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턱을 쥔 손가락이 더 깊이 파고들었다.윤서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아주 조금 위로 올렸다. 복도 천장, 화재감지기 옆에 붙은 검은 반구. 별장에서 생긴 버릇이었다. 어느 방에 들어가든 천장부터 봤다.“위에 카메라 있어요.”태호의 손이 멈칫했다.“호텔 복도예요. 오늘 의원님 행사 때문에 보안팀도 두 배로 붙었고요. 지금 이 장면, 그대로 녹화되고 있어요.”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턱이 아파서 발음이 조금 뭉개졌을 뿐이었다.“놓으세요. 아니면 내일 아침 변호사가 저 영상부터 요청할 거예요.”태호는 한참 그녀를 노려봤다. 그리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검은 반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하나씩 풀렸다.“두고 봐.”그가 돌아섰다. 비틀거리는 발소리가 연회장 쪽으로 멀어졌다.윤서는 그제야 벽에 손을 짚었다. 턱이 욱신거렸다. 별장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카메라가, 오늘은 처음으로 그녀를 지켜 줬다.---그날 밤, 윤서는 처음으로 규칙을 거꾸로 깼다.그녀가 그에게 갔다.호텔을 나온 뒤 그녀는 한 번도 집 쪽으로 차를 돌리지 않았다. 내일 오전, 그는 혼자 아버지의 사무실에 들어간다. 그 전에 그가 무슨 결심을 할지 그녀는 알 것 같았다. 비상계단에서 그녀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규칙은 내가 다시 짤게요. 이번엔 내가 지킬 차례예요. 그 말을 지킬 날이 생각보다 빨리 왔다.도혁의 집은 불이 꺼져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한참이 지나서야 문이 열렸다. 그는 셔츠 차림 그대로였다. 만찬장에서 입었던 그 셔츠. 오른손에는 붕대가 대충 감겨 있었다.“선배님이 여길 왜…….”“들어가도 돼요?”그는 비켜서지 않았다. 문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가세요.”“도혁 씨.”“가세요, 선배님. 지금 여기 오시면 안 돼요. 누가 보고 있을지 몰라요. 오늘 같은 날은 더.”윤서는 대답 대신 그의 붕대 감은 손을 봤다. 냅킨에 번지던 피. 그 손을 쥔 채 식탁 밑에서 버티던 사람.“손부터 봐요.”그녀가 문틀 안으로 한 발
아무도 잔을 내려놓지 않았다.들어 올린 잔들이 식탁 위 허공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연회장 너머의 박수 소리가 이 방까지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길었다.남성구가 먼저 입을 열었다.“무슨 근거로 하는 말이냐.”목소리는 낮았다. 화가 난 목소리가 아니었다. 정치를 삼십 년 한 사람이, 아직 화를 낼지 말지 정하지 않은 목소리였다.태호는 기다렸다는 듯 재킷 안주머니에서 갈색 봉투를 꺼냈다. 접힌 종이 몇 장이 식탁보 위로 펼쳐졌다. 영어로 빽빽한 서류였다. 맨 위에는 뉴욕의 한 요양원 이름이 찍혀 있었다.“사망 기록 사본이에요. 그리고 이건 투약 동의서.”태호가 마지막 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서류 맨 아래, 보호자 서명란.“여기 이름 보이시죠.”윤서는 그 서명을 봤다. 영문 필기체였다. 읽을 필요도 없었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얼굴이 이미 대답하고 있었다.도혁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 있었다. 비상계단에서 봤던 그 회색이었다.“전 그냥 걱정돼서요.”태호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너무 부드러웠다.“이제 다 알려진 동생이잖아요. 이런 게 밖에서 먼저 터지면 아버지까지 다치실까 봐. 형으로서.”윤서의 손끝이 식었다.형으로서. 동생을 걱정하는 얼굴로.그 말투를 그녀는 알았다. 결혼한 뒤로 이 집에서 내내 들어 온 화법이었다. 협박을 걱정처럼, 명령을 부탁처럼 하는 말투. 태호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지만, 태호의 문장이 아니었다.---남성구가 서류를 집어 들었다.한 장, 또 한 장. 그는 오래 읽었다. 영어 문장을 손가락으로 따라가며, 날짜와 약품 이름과 서명을 하나씩 확인했다. 방 안의 누구도 숨소리를 내지 않았다.마지막 장에서 그의 손이 멈췄다.“도혁아.”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이게 사실이냐.”도혁의 입술이 열렸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닫혔다. 그는 아버지를 보지 않았다. 식탁보 위 서명만 보고 있었다. 오래전 눈 오던 병실에서, 끝까지 읽지 못하고 이름을 쓴 그 종
윤서가 위층 계단참에 닿았을 때, 철문은 닫혀 있었다.손잡이는 아직 미지근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숫자판만 천천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담배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누가 봤는지, 무엇을 찍었는지, 찍기는 했는지. 그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그 렌즈 하나가 며칠 동안 그녀의 잠을 갉아먹었다. 그녀는 도혁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날 계단에서 떨던 사람에게, 렌즈 얘기까지 얹을 수는 없었다. 말하지 못한 것이 하나 더 늘었다.---초대는 남성구의 비서실에서 왔다.출판기념회가 끝난 뒤 가족끼리 조촐하게 식사를 하자는 내용이었다. 정중한 문장 끝에 한 줄이 덧붙어 있었다.[사돈어른 일은 의원님께서도 각별히 신경 쓰고 계십니다.]윤서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아버지는 다음 주 다시 검찰에 불려 간다. 한빛의 돈이 어디로 흘렀는지, 누구의 이름으로 받았는지. 그 질문들의 반대편 끝에 남성구가 있었다. 그가 어떤 진술을 하느냐에 따라 아버지가 짊어질 무게가 달라질 수 있었다.화목한 가족 사진. 남성구에게 필요한 건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에는 며느리가 있어야 했다.윤서는 참석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같은 날 저녁, 본가 응접실.최미연은 갈색 봉투 하나를 아들 앞으로 밀었다. 겉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만찬에서 꺼내. 네 아버지 앞에서.”태호는 봉투를 열지 않았다. 열지 않아도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들었다. 미국에서 온 남자가 어머니에게 판 것. 배도혁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맞은 약, 그리고 그 서류 맨 아래 적힌 이름.“엄마가 직접 하지 그래요.”“나는 그 자리에 갈 수가 없잖니.”최미연이 찻잔을 들었다. 새벽에 며느리에게 지분을 내놓으라던 그 손이었다.“그리고 이건 네가 해야 효과가 있어. 형이 동생을 걱정하는 얼굴로. 알겠니.”조용히 있으라던 어머니가, 이번에는 그에게 말하라고 했다. 태호는 그 차이를 곱씹으며 봉투를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호텔 연회장 옆 작은
스티븐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할 말을 끝낸 사람처럼 그는 도혁의 귓가에서 얼굴을 뗐다. 코트 깃을 한 번 바로잡고, 화장대 위에 흩어진 브러시 하나를 제자리에 올려놓았다.“오늘은 인사만 드리러 왔습니다. 다음엔 조금 더 구체적인 얘기를 하죠.”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복도 끝에서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시냐고 묻는 소리, 투자사 쪽이라고 대답하는 낮은 목소리. 그리고 발소리가 멀어졌다.매니저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왔을 때, 도혁은 벽에 등을 붙인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형. 형!”“괜찮아.”괜찮지 않은 목소리였다. 도혁은 매니저의 손을 짚고 일어났다. 그리고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봤다. 분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회색이었다.“다음 신까지 얼마나 남았어.”“한 시간 반. 형 지금…….”“한 시간만 줘. 감독님한텐 속이 안 좋다고 해.”매니저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도혁은 고개를 저었다. 누구에게도 목적지를 말할 수 없었다.그는 모자를 눌러쓰고 촬영장 뒷문으로 나가 택시를 불렀다. 뒷좌석에 앉아 목적지를 말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믿기지 않았다. 신호에 걸릴 때마다 뒤를 돌아봤다. 검은 세단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낮에는 만나지 않는다. 그녀의 회사 근처에는 가지 않는다. 그들이 정한 규칙이었다. 그 규칙들을 하나씩 지나치며, 택시는 한성유통 본사 지하주차장 입구에 섰다.---윤서는 상무실에서 결재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최미연의 목소리가 아직 귀에서 떨어지지 않은 며칠이었다. 지분 명의부터 넘기렴. 그 한 줄을 그녀는 변호사에게 녹음째 넘겼고,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도혁에게도.그 사람은 막 돌아온 촬영장에서 버티는 중이었다. 시어머니의 새벽 티타임까지 얹어 줄 수는 없었다.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저장하지 않은 번호. 낮 시간에는 절대 오지 않던 번호였다.[지하주차장. 비상구. 오 분만.]윤서는 그 다섯 글자를 오래 보지 않았다. 볼 필요가 없었다. 규칙을 만든 사람이 규
오후 네 시. 장소는 배도혁 씨가 정하세요. 혼자 오시고요.그 문자를 받은 다음 날, 도혁은 장소를 정하지 않았다.네 시가 되기 십 분 전, 그는 촬영장 대기 차량 안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 화면에는 그 번호가 떠 있었다. 답장 창은 비어 있었다. 손가락을 몇 번이나 화면 위에 올렸다가 내렸다.네 시가 지났다. 네 시 반이 지났다. 그는 끝내 한 글자도 보내지 않았다.다섯 시 정각, 메시지가 왔다.[기다렸습니다. 다음엔 제가 가죠.]도혁은 그 문장을 지웠다. 번호를 차단했다. 그리고 그날 밤 윤서에게 한 줄을 보냈다. 오늘은 못 가요.차단 버튼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며칠이 지났다.그사이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촬영장에 나왔다. 대사를 외우고, 동선을 맞추고, 컷 소리가 나면 웃었다. 감독은 요즘 도혁이 물이 올랐다고 했다. 스태프들은 복귀 후 첫 주보다 표정이 편해졌다고 했다.아무도 몰랐다. 분장실 거울 앞에 앉을 때마다, 그가 문 쪽을 한 번씩 돌아본다는 걸.촬영장 주차장에 들어설 때마다 낯선 검은 세단이 없는지 확인했다. 밴 창문 틈으로 방문객 명단을 훑었다. 차단한 번호는 다시 울리지 않았다. 그게 더 불안했다.그날도 분장은 오후 두 시에 시작됐다.헤어 담당이 마지막 앞머리를 정리하고 나갔다. 매니저가 나가기 전에 거울 너머로 그를 봤다.“형, 요즘 잠은 자?”“자.”“거짓말. 눈 밑 봐.”매니저는 혀를 차며 커피를 사러 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도혁은 그 문을 조금 열어 둘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분장실에 혼자 남은 도혁은 대본을 펼쳤다. 다음 장면은 주인공이 오래 숨겨 온 진실을 털어놓는 장면이었다. 그는 그 대사를 세 번 소리 내어 읽었다.문이 열렸다.노크는 없었다.“배우 좋죠.”낮은 목소리였다. 미국식 억양이 아주 조금 섞인 한국어.도혁은 대본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목소리가 먼저 몸에 닿았다.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것이 내려갔다.거울 속에 남자가 서 있었다. 단정한
윤서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스피커 너머에서 어머니가 먼저 말했다. 오늘은 거기까지만 하자는 듯, 느긋한 목소리였다.“됐다, 태호야. 오늘은 그만하면 됐어.”윤서가 손을 뻗어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들었죠. 통화 끝났으면 나가요.”목소리는 낮았다. 떨리지 않았다. 태호는 그게 더 견딜 수 없었다. 한 시간 전까지 다른 남자를 안고 있던 여자가, 남편 앞에서 저렇게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다는 게.문이 닫혔다. 잠금장치가 두 번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그는 복도에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 휴대폰 너머에서 어머니가 무언가 더 말하려 했다. 태호는 대답 없이 통화를 끊었다.---신혼집에 돌아왔을 때는 아침 일곱 시였다.윤서가 나간 뒤로 이 집은 절반만 살아 있었다. 그녀가 쓰던 화장대는 비어 있었고, 드레스룸 한쪽은 옷걸이만 걸려 있었다. 거실 벽에는 웨딩 사진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떼어 낼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흥신소에서 새 메일이 와 있었다. 발송 시각은 오전 여섯 시 십이 분. 밤새 골목을 지킨 직원이 오늘 새벽 기록까지 붙여 보낸 모양이었다.[2차 보고서 첨부합니다. 지난번 사진 외에 출입 시간대를 정리했습니다.]첨부 파일을 열었다.앞장에는 이미 본 사진들이 있었다. 촬영장 뒤편 주차장, 회색 승용차에서 내리는 남자. 비 오는 새벽, 비상구를 밀고 나오는 뒷모습. 큰길에서 택시에 오르는 모자 쓴 남자.그다음 장부터가 새로웠다.표였다. 날짜와 시각이 칸칸이 정리돼 있었다.[입장 23:12 / 퇴장 04:06] [입장 22:47 / 퇴장 04:01] [입장 23:30 / 퇴장 03:58]한 줄, 또 한 줄. 표는 두 장을 넘어갔다. 맨 아래에는 흥신소 직원의 메모가 붙어 있었다.[대상 남성, 비상계단 이용. 체류 시간 평균 약 다섯 시간. 퇴장 시각은 거의 일정함.]거의 일정함.태호는 그 다섯 글자를 오래 봤다.표를 한 줄씩 손가락으로 내려가며 날짜를 셌다. 그가 법원 복도에서 그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