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투자사 쪽 답 왔다.”감독이 촬영장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말했다. 손에 든 종이를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다음 주 월요일부터 재개. 대신 일정은 원래보다 열흘 당긴다. 날짜 못 맞추면 그때는 나도 못 막아.”도혁은 종이를 내려다봤다. 빽빽하게 다시 짠 촬영표였다. 밤샘이 사흘 연속으로 잡힌 주도 있었다.“괜찮습니다.”“괜찮긴. 사람 죽어.”감독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원본 나온 뒤로 투자사 사람들 얼굴이 달라지더라. 편집본이 조작이라는 게 경찰 발표로 나오니까, 이제는 배도혁이 피해자라고들 해. 지난달엔 같은 입으로 대체 배우 명단을 읽던 사람들이.”“그 사람들 일이죠.”“그래. 네 일은 이거고.”감독이 촬영표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약속은 지켰다. 이제 네 차례야.”---복귀 첫날, 도혁은 아침 여섯 시에 분장실 의자에 앉았다.그날 분량은 열네 신이었다. 잘려 나갔던 장면 대신 새로 쓴 장면이 절반이었다. 작가실에서 몇 주 동안 옆에서 지켜본 대사들이었다.분장실 문을 열고 들어온 상대 배우가 거울 너머로 그를 보고 잠깐 멈췄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옆자리에 앉았다.“늦었어요, 배도혁 씨. 대본 다 외웠죠?”“어제 다 외웠습니다.”“그럼 됐어요.”그게 환영 인사의 전부였다. 도혁은 그게 고마웠다.도혁은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점심도 대기 차에서 대본을 넘기며 먹었다. 감독이 컷을 외칠 때마다 스태프들 사이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몇 주를 쉰 배우의 연기가 아니었다.마지막 신은 해가 진 뒤에 찍었다. 주인공과 마주 서서, 끝내 하지 못한 말을 삼키는 장면이었다. 테이크는 한 번에 끝났다.“오케이.”감독이 모니터에서 고개를 들었다.“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했다.”박수가 나왔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를 짧은 박수였다. 작가실에서 커피를 내밀던 보조 작가도 그 안에 있었다. 도혁은 고개를 깊이 숙이고 대기실로 향했다. 몇 주 만에 다시 선 카메라 앞이었다.---같은 시각, 촬영장 뒤편 주차장에
최미연은 피의자 조사를 받으러 오면서도 진주 귀걸이를 했다.회색 정장에 낮은 굽의 구두. 머리는 단정하게 묶었고 화장은 옅었다. 변호사와 나란히 조사실에 들어서는 걸음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복도에서 기다리던 기자들 앞을 지날 때도 그녀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앉으시죠.”수사관이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책상 위에는 두꺼운 서류철 하나가 놓여 있었다. 최미연은 의자를 조금 당겨 앉고,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갰다.“별장에서 채윤서 씨와 배도혁 씨를 사흘 동안 나가지 못하게 하셨습니까.”“아니요.”대답은 곧았다.“두 사람은 스스로 머물렀어요. 집안에 의논할 일이 있었고, 조용한 곳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문을 잠근 건 바깥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려던 거고요.”수사관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서류철에서 첫 번째 자료를 꺼냈다.“별장 관리인 진술입니다. 사모님이 전화로, 본인이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 문을 열어 주지 말라고 지시하셨다고 합니다. 냉장고는 사흘 치를 채워 두라고 하셨고요.”“그분이 뭔가 착각하신 것 같네요. 나이가 있으시니까.”수사관은 두 번째 자료를 올려놓았다. 노트북 화면에 음성 파형이 떴다. 그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스피커를 통해 녹음된 목소리가 조사실에 흘러나왔다.“태호는 아이를 가질 수 없어. 윤서는 건강하고. 도혁이 너도 남씨 핏줄이잖아.”최미연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아주 조금 움직였다.“별장 녹화기에 남아 있던 음성입니다. 사모님 서랍에서 나온 원본에서 확인했습니다.”“집안 어른으로서 걱정을 좀 말한 거예요. 그게 무슨 강요예요.”“그럼 이건요.”세 번째 자료였다. 카페 소음 사이로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그건 방법이 잘못됐던 거고.”“사람을 가둬 놓은 게 방법이 조금 잘못된 정도예요?”“그래서 이번에는 선택권을 주잖니.”수사관이 재생을 멈췄다.“가둬 놓았다는 며느님 말에 사모님은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말이 헛나온 거죠. 그 애가 녹음하는 줄 알았으면 그렇게 말했겠어요?”“녹음하는
태호가 본가 현관에 들어선 건 남성구가 경찰서에 다녀온 다음 날 저녁이었다.현관에는 신발이 한 켤레뿐이었다. 늘 문을 열어 주던 가사도우미는 보이지 않았다. 진술을 마친 다음 날 그만뒀다고 했다. 십오 년 만이었다.응접실에 최미연이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찻잔도, 서류도, 휴대폰도. 태호는 어머니가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은 채 앉아 있는 모습을 처음 봤다.“왔니.”목소리는 여전히 꼿꼿했다. 태호는 소파에 앉지 않았다. 외투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이게 뭐니.”“내 변호사가 보낸 거야. 엄마 변호사랑 내 변호사, 오늘부로 갈라.”최미연이 봉투를 내려다봤다. 열어 보지 않았다.“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야. 지금까지는 엄마 변호사가 내 사건까지 같이 봐 줬잖아. 이제 안 해. 엄마는 엄마 사건, 나는 내 사건.”“태호야.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네 아버지까지 저렇게 나가 버렸는데 우리끼리라도…….”“우리?”태호가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숨이 새는 소리에 가까웠다.“엄마, 나 하나만 묻자. 엄마가 경찰한테 낸 진술서. 내 서랍에서 하드 가져왔다고, 내가 침실 영상 받아 놨다고. 그거 쓸 때 무슨 생각 했어?”최미연은 대답하지 않았다.“나 지키려고 하드 가져갔다며. 그럼 그 진술서는? 그것도 나 지키려고 쓴 거야?”“그건 어차피 밝혀질 일이었어. 접속 기록이 다 남아 있었으니까.”“그러니까.”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어차피 밝혀질 거면 엄마가 먼저 말하는 게 낫지. 엄마 죄 줄이는 데는.”최미연의 눈매가 굳었다. 태호는 그 얼굴을 똑바로 봤다. 평생 그 얼굴 앞에서 시선을 내리는 쪽은 자신이었다. 오늘은 아니었다.“나 다 알아. 엄마가 왜 이혼만은 안 된다고 했는지. 왜 하필 배도혁이었는지. 윤서가 내 아내로 남아 있어야 그 애가 내 애로 태어날 수 있으니까. 나는 거기서 이름만 빌려주는 사람이었잖아.”“그런 게 아니야.”“그럼 뭔데.”최미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태호
아침에 걸려 온 전화에서 남성구는 긴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 밤, 둘이서만 보자고 했다.남성구는 만날 곳으로 자기 차 안을 골랐다.밤 열 시, 문을 닫은 지역 문화회관 지하 주차장이었다. 기사도 보좌관도 없이 혼자 운전해 온 검은 승용차 한 대가 기둥 옆에 서 있었다. 도혁이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앉자, 남성구는 한동안 앞 유리만 봤다.“입장문, 봤다.”첫마디였다.“잘 썼더구나. 네 어머니 얘기.”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사람에게서 어머니라는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수사 중인 사건이라고 썼지.”남성구가 고개를 돌렸다.“별장 얘기냐.”“네.”“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처음부터 말해 봐라. 기사에 나온 거 말고.”도혁은 말했다. 별장으로 오라던 문자부터. 문이 잠기던 소리. 천장의 카메라와 스피커. 사흘 동안 그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요구.“아이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채윤서 씨와 제가요. 태어나면 남태호 씨 아이로 키우면 된다고.”남성구의 손이 핸들 위에서 멈췄다.“누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거냐.”
“내일 아침 아홉 시에 나간답니다.”소속사 법무팀장이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저녁 일곱 시, 회의실에는 대표와 법무팀장, 홍보팀장, 매니저, 도혁이 모여 있었다.“어느 매체입니까.”“주간지 쪽입니다. 남성구 의원과 배도혁 배우의 관계를 확인했다고, 반론을 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출생 기록까지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대표가 이마를 짚었다.“어디서 샌 거야.”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소속사 앞 몸싸움 이후로 두 사람이 닮았다는 게시물은 계속 돌았다. 별장 사건이 수사로 넘어가면서 최미연이 왜 하필 배도혁을 그 별장에 불렀는지 묻는 사람도 생겼다. 누가 처음 그 문을 열었는지 따지기에는 이미 문이 너무 많이 열려 있었다.“무대응으로 가죠.”홍보팀장이 말했다.“확인도 부인도 안 하면 됩니다. 지난번처럼요.”“지난번엔 추측이었잖아요. 이번엔 서류가 있다는데.”도혁이 조용히 말했다.“그럼 부인하자는 거야?”대표가 물었다. 도혁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거짓말이잖아요.”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대표는 도혁이 예전에도 같은 말을 했다는 걸 기억하는 얼굴이었다.“제가 쓰겠습니다. 기사보다 먼저.”법무팀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출생을 밝히면 사람들은 바로 다음 질문을 할 겁니다. 왜 하필 그 별장에 배도혁 씨가 있었느냐고요. 그 질문까지 각오하셔야 합니다.”“각오했습니다.”도혁은 망설이지 않았다. 각오는 이미 오래전에, 별장 문이 잠기던 날 해 둔 것이었다.---그날 밤 열한 시, 도혁은 윤서의 식탁에 노트북을 올려놓았다.“내일 아침 여덟 시, 제 공식 계정에 올리기로 했어요. 회사랑도 얘기 끝났고요.”윤서는 화면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문장은 짧았다.[저는 남성구 의원의 아들입니다.어머니 배인아 씨가 세상을 떠난 뒤 유품을 정리하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오래 말하지 않았습니다. 평생 혼자 저를 키운 어머니의 이름이 누군가의 스캔들로 소비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이 사실이 다른 사람의 입
“도혁 씨.”윤서가 어깨를 흔들자 도혁이 눈을 떴다. 창밖의 빛을 보는 순간 그의 얼굴이 굳었다.“몇 시예요.”“일곱 시 사십 분.”도혁은 벌떡 일어났다가 현관문 앞에서 멈췄다. 문 너머 복도에서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들렸다. 누군가 웃으며 통화하는 목소리가 지나갔다. 출근 시간이었다.“지금은 못 나가요.”윤서가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손끝이 차가웠다.“아홉 시 반까지 기다려요. 그때면 다 빠져요.”“선배님 출근은요.”“늦는다고 할게요.”둘은 거실에서 한 시간 반을 기다렸다. 소파 양 끝에 떨어져 앉아서. 커피를 내렸지만 둘 다 반도 마시지 못했다. 엘리베이터가 설 때마다 도혁의 시선이 현관으로 갔다. 별장에서는 나가고 싶어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지금은 문이 열리는데도 나갈 수가 없었다.“미안해요. 제가 깨어 있었어야 했는데.”“내가 안 깨운 거예요.”윤서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새벽에 한 번 눈을 떴었다. 현관 쪽에서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깨워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그 숨소리를 조금만 더 듣고 싶었다. 그러다 다시 잠들었다.그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시계만 봤다.아홉 시 사십 분, 윤서가 먼저 복도를 확인했다. 비어 있었다. 도혁은 모자를 눌러쓰고 비상계단으로 내려갔다.일 층 로비를 지날 때, 관리실 창 너머의 관리인이 고개를 들었다.“좋은 아침입니다.”도혁은 고개만 숙이고 지나쳤다. 모자챙 아래로 등줄기에 땀이 배었다. 관리인은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짧은 인사가 무엇을 봤다는 뜻인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윤서가 회사에 도착한 건 열한 시가 다 돼서였다.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오늘은 출근이 늦으셨네요. 회장님께서 오전에 두 번 찾으셨습니다.”입사 이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윤서는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회장실 문을 열자 채명수는 창가가 아니라 소파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서류철 하나가 놓여 있었다. 윤서는 그 표지를 알아봤다. 몇 달 전 이 방에서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