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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제로두유
그 점에 대해서는 안예서 역시 처음에 의심했었다.

수많은 통역사들 중에서 양효진이 굳이 안예서를 콕 집어 선택한 것부터가 미심쩍은 일인데 박도준의 앞에서 대놓고 그녀의 외모를 칭찬하기까지 했으니 그 속내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점만 제외하면 양효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안예서에게 무척 상냥했다. 성격도 서글서글했고 고의로 난처하게 하는 일 같은 건 전혀 없었다.

하여 안예서는 그녀가 너무 꼬인 시선으로 사람을 오해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안예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연이든 아니든 통역사는 이미 교체됐어. 앞으로 그 사람들이랑 마주칠 일이 없을 거야.”

정윤설이 쿠션을 끌어안은 채 안예서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기분 나쁜 일은 이제 그만 생각해. 나 오늘 보너스 받았으니까 내일 근사한 데서 한턱쏠게.”

안예서가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만 받을게. 내일은 엄마 뵈러 병원에 가야 해.”

3년 전 안씨 가문이 부도 난 그날, 안예서의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건물 옥상에서 몸을 던져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어머니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뒤 깨어나지 못했다. 결국 식물인간이 되어 줄곧 병원에 누워 있었다.

안씨 가문이 대단한 재벌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번듯한 회사를 운영하며 매년 수십억 원대의 수익을 내고 있었다.

안예서는 먹고 입는 걱정 없이 자랐고 돌봐주는 가정부도 있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아버지가 남긴 빚이 고스란히 안예서의 몫이 되었다.

빚쟁이들의 살벌한 협박과 독촉 속에서 사랑만 받고 자란 안예서는 매일 숨죽인 채 공포에 떨며 살아야 했다. 이리저리 도망쳐다니는 와중에도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어떻게든 빚을 갚아보려 발버둥 쳤다.

그렇게 삶에 대한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 허덕이던 안예서가 두 달 뒤 박도준을 만났다.

짧은 시간 동안 세상의 온갖 쓰디쓴 맛을 다 경험했기에 안예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박도준의 제안을 수락했다.

남들 눈에는 돈 때문에 스스로 밑바닥으로 전락한 천박한 여자로 보일지 몰라도 안예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 꽉 쥐어야만 했던 유일한 동아줄이었다는 것을.

정윤설이 말했다.

“그럼 나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 같이 가자. 나도 아줌마 안 뵌 지 한참 됐어.”

안예서가 생각을 거두었다.

“괜찮아. 난 오전에 일찍 다녀올 테니까 네 일 봐.”

...

다음 날 오전 안예서가 일찌감치 병원에 도착했다.

어머니가 평온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라 그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만 같았다.

안예서가 짐을 내려놓고 침대 옆에 앉아 팔을 주물러 주며 조잘조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3년 동안 변함없이 아무런 대답 없는 메아리였다.

식물인간 환자도 외부의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지만 그저 입을 떼지 못할 뿐이라는 의사의 말을 안예서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즐거운 이야기만 들려주었다. 딸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어도 충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병인이 병실로 들어왔다.

“예서 씨, 이제 제가 할게요.”

“네.”

안예서가 물병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물 좀 떠 올게요.”

오전 시간대에 병원에 사람이 가장 많았다. 복도 끝 정수기 앞에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 사람이 적은 VIP 구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안예서가 긴 복도를 지나 정수기 앞에 멈춰 선 그때 방금 안예서의 옆을 스쳐 지나간 한 중년 남자가 걸음을 멈추더니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물을 반쯤 채웠을 무렵 누군가 안예서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곧이어 남자의 흥분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안예서? 너 안예서 맞지?”

그 바람에 뜨거운 물이 안예서의 손등에 쏟아졌다.

안예서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맞네. 내가 사람을 잘못 볼 리가 없지.”

남자가 어찌나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지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

안예서가 입술을 깨물고 차갑게 말했다.

“이거 놓으세요.”

그러자 남자가 껄렁하게 웃었다.

“뭐야? 날 모른 척하겠다? 3년 전에 네가 루프에서 아가씨로 일할 때 내가 널 얼마나 자주 찾았는데.”

입에 담기도 힘든 저급하고 천박한 말이었다. 안예서의 명예를 짓밟으려고 일부러 이러는 게 틀림없었다.

안예서가 루프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는 서빙만 하는 직원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이 남자가 바로 당시 안예서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치근덕대고 심지어 약까지 탔던 그 진상 손님이었다.

화상을 입은 안예서가 두피까지 찌릿해지는 고통을 참으면서 간신히 이성을 잡고 말했다.

“이혁수 씨, 말조심하세요. 전 아가씨로 일한 적이 없고 이혁수 씨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았어요.”

이혁수가 대놓고 비웃었다.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 내가 모를 줄 알아? 너 그날 밤에 아주 바빴잖아. 말해 봐, 어떤 놈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어?”

안예서의 안색이 점점 굳어지더니 물통을 꽉 움켜쥐었다.

이혁수가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몸 팔러 나온 주제에 어디서 비싼 척이야? 3년이나 지났으면 그 자식도 진작에 네 몸뚱이에 질렸겠네.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빌면 널 거둬줄지 한 번 고민은 해볼게. 너같이 굴러먹은 걸레를 누가... 으악!”

이혁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예서가 물통 속의 뜨거운 물을 이혁수의 얼굴에 확 뿌려버렸다.

그가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막아보려 했지만 물 대부분이 그의 반쪽 얼굴에 닿고 말았다.

하지만 안예서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도 전혀 통쾌함을 느끼지 못했다. 방금 허공으로 뿌려진 몇 방울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누군가에게 튀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안예서가 고개를 돌렸다.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사과의 말이 익숙하고도 서늘한 남자의 시선과 마주친 순간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화가 난 이혁수가 길길이 날뛰며 손을 번쩍 들고 욕설을 퍼부었다.

“이년이 미쳤나. 죽고 싶어?”

이혁수의 손이 안예서의 얼굴에 닿으려던 찰나 진영우가 나서서 이혁수의 손목을 잡았다.

이혁수가 미친 듯이 욕했다.

“젠장, 넌 또 뭐야? 남의 일에 참견 말고 당장 꺼져.”

“여긴 병원입니다. 자중하시죠, 대표님.”

진영우가 그를 알아보자 날뛰던 이혁수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때 병원의 보안 요원들도 달려왔다.

상황이 불리해진 걸 깨달은 이혁수가 안예서에게 삿대질하며 무섭게 경고했다.

“절대 이대로 끝나지 않아. 두고 봐, 어디.”

그러고는 화상으로 벌겋게 된 반쪽 얼굴을 움켜쥔 채 황급히 자리를 떴다.

곧이어 구경하던 사람들도 전부 흩어졌다.

안예서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녀는 박도준의 앞에서는 티끌만 한 자존심조차 세울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가 아무리 모욕적인 말을 해도 전부 감내할 수 있었다. 어찌 됐든 그가 그녀의 생계를 책임져줬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끔찍한 수치심이 온몸을 집어삼킬 듯 덮쳐왔고 얼음물에 처박힌 것처럼 뼛속까지 시렸다.

차라리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이 모습을 봤더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박도준이 보고 말았다.

박도준이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표정이 시종일관 똑같았다.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당장이라도 안예서를 통째로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안예서가 고개를 들어 박도준의 정장에 떨어진 물 자국을 보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혹시... 다치셨다면 제가 치료비를 부담할게요.”

그런데 이 말을 내뱉자마자 바로 후회했다.

‘박도준의 치료비를 부담하겠다니. 주제도 모른다고 비웃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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