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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코코넛 서고
맹경운은 여동생을 힐끗 보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며칠 전에 상왕비께서 너에게 시비를 걸었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사이가 좋아진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

맹영은이 답했다.

“그건 오해였어요. 오라버니, 저를 상왕부에 데려가 주세요. 제가 직접 왕야께 해명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왕비의 잘못이 절대 아닙니다.”

맹경운은 단호히 거절했다.

“상왕과 왕비 사이의 일은 끼어들지 말거라. 상왕비는 조용히 지낼 성격이 아니니 앞으로는 되도록이면 가까이 지내지 마.”

주루의 맨 위층에서 한 검은 옷을 입은 젊은 청년이 뒷짐을 지고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청년의 옆에 선 중년 사내가 맹은영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헌아, 저쪽이 맹국공의 적녀인 맹은영이다. 네 모후께서 널 위해 간택한 황자비지.”

연강헌의 시선은 주루 밖에서 연기준과 실랑이를 벌이는 여인의 뒷모습에 닿았다.

“저는 상왕비가 더 재미있어 보입니다만.”

중년 사내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네 숙모 되는 사람이다.”

연강헌은 시선을 거두고 묘한 미소를 지었다.

“오해이십니다. 그저 소문이랑 많이 다른 것 같아서요.”

국구, 즉, 황후의 오라비인 하선준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맹국공은 조정에서도 꽤 성망 높은 사람이다. 세 손자마저 덕목과 재능을 겸비한 전도 유망한 청년들이지. 단씨 가문은 엄청난 부를 이룩하고 만 천하에 점포를 둔 가문이야. 황후마마께서는 두 집안의 처자들이 같이 널 내조한다면 분명히 너에게 힘이 되어줄 거라고 예견하셨지.”

연강헌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방금 전 끌려간 놈이 단씨 가문의 삼대 독자 아닙니까?”

하선준이 말했다.

“아들 녀석은 좀 무능하지만 둘째 딸은 경성에서도 재녀(시조와 그림에 능통한 양반가 여성)라는 호칭을 들을 정도로 똑똑한 아이라고 하니 너도 마음에 들 게다.”

하지만 연강헌은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큰딸은 상왕비의 자리를 원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선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문의 공적을 내세우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의 상왕비가 저 자리에 오를 수도 없었을 게다. 서 장군 댁은 이번 대에 아들이 없으니 점점 몰락할 테고. 상왕이 지금의 상왕비를 내치는 것은 시간 문제야. 그렇게 되면 단씨 가문의 딸을 비로 들인 상왕은 필히 너에게 충성할 테고.”

연기준의 충심에 대하여 연강헌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제 동생들은 최근 별다른 움직임 없습니까?”

하선준이 말했다.

“사황자와 육황자의 어미는 신분이 미천하니 야망은 있어도 그걸 받쳐줄 힘이 없어. 오랜 지병을 앓던 칠황자는 이미 한 달째 두문불출하고 있고. 십삼황자는 재작년에 폐하의 심기를 크게 건드려서 지금은 황릉에서 태후마마의 묘소를 지키는 중이지. 십오황자는 올해 고작 여덟 살이니 배후에 뒷받침해 주는 장군부가 있더라도 단기간엔 권력을 잡긴 힘들 거다. 넌 폐하 안전에서 네 재능을 마음껏 보여줘서 하루빨리 태자 책봉이 이루어지게 하거라. 나머지는 이 외삼촌이 주시하고 있을 테니.”

연강헌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한편 서인경은 연기준에게 끌려 상왕부로 돌아왔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의 속박을 풀려날 수 없으니 화가 치밀었다.

“이봐요, 존귀하신 왕야님. 저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어온 것이고, 저는 그저 정당방위를 했을 뿐이라니깐요! 앞뒤 사정을 좀 따져가면서 행동하시죠?”

연기준은 그녀에겐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어깨에 들쳐멘 채로 왕부에 들어섰다.

“내가 그리 전후사정 따져가며 행동하는 사람으로 보이느냐?”

서인경은 화를 가라앉히려 길게 심호흡했다.

“그래서 지금 뭐 하시려는 겁니까? 정인의 남동생을 좀 때려서 제게 매를 들려는 심산이십니까?”

연기준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녀를 난화원에 집어넣은 후 뒤돌아섰다.

“왕비가 허구헌날 밖에서 사고만 치고 돌아다니니, 3일 금족을 명한다! 그리고 내 명 없이는 절대 외출하지 못하게 하여라!”

분노에 이성을 잃은 서인경은 벽을 쾅쾅 두드리며 고함을 질렀다.

“연기준 이 망할 놈의 자식아! 내가 피해자라고 했잖아! 뭔데 내게 금족령을 내려!”

연기준의 느긋한 목소리가 멀리서 유유히 전해졌다.

“부군인 나를 모욕하였으니 금족 7일!”

대문이 쾅 하고 닫히더니 밖에서 자물쇠를 잠그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인경은 화가 치밀어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자 기둥 뒤에 숨어 있던 평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왕비마마, 화 푸셔요. 며칠 집안에서 쉰다고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차피 매를 맞거나 꾸중을 듣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참으로 낙관적인 아이였다.

서인경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평이야, 네가 말해 보아라. 대체 저 인간이 왜 저렇게 화를 낼까? 자신의 왕비가 하마터면 망나니한테 희롱을 당할 뻔했는데 악인을 징벌하러 가기는커녕, 왜 집안에서 위세를 떠냔 말이다!”

평이가 조심스레 반박했다.

“왕야께선 악인을 징벌하셨지요. 발길질 한번에 놈의 입안을 피투성이로 만드셨지 않습니까. 그때는 정말 멋있었어요.”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그런데 왜 나에게 금족령을 내리냔 말이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평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레 생각을 꺼냈다.

“그 악인도 많이 다쳤지 않습니까.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차라리 처소에 가만히 있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서인경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평이에게 한바탕 불만을 털어놓았더니 자연스레 금족을 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차피 연기준은 그녀에게 물질적으론 박대하지 않았으니 딱히 손해볼 것도 없었다.

평이는 숨겨뒀던 요리 실력을 발휘해서 심심해 하는 서인경에게 갖가지 간식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그날 저녁 평이는 통닭구이를 식탁에 올렸다.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인경에게 물었다.

“왕비마마, 그 집안 사람들이 만약에 따지러 쳐들어온다면 왕야께서 저희를 지켜주실까요?”

서인경은 열심히 닭다리를 뜯다가 웃으며 되물었다.

“두려워?”

평이가 겁먹은 표정으로 답했다.

“아… 아니요….”

서인경은 닭다리 하나를 뜯어서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연기준이 우릴 지켜줄지는 나도 잘 몰라. 하지만 단은설이 애걸복걸 매달리면 부탁을 들어줄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평이는 닭다리를 베어먹으면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분명 왕비는 마마이신데 왜 왕야께선 다른 여인에게 그리도 잘해주시는 걸까요?”

서인경은 아련한 표정으로 전생의 일을 떠올렸다.

“예전에 그분께서 전장에 나가셨을 때, 조정의 군량 조달이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었어. 마침 고향집에 내려갔던 단은설이 그걸 알고 가문의 창고를 열어 상왕군의 위기를 해결해 주었다고 하더구나.”

“그럼 보은이로군요.”

평이는 한탄하듯 말했다.

“그러나 단은설은 분명 딴마음을 품고 있어요. 왕야께선 보은을 위해 왕비마마를 속상하게 하셨단 말씀이네요?”

‘내가 속상해한다고? 그건 내가 아니고 원래 주인이겠지.’

이 몸의 원주인은 전생에 사랑하는 사내가 앞날을 위해 자신의 가족을 희생하고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척자매를 품은 것을 제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결국엔 원래의 서인경이 자신만의 가치를 잃어서일 거야.’

가문이 풍비박산 나고 의지할 곳을 잃은 무능한 여인이 버려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원한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

21세기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물질적인 여자를 비난했다. 하지만 과연 여자만 그랬을까?

남자들은 연애할 대상을 고를 때 자신의 체면을 세워줄 수 있는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를 선호했다.

그러나 결국 결혼은 어느 정도 능력 있고 자신의 부담을 들어줄 수 있는 여자를 택했다.

이혼할 때 재산분할로 서로 원수처럼 싸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사랑도 현실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가난 앞에 아무리 견고한 사랑도 속절없이 무너질 때가 많았다.

21세기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지금 상황에 대입해 보면 서인경은 누굴 탓하고 원망할 수 없었다.

결국 스스로 서는 자가 끝까지 살아남는 법이다.

“어서 밥이나 먹으렴. 다 먹고 서쪽 별채로 가서 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혼수나 찾아오거라.”

평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건 뭐에 쓰시려고요?”

서인경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미리 정리하려는 게야. 나중에 이곳을 나가면 돈 되는 것들을 죄다 팔아서 은화로 바꾼 후에 그 돈으로 큰일을 할 것이다.”

평이는 그녀의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의욕 넘치는 서인경의 모습을 보자 저절로 가슴이 뛰었다.

서인경이 왕부로 시집올 때 친정인 서씨 가문을 제외하고도 황제께서도 인자함을 베풀기 위해 적지 않은 혼수를 보태주었다.

그렇게 며칠간 두 사람은 창고 정리를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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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을 거슬러   제706화

    불쑥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의 눈가가 미세하게 가라앉았다.“제가 데리고 오지 않은 게 아니라 왕야께서 막으셨지요. 그렇다는 건 태황태후께서 직접 키우신 왕야께서 설마 그런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받지 못하셨단 말입니까?”날려보낸 화살이 되려 자신의 눈앞으로 날아오자 태황태후의 안색은 더욱 굳어졌다.“집 안에서 놀다시피 하는 계집아이 주제에 어디 감히 상왕과 비교를 하는 것이냐? 상왕은 국정에, 군정에, 온 나라의 무거운 짐을 다 짊어지고 있는데 너는 이런 사소한 것 하나도 제대로 챙기지 못해놓고 뭘 잘했다는 것이냐? 그리고 상왕의 내조도 못 하면서 무엇을 믿고 상왕비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냐?”어느 시대든 똑같게 말한다. 여자는 집안을 책임져야 하고 남편이 못 하는 건 반드시 대신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래야만 남자가 밖에서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다고 말이다.서인경이 약왕곡에서 가져온 보물만 꺼내도 부유함은 황실에 견줄 만큼 압도적이었으니 황실에 기대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억누르는 것은 오직 하나. 바로 봉건 권력의 생살대권이었다. 서인경도 그 앞에서는 결국 풍토에 맞춰 고개를 숙여야 했다.침묵한 채 버티고 있는 서인경을 보며 태황태후는 제 말이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 듯 눈빛이 우쭐해졌다.“애초에 네게 교양 따위 있을 리가 없지. 애가는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상왕의 발목을 잡지만 않으면 그걸로 족하다. 상왕이 돌아오거든 애가가 마땅한 여인을 골라줄 것이다. 너는 그때 측비로 물러나고 증손은 정실에게 맡기겠다. 아무렴, 너보다 훨씬 잘 돌보지 않겠느냐?”쏟아낸 말들이 끝나자 대전 안은 순간 숨이 멎은 듯 적막해졌다.그때, 작은 손이 태황태후의 손바닥을 있는 힘껏 긁어내렸다.“악!”태황태후는 얼굴을 험하게 굳히며 손을 홱 하고 뿌리쳤다. 곱고 흰 손바닥에서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피가 새어 나왔다.궁녀들이 다급히 꼬막이를 들어 떼어내자 서인경이 단숨에 다가가 아이를 다시 품에

  • 시간을 거슬러   제7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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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을 거슬러   제7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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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을 거슬러   제703화

    “그 상왕비는 장군가에서 자라지 않았나? 그 사나운 기세가 옛 서 노장군과 하나도 다를 게 없네. 보통 무지한 여인처럼 만만히 다룰 상대가 아니네. 이런 식으로 떨어진 자리에 돌 던졌다가는 되레 우리가 먼저 죽을 수도 있다고!”“상왕은 잠시 진국을 떠났을 뿐, 죽은 것도 아닌데! 정말로 우리가 황후와 대황자를 따라 상왕을 탄핵할 셈인 겐가?”한 대신이 가장 먼저 손의 상소문을 활활 타오르는 화로 속에 밀어 넣었다.“나는 위로 부모님에 아래로 처자식까지. 한 집안 목숨을 지켜야 하네. 난 상왕을 건드릴 생각 없네. 누가 탄핵을 하든 말든, 나는 못 하겠네.”누군가의 태도가 흔들리자 곁에서 급하게 소리쳤다.“멍청한 놈! 상왕이 자네 하나뿐이던 아들을 어떻게 죽였는지 벌써 잊었는가!”그러자 그 사람의 눈에 서리던 증오가 눈 녹듯 사라졌다. 텅 빈 시선 끝에 남은 건, 오직 무력감과 두려움뿐이었다.“그래도 나는 또 어린 아들이 있네. 그 애는 책 읽는 걸 좋아해. 장차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을 갈 아이지. 다시는 전장에 나가지 않을 것이고 적 앞에서 등을 보일 일도 없을 것이네. 그러면 상왕도 그 아이를 죽이지는 않겠지. 한데 자네 말대로 했다간 우리 집안이 통째로 죽지 않겠나?”“비겁한 놈!”“그래, 비겁하면 어떻고 기개가 없으면 어떤가! 적어도 온 가족이 몰살당하는 것보단 낫지!”결심을 굳힌 그는 더 미련도 남기지 않고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가 움직이자 남은 이들도 모두 상소문을 내던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결국 그토록 공들여 꾸린 탄핵 세력은 눈 깜짝할 사이에 국구 하선준 혼자만 남게 되었다. 지금 국구부는 벼슬이 이미 세 단계나 깎여 옛 영광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황후와 대황자가 버티고 있으니 그나마 유지했던 것이지 그들마저 없었다면 진작 쫓겨났을 집안이었다.사람들 모두 떠난 자리에 홀로 서 있던 하선준의 얼굴은 먹빛처럼 검게 굳어 있었다.상왕이 올린 죄증만 아니었다면 그가 어찌 이런 몰락을 맛봤겠는가? 상왕비가 대황자와 맞서지만 않았

  • 시간을 거슬러   제702화

    서인경은 문 앞에 의자를 가져오라 지시하고는 걸터앉아 한 대, 또 한 대 뺨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파문 하나 없이 잔잔했다.“여긴 상왕부다. 태황태후의 사람이 감히 윗사람을 능멸해? 본왕비가 태황태후를 대신해 훈계하는 것이다. 내가 왕비인데 하인 한 명도 때리지 못한단 말이냐? 누구든 감히 한 마디 더 변명해 준다면 똑같은 꼴 날 줄 알거라.”경고가 칼처럼 뻗자 입 끝까지 치솟던 말들은 모두 꿀 삼키듯 목구멍으로 사라졌다. 암위들의 손엔 힘 조절 따위는 없었다. 손바닥 소리는 서슬 퍼렇고 주먹보다 더 잔인했다.오십을 채 가기도 전에 환관의 얼굴은 부어올라 돼지처럼 뒤틀렸고 입가에서는 침이 줄줄 흘러나왔다.백 대가 끝났을 때 즈음 그는 거의 죽은 자나 다름없었다.내내 서인경 품에 안겨 있던 꼬막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명도, 살 떨리는 소리도 그에게는 그저 호기심일 뿐이었다숨도 고르지 않고 바라보는 꼬막이에 서인경은 속으로 생각했다.‘이 아이는 과연 누구를 닮아 이렇게 태어난 걸까? 상왕과 내 피를 이어 받았으니 쉽지는 않겠지.’백 대가 끝났을 때는 문 앞에 이미 모여든 구경꾼들로 몇 겹의 벽이 쌓여 있었다.서인경은 꼬막이를 안고 일어섰다.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르기 전, 그녀는 평이를 불렀다.“내가 발을 떼는 즉시 사람을 풀어라. 예정임이 진국의 유아들을 납치해 죽음의 병사로 길렀다는 사실을 온 경성에 퍼뜨려. 그리고 모두가 알게 해야 한다. 상왕은 진국 백성을 위해 야랑국에 간 거라고. 또 나와 세자가 태황태후에게 불려 궁으로 들어간 사실도 퍼트리거라.”평이는 즉시 이해하고 눈을 반짝였다.“명심하겠습니다! 가장 빠르게 온 경성에 퍼지게 하겠습니다.”막북에서 전공을 세운 상왕 부부였는데 돌아오자마자 상왕은 백성을 위해 다시 야랑국으로 향했다.태황태후와 서 가의 오래된 앙금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지금 이 타이밍에 과부와 어린 세자를 들여 궁에 가둔다면 모두가 알 것이다. 그녀

  • 시간을 거슬러   제701화

    단정하게 갖춰 입은 궁중 예복이 몸에 얹혀지자 상왕비라는 위압이 단숨에 살아났다. 거울 앞에 선 그녀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첫 대결을 벌이기엔 이보다 더 알맞은 전투복은 없었다.“얼마나 이 날만을 기다렸겠느냐? 벌어질 일이라면 피해도 소용없다. 가서 맞서주자꾸나.”평이는 입술을 바짝 말아 쥔 채 잔뜩 겁먹은 얼굴이었다.“후궁은 용이 들끓고 호랑이가 노니는 곳이라 하지 않습니까? 왕야께서 계시지 않는 지금, 왕비님 혼자서도 위험한데 세자까지 데리고 들어갔다가 무사히 나오지 못한다면…”서인경은 옷자락을 내려놓고 다가와 평이와 봉한설의 볼을 양손으로 톡 하고 집었다.“안 가면 그게 오히려 항명이다. 목이 날아갈 일이지! 간다면 그래도 한 줄기 숨통이라도 남아 있지 않겠느냐?”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볼 뿐 결국 말 한마디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묵묵히 서인경과 꼬막이의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준비를 마치고 전원 앞으로 나서자 궁에서 조서를 가지고 온 환관은 이미 진득하게 화가 올라 있었다. 하필이면 어제 왔던 그 환관이었다. 그는 어제 빈손으로 돌아갔다는 이유로 궁에 들어서자마자 머리끝까지 욕을 먹었던 참이었다.하지만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상왕이 부재한 지금, 그녀는 그저 친정마저 없는 한낱 상왕비일 뿐. 궁궐의 주인들은 애초에 그녀를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후궁은 높은 자의 눈치만 보는 곳. 주인조차 하찮게 여긴다면 그 밑의 노비들은 더더욱 마음껏 짓밟아 된다고 여기는 법이었다.서인경이 천천히 걸어 나오자 환관은 콧구멍이 하늘을 찌를 기세로 외쳤다.“상왕비의 위세가 참으로 대단하시군요! 태황태후께서 단지 세자를 보고 싶어 하실 뿐인데 상왕비께서는 번번이 핑계만 대며 회피하시니, 이는 태황태후께 대한 참람한 불경입니다!”쏘아붙이는 말투와는 달리 서인경은 오히려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아이가 어려서 준비에 시간이 좀 들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게나.”그녀가 화내지 않자 환관은 더욱 기고만장해졌다.“애가 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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