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아내는 남편을 기억하지 못한다

천재아내는 남편을 기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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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월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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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에서 깨어난 천재 윤재희는 최근 3년의 기억을 잃었다. 그런데 눈앞의 낯선 남자가 자신이 남편이라고 주장한다. “죄송한데, 제가 왜 당신이랑 결혼했죠?” 남편은 재벌그룹의 대표 강태윤. 완벽한 외모와 재력까지 갖췄지만, 두 사람의 결혼생활에는 이혼을 준비할 만큼 깊은 균열이 있었다. 기억을 잃어도 천재적인 두뇌는 그대로인 재희. 그녀는 남편의 비밀을 파헤치는 동시에, 세상이 버린 괴짜 천재들을 모아 문제 해결 회사 SOLVE를 설립한다. 무너지는 기업을 살리고 재벌들의 판을 뒤집으며 세상을 놀라게 하는 여자. 그러나 사고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남편을 향한 의심과 사랑은 더욱 깊어진다. 세상의 모든 문제에는 답이 있었다. **남편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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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낯선 눈빛

윤재희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묵직하게 울렸고, 오른쪽 관자놀이에서 시작된 통증은 뒷목까지 이어졌다. 입안은 모래를 씹은 것처럼 말라 있었으며,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과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갈비뼈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자신이 심상치 않은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재희의 시선은 한동안 병실 천장에 머물렀다.

정사각형 천장에 매립된 조명 여섯 개 가운데 왼쪽 두 번째 조명만 미세하게 중심축에서 벗어나 있었다. 환기구와 스프링클러의 위치까지 고려하면 단순한 시공 오차가 아니라 설계 단계에서부터 균형이 맞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순간에 천장 설계를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할 법도 했지만, 재희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눈에 보이는 구조에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는 것은 생각보다 먼저 일어나는 습관이었고, 한 번 발견한 오류는 이유를 알아내기 전까지 좀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재희는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장면을 떠올렸다. 대학 연구실 창문에는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옆자리 대학원생이 커피를 쏟아 키보드를 망가뜨렸다. 자신은 그 모습을 보며 커피를 마시는 방식보다 컵의 구조를 바꾸는 편이 효율적이라고 말했었다.

그날의 습한 공기와 연구실에 퍼져 있던 커피 향까지 선명하게 떠올랐지만, 이상하게도 그다음 장면은 이어지지 않았다. 연구실에서 언제 나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어떻게 병원에 오게 되었는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빈 공간만 남아 있었다.

재희가 미간을 좁히며 기억의 끝을 붙잡으려던 순간, 침대 옆에서 의자가 급하게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희야?”

낮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침대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였다. 흰 셔츠의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고, 느슨하게 풀린 넥타이 아래로 단정한 목선이 드러났다. 평소에는 빈틈없이 차려입는 사람일 듯했지만 지금은 머리카락마저 흐트러져 있었으며, 눈 밑에 내려앉은 짙은 그늘과 면도하지 못한 턱이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재희는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상당히 잘생긴 남자였다. 선명한 눈매와 곧은 콧날, 쉽게 흐트러지지 않을 듯한 인상까지 갖추고 있었으나, 지금 그의 얼굴에는 외모를 감상할 여유조차 없게 만드는 절박함이 어려 있었다.

남자는 재희와 눈이 마주치자 숨을 멈춘 사람처럼 굳어졌다.

강태윤은 지난 사흘 동안 아내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렸다.

의료진이 의식 회복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을 때도, 검사 결과를 조금 더 지켜보자고 했을 때도 그는 같은 자리를 지켰다. 병실의 기계음이 조금만 달라져도 심장이 내려앉았고, 재희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이면 숨을 죽인 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태윤은 한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내가 살아 있다는 안도감이 온몸을 관통하자 무릎에 힘이 풀릴 것 같았고, 며칠 동안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와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재희야, 정신이 들어? 어디 아픈 데는 없어?”

그는 급하게 침대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그녀의 얼굴과 손, 몸에 연결된 의료기기를 빠르게 살폈다. 호출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의사부터 부를게. 아직 움직이지 말고 있어.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하고.”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재희의 뺨으로 향했다.

평소였다면 이마를 짚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을 것이다. 아프다고 투덜거리는 아내를 품에 안고 괜찮아질 때까지 등을 쓸어주었을 것이며, 그녀가 귀찮다며 밀어내더라도 한 번쯤 더 체온을 확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손끝이 닿기 직전, 재희가 낯선 사람을 바라보듯 눈을 깜빡였다.

태윤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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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낯선 눈빛
윤재희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묵직하게 울렸고, 오른쪽 관자놀이에서 시작된 통증은 뒷목까지 이어졌다. 입안은 모래를 씹은 것처럼 말라 있었으며,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과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갈비뼈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자신이 심상치 않은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그런데도 재희의 시선은 한동안 병실 천장에 머물렀다.정사각형 천장에 매립된 조명 여섯 개 가운데 왼쪽 두 번째 조명만 미세하게 중심축에서 벗어나 있었다. 환기구와 스프링클러의 위치까지 고려하면 단순한 시공 오차가 아니라 설계 단계에서부터 균형이 맞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순간에 천장 설계를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할 법도 했지만, 재희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눈에 보이는 구조에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는 것은 생각보다 먼저 일어나는 습관이었고, 한 번 발견한 오류는 이유를 알아내기 전까지 좀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다만 지금은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재희는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장면을 떠올렸다. 대학 연구실 창문에는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옆자리 대학원생이 커피를 쏟아 키보드를 망가뜨렸다. 자신은 그 모습을 보며 커피를 마시는 방식보다 컵의 구조를 바꾸는 편이 효율적이라고 말했었다.그날의 습한 공기와 연구실에 퍼져 있던 커피 향까지 선명하게 떠올랐지만, 이상하게도 그다음 장면은 이어지지 않았다. 연구실에서 언제 나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어떻게 병원에 오게 되었는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빈 공간만 남아 있었다.재희가 미간을 좁히며 기억의 끝을 붙잡으려던 순간, 침대 옆에서 의자가 급하게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재희야?”낮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침대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였다. 흰 셔츠의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고, 느슨하게 풀린 넥타이 아래로 단정한 목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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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당신이 내 남편이라고요?
그 순간 태윤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너무 오래 의식이 없었던 탓에 잠시 혼란스러운 것일 수도 있었고, 약물의 영향이 남아 있거나 갑자기 깨어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그는 그런 가능성들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재희의 얼굴을 살폈다.“재희야, 나야.”재희는 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지만, 눈빛에 떠오른 것은 반가움이 아니라 곤혹스러움이었다.“제 이름은 아시는 것 같은데, 저는 그쪽이 누군지 모르겠거든요. 혹시 병원 관계자는 아니시죠?”그녀의 시선이 남자의 손목시계와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로 옮겨갔다. 고급 시계와 결혼반지, 몸에 익은 듯한 셔츠 차림까지 고려하면 병원 직원일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그럼 제 보호자세요?”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조금 전까지 가슴을 가득 채웠던 안도감이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처음 만난 낯선 사람을 관찰하는 눈이었다.태윤은 그 눈빛을 알고 있었다. 처음 재희를 만났을 때 그녀는 자신을 정확히 그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직함이나 배경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이 논리적으로 타당한지만 따지던 여자였다.그때는 그 눈빛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함께 사랑하고 살아온 시간이 지워진 지금, 똑같은 눈빛을 다시 마주하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다.병실 문이 열리고 의료진이 들어오자 태윤은 간호사가 침대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시선만큼은 재희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의사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는 동안에도 손을 움켜쥔 채 움직이지 못했다.혹시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몰랐다. 지금의 혼란이 사라지면 예전처럼 자신을 불러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에 태윤은 차마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그러나 재희는 끝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태윤은 마른 입술을 열었다.“강태윤이야. 네가 나를 그렇게 불렀어.”재희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서 몇 번 굴려보았다.어딘가에 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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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사라진 3년
“기억에 공백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의사는 사고로 인한 기억상실 가능성을 설명했다. 현재 확인된 신체 상태와 추가 관찰이 필요한 부분을 구분했고, 기억이 돌아올지 또는 언제 회복될지 단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태윤은 그 설명을 들으며 재희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울거나 겁에 질리는 대신 메모지와 펜을 달라고 하더니 자신의 상태를 차분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태윤은 그 모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재희는 언제나 그랬다. 남들이 당황하는 순간에도 가장 먼저 문제의 구조를 파악했고, 감정에 휩쓸리기보다 해결할 수 있는 부분부터 찾아냈다.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보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본능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었다.태윤은 그런 재희를 사랑했다. 처음에는 그녀의 비범한 머리에 끌렸고, 나중에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녀 자체를 사랑하게 되었다.그런데 지금은 그 익숙한 모습이 오히려 잔인했다. 말투도, 생각하는 방식도, 펜을 쥐는 습관도 그대로였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세계에서 자신과 함께한 시간만 사라져 있었다.“제가 잃어버린 기억의 범위가 정확히 3년인가요?”“현재로서는 그렇게 추정하고 있습니다.”재희는 종이에 긴 선을 하나 긋고 왼쪽 끝에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날짜를 적었다. 이어 사고가 발생한 날짜와 현재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의사가 확정적으로 말한 사실과 추정이라고 설명한 부분을 구분해 적었다.사고 발생 사흘 전, 최근 약 3년의 개인적 기억 공백, 언어와 전문지식 유지, 사고 경위 조사 중.그녀는 정리한 내용을 다시 살피다가 의사가 건네준 검사 안내지에서 한 가지를 발견했다.사고 이후 작성된 기록에는 의식 회복 시점과 검사 시간이 정확히 표시되어 있었지만,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는 문장 가운데 일부는 확정된 사실과 추정이 섞여 있었다.재희는 펜으로 해당 부분을 가리켰다.“여기에는 기억상실 범위를 약 3년으로 추정한다고 되어 있는데, 아래 설명은 마치 그 기간 전체가 사라진 것처럼 적혀 있네요. 정확히 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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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기억에서 지워진 사람
태윤은 그녀가 원하는 자료를 모두 준비하겠다고 약속했다. 재희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 증명하면 됐고, 시간이 필요하다면 기다리면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녀가 자신을 다시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견뎌야 할지 두려움이 밀려왔다.그 생각만큼은 끝까지 이어갈 수 없었다.오후가 되자 병실 문이 급하게 열렸다.“재희야!”어머니 박미선은 딸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침대로 달려왔다. 눈가는 벌겋게 부어 있었고, 손에는 집에서 챙겨온 보온병이 들려 있었다.“아이고, 우리 딸. 엄마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네가 눈을 못 뜬다고 해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미선은 딸의 손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재희는 어머니를 알아보았다. 기억 속보다 눈가의 주름이 조금 깊어지고 머리카락에 흰빛이 섞여 있었지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와 손을 잡는 습관은 그대로였다.“엄마, 나 살아 있어. 검사 결과도 당장 위험한 상태는 아니래.”재희는 울고 있는 어머니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나름대로 위로했지만, 미선은 그 말에 오히려 눈물을 더 쏟았다.“그게 지금 할 말이니? 엄마가 얼마나 놀랐는데.”“살아 있다는 게 제일 중요한 정보잖아. 다른 건 차근차근 해결하면 되고.”미선은 울다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아이고, 정말. 기억을 잃어도 네 성격은 그대로구나.”태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재희가 어머니를 알아보는 순간, 그의 가슴에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왔다. 그녀가 부모님까지 잊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정작 자신만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그는 그 사실을 질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감정은 이성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자신이 아내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졌다는 사실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은 상처가 되었다.뒤따라 들어온 아버지 윤정호는 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재희야, 아버지 알아보겠니?”“아빠를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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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내가 먼저 사랑했다고?
자신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사무실 근처 카페에 앉아 있던 여자. 회의가 늦어지자 노트북을 펼쳐놓고 일을 하다가, 자신이 나타나면 아무렇지 않은 척 화면을 덮던 여자.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그를 올려다보며 말하던 여자.'강태윤 씨, 나 당신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그때 태윤은 웃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고백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재희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이상하네. 원래 이런 변수는 계획에 없었는데.'그날 태윤은 처음으로 자신이 누군가에게 완전히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지금 그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나 그때의 눈빛은 없었다.재희는 어머니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내가 그렇게까지 좋아했다고? 어떤 점이 좋았는데?”미선은 대답하려다가 태윤을 바라보았다.태윤은 그 시선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아주 조금 저었다.지금은 말하지 말아달라는 뜻이었다.재희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를 다른 사람의 말로 채워 넣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녀가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간과 여지를 남겨두고 싶었다.재희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짧은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엄마, 왜 말을 하다 말아?”미선은 딸의 손을 다시 감쌌다.“지금은 몸부터 회복하자. 다른 건 나중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아.”재희는 더 묻지 않았지만, 머릿속에는 새로운 의문이 남았다.부모는 결혼을 인정했고, 과거의 자신은 태윤을 먼저 좋아했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그 결혼 이야기가 깊어지려고 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말을 멈추거나 다른 주제로 돌렸다.단순히 자신이 아픈 상태라 조심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표정들이 있었다.부모님이 돌아간 뒤, 태윤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그는 화면을 확인하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태강그룹 계열사의 긴급 보고였다.협력업체 한 곳이 기존 계약을 뒤집고 새로운 조건을 요구하고 있었다. 재희의 사고 이후 업무를 최소한으로 줄였지만, 모든 결정을 미룰 수는 없었다.태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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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숨겨진 표정
재희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제가 무서워할 이유가 있어요?”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질문에 쉽게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저녁이 되자 재희는 태윤에게 결혼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다.태윤은 휴대전화를 꺼내면서 잠시 망설였다.사진첩에는 수많은 재희가 있었다. 웃는 재희와 화내는 재희, 잠든 재희와 자신을 사랑하던 재희까지, 그 모든 모습이 사진 속에 남아 있었다.그런데 정작 사진 속 주인공은 그 시간을 기억하지 못했다.태윤은 화면을 열어 휴대전화를 건넸다.재희가 사진을 확인하는 동안 그는 침대 옆에 서 있었다.화면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있었다.윤재희.분명 자신의 얼굴이었다.그런데 사진 속 여자는 자신이 아는 윤재희와 조금 달랐다.평소 화장하는 시간을 아까워하던 자신이 정교한 화장을 하고 있었고, 머리카락에는 작은 보석 장식이 반짝였다.무엇보다 표정이 낯설었다.너무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옆에 선 남자는 강태윤이었다.검은 턱시도를 입은 그는 재희의 허리에 한 팔을 두르고 있었다. 평소에는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인데, 사진 속에서는 그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재희는 화면을 확대했다.“이거 합성 아니죠? 요즘은 사진 한 장으로도 사람을 속일 수 있으니까요.”태윤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원하면 결혼식 영상도 보여줄게.”재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사진으로 넘겼다.야외 정원에서 찍은 사진과 결혼식장 입구에서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친구들과 웃고 있는 사진이 차례로 나타났다.수많은 사진 속에서 자신은 한결같이 행복해 보였고, 태윤도 마찬가지였다.재희는 사진을 넘기던 손가락을 멈췄다.결혼식이 끝난 뒤 촬영한 듯한 사진이었다.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복도에서 태윤이 재희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사진 속 재희는 그의 셔츠 자락을 붙잡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그 모습이 이상하게 낯설었다.자신이 누군가에게 저렇게 자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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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사진 속의 부부
예전에는 이런 것을 묻지 않았다. 재희가 잠들면 이불을 덮어주었고, 추워하면 자연스럽게 품에 안았다. 그녀는 때때로 그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허리에 둘러놓기도 했다.그런데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태윤은 손을 거두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이불 덮어줄까?”재희는 그를 바라보았다.“그런 것도 물어봐야 해요? 부부라면서요.”태윤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대답했다.“지금은 물어보고 싶어. 네가 싫어하는 건 하고 싶지 않으니까.”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재희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태윤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끌어올렸다.그의 손등이 재희의 발목에 아주 잠깐 스쳤다.그 짧은 접촉에 태윤의 손가락이 굳었다.사흘 동안 차갑게 식어 있던 아내의 손을 붙잡고 얼마나 간절하게 빌었던가. 이제 그녀가 눈앞에 살아 있는데도 마음대로 안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 태윤을 더욱 괴롭게 했다.그는 지금 당장 재희를 품에 안고 싶었다. 살아줘서 고맙다고, 다시는 혼자 두지 않겠다고, 자신을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으니 제발 곁에만 있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태윤은 손을 거두었다.재희가 낯선 사람에게 안기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그는 한 걸음 물러났다.재희는 그런 태윤을 바라보았다.이 남자는 이상했다.가까이 다가오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매번 스스로 멈췄다. 손을 뻗었다가 거두고, 무언가 말하려다가 삼켰다.그 행동들이 모두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반복적이었다.재희는 머릿속에 새로운 항목을 추가했다.'강태윤은 나를 만지고 싶어 하지만 참는다.'그 사실이 왜 중요한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밤이 깊어지자 병실의 조명이 어두워졌다.재희는 침대 머리맡을 조금 세우고 태윤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들을 계속 살펴보았다.결혼식 사진을 확인한 뒤에는 여행 사진과 일상 사진을 차례로 넘겼다. 두 사람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까지 있었다.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사진이 많았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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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닿을 수 없는 거리
태윤은 서류를 덮었다.“다툰 적은 있어.”“부부니까 다툴 수 있죠. 제가 묻는 건 그 정도가 아닌데요.”그가 고개를 들었다.재희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우리가 서로를 좋아하는 상태였는지, 아니면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 상태였는지 궁금해요.”태윤의 얼굴에서 마지막 남아 있던 표정이 사라졌다.그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그 질문이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다.재희는 기억을 잃었는데도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던 균열을 찾아내고 있었다. 태윤은 손을 움켜쥔 채 자신이 지키려 했던 것들과 재희에게 말하지 않았던 결정들을 떠올렸다.그녀를 위험에서 떼어놓기 위해 대신 선택했던 일들.그때마다 자신은 옳다고 믿었다. 아내를 사랑하고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지만, 정작 재희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태윤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그런데 이제 재희는 그 모든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그는 자신에게 유리한 이야기만 골라 들려줄 수도 있었다. 우리는 행복했고 서로 사랑했으며, 아무 문제도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녀는 당장 반박할 기억조차 없었다.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적어도 재희에게만큼은.태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지금은 쉬어. 아직 회복 중이잖아.”“대답을 피하는 건가요?”그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인정했다.“피하는 거 맞아. 지금 말하면 내가 나한테 유리한 이야기부터 할 것 같아서.”재희가 눈썹을 올렸다.태윤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네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아. 조금만 시간을 줘.”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말을 이어가면 결국 자신을 변명하게 될 것 같았다.태윤은 침대 옆에 놓인 물컵을 확인하고, 간호사 호출 버튼이 손에 닿는 위치에 있는지 살폈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가져가려다 재희가 아직 사진을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대로 내려놓았다.“필요하면 더 봐도 돼.”그가 문 쪽으로 걸어가자 재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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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말하지 못한 진실
그러나 재희는 자신을 미워하지도 않았다. 미워할 기억조차 없었기 때문이다.태윤은 휴대전화를 꺼냈다.화면에는 결혼식 날 찍은 사진이 떠 있었다. 재희는 그의 팔을 붙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고, 사진을 찍기 직전 자신에게 했던 말까지 또렷하게 떠올랐다.'강태윤 씨, 웃어요. 결혼식 사진인데 장례식 사진처럼 나오면 어떡해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그의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태윤은 그 장난스러운 행동에 결국 웃음을 터뜨렸고, 재희는 그제야 만족한 듯 카메라를 바라보았다.태윤은 사진 속 아내의 얼굴을 손끝으로 쓸었다.차가운 유리 화면이었다.예전에는 손을 뻗으면 언제나 닿을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잠결에 자신의 팔을 베고 누워 있거나, 책을 읽다가 아무렇지 않게 어깨에 기대던 여자였다.그런데 이제는 병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다.태윤은 고개를 숙였다.“재희야, 나 어떻게 해야 하냐.”아무도 없는 복도에 낮은 목소리가 흩어졌다.그때 휴대전화 화면에 회사에서 보낸 긴급 결재 요청이 떠올랐다. 태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보고서를 열어 필요한 내용을 확인하고, 담당 임원에게 정확한 지시를 남겼다.수십 명의 직원이 기다리는 결정이었다. 그는 감정을 끼워 넣지 않고 필요한 일을 처리했다.하지만 결재를 마친 뒤 다시 병실 문을 바라보자 조금 전까지 유지하던 침착함이 무너졌다.회사에서는 복잡한 문제도 판단할 수 있었다. 손실을 계산하고 협상 조건을 조정하며, 누군가의 실수를 수습하는 일도 할 수 있었다.그런데 아내의 기억만큼은 어떤 방법으로도 되돌릴 수 없었다.태윤은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기억을 되찾지 못해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하려 했다. 자신을 다시 좋아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녀가 다시 한번 자신의 곁을 선택해준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고 싶었다.그러나 곧 그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깨달았다.재희는 누군가의 뜻대로 움직이는 여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사랑에 빠졌던 이유도 바로 그것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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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우리, 이혼하려고 했어요?
그는 재희가 깨어 있는 모습을 확인하자 걸음을 잠시 멈췄다.아침 햇빛 아래에서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평범한 광경이 태윤에게는 기적처럼 느껴졌다.재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왜 그렇게 봐요? 제가 이상해요?”태윤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아니. 그냥 네가 이렇게 깨어 있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아서.”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덧붙였다.“살아 있어서 고마워.”재희는 그 말을 듣고 눈을 깜빡였다.태윤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보온 용기를 열고 죽을 그릇에 덜어주면서 그녀가 먹기 편하도록 숟가락의 위치를 바꾸고 물컵을 손이 닿는 곳에 놓았다.모든 동작이 익숙했다.오랫동안 누군가를 돌봐온 사람처럼.재희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강태윤 씨, 질문이 하나 있어요.”태윤은 의자를 끌어 앉았다.“말해. 궁금한 건 뭐든 물어봐.”재희는 메모지를 넘겼다.“우리가 결혼한 건 확인했어요. 그런데 제가 왜 당신이랑 결혼했는지는 아직 모르겠거든요.”태윤은 보온 용기의 뚜껑을 열다가 손을 멈췄다.그 질문이 얼마나 잔인한지 재희는 모를 것이다. 자신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선택이었고, 그녀와 결혼한 날 태윤은 처음으로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한다는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그런데 지금 재희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묻고 있었다.태윤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대답했다.“네가 나를 좋아했으니까. 그리고 나도 널 좋아했고.”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엄마도 제가 먼저 좋아했다고 말했어요.”태윤은 희미하게 웃었다.“맞아. 네가 먼저 좋아한다고 했어.”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하지만 결혼하자고 한 건 나였어. 너랑 평생 살고 싶어서.”재희는 잠시 말을 잃었다.남자의 눈빛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다.태윤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지금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며,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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