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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화령
이렇게 당황한 반아영의 모습은 처음 봤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것도 나를 위해.

순간 넋이 나갔다. 그녀가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는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윽고 동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아빠도 피가 나요. 무서워요...”

반아영이 돌아보니 임우혁도 피가 멈추지 않는 팔을 붙잡은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방금 유리 조각이 튀어 그의 팔에 두 군데 작은 상처를 냈다.

“우혁아,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

반아영은 주저 없이 나를 내버려둔 채 임우혁을 부축하며 자리를 떠나려 했다.

“아영아, 고진우 씨도 같이 데려가자. 저 사람 상처가 더 심하니까.”

임우혁의 말은 동호의 울음소리와 함께 이어졌다.

“안 돼요, 아빠. 나 피 무서워요. 저 사람 싫어요!”

나를 보는 동호의 얼굴에 거부감이 가득했다.

임우혁은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고 반아영을 바라보았다.

몇 초 만에 반아영은 결단을 내렸다.

“안 돼, 동호는 피를 싫어하니까 같이 갈 수 없어. 신경 쓰지 마. 고진우는 소방관이라 응급처치할 줄 알고 그가 알아서 잘할 수 있어. 우린 이만 가자.”

반아영은 동호를 안고 임우혁의 손을 잡아끌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걸어갔다.

선홍빛 피가 내 눈앞을 흐릿하게 했다.

피와 눈물이 섞여 얼굴 가득 흘러내렸다.

결국 식당 주인이 사람을 보내 나를 병원 응급실로 실어 보냈다.

다행히 큰일은 아니었고 외상일 뿐이라 붕대를 감으니 괜찮아졌다.

몸보다 더 아픈 마음은 이제 감각조차 사라졌다.

반아영이 식당에서 주저 없이 나를 버리고 가던 모습은 마치 수만 개의 바늘이 내 심장을 찔러 구멍이 숭숭 뚫리고 피가 철철 흐르는 고통을 선사했다.

무뎌진 얼굴로 병상에 누운 나는 반아영에 대한 어떠한 기대도 품지 않은 채 단지 내일 산불 지원에 지장이 없도록 부상이 잘 회복되길 바랐다.

그날 밤 나는 비몽사몽인 상태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내내 뒤척거렸다.

휴대폰은 밤새 조용했다.

반아영은 나에게 걱정이 담긴 말 한마디도 보내지 않았다. 마치 임우혁과 동호만이 그녀의 전부인 듯 나는 그저 아무 상관 없는 행인 취급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대장의 전화에 잠에서 번뜩 깨어났다.

“여보세요, 대장.”

“고진우, 준비됐어?”

“네, 지금 당장 복귀할 수 있습니다.”

머리는 어젯밤만큼 아프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여 보니 별문제 없었다.

반아영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한낱 평범한 내가 고결한 그녀를 상대로 뭘 어떡하겠나.

“좋아, 서두를 것 없어. 산불 상황이 심각해서 대원들은 상부에서 보내는 소방 장비를 기다리고 있어. 장비가 도착하면 바로 출동할 거야. 오후에 통보가 내려올 테니 정확한 시간은 그때 다시 알려줄게.”

전화가 끊긴 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반나절의 시간이 더 생겼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집으로 갈까? 됐어. 떠나기 전에 굳이 망신을 자처할 필요는 없지.’

그때 반아영이 전화를 걸어왔다.

“고진우, 당분간 집에 오지 마. 동호가 널 싫어해. 네가 나타날 때마다 아빠가 기분이 안 좋거나 사고를 당한다고 하더라. 아이가 아직 어리니까 적응할 시간을 줘. 호텔 예약해 뒀고 짐은 집사에게 갖다주라고 했어. 그동안 임우혁이 우리 집에서 머물 거야. 그래도 네 방에서 지내니까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어. 그건 걱정하지 마.”

반아영은 여전히 나에게 통보만 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게 알고 난 회의가 있어서 끊을게.”

통화가 끊긴 후 들리는 신호음이 내 가슴을 쿡쿡 쑤셨다.

‘반아영, 점점 더 선을 넘는구나.’

처음 내가 수상한 점을 눈치챘을 때부터 아이를 입양하고 그 다음엔 당연하다는 듯 임우혁을 집에 들이더니 이젠 나를 쫓아내기까지 했다.

‘이제 임우혁과의 관계를 온 세상에 알리는 것만 남았나?’

하지만 고결한 아내는 나 같은 천한 인간에겐 털어놓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어쩌겠어, 5년의 세월 따위 개나 줘버리라지.’

이제 곧 화재 현장으로 향하는 터라 나도 마음을 비우고 굳이 그들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퇴원 후 호텔에 가서 캐리어를 챙겼다.

그런데 집사가 반아영의 노트북까지 가져다주었다.

내 물건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이 노트북은 내가 반아영에게 준 기념일 선물인데 당시 실수로 검은색을 샀는데도 그녀는 싫은 기색 없이 지금까지 써왔다.

이 노트북은 그녀의 업무용이라 원래는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에 반아영과 연애할 때 찍은 사진과 영상이 가득한 게 떠올랐다.

당시 반아영이 종교를 믿기 전이라 우리도 달콤한 시간을 보냈었다.

떠나는 김에 괜히 거슬리지 않게 조금의 미련도 남기지 않으려 노트북 속 모든 흔적을 지우려 했다.

그런데 켜자마자 반아영의 카톡이 자동 로그인되더니 대화 목록 맨 위에 고정된 남자 이름이 눈에 거슬렸다.

임우혁이었다.

반아영은 그를 상단에 고정해 둔 것도 모자라 특별히 따로 이름을 저장해 두었다.

[혁]

그 한 글자가 그토록 의미심장하게 느껴질 줄이야.

그런데 나는...

매일 반아영에게 수십 통의 메시지를 보내도 대화 목록에 내 흔적이라곤 없었다.

저릿한 가슴을 안고 대화 목록을 위로 올려보았다.

임우혁은 반아영이 유일하게 상단에 고정해둔 사람이었고 그 밑에는 회사 업무 채팅방, 부사장이나 클라이언트가 보였다.

더 밑에는 종교 수행 모임, 수행 동호회, 사원 주지 스님의 연락처가 있었다.

마지막에야 내가 있었는데 내 위로 족히 100명은 더 되어 보였다.

카톡에 설정해 둔 내 닉네임이 눈에 확 들어왔다. 결혼한 지 5년이나 됐는데 이름으로 저장해둘 가치조차 없었던 건지.

더 가슴 아픈 건 반아영이 나와의 채팅창만 알람을 껐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매일 수십 개의 메시지를 보내도 가끔 한두 글자로 답장하던 거였다.

아내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순간도 나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행복하다고 믿었던 결혼생활이 하루아침에 엄청난 조롱이 되어버렸다.

한 글자로 저장된 이름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괴물이 되어 내게 달려들더니 내 심장을 산산조각 내고 저 심연 밑바닥으로 내던져 버렸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동시에 뼛속까지 시린 고통이 밀려왔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지만 반아영의 카톡이 울렸다.

임우혁이 보낸 메시지였다.

연달아 열통이 넘는 메시지엔 반아영과 임우혁이 함께 학교에서 동호와 재미있는 경기에 참여한 사진이었다.

첫 장은 반아영, 임우혁, 동호가 옷을 맞춰 입고 손을 잡은 채 웃으며 찍은 사진이었다.

두 번째는 반아영과 임우혁이 바짝 붙은 채 동호를 들어 올려 풍선을 터뜨리는 모습이었고 세 번째는 동호가 작은 과자 한 조각을 들고 있자 두 사람이 함께 먹으려 다가가면서 입술과 입술 사이 거리가 고작 2, 3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모습이었다.

남은 사진들도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하나같이 친밀하기 그지없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차갑고 고고하게만 굴던 아내가 이처럼 격식을 차리지 않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사진 오른쪽 아래에는 워터마크가 찍혀 있었는데 찍힌 사진이 고작 10분 전이었다.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집에 오지 못하게 한 이유가 이거였어? 내가 수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반아영, 넌 분명 회사에서 회의 중이라고 했잖아. 종교를 믿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그런데 왜 우리 결혼 생활은 온통 거짓말뿐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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