아본 건 나뿐인데, 나를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 넌 그 신선식품 배송도, 너 자신도 지키지 못하게 될 거야."악담을 쏟아내는 이영민을 바라보며, 제이의 머릿속은 폭풍전야처럼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소리를 질러봤자 소용없다. 이영민이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지르면서 허술한 곳을 골랐을 리 없었다. 묵직하게 닫힌 철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서늘한 공기와 짠내, 옅은 곰팡이 냄새로 보아, 이곳은 인적이 드문 바닷가 창고거나 폐쇄된 물류 컨테이너 내부일 터였다.지금 가장 어리석은 짓은 막다른 길에 몰린 미친개를 자극하는 것이다. 제이는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무시하며, 호흡의 템포를 늦췄다."……내가 지키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 이유가 뭐죠?"제이의 목소리는 떨림 없이 고요했다. 납치당한 피해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담담한 어조에, 오히려 이영민의 눈동자가 이질감으로 크게 흔들렸다."이 대표님처럼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회의실 안에는 차분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현제이를 설득하거나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사내에 아무도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입사한 지 일 년 남짓 된 스물다섯의 신입사원이었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단호한 리더십과 추진력은 노련한 임원들조차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만큼 깊이가 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제이는 진짜 초년생이 아니었다. 회귀하기 전 실무 현장에서 이십 년 동안 묵묵히 경력을 쌓아온 베테랑이었기에, 물류 흐름의 미세한 맥을 짚어내는 능력이 누구보다 탁월했다. 상하차장의 복잡한 동선이나 저온 창고의 효율적인 관리법 등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감각들이 고스란히 살아있었다.과거의 기억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그녀가 가진 가장 확실한 자산이었다. 이전에 겪었던 미래에서 신선식품의 당일 배송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다만 그때는 대형 업체들의 선점 경쟁이 끝난 뒤라 시장의 모퉁이에서 현상 유지에 급급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세부적인 기획력과 실무 운영 경험까지 모두 갖추고 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직은 임원들이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해 답답할 뿐이었다."더는 이견이 없으시면, 금일 자로 설비 예산안 승인하겠습니다."제이가 펜을 소리 없이 내려놓자, 임원들은 조용히 지시 사항을 받아 적으며 고개를 숙였다.* * *회사의 중심에서 성공적인 궤도에 오를수록, 제이는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일에 부쩍 정성을 들였다.이전 생에서 겪었던 위암의 기억이 남아있기에, 건강을 잃으면 이 모든 성취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흔다섯에 마주했던 쓸쓸한 끝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식단부터 꼼꼼하게 유기농 위주로 챙겼다.아무리 일정이 바빠도 거르지 않는 약속도 만들었다. 바로 아침 조깅이었다."체력이 제법 좋아지셨네요."옆에서 부드럽게 발걸음을 맞추던 준호가 다정한 미소를 건넸다. 이마에 맺힌 얇은 땀방울이 아침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체력 관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우던 먼지 냄새 대신, 이제는 새 가죽 의자의 묵직한 가죽 향과 매끄러운 유리 테이블이 제이의 눈에 들어왔다.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 화면 속 숫자는 매일 아침 전산이 리셋될 때마다 기어코 앞자리를 바꾸며 치솟고 있었다. 이영민의 몰락이 가져온 반사이익은 실로 엄청났다. 갈 곳을 잃고 시장에 쏟아진 중소 물류 거래처들이 제이의 계열사로 도미노처럼 흡수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매출 곡선은 가파른 수직을 그렸다.임원들은 매일 아침 문턱이 닳도록 사장실을 드나들며 아부 섞인 보고서를 내밀었지만, 그들의 눈빛 깊은 곳에는 여전히 스물다섯의 낙하산 핏덩이를 향한 은근한 무시와 불만이 깔려 있었다."현 사장님, 이번 달 지표는 창사 이래 최대치입니다. 정 회장님께서 내리신 목표치도 이미 가볍게 넘겼습니다."보고서를 검토하는 제이의 눈빛은 무미건조했다. 숫자는 화려했지만, 이건 제이가 원하는 진짜 승리가 아니었다. 단지 상대의 파멸로 인해 굴러떨어진 눈먼 떡고물에 불과했다. 매출의 외형만 불어났을 뿐, 시스템은 여전히 구시대적인 대량 수송 방식에 머물러 있었다."이건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제이는 펜 끝으로 붉은색 지표를 툭툭 치며 단호하게 말했다."공산품과 생필품 몇 상자 더 나르는 걸로 만족할 생각 없습니다. 이영민의 망가진 물류망을 거저먹었다고 안주하는 순간, 다음 주자는 우리가 될 겁니다."보고를 하던 기획조정실장의 안색이 일순 굳어졌다.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면에 걸린 대형 도심 지도를 짚었다. 지도의 주요 거점마다 붉은색 핀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보통의 물류는 썩지 않는 물건을 며칠에 걸쳐 배송하는 것에 안주하죠. 하지만 제가 그리는 최종 목적지는 다릅니다. 신선식품입니다.""신선식품이요?"실장의 입에서 헛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장실 한구석에 대기하고 있던 상무와 전무들의 얼굴에도 순식간에 황당함과 실소가 번져나갔다."야채나 고기, 우유 같은 것들 말
새로운 보금자리는 도심의 화려한 심장부를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초고층 오피스텔이었다.24시간 보안 요원이 상주하는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 카드 키를 대야만 들어설 수 있는 완벽한 요새. 지문 인식 한 번에 묵직한 마찰음을 내며 우아하게 열리는 현관문을 통과하는 순간, 제이는 비로소 자신이 이전 생의 구차했던 밑바닥을 완전히 벗어났음을 온몸으로 실감했다.거실 전면을 가득 채운 대형 통창 너머로 밤의 도심이 보석을 흩뿌려 놓은 듯 아득하게 펼쳐졌다."내 공간이야……."제이는 가만히 읊조렸다. 낡은 조립식 가구와 삐걱거리는 문틈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오던 이전 빌라의 기억은 저편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스스로 설계한 전쟁에서 온전한 제 힘으로 쟁취해 낸 안식처였다."마음에 듭니까?"어느새 다가온 준호가 제이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묵직한 온기가 제이의 몸에 남아 있던 마지막 긴장마저 부드럽게 녹여 내렸다.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현관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백화점과 명품 브랜드의 배송 직원들이 줄을 지어 박스를 들고 들이닥치기 시작했다."여기에 내려놓으시면 됩니다."준호의 지시에 따라 거실과 드레스룸이 순식간에 화려한 박스들로 채워졌다. 제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포장을 뜯어내다 이내 숨을 삼켰다.악어가죽으로 마감된 클래식한 블랙 백부터,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우아한 로즈골드 팔찌와 목걸이, 스위스제 가죽 스트랩 시계까지. 드레스룸의 조명 아래 유리 진열장을 채운 것들은 보통의 여자들이라면 평생을 열망할 법한 초고가 명품들이었다."준호 씨, 이게 다 뭐예요?"제이가 놀라 뒤를 돌아보자, 준호는 그저 당연하다는 듯 싱긋 웃으며 유리장에 시계를 가지런히 올려놓을 뿐이었다."저…… 아직 스물다섯이에요. 이런 건 감당하기 너무 벅차요."제이가 뺨을 살짝 붉히며 손을 내젓자, 준호가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두 팔로 부
"정 본부장님도 한잔 받으셔야죠!"사내 TF 팀원들과 새로 흡수된 물류 사업부 직원들이 한데 섞여 들어 올린 맥주잔들이 요란하게 부딪쳤다."오늘 제가 사장님 에스코트를 책임져야 해서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준호는 가득 채워져 다가오는 맥주잔을 부드러운 손짓으로 밀어내며 대신 얼음이 가득 담긴 탄산수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쏟아지는 아쉬움 섞인 야유 속에서도, 준호의 눈빛에는 제이의 안전한 귀갓길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단단한 이성이 빛나고 있었다.시끌벅적한 갈빗집 안은 숯불 열기와 알코올 냄새, 그리고 성공적인 역공을 자축하는 활기찬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제이의 계열사 사장 취임과 동시에 준호가 이끌던 PF 팀까지 제이의 지휘 아래로 공식 이전되면서, 두 사람은 이제 명실상부한 최고의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사내 최대의 권력 축이 되어 있었다."우리 사장님, 스물다섯에 계열사 탑이라니 진짜 전무후무한 신화 아닙니까? 정 본부장님이 안목이 대단하십니다!"취기가 오른 부장 한 명이 넉살 좋게 준호를 치켜세웠다. 준호는 단정한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둔 채,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제이의 옆자리를 지켰다. 소란스러운 축하 속에서도 준호의 시선은 틈만 나면 제이의 잔을 대신 비우거나, 매운 음식을 짚는 그녀의 앞접시를 묵묵히 챙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제이는 크림색 실크 블라우스 소매를 가볍게 걷어 올린 채 직원들의 인사를 여유롭게 받아넘겼다. 과거의 트라우마였던 '가스라이팅 당하던 며느리'의 그늘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스스로의 지략으로 거대 기업의 왕관을 쟁취한 경영자의 당당함만이 그녀의 옆얼굴에 빛나고 있었다.밤 열한 시가 넘어서야 겨우 끝난 회식 자리. 준호는 비틀거리는 직원들을 택시에 태워 보낸 뒤, 제이를 조수석에 태우고 그녀의 낡은 빌라 골목으로 차를 몰았다.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길은 평소보다 유독 쓸쓸하고 축축했다.골목 어귀에 차를 세운 준호가 시동을 끄자, 좁은 차창 너머로 낡은 가로등 불빛이
아침 햇살이 하얀 레이스 커튼을 뚫고 침대 끝자락에 닿았을 때, 제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전신을 무겁게 지배하는 뻐근한 열기와 손목뼈 마디마디에서 느껴지는 둔탁한 시큰거림이 지난밤의 격정적인 온도를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었다.제이는 뻣뻣하게 굳은 목을 돌려 곁을 살폈다. 이불 밖으로 드러난 준호의 단단한 어깨와, 규칙적으로 숨을 몰아쉬며 오르내리는 그의 묵직한 가슴팍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언제나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던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엉망으로 흐트러진 모습은, 오직 이 침대 위에서만 허락된 그만의 무방비한 영토였다.제이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려 움찔한 순간, 허리춤을 감싸고 있던 준호의 굵은 팔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준호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제이를 제 품속으로 더욱 깊숙이 끌어당겨 묻었다.잠결에도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집요한 독점욕이 그의 뜨거운 체온을 타고 척추를 타고 전해졌다. 제이는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댄 채, 두 사람의 심장 박동이 서서히 포개어지는 감각을 가만히 느꼈다.하지만 평화는 정오가 채 되기도 전에 거칠게 깨졌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준호의 휴대전화가 진동을 울려대기 시작했다.발신인은 대기업의 절대권력이자 준호의 할아버지, 정 회장의 비서실이었다.[정 회장님께서 오늘 오후 세 시, 본가로 현제이 씨와 함께 들라 하십니다.]단 한 마디의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끊긴 전화기 너머로 정막이 가라앉았다.잠에서 완전히 깬 제이는 침대 밑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참담하게 흩어진 어제의 잔해들을 보았다. 이영민이 무자비하게 잡아 뜯어 깃이 통째로 날아간 셔츠와, 갈기갈기 찢겨 속살을 전혀 가려주지 못하는 속옷. 이 꼴로는 정 회장을 마주하기는커녕 준호의 집 현관문을 나서는 것조차 불가능했다."이거라도 걸쳐요."준호가 드레스룸 서랍을 거칠게 뒤져 내민 것은 그가 운동할 때 입는 짙은 회색 후드티와 밴딩 트레이닝 바지였다.옷을 입자 준호 특유의 짙은 우디 향이 코끝을 찔렀다. 그의 넓은 어깨에 맞춰진 옷자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