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7화

Author: 강시아
맹경운은 여동생을 힐끗 보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며칠 전에 상왕비께서 너에게 시비를 걸었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사이가 좋아진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

맹영은이 답했다.

“그건 오해였어요. 오라버니, 저를 상왕부에 데려가 주세요. 제가 직접 왕야께 해명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왕비의 잘못이 절대 아닙니다.”

맹경운은 단호히 거절했다.

“상왕과 왕비 사이의 일은 끼어들지 말거라. 상왕비는 조용히 지낼 성격이 아니니 앞으로는 되도록이면 가까이 지내지 마.”

주루의 맨 위층에서 한 검은 옷을 입은 젊은 청년이 뒷짐을 지고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청년의 옆에 선 중년 사내가 맹은영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헌아, 저쪽이 맹국공의 적녀인 맹은영이다. 네 모후께서 널 위해 간택한 황자비지.”

연강헌의 시선은 주루 밖에서 연기준과 실랑이를 벌이는 여인의 뒷모습에 닿았다.

“저는 상왕비가 더 재미있어 보입니다만.”

중년 사내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네 숙모 되는 사람이다.”

연강헌은 시선을 거두고 묘한 미소를 지었다.

“오해이십니다. 그저 소문이랑 많이 다른 것 같아서요.”

국구, 즉, 황후의 오라비인 하선준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맹국공은 조정에서도 꽤 성망 높은 사람이다. 세 손자마저 덕목과 재능을 겸비한 전도 유망한 청년들이지. 단씨 가문은 엄청난 부를 이룩하고 만 천하에 점포를 둔 가문이야. 황후마마께서는 두 집안의 처자들이 같이 널 내조한다면 분명히 너에게 힘이 되어줄 거라고 예견하셨지.”

연강헌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방금 전 끌려간 놈이 단씨 가문의 삼대 독자 아닙니까?”

하선준이 말했다.

“아들 녀석은 좀 무능하지만 둘째 딸은 경성에서도 재녀(시조와 그림에 능통한 양반가 여성)라는 호칭을 들을 정도로 똑똑한 아이라고 하니 너도 마음에 들 게다.”

하지만 연강헌은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큰딸은 상왕비의 자리를 원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선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문의 공적을 내세우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의 상왕비가 저 자리에 오를 수도 없었을 게다. 서 장군 댁은 이번 대에 아들이 없으니 점점 몰락할 테고. 상왕이 지금의 상왕비를 내치는 것은 시간 문제야. 그렇게 되면 단씨 가문의 딸을 비로 들인 상왕은 필히 너에게 충성할 테고.”

연기준의 충심에 대하여 연강헌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제 동생들은 최근 별다른 움직임 없습니까?”

하선준이 말했다.

“사황자와 육황자의 어미는 신분이 미천하니 야망은 있어도 그걸 받쳐줄 힘이 없어. 오랜 지병을 앓던 칠황자는 이미 한 달째 두문불출하고 있고. 십삼황자는 재작년에 폐하의 심기를 크게 건드려서 지금은 황릉에서 태후마마의 묘소를 지키는 중이지. 십오황자는 올해 고작 여덟 살이니 배후에 뒷받침해 주는 장군부가 있더라도 단기간엔 권력을 잡긴 힘들 거다. 넌 폐하 안전에서 네 재능을 마음껏 보여줘서 하루빨리 태자 책봉이 이루어지게 하거라. 나머지는 이 외삼촌이 주시하고 있을 테니.”

연강헌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한편 서인경은 연기준에게 끌려 상왕부로 돌아왔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의 속박을 풀려날 수 없으니 화가 치밀었다.

“이봐요, 존귀하신 왕야님. 저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어온 것이고, 저는 그저 정당방위를 했을 뿐이라니깐요! 앞뒤 사정을 좀 따져가면서 행동하시죠?”

연기준은 그녀에겐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어깨에 들쳐멘 채로 왕부에 들어섰다.

“내가 그리 전후사정 따져가며 행동하는 사람으로 보이느냐?”

서인경은 화를 가라앉히려 길게 심호흡했다.

“그래서 지금 뭐 하시려는 겁니까? 정인의 남동생을 좀 때려서 제게 매를 들려는 심산이십니까?”

연기준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녀를 난화원에 집어넣은 후 뒤돌아섰다.

“왕비가 허구헌날 밖에서 사고만 치고 돌아다니니, 3일 금족을 명한다! 그리고 내 명 없이는 절대 외출하지 못하게 하여라!”

분노에 이성을 잃은 서인경은 벽을 쾅쾅 두드리며 고함을 질렀다.

“연기준 이 망할 놈의 자식아! 내가 피해자라고 했잖아! 뭔데 내게 금족령을 내려!”

연기준의 느긋한 목소리가 멀리서 유유히 전해졌다.

“부군인 나를 모욕하였으니 금족 7일!”

대문이 쾅 하고 닫히더니 밖에서 자물쇠를 잠그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인경은 화가 치밀어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자 기둥 뒤에 숨어 있던 평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왕비마마, 화 푸셔요. 며칠 집안에서 쉰다고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차피 매를 맞거나 꾸중을 듣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참으로 낙관적인 아이였다.

서인경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평이야, 네가 말해 보아라. 대체 저 인간이 왜 저렇게 화를 낼까? 자신의 왕비가 하마터면 망나니한테 희롱을 당할 뻔했는데 악인을 징벌하러 가기는커녕, 왜 집안에서 위세를 떠냔 말이다!”

평이가 조심스레 반박했다.

“왕야께선 악인을 징벌하셨지요. 발길질 한번에 놈의 입안을 피투성이로 만드셨지 않습니까. 그때는 정말 멋있었어요.”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그런데 왜 나에게 금족령을 내리냔 말이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평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레 생각을 꺼냈다.

“그 악인도 많이 다쳤지 않습니까.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차라리 처소에 가만히 있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서인경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평이에게 한바탕 불만을 털어놓았더니 자연스레 금족을 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차피 연기준은 그녀에게 물질적으론 박대하지 않았으니 딱히 손해볼 것도 없었다.

평이는 숨겨뒀던 요리 실력을 발휘해서 심심해 하는 서인경에게 갖가지 간식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그날 저녁 평이는 통닭구이를 식탁에 올렸다.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인경에게 물었다.

“왕비마마, 그 집안 사람들이 만약에 따지러 쳐들어온다면 왕야께서 저희를 지켜주실까요?”

서인경은 열심히 닭다리를 뜯다가 웃으며 되물었다.

“두려워?”

평이가 겁먹은 표정으로 답했다.

“아… 아니요….”

서인경은 닭다리 하나를 뜯어서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연기준이 우릴 지켜줄지는 나도 잘 몰라. 하지만 단은설이 애걸복걸 매달리면 부탁을 들어줄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평이는 닭다리를 베어먹으면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분명 왕비는 마마이신데 왜 왕야께선 다른 여인에게 그리도 잘해주시는 걸까요?”

서인경은 아련한 표정으로 전생의 일을 떠올렸다.

“예전에 그분께서 전장에 나가셨을 때, 조정의 군량 조달이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었어. 마침 고향집에 내려갔던 단은설이 그걸 알고 가문의 창고를 열어 상왕군의 위기를 해결해 주었다고 하더구나.”

“그럼 보은이로군요.”

평이는 한탄하듯 말했다.

“그러나 단은설은 분명 딴마음을 품고 있어요. 왕야께선 보은을 위해 왕비마마를 속상하게 하셨단 말씀이네요?”

‘내가 속상해한다고? 그건 내가 아니고 원래 주인이겠지.’

이 몸의 원주인은 전생에 사랑하는 사내가 앞날을 위해 자신의 가족을 희생하고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척자매를 품은 것을 제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결국엔 원래의 서인경이 자신만의 가치를 잃어서일 거야.’

가문이 풍비박산 나고 의지할 곳을 잃은 무능한 여인이 버려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원한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

21세기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물질적인 여자를 비난했다. 하지만 과연 여자만 그랬을까?

남자들은 연애할 대상을 고를 때 자신의 체면을 세워줄 수 있는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를 선호했다.

그러나 결국 결혼은 어느 정도 능력 있고 자신의 부담을 들어줄 수 있는 여자를 택했다.

이혼할 때 재산분할로 서로 원수처럼 싸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사랑도 현실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가난 앞에 아무리 견고한 사랑도 속절없이 무너질 때가 많았다.

21세기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지금 상황에 대입해 보면 서인경은 누굴 탓하고 원망할 수 없었다.

결국 스스로 서는 자가 끝까지 살아남는 법이다.

“어서 밥이나 먹으렴. 다 먹고 서쪽 별채로 가서 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혼수나 찾아오거라.”

평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건 뭐에 쓰시려고요?”

서인경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미리 정리하려는 게야. 나중에 이곳을 나가면 돈 되는 것들을 죄다 팔아서 은화로 바꾼 후에 그 돈으로 큰일을 할 것이다.”

평이는 그녀의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의욕 넘치는 서인경의 모습을 보자 저절로 가슴이 뛰었다.

서인경이 왕부로 시집올 때 친정인 서씨 가문을 제외하고도 황제께서도 인자함을 베풀기 위해 적지 않은 혼수를 보태주었다.

그렇게 며칠간 두 사람은 창고 정리를 끝났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시간을 거슬러   제461화

    이 시각, 능지국.출정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출정 후 패배를 겪고 나자 모두가 고개를 떨구었고 온 진영은 침울한 기운에 잠겨 있었다.그동안 귀면인이 군을 이끌고 싸울 때마다 연전연승이었다. 그 덕에 자신감은 이미 하늘을 찔렀고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는 짜릿함에 완전히 중독되어 있었다.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았다. 그것도 연기준의 손에 말이다진국의 상왕이라는 이름이 능지국 군대에 번져나가자 그것은 낮게 깔린 기압처럼 그들의 머리 위를 짓누르고 있었다.모두들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지만 오직 상석에 앉은 단안만은 태평했다. 그는 오히려 여유롭게 붓을 들어 하얀 종이 위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그는 부하들이 진국의 상왕을 입에 올리는 걸 보자 문득 그날 밤 자신의 서재를 침입했던 그 젊고 날랜 소년 장수를 떠올렸다. 전장에서 전략을 주도하며 자신과 대등하게 맞섰던 그 위풍당당한 장군.단안은 미묘하게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의 얼굴에 감탄이 비쳤다. 이상하게도 단안은 그 사내에게서 자신의 젊은 시절 그림자를 보았다.그리고 또 한 사람. 그에게 할아버지라 부르던 그 여자아이.두 사람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부부였다.그날 밤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서재에 침입한 것은 대체 무슨 속셈이었을까?그러나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던 모습을 떠올리자 그는 오히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제법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능지국에 와서 그렇게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을 그는 본 적이 없었다.그때 부장 하나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우리 군이 패했는데 대장군께선 한마디 말씀도 없으시군요. 혹 책임을 피하시려는 겁니까?”모두의 시선이 단안에게로 향했다.그는 태연하게 붓의 마지막 획을 그었다. 단안은 글씨를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붓을 거두며 방금 말을 꺼낸 부장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하길 바라는 것이냐? 진국이 사신을 보내 화리를 청했을 때 본 장군은 두 나라가 앉아 협상하자고

  • 시간을 거슬러   제460화

    서인경은 그가 또 무슨 말을 퍼뜨릴까 걱정되어 달래야 할 건 달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만약 연강헌의 편지가 애초에 막북 밖으로 나가지 못할 거란 걸 알았다면 그에게 눈곱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서인경이 연강헌의 막사 앞으로 다가가던 순간, 쾅 하고 큰 소리가 터졌다. 그러더니 하얀 무언가가 정면으로 날아왔다. 만약 연풍이 재빨리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서인경은 그대로 맞았을 것이다.그 물건이 딱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자 서인경은 그것이 도자기 그릇임을 알아차렸다.“본 황자에게 이런 약을 쓰다니! 아파 죽겠다! 다 꺼지거라!”그와 동시에 약 상자를 멘 호청이 분이 잔뜩 오른 얼굴로 막사 안에서 나왔다. 그는 서인경을 보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왕비 마마, 제발 왕야께 말씀 좀 해주십시오. 이 늙은이는 군의관의 우두머리 자리에서 더는 버티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프거나 쓰라리면 치료도 안 받겠다고 하니... 차라리 전선에 나가는 게 낫지, 이런 환자는 못 보겠습니다.”서인경은 평소 보기 힘든 발끈한 호청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됐습니다. 잠시 후에 한설에게 시켜 약재 두 개를 줄게요.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그러니 화 푸세요.”서인경이 주려는 건 당연히 흔한 약이 아니었다.호청은 그 말을 듣자 금세 얼굴에 드러났던 억울함이 싹 사라졌다.“그럼 기대하겠습니다.”서인경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청은 그제야 속이 풀린 듯 기분 좋게 다시 부상자를 치료하러 발걸음을 옮겼다.그제야 서인경은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연강헌은 침대에 엎드려 있었고 통증 때문에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그는 부하의 말에 고개를 돌렸고 서인경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 순간 상처가 당겨지며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아!”그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황숙모, 용서하십시오. 조카가 부상 중이라 절을 올리지 못하겠습니다.”부하가 의자를 가져왔지만 서인경은 앉지

  • 시간을 거슬러   제459화

    서인경은 말문이 막혀 잠시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녀는 차마 이렇게 말할 수 없었다.‘제가 당신 아들을 꿈에서 봤는데 그 착한 아들이 알려줬습니다. 게다가 그 아들은 뜨거운 물로 목욕도 시켜주었지요.’그렇게 말했다간 연기준은 분명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잠시 고민에 빠진 서인경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했다.“지난번 약왕곡에 있을 때 육승이 알려줬습니다. 나중에 재미있을 것 같아서 고서 몇 권을 찾아보다가 조금 알게 된 것이지요.”연기준이 더 캐묻기 전에 서인경이 먼저 말을 던졌다.“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왕야께서는 이미 일불락의 유적지가 묻혔다는 걸 알고 있었단 말이군요?”연기준은 책을 덮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일불락의 유적지는 그들의 후손이 아닌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서인경의 눈이 반짝였다.“그럼 정말 일불락의 후손이 존재한다는 것입니까? 일불락은 예전에도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지요. 이번엔 직접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연기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엔 알 수 없는 어둠이 스쳤다. 돌고 돌아 결국 일이 이 지점까지 흘러온 것이다.두 사람이 몇 마디 더 나누고 있을 때 막사 문이 젖히며 봉한설이 점심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그릇을 놓으며 불만을 터뜨렸다.“대황자는 정말 제멋대로입니다. 다들 바빠 죽겠는데 굳이 군의관을 불러 상처를 봐 달라질 않나, 우리가 준 약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투덜대질 않나. 싫으면 먹지를 말든가요! 아프다 죽든 말든! 우리 쪽 부상자들도 약재가 모자라 죽겠는데 말입니다.”서인경은 잠시 상황을 파악했다. 봉한설의 투덜거림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지금 군의 약재는 한정되어 있다. 연강헌은 군법에 따라 백 군곤을 맞고 나서 상처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상태가 악화되고 있었던 것이다.평소부터 부귀영화를 누려온 대황자에게 그런 형벌은 상상도 못 할 고통이었다. 평소에는 모기에 한 번만 물려도 황후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연고를 가져다 발라줬으니

  • 시간을 거슬러   제458화

    서인경은 그 말을 들으며 마음속이 서늘해졌다. 겉보기엔 화려하고 모든 이가 부러워하는 남자지만 그의 인생 또한 순탄하지 않았다.“그래서 말입니다, 마마. 부디 왕야와 다시 화리 같은 일로 다투지 마시옵소서. 마마께서 곁에 계신 뒤로 왕야께서는 예전보다 더 목숨을 아끼시옵니다. 예전에는 적의 군영에 들어갈 때도 부하를 데리고 가지 않고 항상 혼자 들어가셨거든요.”서인경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지금은 그나마 나아진 셈이란 말인가?“왕야의 어깨 뒤쪽 상처는 적의 군영에서 입은 것이냐?”연풍은 고개를 끄덕였다.“귀면인이 소식을 듣고 급히 본진으로 돌아왔사옵니다. 왕야께서 임무를 마치고 철수하던 중 그들과 맞닥뜨렸고 마 부장을 구하려다 다치신 것이옵니다.”말이 끝나자마자 한 사람이 급히 달려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전하를 곤란하게 만든 건 제 탓이옵니다. 마마, 부디 저를 벌하시옵소서.”마 부장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가 서려 있었다. 연기준이 자신을 구하다 다쳤다는 생각에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전하보다 제가 늦게 달렸사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하께서 돌아와 저를 구하실 일도 없었을 것인데... 마마, 제게 벌을 내리시옵소서.”서인경은 손짓으로 그를 일으켰다.“그만 일어나거라. 전장은 칼날이 난무하는 곳이다. 어떤 일을 겪을지 누가 알겠느냐?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다.”“마마께서는 이런 일을 쉽게 덮어버리시네요. 그게 너그러워서인지 아니면 왕야의 목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인지 모르겠습니다.”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서인경이 고개를 돌리자 관서윤이 분노에 찬 얼굴로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서인경은 무심하게 그녀를 훑어보며 말했다.“이건 우리 서가군의 일입니다. 다친 사람도 아무 말 안 하는데 그대가 무슨 자격으로 끼어드는 것입니까?”관서윤의 얼굴빛이 굳어졌다.“그대는 역시 왕야와 어울리지 않습니다!”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서인경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바라보다가 연풍에게 당부했다.“직접 왕

  • 시간을 거슬러   제457화

    서인경은 그에게 침을 뱉고 싶었지만 그가 아직 상처가 있다는 말을 듣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연기준의 옷을 벗겨 주었다. 그의 등 뒤 어깨에는 커다란 멍이 퍼져 있었다. 모양으로 보아 발자국 같았다.“누가 왕야를 걷어찬 것입니까?”그녀는 약상자를 가지러 가며 물었고 연기준은 이미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온몸이 따뜻한 물에 잠기자 하루 밤낮 싸운 피로가 몰려왔다. 그는 금세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연기준은 코끝을 살짝 움직였다.“이 목욕물에… 무엇을 넣은 것이냐?”서인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타박상 약을 꺼내 그의 멍든 자리에 약을 발라 주었다.“제가 직접 섞은 약재 몇 가지입니다. 몸에 좋아요.”연기준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는 느긋하게 입을 열어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그 검은 옷의 귀면인은 무공이 제법이더군. 몸놀림이 빠르고 근접전이 능숙하지. 이 발길질은 내가 마 부장을 구할 때 순간 방심해서 기습당한 것이다.”서인경은 손의 동작을 멈추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능지국 사람들은 주로 기마술에 뛰어납니다. 그들의 장수들은 말 위에서 세상을 정복하는 걸 더 좋아하거든요.”연기준은 욕조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취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물결에 섞여 흘러나왔다.“그렇지. 격투술(格斗术: 근접전 무술)을 잘하는 건 야랑국이다.”서인경의 손이 잠시 멈췄다.“설마… 예정임입니까?”예정임은 진국에서 사라진 뒤 그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야랑국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서인경은 의심했다. 양국의 전쟁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자가 바로 예정임일 거라고.그는 호랑이 싸움을 구경하듯 두 나라가 피를 흘리며 소모되기를 기다렸다가 모두 약해진 뒤에 이득을 취하려는 것이다.서인경은 오랫동안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분석했다. 나름 논리도 완벽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연기준은 잠들어 있었다.뜨거운 김이 그의 얼굴을 감싸고

  • 시간을 거슬러   제456화

    관서윤의 감정에 대해 서인경은 그저 우습게 느껴졌다.“그가 왜 저를 좋아하냐고요? 그건 직접 물어보세요. 저는 관 씨 가문의 충절을 존중합니다. 아마 연기준도 그 점 때문에 그대의 무례함을 지금까지 참아준 거겠지요. 한데 아무리 큰 존중도 끝내는 사라지는 날이 오기 마련입니다.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부디 그대 스스로도 잘 생각해 보십시오.”관서윤의 표정에는 더 짙은 증오가 떠올랐다.“머지않아 당신 서 씨 가문도 우리 관 씨처럼 될 겁니다. 그때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두고 보자고요!”서인경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그대는 꽤 확신하는 눈치인데… 뭘 알고 있는 것입니까?”관서윤은 눈썹을 비스듬히 치켜올리며 비웃었다.“그래요. 저는 당신들이 모르는 걸 조금 알고 있습니다. 한데 말해줄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그대가 저처럼 추락할 때까지 기다릴 것입니다.”그녀는 음산하게 웃더니 목소리를 돌연 낮췄다.“아니지… 그대는 저보다 더 비참하겠지요. 당신도, 그리고 뱃속의 아이도 모두 그 사람의 치욕스러운 과거로 남게 될 것입니다.”서인경은 그녀가 냉소를 흘리며 돌아서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가슴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번졌다. 그 느낌은 마치 전생의 마지막 순간이 다시 찾아온 것만 같았다. 서 씨 가문이 사라지고 상왕비는 다른 사람이 되었으며 자신의 이름은 상왕부에서 금기된 채 먼지 속에 묻힌 과거로 남았던 그때처럼 말이다.서인경의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기 시작하더니 불안감이 덮쳐왔다.안 돼.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전생의 일을 다시 되풀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그때 봉한설이 급히 달려왔다. 서인경의 안색이 좋지 않자 그녀는 바로 손을 내밀어 부축했다.“마마, 무슨 일입니까? 그 여자가 뭐라고 했습니까?”서인경은 고개를 저었다.“괜찮다. 돌아가자꾸나.”그녀는 아직 아무 단서도 잡지 못했고 괜히 더 많은 사람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 전투는 꼬박 하루 밤낮을 이어졌다. 이튿날 새벽이 되어서야 대군이 본진으로 돌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