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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칼날

공주의 칼날

โดย:  목화จบแล้ว
ภาษา: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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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황께서 직접 책봉한 공주였다. 그런 내가 진북장군과 혼인하는 건, 그에게는 이미 각별한 하사이었다. 혼인식 날, 가마가 도착하자마자 나는 장군부 앞에서 갓난아기를 안은 채 무릎을 꿇고 있던 여인 하나를 발견했다. 내 부군 기태영은 혼례복을 입은 채 난감한 얼굴로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공주마마, 진아는 제가 변방에 있을 때, 제 아이를 낳아준 여인입니다. 헌데 지금 진아가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진아도 함께 장군부에 발 들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공주마마를 정실로 들이고 진아를 첩으로 들여서 기씨 집안의 대를 이어가게 해주십시오.” 기태영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위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기태영의 할머니 이윤정도 태연하게 말을 보탰다. “공주께서는 워낙 고귀하시니 그까짓 명분이야 무슨 대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기씨 집안은 대대로 외동아들만 있어 왔습니다. 저 아이는 기씨 집안의 핏줄인데 명분도 없이 자라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병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공주마마,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는 갓난아이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간절히 자신을 쳐다보는 기태영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가볍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봉관을 벗곤 다시 가마에 올랐다. “장군, 아이를 가지고 싶다면 굳이 막진 않겠네. 허나 선황의 뜻은 분명했다. 은혜를 베풀어 공주인 날 기씨 집안으로 들인 것이지, 내가 기씨 집안에 하사된 것은 아니었다. 기씨 집안에서 그 은혜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내가 그 명을 거두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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บทที่ 1

제1화

“공주마마, 꼭 혼인식 날에 이리 소란을 피우셔야 하겠습니까?”

기태영이 가마의 문틀을 움켜쥐며 말했다.

그의 거친 손등에는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고 당장이라도 가마를 부숴 버릴 듯한 기세였다.

나는 그저 가마 안에 앉아서 백성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장군님 기태영을 냉랭하게 바라봤다.

기태영의 얼굴에는 정실을 맞이하는 기쁨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오히려 백성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는 사실에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소란을 피웠다?”

내가 팔찌에 박힌 보석을 무심하게 만지작거리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기 장군, 혼인식 날에 외실이 집 앞까지 찾아와서 소란 피우게 하는 건 아주 잘한 짓 같은가?”

그 말을 들은 기태영의 안색이 순간 굳어졌다.

하지만 난감해하던 기태영은 빠르게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마마, 어릴 때부터 궁중에서 곱게 자란 분이 어찌 변방의 고통을 아시겠습니까? 그날 밤, 적군이 쳐들어왔을 때, 진아가 저 대신 화살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저는 진작 죽었을 겁니다. 한낱 유약한 여인인 진아는 저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을 뿐만 아니라 혼인도 하지 않은 몸으로 제 아이까지 낳아 세상의 손가락질을 감내했습니다. 헌데 제가 진아를 버린다면 어찌 사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기태영은 마치 자신이 지고지순한 사내인 양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방금 전까지 기태영에게 손가락질하던 구경꾼들도 그의 말을 듣고는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었다.

연민과 감동의 감정을 담은 눈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있던 김진아에게 향했다.

김진아도 바뀐 분위기를 예민하게 알아차리곤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곤 애처롭게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장군님, 그만하십시오.”

김진아는 창백한 입술을 꼭 깨물고 처량하게 말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오늘 진호를 데리고 이곳에 온 건 이 아이가 기씨 집안의 핏줄이라는 사실만은 알려드려야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저는 공주마마의 시중을 드는 하녀가 되어도 감지덕지합니다.”

김진아는 그렇게 말하며 아이를 안고 내가 있던 가마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김진아의 이마가 땅에 닿을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이마에는 피가 스며들었다.

기태영은 그런 김진아가 안쓰러워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지만 내가 아직 그곳에 있다는 게 생각났는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화가 잔뜩 난 눈길로 나를 쏘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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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제1화
“공주마마, 꼭 혼인식 날에 이리 소란을 피우셔야 하겠습니까?”기태영이 가마의 문틀을 움켜쥐며 말했다.그의 거친 손등에는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고 당장이라도 가마를 부숴 버릴 듯한 기세였다.나는 그저 가마 안에 앉아서 백성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장군님 기태영을 냉랭하게 바라봤다.기태영의 얼굴에는 정실을 맞이하는 기쁨은 조금도 없었다.그는 오히려 백성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는 사실에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소란을 피웠다?”내가 팔찌에 박힌 보석을 무심하게 만지작거리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기 장군, 혼인식 날에 외실이 집 앞까지 찾아와서 소란 피우게 하는 건 아주 잘한 짓 같은가?”그 말을 들은 기태영의 안색이 순간 굳어졌다.하지만 난감해하던 기태영은 빠르게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마마, 어릴 때부터 궁중에서 곱게 자란 분이 어찌 변방의 고통을 아시겠습니까? 그날 밤, 적군이 쳐들어왔을 때, 진아가 저 대신 화살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저는 진작 죽었을 겁니다. 한낱 유약한 여인인 진아는 저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을 뿐만 아니라 혼인도 하지 않은 몸으로 제 아이까지 낳아 세상의 손가락질을 감내했습니다. 헌데 제가 진아를 버린다면 어찌 사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기태영은 마치 자신이 지고지순한 사내인 양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방금 전까지 기태영에게 손가락질하던 구경꾼들도 그의 말을 듣고는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었다. 연민과 감동의 감정을 담은 눈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있던 김진아에게 향했다.김진아도 바뀐 분위기를 예민하게 알아차리곤 몸을 흠칫 떨었다.그리곤 애처롭게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장군님, 그만하십시오.”김진아는 창백한 입술을 꼭 깨물고 처량하게 말했다.“다 제 잘못입니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오늘 진호를 데리고 이곳에 온 건 이 아이가 기씨 집안의 핏줄이라는 사실만은 알려드려야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저는 공주마마의 시중을 드는 하녀가 되어도 감지덕지합니다.”김진아는 그렇게 말하며 아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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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공주마마, 다 들으셨습니까?” 기태영이 분노를 꾹꾹 누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진아는 이미 이만큼 양보했습니다. 그런데도 어찌 이렇게 몰아세우십니까? 존귀하신 공주마마께서는 이 약한 여인 하나 용납하실 너그러움도 없으시단 말입니까?”나는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듯 애틋하게 구는 두 남녀를 바라봤지만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황당함만이 밀려들었다.“기태영, 네가 전장에만 있다보니 정신을 놓았나 보구나.”나는 몸을 살짝 기울여 문발을 걷어내곤 기태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나는 군주고 너는 신하다. 혼인식 전에 사통한 계집을 내 가마 앞에 데려와 소란을 피우게 하고 이제 와서 너그러움을 논하는 게냐?”나의 차가운 눈빛에 기태영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하지만 기태영 뒤에 있던 병사들이 다시 나섰다.그들은 기태영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운 전우들로 예법 따위는 모르는 무식한 사내들이었다.병사들에게 기태영은 하늘이었고 그런 기태영의 생명의 은인이 바로 김진아였다.“공주마마! 장군님께서는 대초(大楚)를 위하여 목숨 걸고 싸우셨습니다!”그때, 얼굴에 흉터가 선명한 병사 하나가 일어서며 소리쳤다.“장군님께서는 그저 자신의 여인과 아이에게 명분을 주고자 하시는 것뿐인데, 그게 무슨 대수라고 그리 매몰차게 구시는 겁니까? 아무리 공주마마라 하셔도 너무하시지 않습니까!”병사 하나가 나서자 무릎을 꿇고 있던 다른 병사도 목청을 높였다.“마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진아 아씨를 품어주십시오!”갑옷을 걸친 수백명 사내들의 목소리가 하늘을 울렸다.병사들은 한 나라의 공주에게 은혜를 간청하는 게 아니라 협박하고 있었다.기태영은 무리 앞에 우뚝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눈빛에는 단호함과 함께 득의양양한 기색이 스며 있었다. 기태영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잘 봐, 백성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너는 내 뜻을 따를 수밖에 없어.’나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곤 문발을 내려 바깥의 시끄러운 소리를 차단했다.“궁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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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내 심장은 점점 차갑게 식었다.“내 체면이 뭐가 되겠냐고?”소예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가마 안에서 날카롭게 울려퍼졌다.“기태영, 아직 네 주제를 모르는구나. 한낱 여인이 화살을 막아줘야 하는 무능한 놈이 내 명성을 운운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한다.”내 말을 들은 기태영의 안색이 순식간에 바뀌더니 버럭 화를 냈다.“방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이 나라의 장군으로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부인에게 무능하다는 말을 듣는 건 죽는 것보다도 괴로울 것이다.“오라버니, 화내지 마십시오.”그때, 김진아가 일어서더니 비틀거리며 다가와 기태영의 품에 안겼다.김진아는 한 손에는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 기태영의 옷소매를 꽉 잡았다.“공주마마께서 화가 나서 그런 것이지 진짜 오라버니를 모욕하려는 게 아닙니다. 모든 건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오라버니가 난감하지 않게 지금 떠나겠습니다.”김진아는 떠나겠다고 말했지만 발이 땅에 붙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눈물을 머금은 김진아의 눈에 억울함과 안타까움이 서려있었다.기태영은 그런 모습을 한 김진아를 보곤 이성을 잃고 말았다.그는 김진아를 살짝 밀어내곤 가마 안을 향해 소리쳤다.“소예진! 적당히 해!”기태영이 내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나와 혼인할 수 있는 건 네 복이야! 네가 아직 아바마마의 예쁨을 받는 공주인 줄 알아? 지금 새로운 폐하께서 즉위하셨으니 너는 전조의 혈육으로서 허울만 남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고!”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위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사람들은 놀라서 숨을 죽였다.기태영이 사람들 앞에서 모두가 쉬쉬하던 사실을 터놓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이윤정도 기태영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비웃으며 가소롭게 웃었다.이윤정도 기태영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두 사람이 보기에 나는 기댈 곳을 잃은 힘 없는 공주일 뿐이었다.그래서 마음대로 휘둘러도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영이 말이 맞다.”이윤정이 지팡이로 바닥으로 내려치더니 턱을 치켜올렸다.“공주, 그러니 어서 현실을 자각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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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마차에서 내려서 진아와 손을 잡고 함께 장군부로 들어오시면 정실 자리는 공주께 드리겠습니다. 진아는 착한 아이라서 공주에게 불경을 보이진 않을 겁니다.”기태영이 말하자 김진아가 얼른 얌전하게 고개를 숙이며 하얀 목덜미를 드러냈다.“공주마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아침 저녁으로 인사도 드리면서 친 언니처럼 모시겠습니다. 그러니 제 아이에게 제대로 된 이름과 자리만 허락해 주십시오.”김진아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애처로운 그 꼴만 보면 내가 다른 이의 가정을 깨뜨린 제삼자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사람들도 그 모습을 보더니 참지 못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공주도 너무하는 거 아니야? 저 처자가 저 정도까지 양보하겠다는데.”“그러니까, 장군은 대초를 위해서 목숨까지 걸었는데 첩 하나 들이는 게 뭐 대수라고.”“저 공주 눈에는 백성들이 하찮은 거야. 오만함이 하늘이 찌르네.”민심은 차츰 기태영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이윤정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이윤정은 경성에서 사람들의 말이 제일 날카로운 칼날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투기가 많고 너그러운 마음이 없다는 죄명을 나에게 씌우면 아무리 공주라고 해도 경성에서 살아가기 어려워질 것이다.“공주, 내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이윤정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최후통첩을 내리듯 물었다.“내리시겠습니까, 말겠습니까?”나는 대답 대신 얼굴에 흉터가 난 병사를 바라봤다.“네 이름이 무엇이냐?”그러자 병사는 내가 말을 걸 줄 몰랐다는 듯 멈칫했다.하지만 곧 기태영을 믿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저는 장호입니다.”“좋다.”장호의 대답을 들은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장호, 검을 들고 공주의 길을 막는 것이 어떤 죄인지 알고 있느냐?”내가 묻자 장호는 재밌다는 듯 박장대소했다.“공주마마, 저는 무식해서 장군님의 명이 곧 천명이라는 것밖에 모릅니다. 저희 장군님께서 적들과 싸울 때, 공주마마는 경성에서 편안히 지내셨겠죠. 오늘 폐하께서 오신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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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일촉즉발의 그 순간, 나는 기태영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그리고 기태영의 손끝이 내 소매에 닿으려던 순간, 짝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나타난 금색의 채찍이 날카로운 뱀처럼 기태영의 손등을 내려쳤다.“아악!”기태영은 처참하게 비명을 지르며 손을 거두었다.거친 그의 손에 선명한 상처가 새겨졌다. 살갗은 찢겨 나가고 빨간 피가 뚝뚝 흘렀다.“누가 감히 장군님을 해한단 말이냐?!”그 모습을 본 장호가 화를 내며 검을 뽑아 들더니 채찍이 날아든 쪽을 쏘아봤다.그러자 수백 명의 병사들도 따라서 검을 들고 살기 서린 눈빛으로 그쪽을 바라봤다.김진아는 그 모습을 보곤 놀라서 아이를 안고 이윤정의 등 뒤에 숨었다.이윤정도 놀랐지만 곧 진정하곤 소리쳤다.“누가 감히 장군부 앞에서 소란을 피운단 말이냐? 죽고 싶은 게야?!”그리고 그때, 골목 끝에서 가지런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우렁찬 그 소리는 무겁게 사람의 심장을 짓눌렀다.더불어 살기 어린 냉기가 밀려왔고 공기마저 차갑게 식은 듯했다.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양옆으로 갈라섰고 넓은 길이 열렸다.검은 갑옷을 입은 기마병들이 지옥문을 열고 나온 사신처럼 서서히 사람들의 시선에 모습을 드러냈다.우람한 군마를 타고 있던 기마병들은 전부 가면을 쓴 채 차갑고 살기 어린 두 눈만 드러냈다.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해 하던 기씨 집안 병사들은 기마병들을 보자마자 안색이 창백해졌다.장호는 검을 쥔 손을 벌벌 떨며 자리에 서 있기도 힘들어했다.“흑… 흑갑위(黑甲衛)…”장호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힘겹게 세 글자를 뱉어냈다.흑갑위가 휩쓸고 지나간 곳은 풀 한 포기 나지 않았다.기태영은 피가 나는 손을 잡고 기마병을 바라봤다.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첩 하나 들이겠다는데 흑갑위가 어찌 온 것이지?’기마병들은 가마 앞에서 멈췄다.곧 그들이 양옆으로 비켜서자 검은 말 한 마리가 걸어 나왔고 그 위에는 젊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사내는 준수한 얼굴을 가졌지만 음신하고 오만한 분위기를 뿜어냈다.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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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예진이라고 부르는 목소리는 애절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주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차가운 바람이 깃발을 스치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나는 허공에 멈춰있던 박유신의 손을 바라보다 망설임 없이 내 손을 그 위에 올렸다.두 손이 닿는 순간, 나는 박유신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유신아, 조금 늦었구나.”내가 박유신의 손길을 따라 가마에서 내리자 치맛자락이 바람에 흩날렸다.그러자 박유신이 나를 품에 안으며 차가운 바람을 막아줬다.“소신이 늦어서 공주마마를 욕보이게 했습니다.”고개를 숙인 채 말하는 박유신의 목소리에 억눌린 분노가 담겨있었다.“공주마마, 이 무례한 인간들을 어찌 처리할 생각입니까? 능지처참할까요? 아니면 구족을 멸할까요?”박유신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무릎을 꿇고 있던 기씨 집안사람들은 순간 얼어버리고 말았다.이윤정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고 하녀들은 놀라서 허둥지둥 그녀의 인중을 눌렀다.기태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홱 들어 박유신을 바라봤다.“대감! 소신이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겁니까?!”기태영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나와 박유신을 번갈아 보며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공주마마, 소신은 그저 전장에서 함께 싸운 형제들을 도와주고 싶었을 뿐인데 지금 소신의 구족을 멸하겠다는 겁니까? 이 천하에 법도라는 게 있긴 합니까?!”기태영은 다시 민심을 끌어들이려고 했다.하지만 절대권력 앞에서 기태영의 알량한 수작질은 통하지 않았다.“법도?”박유신은 기가 막힌다는 듯 피식 웃더니 몸을 돌려 기태영을 내려다봤다.“이 많은 이들 앞에서 황실의 공주를 욕보이고 지금 법도를 논하는 것이냐?”박유신이 그렇게 말하더니 기태영의 가슴을 걷어찼다.그 힘이 얼마나 셌는지 기태영은 저 멀리 날아가 장군부 문 앞에 있던 돌사자에 처박혀 피를 토했다.“장군님!”그 모습을 본 장호와 병사들이 놀라서 검을 뽑아 들려고 했다.하지만 흑갑위가 더 빨랐다. 서슬 퍼런 칼날이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을 빼앗았다.“검을 뽑는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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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아바마마께서 승하하기 전, 내게 준 것이다.”나는 기태영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아바마마께서 나는 대초의 장공주로서 절대 다른 여인과 한 부군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기씨 집안과의 혼인을 명하신 건 너희의 충심을 보기 위함이었다. 헌데 너는 멍청하게 구족을 다 끌어들였구나.”기태영은 금패를 뚫어져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는 나를 힘을 잃은 공주라고만 생각했지만 사실 나는 대초의 지고무상한 권력을 가진 이였다.“마마, 소신이 대역죄를 지었나이다.”기태영은 드디어 거만한 태도를 버리고 몸의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를 향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소신이 잠깐 미쳤었나 봅니다. 소신이 대초를 위하여 몇 년 동안 목숨 걸고 싸웠던 걸 봐서라도 살려주십시오!”“몇 년 동안 목숨 걸고 싸웠다?”기태영의 말을 들은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역겹다는 듯 피를 흘리고 있는 기태영을 바라봤다.“네가 그동안 변방에서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나는 그렇게 말하며 박유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그러자 박유신이 두꺼운 접본 하나를 공경하게 내 손에 올려놓았다.나는 그 접본을 기태영의 앞에 집어 던졌다.“두 눈 똑똑히 뜨고 보거라, 이게 뭔지!”기태영은 떨리는 손으로 접본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곧 놀라서 힘이 풀리고 말았다.접본에는 기태영이 그동안 변방에서 세운 ‘공로’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군 식량을 횡령하고 백성을 죽여 공을 세우고 심지어 적국과 몰래 손을 잡고 재물까지 챙긴 일까지.그 죄목 하나하나가 기태영을 백 번 죽여도 모자랄 정도였다.“저 병사들을 네 사람으로 만들면 모두를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게냐?”나는 몸을 숙여 기태영을 비웃었다.“기태영, 흑갑위의 첩자를 뭐라고 생각한 게냐?”기태영은 넋이 나간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그의 마지막 자존심과 믿음은 내가 내민 접본에 산산조각 났다.“아니야… 이건 진짜가 아니야…”그때, 김진아가 미친 것처럼 달려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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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세상에, 이게 무슨 터무니없는 일이란 말인가!”사람들이 기태영과 김진아를 향해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김진아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녀는 아이를 꼭 안은 채 연신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나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김진아는 기태영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고 말했다.“오라버니, 저를 믿어주십시오! 진호는 정말 오라버니의 아들입니다!”기태영은 멍청하게 고개를 돌려 자신이 금이야 옥이야 아껴줬던 여인을 바라봤다.기태영은 김진아를 위하여 황권에게 미움을 사가면서 그녀를 보호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철저히 꾸며진 거짓된 거였다니.“꺼져라!”기태영이 화가 나서 소리치며 김진아의 뺨을 내려쳤다.김진아는 기태영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저 멀리 날아가 계단에 부딪혔다. 김진아의 품에 있던 아이도 바닥으로 나가떨어져 울음을 터뜨렸다.“미천한 것이! 감히 날 속이다니!”기태영은 미친 사람처럼 김진아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목을 졸랐다. 눈까지 빨개진 기태영은 김진아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방금 전까지 애틋하던 두 사람은 미친개처럼 서로를 헐뜯고 있었다.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그만하거라.”그 모습을 바라보던 내가 차갑게 말했다.“기태영, 네가 폐하를 속이고 업신여긴 죄를 용서할 수 없다. 여봐라! 기태영과 그 병사들을 전부 옥에 가두고 처형을 기다리게 하거라! 기씨 집안은 즉시 봉쇄하여 그 누구도 드나들 수 없게 하거라!”내 명이 떨어지자마자 흑갑위가 사나운 기세로 기씨 집안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얼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변방의 병사들은 흑갑위 앞에서 검도 뽑지 못하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병사들은 자신이 신처럼 모시던 장군님이 나라를 팔아먹고 자신의 아이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일 줄 몰랐다.병사들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목숨을 구걸했다. 기태영의 말이면 전부 따르겠다던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하지만 나는 병사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곧 흑갑위는 그들을 전부 끌어냈다.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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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기태영은 그 은혜를 이미 죽은 하녀에게 돌리면서 내 희생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면서도 늘 고고하게 구는 나를 싫어했다.“그것뿐만이 아니다. 네가 이리 급하게 첩을 들이려고 하는 이유가 핏줄을 이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나는 기태영을 내려다보며 그의 마지막 체면까지 짓밟아버렸다.“네가 변방에서 중상을 입어서 이제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걸 안다. 나와 혼인하고 그 사실을 들킬까 봐 지금 급하게 저 잡종을 데려온 것이 아니더냐.”그 말이 끝나자마자 주위는 고요해졌다.사람들은 괴이한 눈빛으로 기태영을 바라봤다.‘사내구실을 할 수 없는 몸이라니.’대를 잇는 것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는 장군 집안의 사내에게 이는 기태영을 죽이는 것보다도 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아니다! 닥쳐라! 닥쳐!”기태영은 완전히 정신을 놓고 귀를 막은 채 짐승처럼 울부짖었다.그때, 마침 정신을 차린 이윤정은 내 말을 듣고 다시 두 눈을 까뒤집고 쓰러졌다.이번에는 쉽사리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끌어내거라.”박유신이 냉랭하게 손짓했다.그러자 흑갑위가 기태영과 아직 몸부림치고 있던 김진아를 끌어냈다.처참한 비명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고 장군부 문 앞에는 어지러운 자국과 눈에 거슬리는 붉은 비단만이 남았다.“예진아, 화가 좀 풀려?”박유신이 뒤에서 나를 안으며 턱을 내 어깨 위로 올렸다.낮은 목소리에 어렴풋한 탐욕과 조심스러움이 서려 있었다.“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면 내가 옥으로 가서 저놈의 뼈를 하나씩 부러뜨리겠다.”그 말을 들은 나는 등을 돌려 뜨거운 박유신의 눈을 마주하곤 웃었다.“유신아, 여전히 투기가 많구나.”나는 그렇게 말하며 박유신의 두루마기를 정리했다.“기태영은 아직 쓸모가 있다. 새로운 폐하께서 즉위하셨으니 본보기로 보여줄 이가 필요하다. 기씨 집안을 그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그 말을 들은 박유신이 내 손을 잡더니 가볍게 입을 맞췄다.“예진이 말이 맞아. 너만 좋다면 나는 널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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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기태영, 지금 네 꼴을 봐.”나는 깨끗한 바닥에 서서 냉랭하게 오물에 잠겨있는 기태영을 바라봤다.“지금 네 모습은 짐승보다도 못하다. 헌데 내가 널 마음에 둘 것 같으냐?”내 말을 들은 기태영의 눈빛이 암담해졌다.그리고 갑자기 격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기태영이 기침할 때마다 피가 울컥 쏟아져나왔다.“왜… 소예진, 어찌 이리 독한 게야?”기태영은 기침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나는 대초의 공신이다. 널 위해 수없이 싸워서 이겼는데 어찌 나를 이리 대하는 거야?”“이겼다고?”나는 기태영의 말을 들으니 기가 찼다.“기태영, 정말 네가 변방에서 한 번도 지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느냐? 유신이가 몰래 식량을 가져다주고 뒤처리를 해주지 않았다면 네 그 하찮은 병법으로는 진작 황막한 변방에서 죽었을 것이다.”그 말을 들은 기태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등 뒤에 서 있던 박유신을 바라봤다.박유신은 팔짱을 낀 채 하찮다는 듯 기태영을 힐끔 바라봤다.“아바마마께서 널 진북장군으로 책봉한 건 기씨 집안 선조들의 체면을 봐서였다. 네가 변방에서 성실하게 자기 책임을 다하길 바라서 그랬던 것인데 정말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안 것이냐?”내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기태영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밟았다.기태영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공헌도, 가족의 영광도, 혼자만의 착각에 빠졌던 사랑도 그 순간,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아니야… 이건 진짜가 아니야… 너희가 날 속이는 거지!”기태영이 미친 듯이 발버둥 치자 쇠사슬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진아는 어디 있느냐? 내 그 미천한 것을 죽여버릴 것이다!”기태영은 드디어 자신을 구렁텅이로 밀어넣은 원흉이 생각난 것 같았다.“김진아?”김진아의 이름을 들은 나는 옥지기에게 옆에 있던 옥문을 열게 했다.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옥문이 열리자 김진아가 바닥으로 내쳐졌다. 그녀는 온몸이 피로 젖어있었고 머리카락도 절반이나 없어졌다. 휑하니 드러난 두피를 보니 소름이 끼쳤다.김진아는 기태영을 보자마자 처참하게 소리를 질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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