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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했던 터널을 지나 내 인생 리부팅
아득했던 터널을 지나 내 인생 리부팅
Author: 아정이는 고수파

제1화

Author: 아정이는 고수파
송경태가 나를 찾아냈을 때, 나는 길가에 앉아 멍하니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번화가 한복판에 걸린 대형 스크린에서는 송경태와 윤라희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은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다.

그때 송경태가 싸늘한 얼굴로 내 시야를 가로막더니 내 팔을 잡아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이 밤중에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산전 검진 한 번 같이 못 가 준 게 그렇게 난리 칠 일이야? 제발 억지 좀 부리지 마!”

나는 순간 멍해졌다.

송경태와 결혼한 지난 2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은 늘 같았다.

“억지 좀 부리지 마.”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휴대전화를 확인하겠다고 했을 때도 송경태는 괜히 억지를 부리지 말라고 했다.

부부 동반 행사 같은 공식 석상에 함께 가고 싶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산전 검진에 한 번만 같이 가 달라는 부탁조차 송경태에게는 괜한 억지에 불과했다.

예전의 임소이라면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미안하다고 했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나는 어느새 제법 불러온 배를 내려다봤다. 송경태가 원하는 고분고분한 아내 노릇은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내가 대꾸조차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자, 송경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 시간에 어디 가려고?”

“사진 찍으러 가자.”

송경태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임신한 뒤 내가 송경태에게 부탁한 것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산전 검진에 함께 가는 것과 임신 기념사진을 같이 찍는 것.

하지만 송경태는 그중 어느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송경태는 뒤늦게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근처 스튜디오로 가자고 했다.

“거참... 요즘 자꾸 깜빡하네. 네가 좀 이해해 줘.”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송경태는 기억력이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윤라희의 생일은 물론이고 좋아하는 음식, 디저트까지 전부 기억했다.

심지어 윤라희가 작품을 하나씩 완성할 때마다 그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작품이 수십 개를 넘어 백여 개에 달하는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송경태는 유독 나와 관련된 일들만 기억하지 못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차가 멈췄다.

차에서 내려 고개를 든 순간, 내 몸이 그대로 굳었다.

윤라희의 개인 스튜디오였다.

그 여자가 청해시로 돌아온 날,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송경태가 그 여자를 위해 직접 발품을 팔아 개인 스튜디오를 마련해 줬다는 사실을.

스튜디오 이름은 ‘스튜디오 3650’이었다.

송경태와 윤라희가 사랑했던 10년, 꼬박 3,650일을 의미하는 이름이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연인으로 지내왔지만, 윤라희가 꿈을 좇아 유럽으로 떠나면서 헤어지게 됐다.

그리고 윤라희의 선택에 화가 난 송경태는 홧김에 나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렇게 2년이 흐른 뒤, 윤라희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날 비를 흠뻑 맞은 채 사과하는 윤라희를 마주한 순간, 송경태의 오랜 원망은 눈 녹듯 사라졌다.

이후 송경태는 주변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윤라희와 다시 예전처럼 지내기 시작했다.

하룻밤 사이 나는 멀쩡한 아내에서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불청객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억지로 이어 온 결혼 생활에 더 이상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다.

차 문고리를 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송경태가 내 손목을 잡고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송경태를 따라 스튜디오로 들어서자, 윤라희가 곧장 다가왔다.

늘씬한 몸매에 생머리를 느슨하게 틀어 올린 모습은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듯 우아했다.

임신으로 얼굴이 핼쑥해지고 손발까지 퉁퉁 부은 나와 나란히 서자, 윤라희의 모습은 확연히 대비됐다.

스튜디오 직원은 송경태를 이미 여러 번 본 사람처럼 반갑게 말을 걸었다.

“형부, 또 라희 언니 보러 오셨어요?”

송경태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곧바로 내 눈치를 살피듯 고개를 돌렸다.

윤라희도 당황한 듯 혀를 차며 직원을 나무랐다.

“무슨 소리야. 경태 부인이잖아.”

그러고는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소이 씨, 신경 쓰지 마세요. 제 밑에서 일하는 동생인데 생각 없이 말할 때가 있어요.”

윤라희는 자연스럽게 내 팔을 잡고 촬영용 의상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윤라희는 몇 번이나 곁눈질로 내 표정을 살피다가 내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해 보이자 비웃듯 입꼬리를 실룩댔다.

내 시선은 눈앞에 걸린 드레스 한 벌에 머물렀다.

은은한 아이보리색이 감도는 긴 드레스였다. 단정하면서도 성스러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드레스를 꺼내 입어 보려던 순간, 송경태가 손을 뻗어 막았다.

“다른 걸로 골라.”

예상 밖으로 단호한 반응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유를 묻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에는 송경태와 윤라희가 나란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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