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처음 쓰러졌을 때, 규련은 ‘건물주님’의 도움으로 그녀를 무사히 입원시켰다고 했다.퇴원하는 날, 앞마당을 점령했던 멋들어진 검은색 독일제 명품 SUV 역시 그 정체 모를 건물주님의 선의였다.그 모든 호의의 배후가 태하라는 남자였다니. 경신은 차분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화야를 빤히 바라보았다.“표정 보니 이미 눈치채셨네요. 맞아요, 보살님.”“그럼 나 퇴원할 때 탔던 그 어마어마한 차도 혹시······.”“네. 보살님 쓰러지셨을 때 보살님을 직접 안고 병원까지 데려다준 것도 그 사람이에요.”탄식이 절로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직접 안고 병원까지?악연만큼이나 무서운 게 인연이라더니, 어쩌면 이토록 우연이 겹치고 겹칠 수 있을까.“아, 어떻게 난 태하 씨에게 그런 신세를······.”처음 본다는 뻔뻔한 소리나 늘어놓고,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남자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도망칠 궁리만 했다니.경신은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그날 태하 씨가 얼마나 애틋하게 구셨다고요. 공주님처럼 귀하게 대하셨어요. 보살님이랑 사이 안 좋다고 신신당부해서 그동안 입이 근질거려 죽는 줄 알았다고요.”“허, 헐······. 나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니? 태하 씨가 나를 고, 고, 공주님처럼?”“대박 멋졌다니까요. 완전 영화 한편 찍었죠.&rd
벌써 3월 4주 차 금요일이었다.S대 학생생활관 한편, 여학생 기숙사의 아침은 오늘도 여지없었다. 2월 말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져 온 이 어수선한 풍경은 이제 완벽한 일상이 되어버렸다.“보살님!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아, 나 정말 미치겠어!”오늘도 경신은 격렬한 이불킥에 여념이 없었다. 죄 없는 이불에 화풀이하는 경신을 향해 화야가 따끔한 일침을 날리며 아침을 열었다.“임산부가 아침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계속되는 모닝 이불킥은 폐 건강에 해롭다고요. 먼지 날리잖아요!” “미안해, 화야. 근데 정말 미칠 것 같아. 나 어떡하면 좋니?” “뭘 어떡해요. 그냥 MH 엔터에 가서 두고 온 물건들 찾아오면 끝날 일인데!”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악수까지 하면서 ‘바이 바이’ 하고 쿨하게 돌아섰는데······ 이제 와서 다시 가라고? 그 민망함은 온전히 내 몫이잖아. 그냥 새로 살까? 아님 없는 대로 살까?” “그 말만 벌써 일주일째거든요? 지겹지도 않아요? 가서 찾아오는 게 정답이에요!”경신도 알고 있었다. 화야는 언제나 옳다는 것을.지난주, 소강당에서 쓰러지며 안경을 두고 온 것은 물론 핸드폰까지 떨어뜨린 게 분명했다.다시 사면 그만이겠지만, 멀쩡한 돈을 길바닥에 버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핸드폰엔 고작 한 달 남짓이지만 그녀의 새로운 인생사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저장된 인연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포기하기엔 기회비용이 너무 컸다.하지만 문제는 그곳을 다시 제 발로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인연을 끊으려 작정했는데, 물건 때문에 다시 엮이러 가다니.“그냥 다녀오세요.” “휴······ 화야.” “사실, 가고 싶잖아요?”화야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경신은 할 말을 잃었다. 사실 그날,
태하는 들뜬 마음을 갈무리하고 VIP 관계자석으로 돌아왔다. 사람 좋은 마호와 MH 엔터테인먼트의 유일한 아티스트인 에스트렐라 멤버들은, 평소 AI처럼 무미건조하던 태하의 희귀한 반응을 두고 수군거리기 바빴다.“태하 님, 그 여학생 몸은 괜찮은 겁니까?” “어.” “진짜 성격 화통하던데, 생일 파티 때 초대하신 그 과외 선생님 맞죠?” “그래.”시온과 도국의 질문까지는 건성으로 대답했는데, 정기범은 날이 서 있었다.“그 여자랑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여학생, 선생님, 그리고 '그 여자'. 모든 화살표가 한 인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태하는 팔짱을 낀 채, 조금 전까지 경신이 서 있던 빈자리를 묵묵히 응시했다.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절대 다가오지 말라고 했는데, 기억을 잃고 먼저 나타난 그녀였다.좋은 사람을 만나라는 당부. 요즘은 나쁜 남자가 대세라는 엉뚱한 궤변.이어 그의 입가에 희미하지만 매혹적인 미소가 번졌다. 어떻게 그녀를 공략해야 할지 선명한 이정표가 보였다.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칠 만큼 어리석은 남자가 아니었으니까.“잘해 보려고.”그렇게 팔짱을 끼고 선전포고를 하듯 정기범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예전부터 거슬렸는데. 여전히 정기범은 수컷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우와, 상남자.” “남자는 직진이죠.” “태하 님, 순정파군요. 하하!”휙, 태하가 고개를 돌려 수다 삼매경에 빠진 멤버들에게 따가운 눈빛을 보냈다. 자신과 경신에 대해 가볍게 떠드는 꼴을 단 한마디도 들어줄 요량이 없었다.“다들, 조용히 해.”서늘한 경고 한마디면 충분했다. 소강당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고, 오디션은 무거운 긴장감 속에 이어졌다.태하는 다시 곱씹어 보았다. 경신이 한 말을 말이다.“Hombre malo(나쁜 남자)······. 그거 해줘야겠네.”경신의 목소리를 되새기던 태하의 입술 사이로 낮은 혼잣말이 슬그머니 새어 나왔다. *** 경신은 회사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도망치듯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기숙사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
경신이 너무 진지하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바람에 대기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하지만 도윤은 그 정적을 비웃듯 다시 경신에게 다가와, 만개한 노란 국화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런······ 예쁜아, 우와. 감동인데? 나 방금 눈물 날 뻔했잖아. 그래, 고마워.”오늘 경신은 도윤의 낯선 민낯을 보긴 했지만, 그나마 남아있던 좋았던 기억조차 얼룩질까 두려워 더는 과거를 들추지 않기로 했다. 그를 폄하하는 것도 멈추기로 했다. 온 힘을 다해 그를 사랑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으니까.그때, 눈치 없는 현수가 다시 다가와 경신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독설을 내뱉었다.“너, 볼일 끝났으면 어서 꺼져. 시시한 너 따위를 상대할 정도로 여기 사람들 한가하지 않거든? 설마 관심 끌어보려고 아픈 척 연기한 건 아니지?”아, 저 어여쁜 입술에 칼날이라도 달린 걸까. 사람 심장을 콕콕 쑤셔대는 말을 어쩜 저리도 찰지게 할까. 아마 태하나 도윤이 경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못견디게 거슬렸던 모양이다. 경신은 아가들에게 ‘똥이 무서워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 피한다!’는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현수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현수 씨, 내가 시시하다면서 왜 그렇게 신경을 써요? 원래 세상은 내 맘 같지 않은 거에요. 자꾸 그렇게 심술부리면 얼굴 더 못생겨져요.”여자들만의 서늘한 기 싸움 끝에 승자는 역시나 경신이었다.“야! 너 뭐라고?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현수가 다시 발끈하며 달려들려던 찰나, 쾅ㅡ! 태하가 과격하게 일어서며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굉음을 냈다.“아, 시끄럽게.”의자 하나로 상황을 평정한 태하는 나른하면서도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좌중을 훑었다. 그 시선이 어찌나 서늘한지 경신의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그가 다정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린 순간이었다.“아, 놀라라. 태하 씨, 젊어서 그런가 힘이 넘치시네?”“자자! 나도 피곤하고 지쳤다. 오디션 마무리해야 하니까 다들 돌아가!”얼른 태
태하는 지금 눈앞이 캄캄했다.기억조차 온전치 못하다는 경신이 제 품 안에서 종이 인형처럼 힘없이 꺾여 쓰러지다니. 대기실로 안고 들어가 소파에 그녀를 뉘어두고 119를 부르려던 찰나, 다행히 경신이 가늘게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평소에도 이렇게 위태롭게 살았던 건지, 제 가슴 한구석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정신이 들어?”이 와중에 마호와 도윤, 그리고 현수까지 줄줄 사탕처럼 뒤를 쫓아오는 바람에 대기실은 이미 포화 상태라 더 정신 없을 것 같았다.“아······ 네. 괜찮아요. 하하.”사람들과 시선을 맞추는 것조차 버거워 보일 정도로 기력이 쇠한 건지, 경신은 그저 해사하게 웃으며 눈만 깜뻑거렸다.“예쁜이가 몸이 약하네. 현수 씨, 아까 너무 긁어댄 거 아니야?” “도윤 씨! 그냥 저 여자애가 혼자 쓰러진 거라니까!”그때, 쿵ㅡ!경신의 안색을 살피던 태하가 싸늘한 눈빛으로 소파 테이블을 거칠게 걷어찼다. 둔중한 타격음이 정적을 깨부수었다.“쉿, 환자 앞이야.”단 한 마디였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서릿발보다 날카로웠다. 태하의 폭발 직전인 감정을 읽어낸 듯, 시끄럽게 떠들던 이들이 일순간 숨을 죽였다. 태하는 서늘한 시선으로 주변을 훑어 보다 경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오히려 다행이라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원래 빈혈이 좀 있어서 그래요. 바쁘실 텐데 폐를 끼쳤네요.”경신의 사과가 떨어지기 무섭게 도윤이 다시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태하와 경신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얼굴을 불쑥 들이민 그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그나저나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더니. 저번엔 연예인 뺨치게 화려한 스타일이더니, 오늘은 청초한 모범생 버전이네?” “연예인 뺨을 쳐요? 제가요?”자신에 대한 기억이 전무한 상태에서 말을 섞을수록 의아한지 경신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마호가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뚜껑을 따더니 경신에게 건넸다.“우리 경신 양은 실제로도 과 수석을 하는 모범생이자,
꼬여도 한참 꼬인 하루였다.그러고 보니 전생에서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파편들 때문에 뭘 조심해 보려 애를 썼건만, 결국은 새드 엔딩이었다.이번 생은 사랑 따위에 목매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게 혼자 가리라 다짐하며 미신 따위 믿지 않으려 했건만······. 현재의 위험인물과 전생의 인연을 세트로 마주한 지금, 경신은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경신은 가슴이 들썩이도록 크게 심호흡하며, 태하의 넓은 어깨 너머로 슬쩍 도윤을 바라보았다.과거의 도윤은 잘난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와 능글맞은 사회성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던 사내였다. 지금의 그 역시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늘이 내린 스타이자, 경신이 홀로 가슴에 품었던 남자.두 손을 배에 얹고 몸을 웅크린 채 아가들의 눈을 가려주고 싶은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저 사람이 바로······ 엄마가 첫 번째 인생에서 짝사랑했다가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주고, 평생을 그리워했던 남자야.’예쁜 쓰레기, 황도윤. 그것이 경신의 첫사랑에 대한 정의였다.태하의 눈치를 살피니 기색이 영 좋지 못했다. 할 말은 많으나 억지로 삼키는 듯한 기색이었다. 두 남자가 대화를 시작하자 태하는 그저 물끄러미 경신을 지켜보았다.“어휴, 태하 님. 우리 사이에 왜 이러실까.”“무슨 사이?”“하하, 앞으로 곡 받고 노래 부를 사이죠.”“설마.”도윤이 성큼 태하의 옆을 지나 움츠려 있는 경신에게 순식간에 다가왔다.“저번에 보니 태하 님이 예쁜이한테 좀 신경 쓰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이미지가 다르네?”하지만 태하는 도윤의 농담에 아랑곳하지 않고 권태로운 눈빛으로 서늘한 말을 흘렸다.“입 다무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아이고, 살벌해라. 몸도 얼굴도 예쁜 귀염이에게 말 좀 걸었다고, 질투하시는 건가?”경신은 이 죄 많은 몸뚱이를 어찌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경신은 이제 더는 도윤식 농담에 흔들리지 않았다. 뱃속 아가들과의 무지갯빛 미래를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