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8장

Author: 슬이
궁으로 돌아가는 길, 모설희는 서제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강연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제 관자놀이쪽 장신구를 가만히 만지작거리며, 간사하면서도 오만한 미소를 흘렸다.

"언니, 명목뿐인 태자비 자리를 쥐고 있으면 무얼 합니까? 전하의 마음을 차지한 것은 결국 저인 것을요. 예나 지금이나 연모 받지 못하는 인간만큼 처량한 건 없는 법이지요."

모설희가 강연우의 귓가로 은밀하게 상체를 기울였다.

"요 며칠 흘러가는 꼴을 보아하니 언니께서는 영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시는 듯싶어… 제가 오늘, 특별히 판을 벌였습니다. 전하의 심장 깊숙한 곳에 박힌 이가 누구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시라고요."

순간, 강연우의 가슴 저편에서 서늘한 조짐이 일었다.

모설희가 제게 해를 가하려 들 줄 알았다. 그렇기에 옷소매 틈새로 서슬 퍼런 비수까지 숨겨두지 않았던가. 여차하면 황실의 안위 따위 처박아 두고 어전에서 함께 핏빛을 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마차가 달리는 내내 모설희는 기이할 정도로 얌전히 있었다. 단 한 자락의 미동조차 없이.

대열이 궁으로 이어지는 산길 초입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마차 외부에서 돌연 천지를 찢는 듯한 고함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앙!

어디선가 날아든 날카로운 화살 한 대가 마차의 두꺼운 휘장을 단숨에 찢어발기며 강연우의 귀밑을 스쳐 나무에 깊숙이 박혔다. 뒤이어 사방에서 호위무사들의 다급한 고함이 난무했다.

"자객이다! 전하를 호위하라!"

강연우가 거칠게 휘장을 걷어 젖혔다.

맨 후미에 늘어선 마차 주위로 번뜩이는 그림자가 사정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호위무사들은 이미 검은 복면을 쓴 자객들과 뒤엉켜 가차 없는 살행을 벌이고 있었다.

그 혈로의 중심에서 서제겸의 자태는 유독 눈이 시렸다.

장검을 휘두르는 그의 발걸음마다 자객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나갔다.

그러나 살육이 종극에 달해 가던 그 순간. 강연우의 시선 끝에 기이한 광경이 맺혔다.

모설희가 돌연 사지를 떨며 자객 중 한 명을 향해 스스로 몸을 날린 것이었다. 그것은 제 목숨을 건, 자해 공갈이나 다름없었다.

새하얗게 날이 선 칼이 목덜미에 거칠게 닿는 순간에도, 모설희는 마차 벽에 기댄 강연우를 향해 조롱 섞인 실소를 날리고 있었다.

"그 여인을 놓아주어라!"

순간 서제겸이 우뚝 멈춰섰다.

검끝이 맥없이 바닥으로 처박히고, 사내의 눈자위가 핏발로 시뻘겋게 찢어질 듯했다. 본래 무공이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는 사내였으나 하필 제 명줄과도 같은 여인이 적의 손아귀에 잡혔으니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때, 자객이 냉소를 터뜨렸다.

"이 년을 살리고 싶으냐? 좋다."

그는 모설희의 머리채를 한 움큼 쥐고 강제로 고개를 꺾어 올렸다.

"다만, 네놈의 고결한 육신에서 대가를 좀 받아내야겠구나."

모설희는 눈물을 흩뿌리며 가련하게 비명을 질렀다.

"제겸 오라버니… 살려주셔요… 저 무서워요…"

장검을 움켜 쥔 서제겸의 손목 위로 시퍼런 힘줄이 터질 듯한 기세로 돋아났다. 그럼에도 차마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이윽고 자객이 그 꼴을 비웃으며 느릿하게 이빨을 드러냈다.

"듣자하니 이 년이 전하께서 목숨보다 아끼는 보물이라던데?"

서제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모설희만을 두 눈으로 집요하게 쫓을 뿐이었다.

"좋다! 그렇다면 네놈의 손가락 한 토막을 내놓거라!"

지척에 선 채 그 모습을 응시하던 강연우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파르르 떨려왔다.

한편, 서제겸은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제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냉혹하게 굳은 낯빛으로 다섯 손가락을 완전히 펼쳐 보였다.

"어느 손가락을 원하느냐."

자객이 살기를 띠며 눈을 가늘게 떴다.

"새끼손가락이다."

콰드득!

서제겸은 서늘하게 웃어 보이더니 오른손에 쥔 장검을 거꾸로 뒤집어 그대로 제 손등을 내리쳤다.

푸학!

검붉은 선혈이 공중으로 무참히 뻗어나갔다.

잘려 나간 한 토막의 손가락이 둔탁한 파음과 함께 차디찬 눈밭 위로 툭 떨어졌다.

이윽고 하얀 눈밭 위로 눈이 멀 것 같은 선홍빛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넋 놓고 있던 자객이 막 무어라 입을 열려던 순간, 호위무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그의 목을 꺾어 누르며 상황을 종결시켰다.

그제야 구속에서 풀려난 모설희가 비틀거리며 서제겸의 품으로 황급히 안겨 들었다.

"제겸 오라버니! 어찌 이리 무모하십니까! 어찌 저 같은 것을 위해 이런 미련한 짓을…!"

서제겸의 안색은 이미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애써 다정한 목소리를 쥐어짰다.

"네가… 무사하다면, 나는 그것으로 되었다…"

그 말을 끝으로 서제겸은 바닥으로 사정없이 고꾸라졌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이다.

한편, 강연우는 그 자리에 붙박인 채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았다.

하얗게 얼어붙은 대지 위로 붉게 번진 선혈의 흔적을, 의식을 잃어가는 순간에도 모설희의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쥐고 있던 서제겸의 손끝을,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 속에서 황급히 그를 둘러싸고 지혈을 시도하는 어의들의 다급한 손길을.

그 순간, 그녀의 입술 사이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것이었구나. 모설희가 그토록 나에게 각인시키고 싶어 했던 잔혹한 연극의 결말이.'

그리고 서제겸은, 이번에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기대에 부응해 주었다.

'서제겸. 네가 모설희를 이토록 뼛속 깊이 연모하는구나. 저 계집에게 미쳐버린게지.'

동궁은 연일 혼란스러웠다. 수십 명의 어의들이 탕약을 들고 문턱이 닳도록 처소를 들락거렸다.

그때, 청음이 눈시울이 붉게 짓무른 채 처소로 걸어 들어왔다.

"아가씨… 전하의 잘려 나간 손가락은 다행히 접합이 끝났다 하옵니다…"

그녀는 끝내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렸다.

"허나… 정신을 차리자마자 가장 먼저 행한 짓거리가, 제 짓물러진 육신을 돌보는 일도 아니고 고작 설희 낭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소인은 도저히 억울하고 기가 막혀 숨을 쉴 수가 없사옵니다! 아직 국혼도 치르지 않고 동궁에 들지도 않았거늘, 후일 정말로 정식 입궁을 하신다면 대체 아가씨께 얼마나 모진 가해와 핍박을 가하려 이리 구는 것인지…!"

강연우는 그저 가만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윽고 오래된 상자에서 정갈하게 싸인 보따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청음의 여윈 손에 조용히 쥐어주었다.

"청음아, 나는 동궁에 들지 않을 것이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아득한 이별의 끝   제25장

    북적의 초원에 열 번째 봄눈이 내리던 날, 강연우는 화려한 붉은 군막 안에서 남녀 쌍둥이를 낳았다.제갈환은 그녀의 땀에 젖은 손을 꼭 쥔 채 신생아의 첫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눈시울은 지난날 전장에서 깊은 부상을 입었을 때보다도 더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친히 탯줄을 자르고는, 두꺼운 모피로 감싼 아이를 그녀의 눈앞으로 안아 들었다. "우리 딸 좀 보거라. 너를 어찌 이리도 쏙 빼닮았는지." 강연우가 다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참, 벌써부터 딸만 편애하시는군요." "그거야 우리 딸이 너를 똑닮았으니까 그러지."강연우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다가, 상처가 당겨와 나지막이 신음을 내뱉었다. 순간, 제갈환은 깜짝 놀라 바로 몸을 숙였다. "어디가 아픈 것이냐? 어의를 부르겠다!" "전 괜찮아요." 그녀는 제갈환의 손을 끌어당겨, 손가락 마디마다 배어있는 굳은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보다 남량은... 근래에 무슨 소식이 있나요?" 제갈환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저께 들은 바에 따르면, 남량의 새 황제는 정사를 완전히 손에서 놓았고, 각지의 번왕들은 군사를 일으켜 대란을 일으켰으며, 강산에는 유랑민과 굶주림으로 죽은 시체만이 널려있다고 했다. "서제겸 그 자는..."제갈환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끝내 꾹 삼켰다. 그 사람은 온종일 스스로를 차가운 동궁에 가둔 채, 여인의 초상화 한 장만을 마주하고 홀로 앉아 있다 했다. 이미 뼈만 남아 몰골이 흉측하기 그지없다는 소문이었다.사흘 뒤, 남량의 국경에 드높은 봉화가 타올랐다. 제갈환은 검은 갑옷을 입고 왕부 앞에 서서 출정을 선언했다. 강연우의 손에 장군을 거느릴 권력의 상징인 호부를 쥐여주었다."너에게 북적을 맡기겠다. 내 남량을 평정한 뒤 돌아와, 너와 함께 새로 심어둔 작약을 감상하겠다."강연우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미간에 서린 근심을 입술로 훔쳐냈다. "대왕 전하, 만약 서제겸이 스스로 항복한다면...""알고 있다."그는 고개를 숙여

  • 아득한 이별의 끝   제24장

    제갈환이 나직하게 미소를 지었다.그의 요동치는 울대가 그녀의 쇄골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그야 당연하지. 이 물은 기험한 영천이라, 듣자하니 허리가 뻐근할 때 뜸을 뜨는 것보다 효과가 더 좋다 하였다."이윽고 그의 손길이 그녀의 미끈한 허리 뒤로 슬그머니 내려가, 은근한 힘으로 주물러대기 시작했다. "요근래 밤마다 깊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것을 보았는데, 혹여 몸이 피로한 것이냐?"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수증기 속에서, 강연우의 귓볼이 발그레하게 붉은빛으로 물들어 갔다. 그녀는 수줍은 듯 얼굴을 그의 단단한 어깨 오목한 곳에 파묻으며 나직이 웅얼거렸다. "이게 다 어떤 사내가 밤마다 굳이 저를 끌어안고 자려 하는 탓입니다.""너를 안고 자지 않으면 밤사이에 네가 시린 이불을 걷어차진 않을까 어찌 살피겠느냐."제갈환은 그녀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리더니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만히 문질렀다. "지난번 네가 기침을 해댈 때, 내 가슴이 아주 내려앉는 줄 알았다." 그의 입술이 온천의 아늑한 온기를 타고 포개어졌다.감미롭게 얽혀드는 숨결 사이로, 강연우는 그의 단단한 가슴속에서 쿵쾅거리는 맹렬한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그때, 정적을 깨고 아득히 먼 곳에서 가파른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이윽고 호위무사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왕 전하! 긴급히 아뢸 일이 있사옵니다!" 제갈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강연우가 도리어 그의 손등을 살그머니 눌렀다."가보십시오. 저는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녀는 따스한 샘물을 그의 얼굴에 가볍게 뿌렸다. "이리 춘정을 한가득 띤 얼굴로 정사를 논하러 가시면, 도리어 제가 철없이 굴어 경중을 모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제갈환은 그녀의 가냘픈 손가락 끝을 입에 물고 살짝 빨아당겼다. "내 금방 돌아올 터이니, 그때 마저 이어가지."말을 마치고 그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자리를 떠나갔다.한편, 강연우는 그 늠름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투명한 수

  • 아득한 이별의 끝   제23장

    "그렇다면 이 나라의 주인을 바꾸면 될 일이지요."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글자 하나 하나가 얼음 송곳처럼 꽂혔다.그 순간, 아득한 기억의 잔상이 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사지가 찢기는 듯했던 유배길, 강연우는 제 작은 등에 그를 업고 꽁꽁 얼어붙은 강을 건넜었다. 그녀의 투박한 삼베 신발 바닥이 얼음과 마찰하며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애처롭게 울렸었다. 가냘픈 등은 활처럼 휘어 부러질 듯 위태로웠으나, 그럼에도 그녀는 헐떡이는 숨결 사이로 미소를 지어 보였었다. "전하께서 무사하시다면 소첩은 그것으로 족하옵니다."한편, 황제는 비틀거리며 용상의 팔걸이를 붙잡았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핏줄기를 참지 못하고 바닥 위로 붉은 선혈을 흩뿌렸다. "네 이 놈... 이 고약한 불효자 같으니라고..."말을 다 맺지도 못한 채, 황제는 그대로 용상 위로 고꾸라지고 말았다.이윽고 문밖을 지키던 내관들이 벌떼처럼 밀려 들어왔다. 서제겸은 어의들이 황급히 황제를 받들어 올리는 아수라장을 그저 묵묵히 방관할 뿐이었다.잠시 후, 그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검은 옷자락이 바닥에 흩어진 찻잔 파편과 핏자국을 쓸어내렸다.한편, 천리 밖 북적의 왕부 안에는 금빛 장막이 새벽녘에 부는 바람을 맞아 흔들리고 있었다. 강연우는 곰 가죽으로 만든 방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달빛을 머금은 은은한 백색 의복 너머로 살짝 솟아오른 아랫배를 매만졌다. 그때 제갈환이 큰 걸음으로 군막 안에 들어왔다. 그의 검은 철 갑옷 위에는 미처 녹지 않은 눈송이가 하얗게 얹혀 있었다. 그는 군장도 풀지 않은 채 곧장 침상 곁에 무릎을 꿇고, 제 얼굴을 그녀의 배 위에 가만히 묻었다. "오늘 조회가 유독 길어졌다. 아이들이 너를 괴롭히지는 않더냐?""장난치지 마십시오." 강연우는 부끄러운 듯 나직하게 웃으며 그의 단단한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나 제갈환은 요지부동으로 몸을 떼지 않은 채, 짙은 속눈썹을 그녀의 고운 옷자락에 부벼댔다."내 귀에는 똑똑히 들리는데 어찌 그러는 것이냐? 아들

  • 아득한 이별의 끝   제22장

    제갈환이 상처를 추스르는 동안 서제겸이 수차례 알현을 청했으나, 번번이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았다.꼬박 한 달이 흐른 뒤에야 강연우는 마침내 그를 만나주었다.서제겸의 안색은 지독하게 초췌해져 있었고, 눈 밑에는 거무스름한 기운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윽고 온전히 기력을 회복한 제갈환과 강연우가 보란 듯이 손깍지를 끼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자 그의 눈동자에 절망이 스쳤다."그날의 자객들은 내가 보낸 자들이 아니다." 서제겸이 다소 쉰 듯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조정의 모씨 가문 놈들이 너에게 원한을 품고 저지른 짓이다... 허나 이 또한 다 내 탓이다.""알고 있습니다."강연우가 미동조차 없는 어조로 답했다. "대왕 전하께서 이미 전말을 밝히셨습니다. 모설희가 죗값을 치르고 목이 달아났으니, 그 잔당들이 앙심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요." 사태를 돌이키려는 듯 서제겸이 다급히 한 걸음 내디뎠다."연우야, 나와 함께 남령으로 가자. 남량도 너를 원하고 나도... 나도 네가 필요하다."제갈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강연우가 그의 손등을 가볍게 만지며 즉시 막아섰다."제게 맡기십시오." 이윽고 그녀는 서제겸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런 그녀의 낯빛은 평온하기만 했다."전하, 전하와 저의 인연은 이미 오래전 끊어졌습니다." "전하께서 모설희를 살리겠다며 제 가슴팍을 가르고 심장의 피를 훔쳐갔던 그 날, 우리의 인연도 끝이 끝났사옵니다."순간, 청천병력같은 소리에 서제겸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후회하고 있다. 내 뼛속까지 후회하고 있단 말이다...""너무 늦었습니다."강연우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지금 연모하는 사내는 오직 제갈환뿐입니다." 그때, 서제겸이 돌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한 번만, 제발 단 한 번만 기회를 주거라... 내 태자의 자리마저 기꺼이 내던질 터이니."강연우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전하, 이만 처소로 돌아가십시오. 남량의 백성들이 전하를 기다립니다." 때마침

  • 아득한 이별의 끝   제21장

    강연우는 소맷자락에서 은침을 꺼내어, 다시금 그의 몸에 침을 놓아 해독을 시도했다. 남량의 정통 의학과 북적의 영험한 비술을 접목하여 스스로 창안해 낸 침법이었다. 지독한 도박이었으나, 현재로서는 이것이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예리한 은침이 혈자리에 깊숙이 박혀 드는 순간, 제갈환의 육신이 격렬하게 뒤틀리며 온몸의 푸른 힘줄이 터질 듯 솟구쳤다. 강연우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묵묵히 침술을 이어갔다. 그의 거친 경련이 잦아들 때까지 결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대왕 전하의 체내에 퍼진 맹독의 기운이 골수까지 침범했습니다." 의원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령 의식을 찾으신다 한들, 향후...""그 입 다무시오!" 강연우가 버럭 호통을 쳤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훌훌 털고 일어나실 것이오!" 이윽고 깊은 밤, 사방이 적막에 잠기자 피로가 극에 달한 강연우는 침상 가에 위태롭게 엎드려 단잠을 청했다. 그때, 미세하게 제 손가락을 얽어오는 온기가 느껴졌다. "전하?"그녀가 번쩍 고개를 들자,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익숙한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제갈환은 남은 힘을 쥐어짜 입꼬리를 말아올렸다."왜 이리 눈물을 쏟느냐... 과인은 아직 저승길에 오르지 않았다..." 강연우는 그제야 제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단숨에 그의 가슴팍으로 엎어졌으나, 상처를 건드릴까 두려워 차마 힘도 주지 못한 채 가만히 그를 품에 안았다. "참으로 미련하십니다! 대체 왜 매번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제 앞을 가로막는단 말입니까!" 제갈환이 힘겹게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야... 네가 내 유일한 왕비이기 때문이지..."그렇게 한마디 남기고, 그는 다시 정신을 잃고 깊은 혼절 속으로 빠져들었다. 깜짝 놀란 강연우가 다급히 의원을 불렀으나 그의 온몸은 이미 숯불처럼 달아올라 있었고 화살을 맞은 부위는 검푸르게 문드러지기 시작했다. "독이 기어이 사단을 냈습니다!" 의원의

  • 아득한 이별의 끝   제20장

    이튿날 이른 아침.교역을 위한 협상은 왕부 외곽의 드넓은 초원 위에서 개최되었다. 강연우는 북적 왕비로서의 격식을 갖춘 의복을 갖추어 입었다. 햇빛을 받아 부서지는 금빛 머리 장식이 눈부시게 일렁였다. 그녀는 제갈환의 굳건한 팔을 꽉 붙잡은 채, 천천히 협상을 진행하는 군막을 향해 걸어갔다. 한편, 서제겸은 그곳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검은 도포를 걸친 그의 모습은 이전에 비해 유독 수척해 보였다. 이윽고 다정하게 밀착한 채 걸어오는 강연우와 제갈환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 그의 눈동자에 잠시 고통이 스쳤으나 이내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대왕 전하."서제겸은 가볍게 목례를 건네면서도, 시선은 강연우의 얼굴에 닿았다."연우야... 아니, 왕비 마마."강연우는 조금의 동요도 없는 낯빛으로 대꾸했다. "이 먼 국경까지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십니다." 협상은 기이할 정도로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서제겸은 제갈환이 제시하는 까다로운 조항마다 마치 넋이 나간 자처럼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윤허했다. 이윽고 정오가 되자, 일행은 초원에 마련된 자리로 거처를 옮겨 함께 오찬을 나누었다. "왕비 마마, 잠시 저와 자리를 옮겨 사담을 나눌 수 있겠사옵니까?"서제겸이 돌연 나직하게 청해왔다. 그의 눈빛에는 처절한 간청이 서려 있었다. "그저… 마지막 작별이라 여겨주시지요."제갈환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단칼에 거절하려던 찰나, 강연우가 가볍게 그의 손등을 두드렸다."전하,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이윽고 서제겸의 뒤를 따라 거처에서 멀찍이 떨어진 시냇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삼 년이 흘렀다."서제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나는 단 하루도 후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강연우는 저 멀리 만년설이 쌓인 설산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전하,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는 법입니다. 과거의 일은 그저 묻어두십시오." "그럴 수는 없다!" 서제겸이 이성을 잃고 갑자기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억세게 움켜잡았다. "나와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