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연하 세입자가 결혼하자고 한다

열 살 연하 세입자가 결혼하자고 한다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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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덟 국밥집 사장 강보라, 그녀의 평온한 새벽을 깨뜨린 스물여덟 소방관 한지운. "평생 갚겠습니다."라며 느닷없이 프러포즈하는 이 연하남, 대체 왜 하필 우리 집 2층에 세를 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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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ítulo 1

1화. 방 있습니까

새벽 4시 50분이었다. 강보라는 가게 뒷문을 열고, 불을 켜고, 솥 앞에 섰다. 솥은 어제 저녁에 불을 꺼 둔 채로 밤새 뼈를 품고 있었다. 뚜껑을 열자 김이 먼저 올라오고, 그다음에 냄새가 왔다. 보라는 국자를 집기 전에 솥을 보고 작게 말했다.

"오늘도 잘 부탁한다."

아버지가 하던 말이었다. 아버지는 이 말을 할 때 솥 가장자리에 손을 짚었다. 보라는 짚지 않았다. 손을 짚으면 뜨거워서 아버지가 매번 "앗" 하던 것을 어릴 때부터 봐 왔다. 그 "앗"이 없는 새벽이 5년째였다.

가스 불을 올리고, 깍두기 통을 꺼내고, 어제 썰어 둔 파를 냉장고에서 내렸다. 손목에 찬 시계를 봤다. 4시 58분. 이 시계는 5분 빠르다. 아버지가 그렇게 맞춰 놓고 썼고, 보라는 아버지 손목에서 풀어 자기 손목에 찬 뒤로 한 번도 바로잡지 않았다. 5분 빠른 시계로 살면 늦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 말이었다.

유리문 바깥은 아직 캄캄했다. 새뜰시장 골목에 불이 켜진 집은 보라국밥 하나였다. 방앗간 복순 할머니는 5시 반, 건어물 황씨네는 6시, 생선가게 미자 이모는 그날그날이었다. 보라국밥이 제일 먼저였다. 아버지 때부터 그랬다.

유리문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2층 방 월세 놓습니다. 문의는 안에서.» 보라 글씨였다. 붙인 지 한 달이 됐다. 그동안 물어본 사람은 셋이었다. 하나는 방을 보더니 "시장이라 시끄럽겠네요" 하고 갔고, 하나는 월세를 깎자고 했고, 하나는 보라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미자 이모한테 쫓겨났다.

「안 나가면 그냥 두지, 뭐.」

보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솥을 저었다. 2층 바깥방은 아버지가 쓰던 방이었다. 창이 시장 쪽으로 나 있어서 새벽 장 소리가 다 들렸다. 아버지는 그 소리에 깼고, 보라는 안쪽 방에서 그 소리를 못 들었다. 지금은 보라가 그 소리에 깬다. 바깥방은 비어 있는데도.

5시 20분쯤 유리문 밖에 누가 서 있었다. 키가 큰 그림자였다. 보라는 솥을 젓다가 한 번 보고, 다시 솥을 봤다. 문 앞에 서서 안 들어오는 사람은 많았다. 메뉴판을 읽는 사람, 담배를 피우는 사람, 길을 잘못 든 사람. 그림자는 한참 서 있다가 사라졌다. 보라는 파를 썰었다. 썰다가 한 번 더 유리문을 봤다. 아무도 없었다. 골목 가로등 하나가 깜빡였다. 저 가로등은 작년 가을부터 깜빡였고, 상인회에서 고쳐 달라고 세 번 말했고, 아직 그대로였다.

◎

5시 반에 첫 손님이 왔다.

문을 밀고 들어온 사람은 키가 컸다. 문틀 위쪽에 머리가 거의 닿았다. 회색 운동복 차림이었다. 운동복 소매가 짧아서 손목이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 사람은 문 안에 서서 가게를 한 바퀴 둘러봤다. 테이블 여섯 개, 벽에 걸린 메뉴판, 솥, 그리고 보라.

"국밥 되죠."

"되죠. 앉으세요."

그 사람은 솥에서 제일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가 밥 먹던 자리였다. 손님 자리로도 쓰니까 보라는 아무 말 안 했다. 국밥을 뜨고, 깍두기를 놓고, 뚝배기를 내려놓았다.

그 사람은 뚝배기를 두 손으로 잡고 한 바퀴 돌려 놓았다. 손잡이가 오른쪽으로 오게. 그러고는 숟가락을 국물에 세워서 한 번 젓고, 국물을 세 번 떠먹었다. 밥은 그다음이었다.

보라는 솥 뒤에서 그걸 보다가 파를 집었다. 「먹는 사람이 먹는 거지.」

그 사람은 빨리 먹었다. 국물 한 방울 안 남겼다. 그릇을 밀어 놓고 보라를 봤다.

"한 그릇 더요."

"더 드려요?"

"네."

두 번째 그릇도 똑같이 먹었다. 두 손으로 돌리고, 숟가락 세워서 젓고, 국물 세 번. 보라는 두 번째에는 안 봤다. 보려고 안 봤다. 솥을 젓고, 깍두기 통 뚜껑을 닫고, 벽에 걸린 달력을 봤다. 4월 1일. 수요일. 달력은 미자 이모네 생선가게에서 받은 거였다. 생선 그림이 달마다 바뀌는데 4월은 조기였다.

그 사이에 손님 둘이 더 들어왔다. 새벽 배달 기사들이었다. 늘 오는 사람들이라 보라는 묻지 않고 두 그릇을 떴다. 기사 하나가 솥 앞자리를 보고 "오늘은 자리 뺏겼네" 하면서 창가에 앉았다. 다른 하나가 "저 양반 두 그릇째야?" 하고 작게 물었다. 보라는 대답 대신 깍두기를 더 놓았다. 가게 안이 숟가락 소리로 찼다. 보라는 이 소리가 좋았다. 아버지는 이 소리를 "밥값 소리"라고 했다.

그 사람이 일어나서 계산대로 왔다. 보라는 카드 단말기를 돌려놓다가 그 사람이 현금을 내미는 걸 봤다. 만 원짜리 두 장. 보라는 거스름돈 2,000원을 두 손으로 건넸다. 아버지가 그렇게 했고, 보라도 그렇게 했다. 그 사람이 돈을 받으며 유리문 쪽을 봤다. 종이를 봤다.

"2층 방, 저 주세요."

보라는 그 사람 얼굴을 다시 봤다. 짧은 머리, 각진 턱, 눈 밑이 조금 어두웠다. 밤을 샌 얼굴이었다.

"학생?"

"스물여덟이고, 소방관입니다. 새뜰소방서요."

"소방관이 왜 시장 2층에."

"가까워서요. 걸어서 15분입니다."

보라는 잠깐 생각했다. 소방관이면 밤에 안 들어오는 날이 많을 거고, 시끄럽다고 안 할 거고, 월세를 깎자고 할 사람으로는 안 보였다. 깎자고 하면 안 주면 그만이었다.

"방 보고 말해요."

◎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가게 안쪽에 있었다. 나무 계단 열두 개. 보라가 앞서 올라갔다. 셋째 계단에서 삐걱 소리가 났다. 늘 나는 소리였다. 아버지가 고친다고 하다가 못 고친 계단이었다. 보라도 고친다고 하다가 못 고쳤다.

뒤에서 소리가 안 났다.

보라는 돌아봤다. 그 사람이 넷째 계단에 서 있었다. 셋째 계단을 밟지 않고 둘째에서 넷째로 건너뛴 모양이었다. 다리가 기니까 그럴 수도 있었다. 보라는 다시 올라갔다. 「그냥 긴 다리.」

바깥방 문을 열었다. 방은 비어 있었다. 아버지 짐은 5년 전에 다 치웠다. 장롱 하나, 창문 하나, 그리고 벽. 창은 시장 골목 쪽이었다. 아직 어두운데 황씨네 셔터 올리는 소리가 올라왔다. 6시도 안 됐는데 황복례는 오늘 빨랐다.

"시끄러워요, 새벽에. 장 서는 소리 다 들려요."

그 사람은 대답을 안 했다. 방에 들어서서 창을 보고, 그다음에 벽을 봤다. 창 옆 벽이었다. 거기에 연필로 그은 금이 네 개 있었다. 짧은 가로줄 네 개가 위아래로 조금씩 떨어져 있었다. 제일 아래 금과 제일 위 금 사이는 손가락 두 마디쯤이었다. 아버지가 그었다는 것만 알았다. 뭘 쟀는지는 몰랐다. 보라 키는 아니었다. 보라는 그때 서울에 있었고, 보라 키는 저보다 한참 아래였다.

그 사람이 그 금을 한참 봤다. 손을 들다가 내렸다.

"월세 40만 원이에요. 보증금 300. 화장실은 가게 쓰는 거 같이 쓰고, 2층엔 작은 세면대만 있어요. 밥은 알아서."

"네."

"네가 뭐예요. 보고 생각해 보고—"

"이 방으로 하겠습니다."

보라는 팔짱을 꼈다. 「이렇게 바로?」

"방 보러 온 사람이 셋 있었는데 다 안 했어요. 왜 하는지 물어봐도 돼요?"

그 사람이 보라를 봤다. 밤샌 눈이 보라를 똑바로 봤다.

"국밥이 맛있어서요."

보라는 할 말이 없어서 창을 열었다. 찬 공기가 들어왔다. 아래에서 황복례 목소리가 올라왔다. "보라야, 2층에 불 켰냐!" 보라는 대답 안 했다. 그 사람이 창밖으로 골목을 내려다봤다. 황씨네, 미자네, 방앗간, 그 너머 시장 뒷길. 아는 길을 보는 눈이었다. 보라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그만뒀다. 시장 뒷길은 누가 봐도 다 아는 길이었다.

◎

내려와서 보라는 솥을 한 번 젓고, 그 사람은 가게 가운데 서 있었다. 보라가 계약서는 저녁에 쓰자고 했다. 가게가 5시 반부터 오후 3시까지라 낮에는 짬이 안 났다. 그 사람은 알겠다고 했다. 이름을 물었다.

"한지운입니다."

"강보라예요. 사장이고요."

지운이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깊었다. 보라는 그렇게 깊게 인사받을 일을 한 적이 없어서 뒤로 반 걸음 물러났다.

그때 유리문이 열리고 황복례가 들어왔다. 멸치 상자를 든 채였다. 황복례는 지운을 한 번 보고, 보라를 한 번 보고, 다시 지운을 봤다. 위에서 아래로.

"저 키 봐라."

"이모, 아침부터."

"2층 세입자냐? 총각이 왜 시장 2층을 와. 보라야, 너 월세 제대로 받아라."

"받아요."

"얼마 받는데."

"이모."

황복례는 상자를 내려놓고 국밥 한 그릇을 시켰다. 지운이 황복례 상자를 들어서 벽 쪽으로 옮겨 주었다. 부탁한 것도 아닌데. 황복례가 "어이구" 하면서 지운 팔뚝을 한 번 쳤다. 보라는 솥을 저었다. 저런 건 하지 말라고 해야 하나 싶었다.

"총각, 어디서 왔어?"

"소방서요."

"아니, 고향이 어디냐고."

지운이 잠깐 말을 안 했다. 보라는 국밥을 뜨면서 그 잠깐을 들었다.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황복례는 더 안 물었다. 국밥이 나왔으니까. 황복례는 국밥 앞에서는 말을 안 하는 사람이었다. 보라 아버지가 황복례를 두고 "저 입을 막는 건 국밥뿐"이라고 했었다.

지운은 문 앞에서 다시 보라를 봤다. 바깥은 이제 조금 밝았다. 골목에 셔터 소리가 하나씩 늘었다. 방앗간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시작됐다.

"저녁에 짐 옮겨도 됩니까, 누—"

지운이 말을 끊었다. 반 박자 뒤에 고쳐 말했다.

"사장님."

보라는 국자를 든 채로 지운을 봤다. 「누, 뭐?」

"저녁 7시요. 가게 닫고."

지운이 나갔다. 유리문이 닫히고, 키 큰 그림자가 골목을 왼쪽으로 꺾어 사라졌다. 소방서 쪽이었다. 황복례가 국밥을 먹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쟤 뭐라 그랬냐?"

"사장님이라고요."

"그 앞에."

"몰라요."

보라는 솥 뚜껑을 닫았다. 셋째 계단 소리가 안 났던 것이 생각났다. 보라는 그걸 생각하다가 솥에서 김이 넘치는 걸 늦게 봤다. 아버지라면 "앗" 했을 것이다.

(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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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방 있습니까
새벽 4시 50분이었다. 강보라는 가게 뒷문을 열고, 불을 켜고, 솥 앞에 섰다. 솥은 어제 저녁에 불을 꺼 둔 채로 밤새 뼈를 품고 있었다. 뚜껑을 열자 김이 먼저 올라오고, 그다음에 냄새가 왔다. 보라는 국자를 집기 전에 솥을 보고 작게 말했다."오늘도 잘 부탁한다."아버지가 하던 말이었다. 아버지는 이 말을 할 때 솥 가장자리에 손을 짚었다. 보라는 짚지 않았다. 손을 짚으면 뜨거워서 아버지가 매번 "앗" 하던 것을 어릴 때부터 봐 왔다. 그 "앗"이 없는 새벽이 5년째였다.가스 불을 올리고, 깍두기 통을 꺼내고, 어제 썰어 둔 파를 냉장고에서 내렸다. 손목에 찬 시계를 봤다. 4시 58분. 이 시계는 5분 빠르다. 아버지가 그렇게 맞춰 놓고 썼고, 보라는 아버지 손목에서 풀어 자기 손목에 찬 뒤로 한 번도 바로잡지 않았다. 5분 빠른 시계로 살면 늦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 말이었다.유리문 바깥은 아직 캄캄했다. 새뜰시장 골목에 불이 켜진 집은 보라국밥 하나였다. 방앗간 복순 할머니는 5시 반, 건어물 황씨네는 6시, 생선가게 미자 이모는 그날그날이었다. 보라국밥이 제일 먼저였다. 아버지 때부터 그랬다.유리문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2층 방 월세 놓습니다. 문의는 안에서.» 보라 글씨였다. 붙인 지 한 달이 됐다. 그동안 물어본 사람은 셋이었다. 하나는 방을 보더니 "시장이라 시끄럽겠네요" 하고 갔고, 하나는 월세를 깎자고 했고, 하나는 보라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미자 이모한테 쫓겨났다.「안 나가면 그냥 두지, 뭐.」보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솥을 저었다. 2층 바깥방은 아버지가 쓰던 방이었다. 창이 시장 쪽으로 나 있어서 새벽 장 소리가 다 들렸다. 아버지는 그 소리에 깼고, 보라는 안쪽 방에서 그 소리를 못 들었다. 지금은 보라가 그 소리에 깬다. 바깥방은 비어 있는데도.5시 20분쯤 유리문 밖에 누가 서 있었다. 키가 큰 그림자였다. 보라는 솥을 젓다가 한 번 보고, 다시 솥을 봤다. 문 앞에 서서 안 들어오는 사람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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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계약서는 두 장
오후 3시에 보라는 유리문의 종이를 뗐다. «2층 방 월세 놓습니다. 문의는 안에서.» 한 달 동안 붙어 있던 종이였다. 테이프 자국이 네 귀퉁이에 남았다. 보라는 손톱으로 긁다가 그만뒀다. 유리가 허전했다. 종이 한 장 뗐을 뿐인데 골목이 더 잘 보였다.생선가게 미자 이모가 고무장갑을 낀 채로 지나가다 멈췄다."나갔어?""나갔어요.""누구? 아침에 복례가 그러던데, 키 큰 총각이라며.""소방관이래요.""총각이야?""몰라요. 안 물어봤어요."미자 이모가 고무장갑 낀 손으로 보라 어깨를 툭 쳤다. 비린내가 묻었다. 보라는 앞치마로 어깨를 닦았다."총각이면 밥은 니가 해 주냐?""월세 받는데 밥을 왜 해요.""그러게 말이다. 그래도 한 그릇은 줘라. 첫날인데."미자 이모는 웃으면서 갔다. 보라는 솥을 비우고, 바닥에 물을 뿌리고, 솔로 밀었다. 가게를 닫은 뒤 바닥 미는 소리는 새벽 솥 소리 다음으로 보라가 좋아하는 소리였다. 하루가 끝났다는 소리였다. 오늘은 그 소리 뒤에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저녁 7시.계약서 양식은 아버지 서랍에 있었다. 아버지는 바깥방을 세놓은 적이 없었지만 양식은 갖고 있었다. 뭐든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안 나오는 볼펜도, 안 맞는 열쇠도, 끊긴 고무줄도. 보라는 양식을 두 장 꺼내 식탁에 놓고 아버지 볼펜을 집었다. 세 자루를 눌러 보고 나오는 걸 찾았다. 그러고 해 지기 전에 걸레를 들고 2층에 올라가 바깥방 바닥을 닦았다. 장롱 문도 열어 두었다. 5년 동안 열 일이 없던 문이었다. 안에서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7시에 유리문 밖에 흰 승용차가 섰다. 보라는 시계를 봤다. 7시 5분. 5분 빠르니까 7시였다. 지운이 조수석에서 내리고, 뒷자리에서 상자 세 개를 꺼냈다. 운전석에서 누가 손을 흔들고 차는 바로 갔다. 골목이 좁아서 오래 설 수 없었다.지운은 상자 두 개를 포개 들고 하나를 발로 밀어 문 앞까지 왔다. 보라가 문을 열어 줬다. 운동복은 아침 그 운동복이었다."그게 다예요?""네."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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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셋째 계단
목요일 새벽에는 뒷문 소리가 안 났다. 대신 계단 소리가 났다. 5시 40분, 보라가 두 번째 배달 기사 국밥을 뜨고 있을 때 가게 안쪽 계단에서 발소리가 내려왔다. 열두 계단인데 열한 번 소리가 났다. 보라는 세고 있지 않았는데 세어졌다.지운은 솥 앞자리에 앉았다. 어제 그 운동복이었다. 머리가 젖어 있었다. 찬물로 감은 머리였다."두 그릇이요?""네."보라는 두 그릇을 한 번에 안 떴다. 한 그릇을 놓고, 그 그릇이 비면 또 떴다. 지운은 첫 그릇을 돌려 놓고, 숟가락을 세워 젓고, 국물을 세 번 떠먹었다. 보라는 그걸 안 보고 파를 썰었다. 배달 기사 하나가 "저 양반 또 왔네" 했다. 다른 하나가 "2층 산대" 했다. 시장은 하루면 다 알았다.지운은 밥값을 내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비번이라고 했다. 보라는 비번이 뭔지 묻지 않았다. 점심때 지운이 시장 끝 이불집에서 이불을 사 들고 왔다. 회색이었다. 꽃무늬 이불은 저녁에 개어져서 보라 방문 앞에 놓여 있었다. 개킨 모양이 반듯했다. 보라는 그 이불을 들고 한참 서 있다가 장롱에 넣었다. 「각이 섰네.」 그날 밤 벽 너머에서는 라면 봉지 소리가 안 났다. 가게 불로 끓이라고 했는데 가게에도 안 내려왔다. 보라는 그게 신경 쓰여서 신경 안 쓰기로 했다. 벽 너머는 10시에 조용해졌다.◎금요일 새벽에는 아무 소리도 안 났다.4시 50분에 보라가 불을 켜고 솥에 인사를 하고, 5시 반에 문을 열고, 5시 40분이 되고, 6시가 됐다. 계단은 조용했다. 바깥방 창 쪽에서 아무 기척이 없었다. 보라는 두 그릇을 안 떴다. 뜰 사람이 없으니까 안 떴다. 그게 전부였다.황복례가 7시에 멸치 상자를 들고 와서 가게를 한 바퀴 둘러봤다."총각 어디 갔냐.""몰라요.""첫날부터 외박이냐.""이모. 소방관이에요.""소방관은 외박해도 되냐."보라는 대답을 안 하고 깍두기를 썰었다. 도마 소리가 조금 컸다. 황복례가 그 소리를 듣고 입을 다물었다. 보라도 자기 도마 소리가 큰 걸 알았다. 알아서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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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숟가락 먼저
월요일 5시 20분에 유리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보라는 솥을 젓다가 돌아봤다.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자애가 문 밖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에 알바 종이를 보고 들어왔던 아이였다. 윤소정, 스물셋, 휴학 중. 보라가 물어본 건 그 셋이었고 소정이 말한 건 그 열 배였다.문을 열어 줬다."5시 반이라고 했는데.""일찍 오면 좋을 것 같아서요. 첫날이잖아요.""첫날이라 일찍 오는 사람은 둘째 날 늦어.""안 늦어요. 저 버스 첫차 탔어요."보라는 앞치마를 하나 던져 줬다. 보라국밥 앞치마는 끈이 길었다. 허리 뒤로 돌려서 앞으로 가져와 두 번 매듭을 지어야 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맸고, 보라도 그렇게 맸다. 뒤에서 묶으면 솥에 몸을 붙일 때 매듭이 걸렸다. 소정은 끈을 뒤로 돌려서 뒤에서 묶었다."앞에서.""네?""끈을 앞으로 가져와서 앞에서 묶어. 뒤에 매듭 있으면 솥에 걸려."소정은 풀고 다시 묶었다. 이번에는 앞으로 가져오긴 했는데 한 번만 묶었다. 보라가 끈을 잡아당기자 풀렸다."두 번.""두 번이요."세 번째에 됐다. 보라는 소정 허리의 매듭을 손가락으로 한 번 눌러 보고 됐다고 했다. 소정이 매듭을 내려다봤다."사장님 앞치마는 왜 안 풀려요?""8년 묶었으니까.""8년 동안 혼자 하셨어요?""혼자는 5년."소정이 뭘 더 물으려다 말았다.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보라는 그게 마음에 들어서 그릇 놓는 칸, 깍두기 통, 뚝배기 데우는 자리를 한 번씩만 가르쳐 줬다. 소정은 한 번에 외웠다. 외우고 나서 자기가 외운 걸 소리 내어 다시 말했다. 보라가 고개를 끄덕이면 다음 걸 물었다. 5시 반이 되기 전에 가게 안을 다 외웠다.◎5시 40분에 계단 소리가 났다. 열한 번. 소정이 계단을 봤다. 지운이 내려왔다. 남색 근무복이었다. 근무복이면 소방서 가는 날이었다. 소정이 보라 옆구리를 팔꿈치로 쳤다."2층 분이세요?""그래.""키가.""커."지운이 솥 앞자리에 앉았다. 소정이 먼저 인사했다."윤소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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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결혼은 안 합니다
4월 18일 토요일은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다음 날이 상인회 봄 야유회였다. 시장 골목에 돗자리 뭉치, 생수 상자, 휴대용 버너가 나와 있고, 그걸 어디에 둘지로 아침 6시부터 말이 많았다. 말이 많은 사람들은 보라국밥에 모였다. 아버지 때부터 시장 모임은 여기서 했다. 테이블 여섯 개 중 창가 둘을 붙이면 상인회가 됐다.황복례가 공책을 펴 놓고 명단을 적었다. 올해 야유회 준비는 황복례가 맡았다. 맡겼다기보다 황복례가 맡겠다고 해서 아무도 말을 못 했다."방앗간, 떡 두 말. 생선, 미자 니가 알아서. 과일 집, 사과 한 상자. 보라국밥, 국물 두 통에 깍두기.""국물은 새벽에 뜰게요. 통은 저녁에 미리 씻어 놓고.""떡 두 말이 뭐냐. 세 말 해라."복순 할머니였다. 언제 들어왔는지 솥 앞 둘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황복례가 "할머니, 두 말이면 남아요" 했고 할머니가 "남으면 싸 가지" 했다. 황복례는 공책에 두 말을 지우고 세 말로 썼다. 복순 할머니는 그걸 보고 지운을 봤다."총각도 가냐.""일이 있습니다.""가라. 떡 들 사람이 없어.""떡은 제가 아침에 방앗간에서 트럭까지 옮기겠습니다. 가는 건 못 갑니다."할머니는 알았다고 했다. 알았다고 하고 "만수가 떡을 잘 들었는데" 했다. 보라는 국자를 잠깐 세웠다 다시 저었다. 미자 이모가 할머니 앞에 물을 놓았다. 황복례가 공책에서 고개를 들었다."보라야, 너도 가라.""가게 있어요.""하루 닫아.""아빠도 안 갔어요.""그래서 니가 이 모양이다."보라는 대꾸하지 않고 솥을 저었다. 소정이 공책을 들여다보다가 "저도 가요?" 했고, 황복례가 "알바도 상인이냐" 했고, 미자 이모가 "데려가, 젊은 애 하나는 있어야 사진이 산다" 했다. 소정은 가는 걸로 됐다.지운은 솥 앞자리에 앉아 둘째 그릇을 먹고 있었다. 비번이었다. 어제 당번이었고 5시 40분에 내려와서 지금은 7시 10분이었다. 두 그릇을 먹는 데 보통 20분이면 되는데 오늘은 길었다. 황복례가 지운 쪽으로 몸을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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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찢어진 장
비는 새벽부터 왔다. 보라가 4시 50분에 뒷문을 열었을 때 골목 바닥이 벌써 젖어 있었다. 솥에 인사를 하고 불을 올리는데 빗소리가 솥 소리를 덮었다. 비 오는 날은 국물 냄새가 밖으로 못 나갔다. 가게 안에 고였다. 유리문 안쪽에 김이 서려서 골목이 안 보였다.5시 40분에 계단 소리가 안 났다. 지운은 비번인데 새벽에 나갔다. 어젯밤에 벽 너머로 "내일 아침에 교육이 있어서 못 내려옵니다" 했다. 벽 너머로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보라는 "알았어요" 하지 않았다. 벽에 대고 대답하는 게 이상해서였다. 그런데 지운은 보라가 들은 걸 아는 것처럼 더 말을 안 했다.소정이 5시 반에 왔다. 머리가 젖어 있었다. 보라는 수건을 던져 줬다. 소정은 머리를 닦고 앞치마를 묶었다. 두 번. 이제는 보라가 안 봐도 됐다."사장님, 손님 오겠어요?""와. 비 와도 밥은 먹어."왔다. 셋 왔다. 6시에 배달 기사 하나가 비옷을 입은 채로 들어와서 창가에서 먹었다. 늘 오는 둘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비 오면 안 나와" 했다. 7시에 복순 할머니가 비닐을 머리에 쓰고 와서 솥 앞 둘째 자리에 앉았다. 비닐을 벗어서 식탁에 놓고 빗물을 손으로 털었다."비 오는 날은 만수가 뼈를 더 넣었어.""뼈 받는 날이 아니에요, 할머니. 오늘 수요일이에요.""그래서 더 넣었다고. 비 오면 사람이 안 오니까 남은 뼈를 다 넣었어. 그날 국물이 제일 진했지."보라는 국자를 들고 그 말을 생각했다. 그런 얘기는 공책에 없었다. 할머니는 국밥을 반만 먹고 반은 남겼다. 비 오는 날은 입맛이 없다고 했다. 나가면서 비닐을 다시 쓰고 "총각은?" 했다. 보라가 "교육이요" 했다. 할머니는 "소방관이 뭔 교육을 또 받아" 하고 갔다. 8시에 모르는 남자가 들어와서 "여기 큰길 나가는 데가 어디예요" 하고 물었다. 길을 잘못 든 택시 기사였다. 보라는 길을 가르쳐 주고, 남자는 가르쳐 준 값으로 국밥을 먹고 갔다.그게 끝이었다. 9시가 되자 가게에 보라와 소정만 남았다. 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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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사이렌
5월 2일 토요일, 달력 생선이 바뀌었다. 조기에서 병어로. 보라는 4시 50분에 달력을 한 장 넘기고 솥 앞에 섰다. 넘기고 나니까 4월이 없었다. 4월 1일에 종이가 붙어 있던 유리문이, 지금은 아무것도 안 붙어 있는 유리문이 됐다. 그 한 달이 한 장이었다."오늘도 잘 부탁한다."5시 40분에 계단 소리가 열한 번 났다. 비번이었다. 지운은 솥 앞자리에 앉았다. 두 그릇. 돌리고, 세우고, 세 번. 보라는 이제 그걸 보고도 국자를 안 멈췄다. 멈추지 않는 연습을 한 달 했다.소정이 "오늘 날씨 좋대요" 하면서 유리문을 활짝 열었다. 5월 바람이 들어왔다. 국물 냄새가 골목으로 나갔다. 아버지는 이걸 "간판 내건다"고 했다. 냄새가 간판이었다.지운은 두 그릇을 먹고 밥값을 내고, 거스름돈을 두 손으로 받고, "누나, 잘 먹었습니다" 하고, 2층으로 안 올라갔다. 걸레를 집었다."비번.""네.""오늘은 바닥 벌써 밀었어요.""그럼 설거지요.""그릇 아직 안 나왔어요.""나오면요."지운은 걸레를 든 채로 솥 옆에 섰다. 소정이 그걸 보고 웃음을 참았다. 보라는 안 참았다. 참을 것도 없었다. 그냥 솥을 저었다.◎9시에 복순 할머니가 왔다. 방앗간 떡 한 접시를 또 들고 왔다. 가래떡이 아니라 쑥떡이었다. 5월이라 쑥이 났다고 했다. 할머니는 솥 앞 둘째 자리에 앉아서 국밥을 받았다. 접시는 지운 앞으로 밀었다. 지운은 설거지하던 손을 닦고 쑥떡 하나를 집어 먹었다. 이번에는 뜨거울 때였다. 할머니가 "뜨거울 때 먹네" 하고 좋아했다. 소정이 하나 집으려다가 할머니 눈치를 보고 손을 뺐다. 할머니가 "너도 먹어" 해서 다시 집었다.지운은 그때 뼈 상자를 옮기고 있었다. 월요일에 받은 뼈가 아니라 토요일 아침에 특별히 들어온 뼈였다. 뼈 집 트럭이 골목 입구에 서면 보라가 상자를 끌고 오는 게 5년 일이었다. 오늘은 지운이 들고 왔다. 두 상자를 포개서. 가게 안으로 들고 와서 냉장고 옆에 놓고, 허리를 폈다. 창에서 들어온 빛이 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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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저녁 장사
"사장님, 저녁도 해요."소정이 그 말을 꺼낸 건 5월 9일 토요일 아침 7시였다. 솥 앞자리는 비어 있었다. 지운은 5시 40분에 두 그릇을 먹고 나갔다. 비번인데 소방서에 간다고 했다. 지난주 창고 불 보고서를 다시 쓰라고 해서 그걸 내러 간다고 했다. 보고서를 비번에 내러 가는 사람이었다."안 해.""어제 3시에 문 닫는데 네 명이 와서 돌아갔대요. 미자 이모가 봤대요.""네 명이 아니라 마흔 명이 와도 안 해.""왜요.""아빠도 안 했어. 새벽 장사가 저녁까지 하면 새벽이 죽어. 4시 50분에 일어나려면 9시엔 자야 돼.""알바를 더 쓰면요.""알바가 솥을 봐?"소정이 입을 다물었다. 다물고 나서 작게 "그래도요" 했다. 보라는 못 들은 척했다. 못 들은 척하는 건 보라가 잘하는 거였다. 황복례가 들어오다가 그 말을 듣고 창가에 앉았다."저녁 장사 하자고? 보라야, 해라. 저녁에 국밥집 불 켜지면 골목이 산다.""이모는 저녁에 집에 가잖아요.""가지. 가면서 불 켜진 거 보면 좋지.""보기만 좋은 건 안 해요."황복례는 국밥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미자 이모가 생선 상자를 들고 지나가다 문틈으로 "뭔 얘기냐" 했고, 소정이 "저녁 장사요" 했고, 미자 이모가 "그럼 생선도 저녁에 팔아야겠네" 하고 갔다. 가게 하나가 저녁을 하면 골목이 다 저녁을 해야 했다. 보라는 그게 싫었다. 싫다기보다 무거웠다. 소정은 그릇을 닦았다. 아침은 그렇게 지나갔다.◎1시에 소정이 안 갔다. 깍두기를 담그는 날이었다. 무를 절이고, 양념을 하고, 통에 넣는 걸 소정이 배우고 싶다고 했다. 보라는 "배워서 뭐 하게" 했는데 소정은 "그냥요" 했다. 그냥이라는 말에 보라는 약했다. 아버지가 그냥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무 세 통을 절이는 동안 가게에 둘만 있었다. 보라는 3시에 문을 닫았다. 소정은 양념을 버무렸다. 손이 빨갰다. 고무장갑을 꼈는데도 손목 위까지 빨갰다."사장님, 왜 손으로만 해요? 기계 쓰면 되잖아요.""손이 아는 거 기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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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외상장부
계산대 밑에서 상자가 나왔다. 5월 셋째 주 목요일, 소정이 계산대 밑을 치우다가 꺼냈다. 종이 상자였다. 먼지가 앉아서 손자국이 났다."사장님, 이거 뭐예요?"보라는 솥을 젓다가 돌아봤다. 상자를 보고 알았다. 아버지 외상장부였다. 돌아가시고 나서 계산대 밑에 넣어 두고 5년 동안 펴 본 적이 없었다. 뚜껑을 열 일은 있어도 장부를 펼 일은 없었다. 보라는 외상을 안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로 외상은 끝났다."장부야. 아빠 거.""열어 봐도 돼요?""이따가. 손님 빠지면."8시에 복순 할머니가 왔다. 솥 앞 둘째 자리에 앉아서 앞치마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명함만 한 종이. 할머니는 그걸 두 손으로 냈다. 보라도 두 손으로 받아서 계산대 옆 통에 넣었다. 통에는 그런 종이가 열 장쯤 들어 있었다. 소정은 그 통을 처음 봤다. 한 달 넘게 있으면서 처음 봤다. 계산대 옆에 늘 있던 통이었다. 소정이 그걸 보고 뭐냐고 물으려다가 할머니 앞이라 안 물었다. 할머니는 국밥을 받고 "오늘은 내 돈으로 먹는 거다" 했다. 보라가 "네" 했다. 할머니 돈이 아니었다. 그래도 할머니 돈이었다. 둘 다 맞았다.손님은 9시에 빠졌다. 지운은 솥 앞자리에서 두 그릇을 먹고 "누나, 잘 먹었습니다" 하고 걸레를 들고 있었다. 보라는 "금지" 했다. 비번이었다. 보라는 상자를 창가 식탁에 올렸다. 뚜껑을 열었다. 공책이 수북했다. 다 똑같은 줄 공책이었다. 표지에 아버지 글씨로 «외상», 그 밑에 매직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하나. 그게 다였다. 몇 년 것인지는 안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걸 안 적었다. 순서는 아버지 머리에 있었다.보라는 한 권을 폈다. 아버지 글씨가 줄줄이 있었다. 눌러 쓴 글씨.«황씨네 국밥 2 — 갚음»«방앗간 — 떡으로»«택시 김 씨 국밥 1»«택시 김 씨 국밥 1 — 또»«생선 미자 국밥 3 — 갈치로 받음»소정이 옆에서 읽다가 웃었다."다 아는 사람들이네요.""시장이니까.""갈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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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배경 화면
5월 23일 토요일은 5시에 벌써 밝았다. 보라가 4시 50분에 불을 켰을 때 유리문 밖이 회색이었고, 솥에 인사를 하고 돌아서니까 파랬다. 해가 길어졌다. 아버지는 이맘때를 "불 켜는 게 아까운 때"라고 했다. 그래도 켰다. 켜는 게 인사였다.5시 40분에 계단 소리가 열한 번 났다. 비번. 두 그릇. 돌리고, 세우고, 세 번. 지운은 먹고 나서 "누나, 잘 먹었습니다" 했고, 보라는 "금지" 했고, 지운은 휴대폰을 식탁에 놓고 걸레를 들었다. 그 두 마디는 이제 인사였다. 둘 다 그걸 알았고 둘 다 안 고쳤다. 운동복 주머니에 넣으면 바닥 닦을 때 떨어진다고 했다. 식탁에 놓는 게 두 주째였다. 보라는 그 휴대폰을 본 적이 없었다. 남의 휴대폰은 안 보는 거였다.소정이 5시 반에 와서 앞치마를 묶고, 7시에 황복례가 멸치를 들고 오고, 8시에 복순 할머니가 쿠폰을 두 손으로 냈다. 할머니는 설거지하는 지운 등을 보고 "총각은 밥 먹었냐" 했고, 지운이 "두 그릇 먹었습니다" 했고, 할머니가 "두 그릇으로 되냐, 그 키에" 했다. 지운이 "됩니다" 했다. 할머니는 안 믿는 얼굴로 국밥을 먹었다. 토요일 아침은 평일보다 손님이 많았다. 9시까지 솥 앞자리 빼고 다 찼다. 솥 앞자리는 지운이 먹고 나간 뒤에 비어 있었다. 비번 날은 비워 둘 이유가 없었는데 소정이 거기 앉으려는 손님을 창가로 보냈다. 보라가 시킨 게 아니었다. 소정은 두 달이 안 돼서 보라가 안 시킨 것까지 했다.◎9시 반에 식탁 위에서 휴대폰이 울렸다.지운 거였다. 소리는 안 나고 떨렸다. 식탁 위에서 떨리면서 조금씩 움직였다. 지운은 설거지통 앞에 있었다. 손에 거품이 묻어 있었다. 소정은 창가에 그릇을 나르고 있었다. 보라가 제일 가까웠다.휴대폰은 떨리면서 식탁 가장자리로 갔다. 떨어지기 전에 보라가 집었다."지운 씨, 전화."지운이 돌아봤다. 손에 거품. 보라는 휴대폰을 들고 지운 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다 화면을 봤다. 보려고 본 게 아니었다. 들고 있으면 보였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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