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연화는 약과를 쥔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수라간 문 앞에 이헌이 서 있었다. 뒤따라온 내관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전하께서 어찌 이곳까지…….”
연화는 황급히 일어나 예를 올렸다. 놀란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약과까지 등 뒤로 숨겼지만, 이미 늦었다.
이헌의 시선이 연화의 손을 따라갔다.
“무엇을 숨겼느냐.”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내가 이미 보았다.”
연화는 잠시 망설이다 약과를 내밀었다.
“약과이옵니다. 드시겠습니까?”
뜻밖의 물음에 이헌이 잠시 말이 없었다. 뒤에 서 있던 내관이 대신 나섰다.
“전하께서는 늦은 밤에 단것을 드시
모두의 시선이 민서령에게 향했다.민서령은 당황하지 않고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봤다.“이것은 제가 고른 차가 아닙니다.”“네 자리에 놓여 있지 않느냐.”대비가 물었다.“소인은 독을 살필 때 향이 강한 차를 마시지 않습니다. 계피 향이 후각을 둔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민서령은 연화를 바라봤다.“제가 평소 마시는 차를 기억하십니까?”“국화차입니다.”연화는 곧바로 대답했다.“지난번에도 계피차를 드시지 않았습니다. 독 냄새를 놓칠 수 있다고 하셨고요.”민서령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기억하고 계셨군요.”“먹는 것에 관한 이야기는 잘 기억합니다.”“역시 연화답습니다.”이헌이 두 사람 사이로 한 걸음 들어왔다.“지금 감탄할 때는 아닌 듯하군.”연화가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민서령은 찻잔 아래 놓인 이름패를 뒤집었다.종이 한쪽이 억지로 뜯긴 흔적이 있었다.“누군가 이름패를 바꾸고 제 자리에 계피차를 놓았습니다.”“왜 하필 민 규수의 자리였을까요?”연화가 묻자 서진우가 답했다.“독을 잘 아는 민 규수를 의심하게 만들려는 것이겠지.”“그럼 박 상궁마마와 규수 중 한 사람이 함께 움직였다는 뜻이네요.”연화의 말에 규수들의 표정이 굳었다.영성대군의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대비가 명했다.
“그중 하나가 영성대군의 사람이다.”대비의 말이 떨어지자 네 명의 상궁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모두 십 년 넘게 대비를 모신 사람들이었다.대비의 수결을 볼 수 있고, 인장을 보관하는 장소도 아는 이들이었다.“억울하옵니다, 마마.”가장 연장자인 박 상궁이 머리를 조아렸다.“소인은 이십 년 동안 마마를 모셨사옵니다.”“함께한 세월이 결백을 증명하지는 않는다.”대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네 사람의 처소를 수색하라는 명이 떨어졌다.그러자 박 상궁이 연화를 바라봤다.“그 전에 승은상궁부터 가두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이헌의 눈빛이 서늘해졌다.“방금 뭐라 했지?”“독이 든 차를 직접 따른 사람은 승은상궁이옵니다. 아무리 전하의 총애를 받는다 해도 궁녀는 궁녀이니…….”“궁녀라 해서 모두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대비가 말을 끊었다.“연화는 전하의 승은을 입고 정식으로 승은상궁에 올랐다. 강녕전에 속한 궁녀들을 거느리며 전하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이다.”박 상궁의 얼굴이 굳었다.“증좌도 없이 함부로 끌고 갈 수 있는 아이가 아니라는 뜻이다.”연화는 자신을 위해 내려진 말인데도 어딘가 얼떨떨했다.어제까지만 해도 상궁들이 부르면 달려가야 했다.그런데 이제는 다른 궁녀들을 거느리는 자리가 되었다.연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소인도 궁녀들에게 명을 내려도 됩니까?”“강녕전에 속한 일이라면 가능하다.”이헌이 대신 대답했다.“무엇을 시키고 싶은데?”“밤에 출출할 때 간식을 가져오라고 해도 됩니까?”“안 된다.”“어째서요?”“네가 상궁이 된 것이지, 수라간의 주인이 된 것은 아니니까.”연화의 얼굴에 실망이 떠올랐다.엄중했던 분위기가 잠시 흐트러졌다.서진우의 입가에도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그는 곧 표정을 지우고 네 상궁의 손을 살폈다.“명령서를 쓴 사람은 왼손잡이일 가능성이 큽니다.”“어찌 아느냐?”대비가 물었다.“수결의 끝이 왼쪽으로 번졌습니다. 오른손으로 흉내 냈다면 먹이 반대편으로 번졌을 것입니다.”
“누구도 승은상궁의 몸에 손대지 마라.”서진우가 연화의 앞을 막아선 채 칼을 겨눴다.대비전의 금군들도 일제히 칼자루를 붙잡았다.연화는 서진우의 소매를 당겼다.“진우 공자, 칼을 내려놓으십시오.”“너를 잡아가려 했다.”“그렇다고 대비전에서 칼을 드시면 공자까지 잡혀갑니다.”“상관없다.”“소인은 상관있습니다.”서진우가 연화를 돌아봤다.연화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소인은 독을 넣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숨을 이유도, 칼 뒤에 숨어 있을 이유도 없습니다.”서진우는 잠시 망설이다 칼을 내렸다.그러나 연화의 앞에서는 비키지 않았다.대비가 상궁들에게 명했다.“윤채령을 안으로 옮기고 의원을 불러라.”궁인들이 쓰러진 윤채령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입술은 검푸르게 변해 있었다.민서령이 가장 먼저 달려가 맥을 짚었다.“독이 맞습니다.”규수들이 술렁였다.“승은상궁이 직접 차를 따랐습니다.”누군가 말했다.“주전자 안에서 뱀의 문양도 나왔지 않습니까.”궁인들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연화에게 쏟아졌다.연화는 찻주전자를 가만히 바라봤다.“이상합니다.”“무엇이 말이냐.”대비가 물었다.“저 주전자의 차는 윤 규수만 마신 것이 아닙니다.”연화가 규수들의 앞에 놓인 찻잔을 가리켰다.윤채령에게 차를 따르기 전, 이미 세 명의 규수에게 같은 주전자의 차를 따라 주었다.“차에 독이 들어 있었다면 먼저 드신 분들도 쓰러져야 합니다.”규수들이 놀라 제 찻잔을 내려다봤다.연화는 주전자 속의 종이 조각을 젓가락으로 건져 냈다.“이 종이는 물에 젖지도 않았습니다.”종이 표면에는 얇게 밀랍이 발라져 있었다.독을 우려내기 위한 물건이 아니라, 범인을 지목하기 위해 일부러 넣은 흔적이었다.“소인의 누명을 씌우고 싶은 사람이 넣은 것 같습니다.”“그렇다면 독은 어디에 있었지?”대비의 물음에 연화가 윤채령이 떨어뜨린 찻잔을 살폈다.잔 가장자리에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연지인 것 같습니다.”민서령이 천으로 자국을 닦아 냄새를 맡았다
“이번 간택에 들어오는 규수들 가운데 세 명이 내 사람이다.”영성대군의 말이 끝나자 이헌이 칼을 뽑았다.“숙부를 잡아라.”강무영과 서진우가 동시에 정자로 뛰어들었다.그러나 영성대군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탁자 아래에 숨겨 둔 줄을 당기자 정자 바닥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연화!”이헌은 연화부터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연기 사이로 화살 하나가 날아들었다. 서진우가 몸을 돌려 칼로 화살을 쳐 냈다.화살촉이 향하던 곳은 정확히 연화의 가슴이었다.“다치지 않았느냐?”서진우가 연화를 살피며 물었다.“괜찮습니다.”“내 곁에 있으니 당연히 괜찮다.”이헌이 연화를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서진우는 이헌을 바라봤다가 조용히 칼을 거뒀다.연기가 걷혔을 때 영성대군과 사내들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강무영이 정자 아래의 통로를 발견했지만 입구는 무너져 있었다.“처음부터 도망칠 길을 마련해 둔 모양입니다.”“쫓겠습니다.”서진우가 통로로 내려가려 하자 이헌이 막았다.“이미 늦었다.”“흔적이 남았을 수도 있습니다.”“곧 간택 규수들이 궁으로 들어온다. 지금은 그들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다.”서진우의 시선이 연화에게 향했다.“알겠습니다.”그가 추격을 포기한 이유가 명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헌도 알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이헌과 연화는 대비전으로 향했다.서진우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강무영은 영성대군이 달아난 통로를 조사하기 위해 폐전에 남았다.이야기를 들은 대비는 놀라기는커녕 차분히 찻잔을 내려놓았다.“세 명이라 했느냐.”“간택을 당장 중단하십시오.”이헌이 단호하게 말했다.“중단할 수 없다.”“역도들이 궁 안으로 들어옵니다.”“그러니 더더욱 진행해야 한다.”이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까?”“영성대군의 사람이 섞여 들어올 가능성은 예상했다.”“그런데도 간택을 강행하셨습니까?”“그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어떻게 잡겠느냐.”대비는 간택 규수들의 명부를 펼쳤다.“밖에 흩어져 있는 적보다 궁 안에
“승은은 내렸으면서 후궁으로 삼지는 않았다?”어둠 너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영성대군은 낡은 정자 안에 앉아 있었다.왼쪽 얼굴 절반을 덮은 화상 자국만 아니었다면 왕실 제례에 걸린 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이헌은 연화를 제 뒤에 세운 채 그를 바라봤다.“죽은 자가 남의 일에 관심이 많군.”“십팔 년 만에 만난 숙부에게 인사부터 해야 하지 않겠느냐.”“아바마마께 독을 건넨 자를 숙부라 부를 생각은 없다.”영성대군의 미소가 짙어졌다.“나는 약재를 건넸을 뿐이다. 직접 달여 선왕의 입에 넣은 사람은 네 어미였지.”이헌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연화는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이헌이 돌아보자 연화가 고개를 저었다.“저분이 전하를 화나게 하려는 것 같습니다.”“제법 영리하구나.”영성대군의 시선이 연화에게 향했다.“강무영의 딸은 힘만 센 줄 알았는데.”“사람을 화나게 한 뒤 실수하게 만드는 것은 수라간에서도 자주 보았습니다.”“수라간에서?”“간식을 빼앗아 먹은 아이가 화를 내면, 먼저 때렸다며 상궁마마께 고자질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연화가 진지하게 대답했다.“대군마마께서도 비슷하신 듯합니다.”정자 안이 조용해졌다.뒤에 서 있던 서진우가 고개를 숙였다. 웃음을 감추는 얼굴이었다.영성대군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감히 나를 어린 궁녀와 비교하는 것이냐?”“먼저 소인을 수라간 궁녀라 하시지 않았습니까.”“연화.”이헌이 낮게 불렀다.“예, 전하.”“잘했다.”영성대군의 눈빛이 싸늘해졌다.그는 탁자 위에 붉은 비녀를 내려놓았다. 조금 전 강녕전으로 보내졌던 것과 똑같은 비녀였다.“후궁도 아닌 상궁에게 과분한 선물이었던 모양이구나.”“독이 묻은 선물은 후궁마마께도 과분할 것 같습니다.”연화의 대답에 이헌의 입가가 올라갔다.영성대군은 연화를 한동안 바라보다 물었다.“이헌이 너를 아낀다고 생각하느냐?”“예.”연화는 망설이지 않았다.“그런데도 후궁으로 삼지 않았다.”“승은상궁도 전보다 높은 자리입
“후궁 간택을 예정대로 진행한다.”교지를 읽은 이헌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어마마마를 뵈어야겠다.”이헌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연화가 약과 상자를 안은 채 따라나섰다.“너는 강녕전에 있어라.”“소인에 관한 일이니 함께 가겠습니다.”“가서 좋은 말을 듣지는 못할 것이다.”연화는 잠시 생각하더니 약과 하나를 입에 넣었다.“먹고 들으면 조금 나을 것입니다.”“그것으로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냐?”“배가 고프면 좋은 말도 나쁘게 들립니다.”이헌은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연화의 손에서 약과 상자를 빼앗았다.“하나만 먹어라.”“이미 두 개 먹었습니다.”“언제?”“전하께서 교지를 읽으실 때요.”연화가 마지막 약과를 입안에 넣었다.승은상궁이 되어도 식탐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두 사람이 대비전에 도착하자 대비는 예상했다는 듯 차를 마시고 있었다.“간택을 취소해 주십시오.”이헌이 인사도 생략한 채 말했다.“안 된다.”“제게는 연화가 있습니다.”“승은상궁 하나를 두었다고 국혼과 후궁 간택을 모두 물릴 셈이냐?”대비의 시선이 연화에게 향했다.“네가 전하를 설득하였느냐?”“아니옵니다.”연화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소인은 간택을 진행한다는 사실도 방금 알았습니다.”“그런데도 아무렇지 않으냐?”연화는 이헌의 눈치를 살폈다.“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이헌의 표정이 미세하게 풀렸다.“하지만 나라에 필요한 일이라면 소인이 막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다시 이헌의 표정이 굳었다.대비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전하께서 다른 여인을 품으셔도 괜찮다는 뜻이냐?”연화의 눈이 커졌다.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연화가 작게 말했다.“그것은 싫습니다.”이헌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들으셨습니까?”“무엇을 그리 자랑스럽게 확인하느냐.”대비가 혀를 찼다.연화는 뒤늦게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숙였다.“간택을 막을 수는 없으나, 전하께서 다른 분께 승은을 내리는 것은 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