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연화는 어쩔 수 없이 내관의 뒤를 따라 걸었지만, 걸을수록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정확히는 도망치고 싶었다.
상궁께 혼난 걸로 끝난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었다.
'전하께서 찾으신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설마 불려가서 칭찬받는 건 아닐 테고.' 궁에서 내쫓기면 어떡하지?조심스레 앞서 걷는 내관을 바라봤지만,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조금이라도 힌트를 얻고 싶어 입을 열었다.
"저기…." 내관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무슨 일이냐.""전하께서… 많이 노하셨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내관은 작게 웃는 듯하더니 말했다.
"직접 들으면 알 것이다.""..."
도움이 하나도 안 됐다.연화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 왕이 머무는 전각 앞에 도착했다. "들라 하신다." 문이 서서히 열리고, 연화는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고개 숙여 인사 올리옵니다." 조용했다.생각보다 사람이 없었다.
왕.
그리고 가까이 시중드는 내관 한 사람.
그뿐이었다.
"연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예."이름을 기억할 줄이야.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요새 집무가 조금 한가하신 건가..?' "고개를 들어라."'또 저 소리다.'
상궁은 절대 올려다보지 말라 했는데. 하지만 명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조심스레 시선을 들었다.
짙은 눈동자를 찬찬히 살피니, 분명 낮에 보았던 얼굴이었다.
그땐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전하셨네.' 새삼 실감이 났다. --- 왕은 잠시 연화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정말 몰랐느냐." 연화는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예.""짐이 누구인지."
"정말 몰랐습니다."
"거짓이 아니고?"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멀리서 뵌 적은 있을지 모르나, 가까이 뵌 것은 처음이옵니다." 왕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궁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지.""삼 년이옵니다."
"삼 년 동안 짐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느냐."
연화는 잠시 생각했다. "일하느라 바빴습니다.""..."
"아침에는 불을 피우고, 창고도 오가고, 저녁에는 그릇을 닦습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왕은 다시 물었다.
"수라간 일이 그리 바쁜가.""예."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맛난 것도 나옵니다." 왕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재차 물었다. "맛난 것?" 연화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떡이라든지."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약과도 나오고." 둘. "수정과도 가끔…." 셋. "계절마다…."신이 나 하나씩 세던 연화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아차.' 이게 지금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송구하옵니다. 죽, 죽여주시옵소서." 서툰 연화의 내시반청(內視反聽)에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왕은 처음으로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궁의 음식이 그리 좋으냐." 연화는 망설이지 않았다. "좋습니다.""그리 단호할 일인가."
"밖에서는 이렇게 자주 먹기 어렵습니다."
"..."
"그래서 수라간이 좋습니다."
왕은 처음 듣는 대답이었다.보통 궁녀들은 수라간이 힘들다고 했다.
연화만 달랐다.
힘들어도.
밥이 맛있으니 괜찮다고 말하는 얼굴이었다.
--- 왕은 화제를 돌렸다. "오늘." 연화의 등이 다시 굳었다. 역시 그 이야기인 것인가. "짐을 잡아당긴 것은." 연화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답했다. "송구하옵니다.""사과를 묻는 것이 아니다."
"..."
"살리려던 것이냐."
연화는 고개를 들었다.그 질문은 예상하지 못했다.
"...예.""망설임이 없더군."
연화는 조금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그러면 다치실 것 같았습니다.""짐인 줄도 모르고?"
"예."
"알았더라도 그리했겠느냐."
이번에는 조금 오래 생각했다. 연화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아마.""아마?"
"누구든 다치시면 안 되니까요."
왕은 말이 없었다.그 한마디는 꾸민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눈앞에 사람이 위험하니, 몸이 먼저 움직였을 뿐.
--- 한참의 침묵 끝에 왕이 입을 열었다. "됐다." 연화는 눈을 깜빡였다.끝인가?
혼도 안 나고?
곤장도 없이?
"물러가거라.""…예?"
"들리지 않았느냐."
그제야 연화는 허둥지둥 머리를 조아렸다. "망극하옵니다." 거의 뛰다시피 전각을 빠져나왔다.문이 닫히고 나서야 크게 숨을 내쉬었다.
'살았다.' 진짜로 살았다.그렇게 안도하며 몇 걸음 옮겼을 때였다.
"연화." 뒤에서 내관이 불렀다.연화는 화들짝 돌아봤다.
"예?" 내관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전하신 말씀이 있다." 연화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설마. 아직 안 끝난 건가.
"다음부터는.""...예."
"짐을 알아보라 하신다."
"..."
"전하께서 이름을 기억하시는 게 흔치 않은데, 크흠. 신기한 일이로다."
내시는 나름 상기된 톤으로 연화에게 속삭였지만, 연화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감동하지 않는다. '그냥 잊어주시면 더 좋을 텐데.'“어젯밤처럼.”이헌의 말에 연화의 얼굴이 붉어졌다.“한 시진 뒤에 깨워 드리겠습니다.”“지금은?”“주무십시오.”연화가 돌아누우려 하자 이헌이 허리를 붙잡았다.“잠은 다 잤다.”“조금 전에는 일어나기 싫다고 하셨습니다.”“네가 깨워 준다고 하니 마음이 바뀌었다.”그의 입술이 연화의 이마에 닿았다.눈썹과 콧등을 차례로 지나더니 입술 바로 앞에서 멈췄다.연화가 기다리다 못해 물었다.“왜 멈추십니까?”“무엇을 기다리는지 말해 보아라.”“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그렇다면 일어나야겠군.”이헌이 몸을 떼려 하자 연화가 그의 잠옷 깃을 붙잡았다.“왕께서 하던 일을 끝내지 않고 가시면 안 됩니다.”“무슨 일?”“입을…….”연화는 끝까지 말하지 못하고 이헌의 목을 끌어당겼다.맞닿은 입술 사이로 그의 웃음이 번졌다.이헌은 연화가 물러나지 못하도록 뒷머리를 감쌌다. 아침을 알리던 새소리도, 문밖에서 기다리는 내관의 기척도 잠시 멀어졌다.입맞춤이 끝난 뒤 연화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이제 깨셨습니까?”“아직 부족하다.”“한 번이면 충분합니다.”“누가 정했느냐?”“신첩이 정했습니다.”“왕의 허락도 없이?”“지금은 왕이 아니고 싶다고 하셨지 않습니까.”이헌은 할 말을 잃었다.연화가 그의 팔 아래에서 빠져나와 침상 밖으로 내려갔다.“한 시진이 지났습니다. 국정을 돌보십시오.”“정확히는 반 시진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머지 반 시진은 전하께서 신첩을 속인 벌로 거두겠습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냐?”이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연화는 그의 가슴을 밀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그러나 밀어내지는 않았다.“당근을 드리면 안 됩니까?”“싫다.”“약과는요?”“그것도 싫다.”“전하께서는 입맛이 까다로우십니다.”“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뿐이니까.”이헌의 시선이 연화의 입술에 머물렀다.연화의 손끝이 움찔했다.그가 입을 맞추려는 순간, 문밖에서 상궁의 목소리가 들렸다.“전하, 숙의마마. 온천물이 준비되었사옵니다.”연화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물부터 식겠습니다.”“나는 이미 기다리다 식을 것 같다.”“전하께서는 조금 식으셔도 됩니다.”연화가 도망치듯 문 쪽으로 걸어갔다.등 뒤로 이헌의 웃음소리가 따라왔다.온궁의 온천은 침전 뒤편에 있었다.돌을 쌓아 만든 탕 위로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다. 연화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몸을 씻은 뒤 물에 들어갔다.따뜻한 기운이 피로를 풀어 주었다.말을 타고 오느라 뻐근했던 허벅지까지 편안해졌다.“이래서 온궁에 오는 것입니까?”“전하께서는 국정을 돌보느라 몸이 자주 굳으시니 온천이 도움이 되옵니다.”상궁이 답했다.연화는 물 위에 턱을 괴었다.“전하께서도 지금 들어가 계십니까?”“전하의 탕은 맞은편에 있사옵니다.”연화의 시선이 돌담 너머로 향했다.탕은 나뉘어 있었지만 흐르는 물은 이어져 있었다.그 사실을 의식한 순간, 조금 전 이헌이 가까이 다가왔던 장면이 떠올랐다.연화는 더운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물이 너무 뜨겁습니까
“저희 아버지를 살려 주십시오!”아이의 외침에 행렬이 멈췄다.금군이 달려가 아이를 붙잡았다. 아이는 땅에 넘어지면서도 손에 든 종이를 놓지 않았다.“전하의 행차를 막다니, 당장 물러나지 못하겠느냐!”“잠깐.”이헌이 금군을 제지했다.연화는 말에서 내려 아이에게 다가갔다. 열 살도 되지 않아 보이는 아이였다. 짚신 앞부분이 터져 발가락이 드러나 있었다.“다친 곳은 없느냐?”아이가 고개를 저었다.“아버지가 어디에 계시느냐?”“온궁 근처 창고에 갇혀 있습니다.”“무슨 죄를 지으셨는데?”“품삯을 달라고 했습니다.”연화가 이헌을 돌아봤다.온궁 수리를 위해 인근 백성들을 일꾼으로 썼다는 보고는 받았다. 하지만 나라에서 품삯과 식량을 모두 지급하도록 명한 일이었다.이헌이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그 종이를 내게 다오.”아이는 종이를 건네려다가 멈칫했다.“정말 전하이십니까?”주변의 내관들이 숨을 삼켰다.왕에게 신분을 증명해 보이라고 묻는 것과 다름없었다.이헌은 화를 내지 않았다.“네 눈에는 내가 무엇으로 보이느냐?”아이가 이헌의 옷과 말, 길게 늘어선 행렬을 살폈다.“아주 돈 많은 분으로 보입니다.”연화가 입술을 깨물었다.공주는 고개를 돌렸고, 뒤편의 금군들 사이에서도 헛기침이 이어졌다.이헌이 연화를 바라봤다.“웃
연화는 승마복과 쪽지를 번갈아 보았다.온궁으로 가는 길에는 반드시 말을 타셔야 합니다.“누가 보낸 것입니까?”상궁이 상자 안쪽을 확인했다.“정 소원마마의 처소에서 보냈사옵니다.”연화는 승마복을 펼쳤다.붉은 비단 위에 금실로 꽃과 구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아름답기는 했으나 소매가 지나치게 넓고 치맛자락도 길었다.공주가 승마복을 살펴보다 코웃음을 쳤다.“이것을 입고 말에 오르면 치맛자락이 안장에 걸리겠다.”“좋은 것을 보내 주신 줄 알았습니다.”“좋은 옷과 말을 타기 좋은 옷은 다르지.”“그러면 돌려드려야 합니까?”“아니.”공주가 승마복을 연화의 몸에 대 보며 웃었다.“정 소원의 정성이니 입고 찾아가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연화는 공주의 표정을 보고 상자를 닫았다.“공주마마께서 재미있는 생각을 하신 얼굴입니다.”“나를 제법 잘 아는구나.”“그런 얼굴을 하실 때마다 신첩이 힘들었습니다.”다음 날, 공주는 후궁들을 승마장으로 불러 모았다.연화의 온궁 행차를 앞두고 직접 승마를 가르치겠다는 명분이었다.정 소원은 연화가 자신의 승마복을 입고 나타나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마음에 드셨습니까?”“아주 곱습니다.”연화가 양팔을 벌었다.넓은 소매가 바람을 받아 펄럭였다.“다만 이 옷을 입고 말을 타면 신첩보다 옷이 먼
연화는 정 소원이 보낸 청원지를 다시 읽었다.내일 밤, 전하를 모실 예정이니 각별히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꿀떡과 잣죽, 약과까지.이헌은 연화의 허리를 감싼 채 태연히 말했다.“왕이 이미 강 숙의의 처소에 붙잡혀 있어 갈 수 없다고 전하라.”연화가 그의 손을 떼어 냈다.“붙잡은 적 없습니다.”“지금 놓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그렇게 답을 보내면 신첩이 질투하여 전하를 막았다고 할 것입니다.”“질투한 것이 아니냐?”“아닙니다.”연화의 대답은 빨랐다.이헌이 그녀의 볼을 눌렀다.“그런데 왜 꿀떡을 빼겠다는 것이냐?”“전하의 건강을 생각한 것입니다.”“잣죽도?”“잣은 비쌉니다.”“약과는?”“그것은 신첩이 먹을 것입니다.”이헌이 웃음을 터뜨렸다.연화는 웃지 않았다. 정 소원이 청한 음식이 문제가 아니었다.왕의 거동이 정해진 것처럼 말해 필요한 것을 먼저 챙기려 한 것이 문제였다. 이번 일을 그냥 넘기면 다른 후궁들도 앞다투어 같은 수를 쓸 터였다.연화는 새 청원지를 꺼냈다.“다시 먹을 갈아 주십시오.”“내가?”“가장 귀한 장부를 받으신 분이니 끝까지 도와주셔야 합니다.”이헌은 순순히 먹을 갈았다.연화가 붓을 들고 한참 고민하자 그가 물었다.&ldquo
연화의 처소에 장부가 산처럼 쌓였다.그녀는 한 시진째 첫 권의 같은 줄만 읽고 있었다.“꿀 두 항아리, 잣 세 되, 말린 대추 다섯 말…….”연화가 손가락으로 수량을 짚었다.“이것을 한 달 동안 전부 먹었다는 말입니까?”상궁이 고개를 숙였다.“정 소원마마의 처소에 들어간 양이옵니다.”“사람이 아니라 다람쥐가 사는 것 아닙니까?”옆에서 장부를 보던 공주가 대추를 집어 먹었다.“아무리 정 소원이라도 혼자 먹었을 리는 없지.”“소원마마뿐 아니라 나인들도 함께 먹었다면 가능하지 않습니까?”“저만큼 먹으면 처소의 나인들이 전부 굴러다녔을 것이다.”연화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다.그 말에는 반박하기 어려웠다.장부를 한 장 더 넘기자 이번에는 윤 소원의 처소에서 받아 간 참기름과 고기 수량이 나왔다. 근신 중인 후궁의 처소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았다.“근신하면 더 잘 먹습니까?”“밖에 나오지 못하니 먹는 즐거움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공주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좋겠습니다.”“무엇이?”“신첩도 근신하면 장부를 보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너를 근신시킬 수 있는 분이 전하인데, 가능하겠어?”연화가 잠시 생각했다.이헌은 근신을 내리기는커녕 장부를 더 가져올 사람이었다.“죄를 짓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공주는 대추를 하나 더 집다가 연화에게 손등을 맞았다.“그것은 장부와 맞춰 봐야 합니다.”“과자 하나에도 야박하더니 이제 대추까지 못 먹게 하는구나.”“공주마마께서 드신 것은 따로 적어 두겠습니다.”연화가 붓을 들자 공주는 남은 대추를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