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망했다.
연화는 무릎을 꿇으며 생각했다. 정말로 망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일단 말했다.궁녀들은 원래 이럴 때 죽을 죄를 지었다고 하는 법이다.
연화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말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 더 말했다가, 가만 생각해보니 이상했다.죽을 죄를 지은 건가?
연화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
분명 쌀자루가 떨어질 뻔했다.
그리고 전하는 그 아래에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안 잡았으면.
넘어지셨을 텐데.
... 그럼 공 아닌가?잠시 고민하던 연화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니다. 전하를 잡아당겼다. 그것도 너무 세게.
"이름이 무엇이냐."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리자 연화의 어깨가 움찔했다. "소첩은 연화라고 불리옵니다.""연화."
왕이 짧게 이름을 되뇌었다.이름을 따라하는 모습에, 연화는 이유 없이 더 불안해졌다.
"어느 전각 소속이지.""수라간이옵니다."
"수라간."
또 따라 한다.연화는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혼나는 게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왕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침묵이 길어졌다.
연화는 점점 초조해졌다.
이럴 거면 차라리 곤장을 때려라. 사람을 왜 이렇게 긴장시키는 거지.
"고개를 들어 보아라.""..."
연화는 얼어붙었다.고개를? 전하를? 정면으로?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들리지 않았느냐.""소첩이 어찌 감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뒤이어 우르르 발소리가 가까워졌다.상궁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달려온 상궁이 그대로 엎드렸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뒤따라온 내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순식간에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연화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
다행인 건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았다.
상궁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왕을 살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없다."
"망극하옵니다."
상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곤 그제야 연화를 발견했다.
정확히는. 연화 옆에 놓인 쌀자루를. 그리고 상황을.
상궁의 눈이 가늘어졌다.
연화는 본능적으로 저 눈빛은 혼나는 눈빛이다라는 걸 알아차렸다.
"연화.""예."
"이리 와라."
끝났다.연화는 속으로 눈을 감았다.
오늘 곶감도 못 먹었는데. 곤장까지 맞게 생겼다.
인생이 참 팍팍했다.
--- 상궁에게 한참을 붙들려 혼이 난 뒤에야 연화는 풀려날 수 있었다.정확히 말하면 혼이 났다기보다는.
"네년은 눈이 없느냐.""있습니다."
"귀는."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전하를 못 알아보느냐."
"...처음 뵈었습니다."
상궁은 결국 이마를 짚었다.연화도 억울한 게, 정말 처음 봤다.
멀리서 본 적은 있을지 몰라도.
저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전하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혼이 더 날 것 같았으니까.
--- 수라간으로 돌아왔을 때는 해가 제법 기울어 있었다.궁녀 하나가 반색했다.
"어? 왔네.""응."
"창고 일 많이 힘들었어?"
"조금."
연화는 대충 대답하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몸은 멀쩡했다.
문제는 마음이었다.
아직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전하.
전하.
전하.
자꾸 그 두 글자가 떠올랐다.
"왜 그래?" 궁녀 하나가 물었다. "아까부터 넋이 나갔네.""그런가."
"혼났어?"
연화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쯧쯧."
궁녀가 혀를 찼다. "그러니까 조심하지." 연화는 대답하지 않았다.사실 상궁에게 혼난 건 별로 무섭지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 "연화.""응."
"곶감 먹을래?"
연화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곶감. 그 말에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그러나.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
순간 수라간이 조용해졌다.궁녀들이 하나둘 연화를 쳐다봤다.
"너 어디 아프냐?""왜?"
"곶감을 거절했잖아."
"그러네."
"연화가?"
연화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그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결국 궁녀가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네.""원래 없었어."
"그럼 왜 그래?"
연화는 잠시 고민했지만, 솔직히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오늘 전하를 잡아당겼다고?
그러면 다들 기절할 것이다. 그래서 적당히 둘러댔다.
"피곤해서.""거짓말."
"맞는데."
"너는 피곤해도 먹잖아."
그건 맞았다. 연화는 입을 다물었다. ---저녁이 지나고 밤이 되자, 수라간 안은 조용했다.
궁녀 몇은 이미 잠들었고.
몇은 마지막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연화도 슬슬 눈을 감으려던 참이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라간 궁녀 연화." 연화는 눈을 떴다.설마. 아니겠지.
"...""수라간 궁녀 연화."
이번에는 더 또렷했다.주변 궁녀들도 고개를 들었다.
"누구야?""이 밤에?"
연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문밖으로 나가자 낯선 내관 하나가 서 있었다.
정갈한 복색. 곧은 자세. 그리고 익숙한 말.
"연화가 너더냐." 연화의 불길한 예감이 정답임을 알렸다. "...예." 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찾으신다.".
. .정적이 흘렀다.
연화는 눈을 깜빡였다.
뒤에 있던 궁녀들도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누구를요?" 궁녀 하나가 물었다.내관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연화를."“어젯밤처럼.”이헌의 말에 연화의 얼굴이 붉어졌다.“한 시진 뒤에 깨워 드리겠습니다.”“지금은?”“주무십시오.”연화가 돌아누우려 하자 이헌이 허리를 붙잡았다.“잠은 다 잤다.”“조금 전에는 일어나기 싫다고 하셨습니다.”“네가 깨워 준다고 하니 마음이 바뀌었다.”그의 입술이 연화의 이마에 닿았다.눈썹과 콧등을 차례로 지나더니 입술 바로 앞에서 멈췄다.연화가 기다리다 못해 물었다.“왜 멈추십니까?”“무엇을 기다리는지 말해 보아라.”“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그렇다면 일어나야겠군.”이헌이 몸을 떼려 하자 연화가 그의 잠옷 깃을 붙잡았다.“왕께서 하던 일을 끝내지 않고 가시면 안 됩니다.”“무슨 일?”“입을…….”연화는 끝까지 말하지 못하고 이헌의 목을 끌어당겼다.맞닿은 입술 사이로 그의 웃음이 번졌다.이헌은 연화가 물러나지 못하도록 뒷머리를 감쌌다. 아침을 알리던 새소리도, 문밖에서 기다리는 내관의 기척도 잠시 멀어졌다.입맞춤이 끝난 뒤 연화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이제 깨셨습니까?”“아직 부족하다.”“한 번이면 충분합니다.”“누가 정했느냐?”“신첩이 정했습니다.”“왕의 허락도 없이?”“지금은 왕이 아니고 싶다고 하셨지 않습니까.”이헌은 할 말을 잃었다.연화가 그의 팔 아래에서 빠져나와 침상 밖으로 내려갔다.“한 시진이 지났습니다. 국정을 돌보십시오.”“정확히는 반 시진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머지 반 시진은 전하께서 신첩을 속인 벌로 거두겠습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냐?”이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연화는 그의 가슴을 밀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그러나 밀어내지는 않았다.“당근을 드리면 안 됩니까?”“싫다.”“약과는요?”“그것도 싫다.”“전하께서는 입맛이 까다로우십니다.”“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뿐이니까.”이헌의 시선이 연화의 입술에 머물렀다.연화의 손끝이 움찔했다.그가 입을 맞추려는 순간, 문밖에서 상궁의 목소리가 들렸다.“전하, 숙의마마. 온천물이 준비되었사옵니다.”연화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물부터 식겠습니다.”“나는 이미 기다리다 식을 것 같다.”“전하께서는 조금 식으셔도 됩니다.”연화가 도망치듯 문 쪽으로 걸어갔다.등 뒤로 이헌의 웃음소리가 따라왔다.온궁의 온천은 침전 뒤편에 있었다.돌을 쌓아 만든 탕 위로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다. 연화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몸을 씻은 뒤 물에 들어갔다.따뜻한 기운이 피로를 풀어 주었다.말을 타고 오느라 뻐근했던 허벅지까지 편안해졌다.“이래서 온궁에 오는 것입니까?”“전하께서는 국정을 돌보느라 몸이 자주 굳으시니 온천이 도움이 되옵니다.”상궁이 답했다.연화는 물 위에 턱을 괴었다.“전하께서도 지금 들어가 계십니까?”“전하의 탕은 맞은편에 있사옵니다.”연화의 시선이 돌담 너머로 향했다.탕은 나뉘어 있었지만 흐르는 물은 이어져 있었다.그 사실을 의식한 순간, 조금 전 이헌이 가까이 다가왔던 장면이 떠올랐다.연화는 더운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물이 너무 뜨겁습니까
“저희 아버지를 살려 주십시오!”아이의 외침에 행렬이 멈췄다.금군이 달려가 아이를 붙잡았다. 아이는 땅에 넘어지면서도 손에 든 종이를 놓지 않았다.“전하의 행차를 막다니, 당장 물러나지 못하겠느냐!”“잠깐.”이헌이 금군을 제지했다.연화는 말에서 내려 아이에게 다가갔다. 열 살도 되지 않아 보이는 아이였다. 짚신 앞부분이 터져 발가락이 드러나 있었다.“다친 곳은 없느냐?”아이가 고개를 저었다.“아버지가 어디에 계시느냐?”“온궁 근처 창고에 갇혀 있습니다.”“무슨 죄를 지으셨는데?”“품삯을 달라고 했습니다.”연화가 이헌을 돌아봤다.온궁 수리를 위해 인근 백성들을 일꾼으로 썼다는 보고는 받았다. 하지만 나라에서 품삯과 식량을 모두 지급하도록 명한 일이었다.이헌이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그 종이를 내게 다오.”아이는 종이를 건네려다가 멈칫했다.“정말 전하이십니까?”주변의 내관들이 숨을 삼켰다.왕에게 신분을 증명해 보이라고 묻는 것과 다름없었다.이헌은 화를 내지 않았다.“네 눈에는 내가 무엇으로 보이느냐?”아이가 이헌의 옷과 말, 길게 늘어선 행렬을 살폈다.“아주 돈 많은 분으로 보입니다.”연화가 입술을 깨물었다.공주는 고개를 돌렸고, 뒤편의 금군들 사이에서도 헛기침이 이어졌다.이헌이 연화를 바라봤다.“웃
연화는 승마복과 쪽지를 번갈아 보았다.온궁으로 가는 길에는 반드시 말을 타셔야 합니다.“누가 보낸 것입니까?”상궁이 상자 안쪽을 확인했다.“정 소원마마의 처소에서 보냈사옵니다.”연화는 승마복을 펼쳤다.붉은 비단 위에 금실로 꽃과 구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아름답기는 했으나 소매가 지나치게 넓고 치맛자락도 길었다.공주가 승마복을 살펴보다 코웃음을 쳤다.“이것을 입고 말에 오르면 치맛자락이 안장에 걸리겠다.”“좋은 것을 보내 주신 줄 알았습니다.”“좋은 옷과 말을 타기 좋은 옷은 다르지.”“그러면 돌려드려야 합니까?”“아니.”공주가 승마복을 연화의 몸에 대 보며 웃었다.“정 소원의 정성이니 입고 찾아가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연화는 공주의 표정을 보고 상자를 닫았다.“공주마마께서 재미있는 생각을 하신 얼굴입니다.”“나를 제법 잘 아는구나.”“그런 얼굴을 하실 때마다 신첩이 힘들었습니다.”다음 날, 공주는 후궁들을 승마장으로 불러 모았다.연화의 온궁 행차를 앞두고 직접 승마를 가르치겠다는 명분이었다.정 소원은 연화가 자신의 승마복을 입고 나타나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마음에 드셨습니까?”“아주 곱습니다.”연화가 양팔을 벌었다.넓은 소매가 바람을 받아 펄럭였다.“다만 이 옷을 입고 말을 타면 신첩보다 옷이 먼
연화는 정 소원이 보낸 청원지를 다시 읽었다.내일 밤, 전하를 모실 예정이니 각별히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꿀떡과 잣죽, 약과까지.이헌은 연화의 허리를 감싼 채 태연히 말했다.“왕이 이미 강 숙의의 처소에 붙잡혀 있어 갈 수 없다고 전하라.”연화가 그의 손을 떼어 냈다.“붙잡은 적 없습니다.”“지금 놓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그렇게 답을 보내면 신첩이 질투하여 전하를 막았다고 할 것입니다.”“질투한 것이 아니냐?”“아닙니다.”연화의 대답은 빨랐다.이헌이 그녀의 볼을 눌렀다.“그런데 왜 꿀떡을 빼겠다는 것이냐?”“전하의 건강을 생각한 것입니다.”“잣죽도?”“잣은 비쌉니다.”“약과는?”“그것은 신첩이 먹을 것입니다.”이헌이 웃음을 터뜨렸다.연화는 웃지 않았다. 정 소원이 청한 음식이 문제가 아니었다.왕의 거동이 정해진 것처럼 말해 필요한 것을 먼저 챙기려 한 것이 문제였다. 이번 일을 그냥 넘기면 다른 후궁들도 앞다투어 같은 수를 쓸 터였다.연화는 새 청원지를 꺼냈다.“다시 먹을 갈아 주십시오.”“내가?”“가장 귀한 장부를 받으신 분이니 끝까지 도와주셔야 합니다.”이헌은 순순히 먹을 갈았다.연화가 붓을 들고 한참 고민하자 그가 물었다.&ldquo
연화의 처소에 장부가 산처럼 쌓였다.그녀는 한 시진째 첫 권의 같은 줄만 읽고 있었다.“꿀 두 항아리, 잣 세 되, 말린 대추 다섯 말…….”연화가 손가락으로 수량을 짚었다.“이것을 한 달 동안 전부 먹었다는 말입니까?”상궁이 고개를 숙였다.“정 소원마마의 처소에 들어간 양이옵니다.”“사람이 아니라 다람쥐가 사는 것 아닙니까?”옆에서 장부를 보던 공주가 대추를 집어 먹었다.“아무리 정 소원이라도 혼자 먹었을 리는 없지.”“소원마마뿐 아니라 나인들도 함께 먹었다면 가능하지 않습니까?”“저만큼 먹으면 처소의 나인들이 전부 굴러다녔을 것이다.”연화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다.그 말에는 반박하기 어려웠다.장부를 한 장 더 넘기자 이번에는 윤 소원의 처소에서 받아 간 참기름과 고기 수량이 나왔다. 근신 중인 후궁의 처소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았다.“근신하면 더 잘 먹습니까?”“밖에 나오지 못하니 먹는 즐거움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공주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좋겠습니다.”“무엇이?”“신첩도 근신하면 장부를 보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너를 근신시킬 수 있는 분이 전하인데, 가능하겠어?”연화가 잠시 생각했다.이헌은 근신을 내리기는커녕 장부를 더 가져올 사람이었다.“죄를 짓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공주는 대추를 하나 더 집다가 연화에게 손등을 맞았다.“그것은 장부와 맞춰 봐야 합니다.”“과자 하나에도 야박하더니 이제 대추까지 못 먹게 하는구나.”“공주마마께서 드신 것은 따로 적어 두겠습니다.”연화가 붓을 들자 공주는 남은 대추를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