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7화

Author: 코코넛 서고
맹경운은 여동생을 힐끗 보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며칠 전에 상왕비께서 너에게 시비를 걸었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사이가 좋아진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

맹영은이 답했다.

“그건 오해였어요. 오라버니, 저를 상왕부에 데려가 주세요. 제가 직접 왕야께 해명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왕비의 잘못이 절대 아닙니다.”

맹경운은 단호히 거절했다.

“상왕과 왕비 사이의 일은 끼어들지 말거라. 상왕비는 조용히 지낼 성격이 아니니 앞으로는 되도록이면 가까이 지내지 마.”

주루의 맨 위층에서 한 검은 옷을 입은 젊은 청년이 뒷짐을 지고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청년의 옆에 선 중년 사내가 맹은영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헌아, 저쪽이 맹국공의 적녀인 맹은영이다. 네 모후께서 널 위해 간택한 황자비지.”

연강헌의 시선은 주루 밖에서 연기준과 실랑이를 벌이는 여인의 뒷모습에 닿았다.

“저는 상왕비가 더 재미있어 보입니다만.”

중년 사내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네 숙모 되는 사람이다.”

연강헌은 시선을 거두고 묘한 미소를 지었다.

“오해이십니다. 그저 소문이랑 많이 다른 것 같아서요.”

국구, 즉, 황후의 오라비인 하선준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맹국공은 조정에서도 꽤 성망 높은 사람이다. 세 손자마저 덕목과 재능을 겸비한 전도 유망한 청년들이지. 단씨 가문은 엄청난 부를 이룩하고 만 천하에 점포를 둔 가문이야. 황후마마께서는 두 집안의 처자들이 같이 널 내조한다면 분명히 너에게 힘이 되어줄 거라고 예견하셨지.”

연강헌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방금 전 끌려간 놈이 단씨 가문의 삼대 독자 아닙니까?”

하선준이 말했다.

“아들 녀석은 좀 무능하지만 둘째 딸은 경성에서도 재녀(시조와 그림에 능통한 양반가 여성)라는 호칭을 들을 정도로 똑똑한 아이라고 하니 너도 마음에 들 게다.”

하지만 연강헌은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큰딸은 상왕비의 자리를 원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선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문의 공적을 내세우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의 상왕비가 저 자리에 오를 수도 없었을 게다. 서 장군 댁은 이번 대에 아들이 없으니 점점 몰락할 테고. 상왕이 지금의 상왕비를 내치는 것은 시간 문제야. 그렇게 되면 단씨 가문의 딸을 비로 들인 상왕은 필히 너에게 충성할 테고.”

연기준의 충심에 대하여 연강헌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제 동생들은 최근 별다른 움직임 없습니까?”

하선준이 말했다.

“사황자와 육황자의 어미는 신분이 미천하니 야망은 있어도 그걸 받쳐줄 힘이 없어. 오랜 지병을 앓던 칠황자는 이미 한 달째 두문불출하고 있고. 십삼황자는 재작년에 폐하의 심기를 크게 건드려서 지금은 황릉에서 태후마마의 묘소를 지키는 중이지. 십오황자는 올해 고작 여덟 살이니 배후에 뒷받침해 주는 장군부가 있더라도 단기간엔 권력을 잡긴 힘들 거다. 넌 폐하 안전에서 네 재능을 마음껏 보여줘서 하루빨리 태자 책봉이 이루어지게 하거라. 나머지는 이 외삼촌이 주시하고 있을 테니.”

연강헌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한편 서인경은 연기준에게 끌려 상왕부로 돌아왔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의 속박을 풀려날 수 없으니 화가 치밀었다.

“이봐요, 존귀하신 왕야님. 저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어온 것이고, 저는 그저 정당방위를 했을 뿐이라니깐요! 앞뒤 사정을 좀 따져가면서 행동하시죠?”

연기준은 그녀에겐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어깨에 들쳐멘 채로 왕부에 들어섰다.

“내가 그리 전후사정 따져가며 행동하는 사람으로 보이느냐?”

서인경은 화를 가라앉히려 길게 심호흡했다.

“그래서 지금 뭐 하시려는 겁니까? 정인의 남동생을 좀 때려서 제게 매를 들려는 심산이십니까?”

연기준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녀를 난화원에 집어넣은 후 뒤돌아섰다.

“왕비가 허구헌날 밖에서 사고만 치고 돌아다니니, 3일 금족을 명한다! 그리고 내 명 없이는 절대 외출하지 못하게 하여라!”

분노에 이성을 잃은 서인경은 벽을 쾅쾅 두드리며 고함을 질렀다.

“연기준 이 망할 놈의 자식아! 내가 피해자라고 했잖아! 뭔데 내게 금족령을 내려!”

연기준의 느긋한 목소리가 멀리서 유유히 전해졌다.

“부군인 나를 모욕하였으니 금족 7일!”

대문이 쾅 하고 닫히더니 밖에서 자물쇠를 잠그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인경은 화가 치밀어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자 기둥 뒤에 숨어 있던 평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왕비마마, 화 푸셔요. 며칠 집안에서 쉰다고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차피 매를 맞거나 꾸중을 듣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참으로 낙관적인 아이였다.

서인경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평이야, 네가 말해 보아라. 대체 저 인간이 왜 저렇게 화를 낼까? 자신의 왕비가 하마터면 망나니한테 희롱을 당할 뻔했는데 악인을 징벌하러 가기는커녕, 왜 집안에서 위세를 떠냔 말이다!”

평이가 조심스레 반박했다.

“왕야께선 악인을 징벌하셨지요. 발길질 한번에 놈의 입안을 피투성이로 만드셨지 않습니까. 그때는 정말 멋있었어요.”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그런데 왜 나에게 금족령을 내리냔 말이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평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레 생각을 꺼냈다.

“그 악인도 많이 다쳤지 않습니까.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차라리 처소에 가만히 있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서인경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평이에게 한바탕 불만을 털어놓았더니 자연스레 금족을 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차피 연기준은 그녀에게 물질적으론 박대하지 않았으니 딱히 손해볼 것도 없었다.

평이는 숨겨뒀던 요리 실력을 발휘해서 심심해 하는 서인경에게 갖가지 간식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그날 저녁 평이는 통닭구이를 식탁에 올렸다.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인경에게 물었다.

“왕비마마, 그 집안 사람들이 만약에 따지러 쳐들어온다면 왕야께서 저희를 지켜주실까요?”

서인경은 열심히 닭다리를 뜯다가 웃으며 되물었다.

“두려워?”

평이가 겁먹은 표정으로 답했다.

“아… 아니요….”

서인경은 닭다리 하나를 뜯어서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연기준이 우릴 지켜줄지는 나도 잘 몰라. 하지만 단은설이 애걸복걸 매달리면 부탁을 들어줄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평이는 닭다리를 베어먹으면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분명 왕비는 마마이신데 왜 왕야께선 다른 여인에게 그리도 잘해주시는 걸까요?”

서인경은 아련한 표정으로 전생의 일을 떠올렸다.

“예전에 그분께서 전장에 나가셨을 때, 조정의 군량 조달이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었어. 마침 고향집에 내려갔던 단은설이 그걸 알고 가문의 창고를 열어 상왕군의 위기를 해결해 주었다고 하더구나.”

“그럼 보은이로군요.”

평이는 한탄하듯 말했다.

“그러나 단은설은 분명 딴마음을 품고 있어요. 왕야께선 보은을 위해 왕비마마를 속상하게 하셨단 말씀이네요?”

‘내가 속상해한다고? 그건 내가 아니고 원래 주인이겠지.’

이 몸의 원주인은 전생에 사랑하는 사내가 앞날을 위해 자신의 가족을 희생하고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척자매를 품은 것을 제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결국엔 원래의 서인경이 자신만의 가치를 잃어서일 거야.’

가문이 풍비박산 나고 의지할 곳을 잃은 무능한 여인이 버려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원한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

21세기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물질적인 여자를 비난했다. 하지만 과연 여자만 그랬을까?

남자들은 연애할 대상을 고를 때 자신의 체면을 세워줄 수 있는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를 선호했다.

그러나 결국 결혼은 어느 정도 능력 있고 자신의 부담을 들어줄 수 있는 여자를 택했다.

이혼할 때 재산분할로 서로 원수처럼 싸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사랑도 현실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가난 앞에 아무리 견고한 사랑도 속절없이 무너질 때가 많았다.

21세기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지금 상황에 대입해 보면 서인경은 누굴 탓하고 원망할 수 없었다.

결국 스스로 서는 자가 끝까지 살아남는 법이다.

“어서 밥이나 먹으렴. 다 먹고 서쪽 별채로 가서 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혼수나 찾아오거라.”

평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건 뭐에 쓰시려고요?”

서인경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미리 정리하려는 게야. 나중에 이곳을 나가면 돈 되는 것들을 죄다 팔아서 은화로 바꾼 후에 그 돈으로 큰일을 할 것이다.”

평이는 그녀의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의욕 넘치는 서인경의 모습을 보자 저절로 가슴이 뛰었다.

서인경이 왕부로 시집올 때 친정인 서씨 가문을 제외하고도 황제께서도 인자함을 베풀기 위해 적지 않은 혼수를 보태주었다.

그렇게 며칠간 두 사람은 창고 정리를 끝났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시간을 거슬러   제1115화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한 번이라도 터지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존재는 바로 화친 공주였다. 상대가 분풀이를 하듯 공주를 죽이거나, 전장 한복판에 끌어내 모욕을 주는 일. 그런 일은 역사 속에서 셀 수 없이 반복되어 왔다.금수 대장공주는 줄곧 믿어왔다. 아버지는 자신을 두 나라의 관계를 이어주기 위해 보낸 것이라고, 자신이 시집온 이상 양국의 관계는 굳건해지고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리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진국이 전쟁을 일으킬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그녀의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그녀에게 있어 가장 절대적이고 신과 같은 존재였으니까.이미 성조 선제와 함께 묻혀버렸어야 할 비밀을 연기준이 지금 이 자리에서 드러내고 말았다.금수 대장공주는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채, 눈빛이 흐트러졌다.“방금 네가 한 말은 전부 거짓이라고 하거라.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다.”연기준은 그저 연민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황고모께서 짐의 조건을 받아들이신다면, 즉시 그들에게 손을 멈추게 하겠습니다. 요동의 도성도, 영토도 지킬 수 있습니다. 다만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뿐이지요. 허나 황고모께서 이를 거부하신다면 요동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 생각하십시오. 황고모께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진국군이 성을 함락시키는 속도는 결코 만만하지 않으니까요.”말을 마친 연기준은 그대로 돌아섰다.막사를 나서자마자, 등 뒤에서 찢어질 듯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연기준, 꿈 깨! 네 황후도, 네 진국군도 모두 도성에 묻히게 될 것이다! 넌 너무 일찍 기뻐한 거야! 하하하하!”연기준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말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대로 말을 몰아 떠났다.*그 무렵, 단은설과 그녀의 협력자들은 이미 모두 붙잡혀 있었다.다만 봉한설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저 사람들, 연강호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냐?”연기준은 나무에 묶여

  • 시간을 거슬러   제1114화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진국군은 거침없이 밀고 들어와 이미 도성 코앞까지 이르고 있었다.금수 대장공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녀는 탁자를 세게 내려치며 분노에 휩싸여 외쳤다.“연기준, 감히 본궁을 속이다니!”연기준은 평온한 표정으로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황고모께서도 짐을 속이시지 않았습니까? 진국군을 기습하라고 보낸 자들, 모두 정예 중의 정예였지요. 다만 짐이 한 수 위였을 뿐입니다.”금수 대장공주는 발걸음이 휘청이더니, 넋이 나간 듯 의자에 주저앉았다.한참 뒤, 분노로 일그러졌던 얼굴에 억지 웃음이 번졌지만 눈동자 깊은 곳의 패배감은 끝내 숨기지 못했다.“좋다… 참으로 좋다. 역시 연도현이 눈여겨본 사람답구나. 그 아이보다도 네 재능이 훨씬 뛰어나구나.”연도현의 이름이 언급되자 연기준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흔적은 금세 사라졌다.“열셋 째 황숙의 체면을 봐서라도 짐은 황고모와 죽고 죽이는 지경까지 가고 싶지 않습니다. 요동은 사람을 보내 진국 땅에서 날뛰던 메뚜기 떼를 소탕하고, 백성들에게 평안을 돌려주십시오. 또한 요동의 황제와 황후는 재해 속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수만의 진국 백성 앞에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고 혼령을 위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 다섯 곳을 내어주고 앞으로 십 년간 요동 사람은 단 한 명도 진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하십시오. 그러면 이 일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헛된 망상이다!”금수 대장공주는 반생을 바쳐 진국을 굴복시키려 해왔다. 그런데 마지막에 맞이한 결과가 고작 이것이라니.이대로 궁으로 돌아간다면, 요동의 백성들은 더 이상 그녀를 믿지 않을 것이고 요동 후궁에서도 그녀가 설 자리는 사라질 터였다.“헛된 망상이라고요?”연기준은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털며 돌아섰다.“그렇다면 황고모께서는 요동이 완전히 진국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날을 기다리십시오. 그때가 되면 황고모의 최후는, 지금 짐이 제시한 조건보다 훨씬 더 비참할 것입니다.”연기준은 더는 협상의 여지를 두지 않고

  • 시간을 거슬러   제1113화

    그곳에 이르게 되면 자신은 결국 주인의 짐이 될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차라리 진국 황궁으로 돌아가 주인을 대신해 태자를 목숨 걸고 지키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주인 곁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연풍의 마음은 더욱 아렸고 놓아주기 어려워졌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반드시 주인보다 먼저 앞에 나서겠다고, 설령 주인을 대신해 죽게 된다 해도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봉한설의 말은 분명 연풍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그 깊은 무력감은 오히려 그를 더욱 성실하고 치열하게 움직이게 만들었다.그 변화는 연기준뿐 아니라, 어린 꼬막이조차 눈치챌 정도였다.*다음 날, 부생이 그들을 데리고 단은설을 찾으러 가자는 이야기가 나오자 연풍은 유난히 적극적으로 나섰다.“폐하, 저를 보내주십시오. 반드시 단은설을 데려오겠습니다.”연기준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럴 필요 없다. 단은설 곁에는 연강호가 남긴 사람들이 있다. 너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한설이에게 맡기거라.”말을 마친 뒤, 연풍의 낙담한 표정을 보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한설의 무공이 너보다 약할 수는 있어도 일불락을 상대하는 데는 훨씬 능하다.”그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는 언젠가 반드시 설산으로 가게 될 날이 떠올랐다. 그곳에 이르면 자신은 진짜 아무 쓸모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연풍은 다시 한 번 깊이 무너져 내렸다.하지만 연기준의 말은 사실이었다. 억지로 따라간다 해도, 그저 짐이 될 뿐이었다.그때, 꼬막이가 그의 가라앉은 기색을 눈치채고 다가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연풍 형님, 저랑 같이 가요. 부탁할 게 있습니다!”연기준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또 무슨 생각이냐?”꼬막이는 신비롭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 대신 친척 좀 만나러 가야 합니다!”연기준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꼬막이를 연풍에게 넘겨주었다.“잘 지키거라.”자신에게도 아직

  • 시간을 거슬러   제1112화

    검은 옷의 사내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그는 방금 연기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설마 너희가 일불락의 원수가 아니라는 것이냐? 그럴 리가…”봉한설이 담담히 말했다.“왜 그럴 리가 없습니까? 그들은 일불락의 원수일 뿐만 아니라, 당신이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손을 쓰라고 부추긴 그 자야말로 진짜 일불락의 가장 큰 원수예요.”검은 옷의 사내는 눈을 크게 떴다.“아니, 그럴 리 없다. 그는 분명…”말을 반쯤 꺼내다 말고 그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지금의 나는 그도 믿지 못하겠고 너희도 믿지 못하겠다. 오늘 일은 여기서 끝내지.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이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을 거다.”그 말을 마치자마자 검은 옷의 사내는 꼬막이를 연기준 쪽으로 던져 버렸다.연기준이 몸을 날려 받아냈다. 꼬막이는 공중에서 한 줄기의 호를 그리며 날아가 그대로 그의 품에 단단히 안겼다.검은 옷의 사내가 달아나려 하자 암위들이 즉시 장검을 뽑아 들고 그를 향해 찔러 들어갔다.그때, 꼬막이가 다급히 외쳤다.“아아아, 잠깐! 아프게 하지 마세요!”그의 말에 암위들의 손길이 순간 멈칫했다.그 틈을 타 검은 옷의 사내는 꼬막이를 깊이 한 번 바라보더니 곧바로 몸을 날려 자취를 감췄다.짧지만 소란스러웠던 소동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꼬막이는 큰일을 겪고도 무사히 다시 연기준의 곁으로 돌아왔다.아이는 뒤늦게 가슴을 두드리며 중얼거린다.“아이고... 아기 심장 떨어질 뻔했습니다.”연기준이 곁눈질로 그를 흘겨봤다.“아까 보니 꽤 침착하던데.”꼬막이는 연기준의 어깨를 끌어안고 온몸의 힘을 빼듯 축 늘어졌다.“그건 다 속인 겁니다. 사실은 정말 무서워서 죽을 뻔했거든요.”그 말투를 듣고서야 봉한설은 그가 크게 다치지 않았음을 알았다.“왜 암위들한테 잡으라고 안 했습니까? 그자를 잡으면 줄기를 따라가서 뒤에 있는 가문까지 찾아낼 수도 있었을 텐데요

  • 시간을 거슬러   제1111화

    검은 옷의 사내는 잠시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연기준이 이렇게까지 빠르게 정답에 다다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순간, 그의 눈빛이 비통하게 일그러졌다.“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냐? 수령의 원수를 갚을 수만 있다면, 원수가 대대로 고통받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어느새 암위들이 조용히 그의 등 뒤로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다.연기준은 곁눈질로 그 움직임을 확인하고는 다시 시선을 거두어 오직 검은 옷의 사내만을 똑바로 응시했다.“너와 네 뒤의 가문은 여전히 일불락 수령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 헌데 선과 악도 가리지 못하고, 옳고 그름도 분별하지 못하지.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고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가린 그자가 바로 일불락 수령의 가장 큰 원수다.”그 말에, 검은 옷의 사내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입을 떼지 못한 채, 그저 눈을 크게 뜬다.“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그의 주의력은 온전히 연기준에게 쏠려 있었다. 무엇이 진실인지, 단 한마디라도 더 알아내고 싶다는 듯 초조하게 매달렸다. 그 탓에 손에 들어간 힘도 어느새 느슨해졌다.꼬막이의 목을 조이던 압박이 조금씩 풀리자 아이는 급히 숨을 몰아쉬며 몇 번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 뒤에야 겨우 숨을 돌렸다.그러고는 아직 어린 목소리로 연기준의 말에 힘을 보탰다.“우리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게 맞습니다. 여 할머니께서 그러셨거든요. 얼굴도 못 드러내는 그 사람은, 사람들 앞에 나설 낯이 없는 거래요. 일불락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얼굴만 보면 당장 죽여버릴 만큼, 대대로 잊지 못할 원수라고 했습니다.”여 할머니?검은 옷의 사내의 표정이 더욱 기이하게 일그러졌다.“어느 여 할머니를 말하는 것이냐?”꼬막이는 여전히 숨을 고르며 목을 매만졌다.“그냥 설산 안에 사는 그 여 할머니요! 입가에 검은 점 있는 그 할머니 말입니다!”그 순간, 검은 옷의 사내의 온몸이 굳어 버렸다.설산의 여 할머니라니?여족? 설장로? 입가의 검은 점…이 어린아이가 정말로 설장로를 안

  • 시간을 거슬러   제1110화

    말을 마치자마자 봉한설은 즉시 몸을 날리며 한 줄기 바람처럼 순식간에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뒷산.이미 연기준과 암위들이 검은 옷의 사내를 따라잡은 상태였다.그때쯤 꼬막이도 깨어났지만 사내의 어깨에 들려 있으면서도 조금도 겁을 먹은 기색이 없었다.까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가다가 연기준이 따라붙은 것을 보자마자 양팔을 흔들며 외쳤다.“아버지! 저 여기 있습니다!”그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연기준도 이렇게 빠르게 위치를 특정하진 못했을 것이다.그 순간, 검은 옷의 사내는 꼬막이를 어깨에 멘 채 연기준을 경계 어린 눈빛으로 훑어보았다.“생각보다 빠르게 따라붙었군. 진국의 황제라더니, 듣던 것보다 훨씬 영리하네. 일불락 수령 일족의 후예라던데 사람 보는 눈은 그 조상보다 훨씬 낫군.”연기준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눈동자는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넌 일불락의 후손이구나.”물음이 아니라 단정이었다.“어느 부족 출신인지 밝혀라.”검은 옷의 사내는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나를 이기면 그때 알려주지.”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순간, 공기 속에 수없이 많은 빙능이 맺혀들었다.날카로운 얼음조각들이 일제히 연기준을 향해 쏟아졌다. 연기준은 가까이 있던 암위의 검을 뽑아 들고 내력을 끌어올려 검을 휘둘렀다.앞뒤에서 부딪히는 힘에 의해 빙능은 공중에서 산산이 부서졌다.그 반동으로 검은 옷의 사내는 내력이 역류하여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다.그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너... 목족 무공을 쓸 줄 아는 것이냐?”그 말에, 연기준 역시 순간 멈칫했다.방금 그가 사용한 내력은 어릴 적 연도현이 가르쳐준 것이었다.그때는 그저 일반적인 내공보다 깊고 강하다고만 여겼을 뿐이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연도현은 이미 그의 출생을 알고 일찍이 일족과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았던 것일지도 모른다.연기준은 낮게 말했다.“아이를 놓거라. 같은 일불락의 후손이라면 서로 죽일 필요는 없을 텐데.”검은 옷의 사내는 잠시 놀란 기색을 보였

  • 시간을 거슬러   제305화

    서인경의 시선이 곁에 서 있는 노신을 스쳐 지나갔다.“홍복, 너는 문밖을 지키거라.”방금 두 사람의 기세라면 자칫하면 정말로 싸움이 붙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두려웠던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하나…”예정훈은 짧게 잘라 말했다.“걱정 말고 나가 있거라.”홍복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며 문을 닫았다. 그러자 예정훈의 시선이 다시 서인경에게 향했다.“이제 말해도 됩니다.”서인경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며칠 전, 제 사람들이 서가 군영 밖에서 야랑국 선황후의 화권을 주워왔습니다.”그 말에 예정훈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하며 동

  • 시간을 거슬러   제266화

    다행인 것은 그녀에게는 아직 포기를 원하지 않은 남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막수한은 봉수정의 어깨를 꽉 붙잡으며 낮게 말했다.“너는 나에게 약속하지 않았느냐?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봉수정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곁에 있던 서인경을 바라보았다.“상왕비, 세상 누구나 지키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마마께서는 아이들을 지키고자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지하흑시가 있지요. 흑시는 우리 목숨보다도 귀한 존재입니다. 저 아이들을 돕는 것은 우리가 아직 인간성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지 결코

  • 시간을 거슬러   제313화

    그는 뒤로 손을 내저었다.“너희 둘, 나가서 문밖을 지키거라. 본도련님과의 자리를 방해하지 말거라.”하인들은 명을 받들어 물러나며 아예 문까지 꼭 닫아주었다.문이 닫히자 단평안은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정욕이 눈에 가득 차 서인경에게 달려들었다.“이 년, 내가 너를 몇 해나 그리워했는 줄 아느냐! 오늘은 네가...”그의 말은 채 끝맺지 못했다. 단평안의 몸은 서인경 눈앞 한 치 앞에서 멈춰 섰고 그의 눈빛은 공포에 굳어졌다.단평안은 똑똑히 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그러나 날카로운 칼끝은 이미 그의 살

  • 시간을 거슬러   제300화

    “상왕비라 했나?”예정임의 손이 순간 멈추었다.“오늘 본황자는 상왕만 보았다. 대전에는 몇몇 궁녀들뿐, 부인을 동반한 이는 하나도 없었지.”그의 어투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시위는 예정임에게 차를 따라 올리며 무심히 말했다.“듣자 하니, 진국은 남권 제도라 하여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 여인이 참석할 수 없다 하옵니다. 다만 주군, 대장군의 당부를 잊지 마시길. 만약 주군의 속내가 대장군의 귀에 들어간다면 두고두고 꾸중을 들으실 것이옵니다.”예정임은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 가득 실망을 드러냈다.“그만, 그만!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