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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Penulis: 제로두유
비릿한 냄새가 꽉 막힌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남들에게 절대 들켜선 안 되는 두 사람의 은밀한 관계처럼 말이다.

박도준이 안예서의 앞에 서서 정장 바지의 지퍼를 올렸다. 눈 깜짝할 새에 평소의 서늘하고 거리감 있는 모습으로 돌아간 박도준과 안예서의 초라한 모습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된 거 하나 짚고 넘어갈게. 너한테는 이 관계를 끝낼 권리가 없어. 멈출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야.”

안예서가 고개를 들어 박도준을 쳐다보았다. 목구멍에서 맴돌던 목소리가 간신히 흘러나왔다.

“대표님한테 약혼녀가 있으신 거 아니었어요?”

박도준이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건 내 사정이고.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양효진 씨가 만약 저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영영 모를 거야.”

안예서는 문득 우습게 느껴졌다. 우스운 게 그녀인지, 아니면 박도준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전 내연녀가 되고 싶지 않아요.”

박도준이 코웃음을 쳤다.

“안예서, 네가 어떤 여자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녀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시선을 늘어뜨렸다.

‘하긴. 박도준의 눈에 난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는 여자잖아.’

박도준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다가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안예서를 돌아봤다.

“앞으로는 그런 옷 입지 마.”

안예서는 굴욕감과 함께 속에서 열불이 뻗쳤다. 이건 누가 봐도 단정한 오피스룩인데 박도준의 눈에만 야하게 보였다.

역시 마음이 더러운 사람의 눈에는 뭐든 다 더럽게만 보이나 보다.

박도준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에야 안예서가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대충 몸을 닦은 다음 허리 위까지 말려 올라간 치마를 내렸다.

그런데 셔츠 단추를 채우던 그때 그곳이 쓰라리게 아팠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따가움이 밀려왔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회의실로 돌아가 짐을 챙겨 도망치듯 나왔다.

주변에 안예서를 쳐다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이 그녀를 찌르는 것 같아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

세진 그룹 대표실.

진영우가 노크하고 들어갔다.

“대표님, 양효진 씨를 무사히 모셔다드렸습니다.”

박도준이 고개도 들지 않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래.”

진영우가 말을 이었다.

“방금 들어온 소식인데 어르신께서 그 혼외자를 찾으셨다고 합니다. 모레 귀국할 예정입니다.”

박도준이 여전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본가 쪽에서는 뭐래?”

“어르신은 혼외자를 집으로 들일 생각이신 듯해요. 다만 대표님의 약혼 소식이 막 세상에 알려진 참이라 당장 대놓고 들이기에는 무리가 있겠죠. 양씨 가문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으니까요.”

박도준이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

“양씨 가문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야. 나중에 내가 양효진이랑 결혼할 때 혼외자의 이름도 호적에 슬쩍 올리려는 속셈이겠지.”

진영우가 고개를 푹 숙였다. 대표의 집안일이라 감히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몇 초 뒤 박도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오늘 온 그 통역사 말이야. 양효진이 어디서 데려왔는지 알아?”

진영우가 미리 조사해 둔 자료를 건넸다.

“안예서 씨가 번역 회사에 다니고 있더라고요. 젊고 예쁜 데다 업무 능력까지 뛰어나서 업계에서도 꽤 유명한 편입니다. 양효진 씨가 안예서 씨를 찾은 건 그저 우연일 겁니다.”

박도준이 서류를 넘겨 이력서에 붙은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안예서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쟁반에 술잔을 받쳐 들고 박도준의 곁을 지나쳐 가던 안예서의 눈빛이 사진 속에서처럼 맑고 투명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처음엔 어설프고 순진하기만 했던 안예서가 교태를 부릴 줄 알게 되었고 어떻게 해야 박도준을 만족시키는지 점점 더 잘 알게 되었다.

박도준이 양씨 가문과의 정략결혼에 동의했을 때 원래는 양효진과 진짜로 결혼하게 되면 안예서에게 돈을 주고 이 관계를 끝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안예서가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감히 내 돈을 받으면서 마음속에 딴 놈을 품어? 간덩이가 부었구나, 아주.’

박도준이 이력서를 책상 위에 툭 던지며 지시했다.

“통역사를 남자로 바꾸라고 해.”

...

집에 도착한 안예서는 씻을 새도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오늘의 통역 자료를 정리했다.

마침내 오후 두 시가 되기 전에 진영우의 이메일로 모든 자료를 전송했다.

노트북을 덮고 뻐근한 목을 풀다가 아까 장비실에서 걸려왔던 전화가 떠올랐다. 휴대폰을 들고 한참을 망설인 뒤 양효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예서가 숨을 죽인 채 통화연결음을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효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서 씨, 휴대폰 받았어요?”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어쩔 수 없이 거짓말했다.

“네, 방금 받았어요.”

“지금은 좀 어때요? 괜찮아졌어요? 원래는 제가 병원까지 모셔다드리려고 했는데 도준 씨가 저보다 한발 빠를 줄은 몰랐네요.”

“많이 좋아졌어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도준 씨 비서한테서 들었는데 오늘 회의에서 통역을 정말 잘해주셨다면서요? 예서 씨가 저를 크게 도와주신 거예요. 안 그러면 도준 씨를 볼 면목이 없을 뻔했어요.”

안예서가 휴대폰을 꽉 쥐었다.

“과찬이십니다. 전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그러고는 입술을 깨물고 이어 말했다.

“죄송한데 전 아무래도 이번 일을 계속 맡기는 힘들 것 같아요. 앞으로는 다른 분이 통역해드릴 겁니다.”

양효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혹시 보수가 너무 적었나요?”

“그게 아니라 저의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통역 비용은 받지 않겠습니다. 우리 회사에 저보다 훌륭한 통역사들이 많으니 가장 뛰어난 분으로 바꿔드릴게요.”

안예서의 단호한 말투에 양효진이 아쉬워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예서 씨가 안 된다고 하는데 억지로 강요해선 안 되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게 평가해 주신 것도 감사드리고요.”

“무슨 말씀을요. 예서 씨처럼 뛰어난 통역사는 저뿐만 아니라 도준 씨도 분명 마음에 쏙 들어 했을 거예요. 조금 아쉽게 됐지만 괜찮아요. 나중에 또 좋은 기회로 같이 일했으면 좋겠네요.”

“그럼 이만 끊을게요. 들어가세요, 양효진 씨.”

전화를 끊은 뒤 안예서가 카펫 위에 털썩 앉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피임약을 꺼내 곁에 있던 찬물과 함께 삼켰다.

지난 몇 년 동안 박도준은 매번 철저하게 피임을 해왔다. 어젯밤 마지막 순간에도 분명히 몸을 뺐었다.

하지만 오늘은...

안예서는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회사 담당자에게 메시지를 보내 상황을 간단히 설명한 후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담당자에게서 음성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알겠어요. 안 그래도 방금 세진 그룹 쪽에서 남자 통역사로 교체해 달라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요 며칠 다른 의뢰가 없으니 예서 씨는 푹 쉬도록 해요.”

[네.]

안예서가 고개를 숙이고 짧은 답장을 보냈다.

예상대로 박도준도 안예서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안예서는 다시 컴퓨터를 켜서 계정에 로그인한 뒤 인터넷에 올라온 번역 건들을 찾아서 받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빚을 갚아야 할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미리 계산해봤는데 원래는 이번 큰 건을 무사히 마치면 금액이 딱 맞아떨어졌다.

당분간은 부지런히 아르바이트를 구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정윤설이 안예서가 하루 동안 겪은 일을 전해 듣더니 바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거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 같은데? 양효진인지 뭔지 하는 여자가 기선 제압하려고 일부러 널 찾은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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