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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안.
내 남편 강도윤은 아름다운 비서 한유리와 마주 앉아 웃고 떠들며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마치 첫 데이트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다정한 두 사람.
우습게도 그 모습을 지켜보는 건 나뿐이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두 사람을 바라보며, 아직 아무런 티도 나지 않는 아랫배를 살며시 쓸어내렸다. 그 안에는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물론 도윤은 아직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조차 몰랐으니까.
오늘은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저녁 식사 자리였다. 하지만 이 집에서 나는 한 번도 환영받는 사람이었던 적이 없다. 언제나 그저 가족들 사이에 끼어 있는 낯선 사람일 뿐이었다.
도윤이 유리가 잘라 건네준 스테이크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유리. 어린 시절부터 도윤과 알고 지낸 오랜 친구이자, 누구보다 그를 잘 안다는 여자.
지금 임신 소식을 전하면 두 사람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는 꼴이 되겠지.
"유리야, 도윤이한테 MBA 과정을 밟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진행되고 있니? 우리한테도 좀 이야기해 보렴."
시어머니 강명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 식사가 단순히 가족끼리 안부를 나누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명희 여사는 자신이 원하는 며느릿감이 어떤 사람인지 내 앞에서 직접 보여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유리는 굵은 웨이브가 들어간 갈색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넘기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네, 아주 잘 배우고 있어요. 글로벌 시장에 대해 공부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많고요."
유리는 반짝이는 눈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
"도윤 씨도 제가 회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했거든요. 그렇죠, 도윤 씨?"
유리는 대답을 기다리며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도윤은 이미 그녀의 자연스러운 말솜씨와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에 빠져 있는 듯했다.
"당연하지. 유리는 사업적인 감각도 뛰어나고 머리도 좋으니까."
도윤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키가 크고 깔끔하게 정돈된 검은 머리카락에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 CEO라는 직함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나는 포크를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화가 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이 밀려왔다.
도윤은 한 번도 내 능력을 그렇게 칭찬해 준 적이 없었다.
내가 무언가를 잘해 냈다고 해도 늘 핑계를 댔다. 너무 전문적인 분야라든가,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든가, 가족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굳이 이야기할 만한 것도 아니라든가.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마치 유리가 이미 이 집의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평소에는 날카롭고 차갑기만 하던 도윤의 눈빛이 유리를 향할 때만큼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나를 바라볼 때와는 너무나 다른 눈빛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팠다.
애초에 이 자리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손님, 와인 드시겠습니까?"
웨이터가 고급 와인 한 병을 들고 다가왔다.
"아, 저는…… 아이스티로 부탁드릴게요."
내가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웨이터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 배를 살며시 만졌다.
내가 왜 와인을 마시지 않는지 누군가 눈치챌까?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다들 유리에게 정신이 팔려 있으니까.
나는 그저 도윤이 데려왔으니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그의 아내였으니까.
"잠시 실례할게요.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잠시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반가움이나 걱정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는 내가 무얼 하든 아무도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향하는 동안, 아까부터 욱신거리던 무릎이 다시 아파 왔다.
조금 전 길을 걷다가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을 미처 보지 못하고 넘어졌기 때문이었다.
왼쪽 무릎이 아직도 쑤셨다.
하마터면 뼈라도 부러진 줄 알았네.
"축하드려요, 서지안 씨. 임신 4주 차입니다."
김서현 원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나는 애써 기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사실 마음 한구석은 복잡하기만 했다.
아이를 낳고 싶었다.
분명 그랬다.
하지만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어떻게 함께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내 표정에서 망설임을 읽은 원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편이 이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어요."
나는 원장과 눈을 마주쳤다.
원장은 내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다정하게 말했다.
"결정은 지안 씨가 하는 거예요. 다만 남편분과 충분히 이야기해 보시는 게 좋겠어요."
화장실로 들어선 나는 세면대에서 물을 받아 얼굴을 적셨다.
복잡한 머릿속을 조금이라도 정리하고 싶었다.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임신 소식을 알릴까?
어쩌면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조금은 다르게 봐 주지 않을까.
더는 그저 한때 도윤의 회사에서 일했던 사람이 아니라, 이 집의 며느리이자 그의 아이를 가진 아내로 말이다.
하지만 곧 연회장에 들어섰을 때의 차가운 분위기가 떠올랐다.
절뚝거리며 들어오는 나를 보고도 도윤과 그의 가족들은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일부러 나를 모른 척하는 것 같았다.
그저 나를 빤히 바라보던 도윤의 시선만이 기억에 남았다.
거울 속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분명 나였다.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와 어깨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밤색 머리카락. 양쪽 뺨에는 작고 옅은 주근깨가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낯설었다.
내가 알던 예전의 서지안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함부로 무시당하지 않았고,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자신을 낮추지도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 버린 걸까?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한유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더니 유리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마침 내가 주문한 아이스티를 들고 오던 웨이터가 미처 피하지 못했고, 결국 음료가 그대로 내 흰색 원피스 위로 쏟아졌다.
"뭐 하는 거예요? 한유리 씨, 앞 좀 보고 다녀요!"
당황한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손수건을 꺼내 급히 얼룩을 닦아 보았지만 이미 옷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때였다.
도윤이 마치 백마 탄 왕자라도 된 것처럼 황급히 유리에게 달려갔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그가 유리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유리는 금세 눈물을 글썽이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지안 씨가 왜 저를 밀었는지 모르겠어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런 뻔뻔한 거짓말을 하다니.
"뭐라고요? 제가 언제 밀었다고 그래요? 전 유리 씨한테 손도 안 댔어요!"
그러자 도윤이 차갑게 나를 노려보았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유리한테 사과해."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이 남자가 내 남편이 맞나?
"지금 진심이에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사과하라는 거예요? 사과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잖아요. 내 옷을 이렇게 망쳐 놓은 사람이 누군데요!"
"정말 어이가 없네. 지금 네 옷이 그렇게 중요해? 너는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내가 이기적이라고요?"
참고 있던 말이 터져 나왔다.
"당신은 나한테 눈길 한 번 준 적도 없잖아요! 나도 별일 아닌 것처럼 넘어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온통 유리 씨한테만 정신이 팔려서 자기 아내가 여기 있는지도 잊어버린 것 같네요!"
순식간에 식당 안의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평소라면 사람들 앞에서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이제는 상관없었다.
"그만해!"
시어머니 명희 여사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당장 이 소란을 멈추렴! 유리에게 사과하지 않을 거라면 당장 여기서 나가!"
나는 도윤을 바라보았다.
제발 한마디만이라도 해 주길 바랐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테이블만 내려다볼 뿐, 어머니가 내게 모욕을 주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살면서 이렇게 비참했던 적이 있었을까.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알겠어요. 더 이상 여기서 소란 피우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갈게요."
나는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다.
연회장을 빠져나오는 동안 웨이터들이 나를 힐끔거렸다.
이제 정말 지긋지긋했다.
남편이 나를 지켜 줄 생각조차 없다면, 이 결혼을 계속 이어 갈 이유도 없었다.
임신했다는 사실도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정말 이혼해야겠다.
빌어먹을, 이 지긋지긋한 결혼을 끝내 버리겠어!
‘그냥 태준 씨와 저녁 한 끼 먹는 것뿐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나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뇌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다.그저 오랜만에 만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설렘과 긴장감은 그 말과는 전혀 달랐다.처음에는 짙은 미드나이트 블루 드레스를 입을까 고민했다. 몸매를 자연스럽게 살려 주는 완벽한 핏에, 적당히 과감한 네크라인까지. 태준 씨가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하는 장면을 상상하자 문득 망설여졌다.‘너무 과한가?’결국 그 드레스는 입지 않기로 했다.대신 편안하면서도 자신감 있게 입을 수 있는 익숙한 블랙 원피스와 가장 좋아하는 하이힐을 골랐다. 세련되면서도 저녁 내내 신고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신발이었다.나는 태준 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거실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몇 번이나 시계를 확인하면서 도대체 언제쯤 올지 궁금해했다.또다시 거실을 한 바퀴 돌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태준 씨에게서 온 문자였다.[도착했어요.]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곧바로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심장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드디어 왔구나.문을 열자마자 내 심장이 다시 한번 빠르게 뛰었다.눈앞에 선 태준 씨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평소 보이던 거뭇한 수염 자국은 말끔히 사라져 있었고, 깔끔하게 면도한 얼굴 덕분에 턱선이 한층 더 또렷해 보였다.몸에 꼭 맞게 재단된 차콜 그레이 정장까지 완벽했다. 은은하면서도 깊은 우디 향이 풍겼는데, 고급스러우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향이었다.“와, 지안 씨. 정말 예쁘네요.”태준 씨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눈빛도 덩달아 반짝였다.“고마워요, 태준 씨. 와, 태준 씨도 정말 멋있으신데요?”나는 그의 달라진 모습에 살짝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긴장한 나머지 어색한 웃음까지 새어 나왔다.“그럼 출발할까요?”태준 씨가 물었다.나는 여전히 그의 모습에 정신이 팔린 채 고개만 끄덕였다.“……그제야 회의 내내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말씀이세요? 전 괜찮아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하지만 어머니와 클레어 고모는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머니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도윤아, 너 안색이 별로 좋지 않구나.”어머니가 부드럽게 말했다.“정말이에요. 오히려 요즘 그 어느 때보다 잘 지내고 있어요.”나는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두 사람이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이 도착하기 전, 나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적잖이 놀랐다. 창백한 얼굴 아래로 짙은 다크서클이 도드라져 있었고, 입술은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며칠째 면도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사실 이혼이 최종 확정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클레어 고모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굳이 부정할 필요 없어, 도윤아. 네 전처가 바람을 피웠다는 걸 우리도 알고 있잖니. 그러니 네가 이렇게 스트레스받는 것도 당연하지.”나는 고모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속에서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내 결혼 생활이 대체 두 사람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그때 클레어 고모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그러고 보니 유리는 아직 혼자라던데. 이번 기회에 좀 더 가까이 지내 보는 건 어떠니?”어머니도 맞장구를 쳤다.“그래. 유리는 줄곧 너만 기다려 온 것 같더구나. 이제는 성숙하고 똑똑한 여자와 연애할 때도 됐지.”“그런 거 아니에요. 유리와 저는 그냥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나는 서둘러 해명했다.“그보다 어머니, 파인먼-웹스터 합병 건이나 이야기하죠. 조만간 성사될 것 같은데요.”나는 일부러 대화의 주제를 사업 이야기로 돌렸다. 어머니와 클레어 고모가 내 연애사에 끼어드는 건 딱 질색이었다.그 후 며칠 동안 나는 일에 파묻혀 지냈다.평소보다 훨씬 많은 회의에 참석했고, 금융업계에서 손꼽히는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제안서도 준비했다. 바쁘게 지내는 것
당장이라도 화가 치밀어 책상 위의 물건들을 한 손으로 쓸어 버리고 싶었다.이혼한 뒤로 지안은 정말 많이 달라졌다. 예전보다 훨씬 대담해졌다.내 전화를 받지 않는 건 물론이고, 그건 지안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봤지만 이번에는 통화 중이었다.설마 벌써 다른 남자와 통화하고 있는 건가?요즘 지안의 태도를 생각하면 유리의 말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태준 삼촌이 지안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짜증 나는데, 이제는 돈 많은 남자들을 찾아다니기라도 하는 모양이다.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지안이 이렇게 빨리 나를 잊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우리가 함께한 3년의 결혼 생활이 지안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걸까? 마치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져 버린 것처럼 말이다.퇴원할 때만 해도 나는 지안이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반쯤 기대했다. 이혼하겠다는 생각도 접고 다시 예전처럼 지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어쨌든 나는 지안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으니까.하지만 집에 돌아온 내게 변호사가 전한 건 냉혹한 현실뿐이었다. 지안은 결국 이혼을 진행했고, 우리의 결혼 생활은 이미 끝나 있었다.내가 병원에서 부상당한 몸을 회복하고 있는 동안에도 지안은 내게 관계를 되돌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벌써부터 동료들과 지인들이 나를 비웃으며 수군거리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아내에게 버림받은 남자. 아내를 떠난 게 아니라 아내에게 차인 패배자.사람들은 분명 나를 그렇게 볼 것이다.지안은 이혼이 내 평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걸까? 내 체면과 지위가 걸린 문제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비서에게 듣기로 지안은 예전에 나와 함께 일하던 시절 살았던 옛 아파트로 돌아갔다고 했다.나도 아까 직접 그곳까지 찾아가 대화를 나눠 보려 했지만, 지안은 집에 없었다. 일부러 나를 피하며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 버린 것만 같았다.이제야 지안이 집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실감하고 있었다.음식 하나도 예전 같지 않았
나는 몇 분 동안 휴대전화만 멍하니 바라봤다.‘도대체 도윤 씨가 지금 왜 나한테 전화하는 거지?’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몸을 기울였다.“왜 그러니, 딸? 누가 전화했어?”“아, 그냥 친구 스티비야. 내가 잘 도착했는지 확인하려나 봐.”나는 거짓말로 얼버무렸다. 도윤 씨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았다. 아빠의 화를 다시 돋우는 건 지금 내게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식사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모님께 말했다.“엄마, 아빠. 장거리 이동을 해서 그런지 좀 피곤하네. 내 방에서 잠깐 쉬어도 될까?”“그럼, 당연하지. 푹 쉬렴.”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두 사람을 향해 미소 지었다.“고마워. 그리고 엄마,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 해 줘서 고마워. 정말 맛있었어.”계단을 올라가는데 휴대전화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아, 진짜!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설마 이혼 관련해서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나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도윤 씨는 정말 사람 신경을 긁는 데 재주가 있었다.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은데, 이제는 머리까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방에 들어서자 옛 추억이 밀려왔다.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고등학교 시절 붙여 놓았던 포스터와 사진들이 여전히 벽에 걸려 있었고, 침대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십 대 시절 사용하던 낡은 이불까지 그대로 침대 위에 펼쳐져 있었다.책장도 내가 떠났을 때와 똑같았다. 책이며 자잘한 소장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대학에 진학한 뒤로도 엄마가 줄곧 내 방을 관리해 주신 게 분명했다.나는 침대에 앉아 도윤 씨가 보낸 메시지를 열어 봤다.[전화 좀 받아 줄래? 중요한 일이야. 고마워.]나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올렸다.‘부탁 좀 한다는 말에 고맙다는 인사까지? 도윤 씨가 이런 문자도 보낼 줄 아네. 이혼하고 나서 예의라도 좀 배웠나 보지.’나는 전화를 받는 대신 곧
아빠는 내 질문에 눈을 반짝였다.“글쎄, 엄마가 정원을 정말 멋지게 가꿔 놨단다. 요리 실력도 여전하고, 아니, 오히려 더 좋아졌지.”아빠는 자랑스럽다는 듯 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믿기지 않겠지만, 아빠가 매주 나랑 에어로빅 수업도 듣고 있어. 덕분에 아직 젊게 살고 있지.”엄마가 웃으며 거들었다.아빠도 고개를 끄덕였다.“가끔 컨설팅 일도 몇 건 맡고 있어. 너무 심심하지 않게 말이야. 그래도 이제 은퇴했으니 무리하지 않고 여유롭게 지내고 있단다.”“그럼 우리 딸은?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니?”엄마가 물었다.“아, 별일 없어. 그냥 예전에 살던 아파트로 다시 이사했어.”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엄마와 아빠는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말없이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아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지안아, 혹시 남편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니?”아빠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사실 도윤 씨는 이제 내 남편이 아니야. 우리 이혼했어.”내가 솔직하게 털어놓자 엄마와 아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아이고, 우리 딸……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말 마음 아프네.”엄마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애써 희미하게 웃었다.“괜찮아.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그 순간 아빠의 손에 들린 식기가 접시 위로 달그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그래, 그 자식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3년 동안 우리한테 연락도 제대로 못 하더니, 이제 와서 들려주는 소식이 이혼이라니!”“아빠, 진정해.”나는 식탁 너머로 손을 뻗어 아빠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나 이제 괜찮아. 정말이야. 화낼 필요 없어.”“그래도 우린 네가 얼마나 걱정됐는지 아니?”아빠가 속상한 듯 말했다.“알아. 정말 미안해. 하지만 그 사람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하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서로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깨달았을 뿐이야.”아빠는 원래부터 보호 본능이 강하고,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따지는 사람이었다. 아빠 성격을 생각
서지안의 시점화장실 칸막이 밖에서 스티비는 내가 속을 게워 내는 동안 조용히 기다려 주고 있었다.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괜찮아? 원하면 내가 머리카락 잡아 줄게.”스티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 괜찮아. 혼자 할 수 있어. 이제는 꽤 익숙하거든.”나는 대답했다.구토를 마친 뒤 입가를 닦고 천천히 심호흡했다.스티비가 임신 사실을 숨긴 나에게 화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건 내 기우였다.화장실 칸에서 나오자마자 스티비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기 때문이다.“스티비, 너 울어?”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발견하고 내가 물었다.스티비는 나를 살짝 놓아주며 웃었다.“당연히 울지, 이 바보야! 내가 이모가 된다잖아!”“아니면 우리 아기의 대모가 되어 줄래?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우리 아이를 잘 돌봐 줄 거라고 믿거든.”내 말에 스티비가 활짝 웃었다.“그거 정말 좋다! 물론 네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아니라, 네 아기의 대모가 되는 게 좋다는 뜻이야.”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스티비가 물었다.“잠깐, 도윤 씨는 네가 자기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알아?”나는 조금 먼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말하지 않았어. 혼자서도 충분히 아이를 키울 수 있어. 그 사람 도움은 필요 없어.”“난 좋아.”스티비는 흔쾌히 대답했다.“하지만 기억해 둬. 네가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곁에 있을 거야. 우리 미래의 아기 대모가 되어 줄 사람으로서 말이야!”나는 기차를 타고 솔트레이크로 향했다. 부모님을 만나고 우리가 함께 살던 옛집도 둘러볼 생각이었다.대문 앞에 선 나는 한동안 옛집을 바라보았다.집은 대체로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군데군데 작은 변화가 있긴 했다. 현관문의 색이 조금 달라졌고, 창문에는 새 덧문이 달려 있었다.나는 손을 뻗어 초인종을 눌렀다. 손가락을 버튼 위에 필요 이상으로 오래 올려 둔 채 망설였다.이렇게 오랜만에 찾아온 나를 보면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잠시 후 삐걱거리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