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화

Author: 아정이는 고수파
사진 속 윤라희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내가 고른 것과 똑같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드레스를 내려놓고 다른 디자인을 골랐다.

드레스를 들고 탈의실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스튜디오 직원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같은 옷을 입는다고 다 똑같이 어울리는 건 아니잖아요. 본인도 알아챘나 봐요. 바로 다른 옷으로 바꾸는 것 좀 봐요.”

윤라희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대놓고 나를 비웃는 듯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유치한 도발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옷을 갈아입은 뒤 촬영용 의자에 앉자, 송경태가 내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카메라 셔터가 눌리기 직전이었다.

“어머, 경태야...”

윤라희가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바닥에 쓰러졌다.

“나 여기가 너무 아파.”

송경태는 내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윤라희에게 달려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스튜디오 직원이 안 됐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나는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고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었다.

“계속 찍어 주세요.”

직원이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촬영을 모두 마친 뒤 나는 완성된 사진을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스튜디오를 나왔다.

어차피 나와 아이를 위해 남기는 추억이었다.

그 사진에 송경태가 있든 없든 이제는 상관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매서웠다. 이대로 집까지 돌아가기는 무리일 것 같아 근처 호텔에 방을 잡았다.

침대에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전화가 연달아 울렸다.

송경태에게 걸려 온 전화라는 걸 확인한 나는 망설임 없이 수신을 거부했다.

계속 전화를 받지 않자, 세 번이나 이어지던 전화는 그제야 잠잠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결에 다시 휴대전화 알림음이 들렸다.

이번에는 메시지였다.

무심코 화면을 확인한 순간, 윤라희가 송경태의 품에 안겨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윤라희가 입고 있는 옷이 낯익었다.

내 잠옷이었다.

사진은 5초도 지나지 않아 삭제됐다.

곧이어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미안해요. 제가 실수로 잘못 보냈네요.]

실수일 리 없었다. 나에게 보여 주려고 일부러 보낸 사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화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휴대전화를 꺼 버리고 포근한 이불 속에 누웠다. 그리고 다시 잠들었다.

다음 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집 안에서는 파티가 한창이었다.

거실 한가운데 있던 송경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송경태와 눈이 마주쳤다.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여전히 나를 불편하게 했다.

“아이고, 난 또 영원히 안 들어올 줄 알았네?”

“어제는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근처 호텔에서 잤어.”

나는 송경태가 또 화를 낼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알고 있어. 위치 확인해 봤거든. 그래도 앞으로 외박할 때는 반드시 나한테 허락받아야 해.”

외투를 벗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송경태를 바라봤다.

“내 휴대전화에 위치 추적을 해 놨어?”

“혹시 무슨 일 생길까 봐 그런 거야.”

송경태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듯 대화를 끝내고 거실에 있는 사람들을 소개했다.

전부 송경태의 친구들이었다.

결혼식 날 얼굴을 본 뒤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송경태의 아내인 나보다 윤라희와 훨씬 가까워 보였다.

윤라희는 마치 제 집에 손님을 초대한 사람처럼 앞으로 나서서 한 명씩 소개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안준호. 요리를 진짜 잘해요. 특히 국물 요리는 끝내줘요.”

그러고는 다음 사람을 가리켰다.

“여기는 이도윤. 도윤이는 유명한 아티스트예요.”

마지막 남자를 소개할 때는 장난스럽게 웃기까지 했다.

“그리고 얘는 류시우. 얼굴은 좀 봐줄 만한데 항상 장난이 너무 심해서 문제예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실에 웃음이 터졌다.

안준호가 서운한 척 윤라희를 타박했다.

“야, 윤라희. 내 얼굴을 어때서? 왜 은근슬쩍 사심을 끼워 넣어?”

윤라희는 볼을 부풀리며 곧장 친구들 사이로 뛰어들었고, 친구들도 익숙하다는 듯 장난을 받아 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누구도 내게 제대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딱히 서운하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람들 사이에 억지로 끼어들 생각도 없었으니까.

송경태는 그런 윤라희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눈빛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침실로 향했다.

그런데 돌아서는 순간 쓰레기통 안에 버려진 무언가가 눈에 들어와 걸음을 멈췄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다가간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음식물쓰레기 사이에 김치가 뒤엉켜 있었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 마지막으로 담가 준 김치였다.

얼마 전, 엄마는 너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 김치는 엄마가 남긴 마지막 음식이나 다름없었다.

먹고 싶어도 차마 손을 대지 못한 채 일주일 내내 냉장고에 넣어 두고 바라보기만 했던 김치가 음식물쓰레기와 뒤섞여 있었다.

귓가에서 이명이 울렸다. 손끝이 떨리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쓰레기통 앞에 선 채 겨우 입을 열었다.

“이거 누가 버렸어?”

아무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거실에는 여전히 웃고 떠드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손을 움켜쥐고 다시 물었다.

“누가 버렸어?”

그래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자, 나도 더는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냈다.

“이 김치 누가 버렸냐고!”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아득했던 터널을 지나 내 인생 리부팅   제9화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일단... 이혼부터 정리되고 나서 이야기하고 싶어.”순간 최시현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활짝 웃더니 나를 번쩍 안아 들고 그 자리에서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돌았다.덕분에 나도 덩달아 웃음이 터졌다.그러면서도 떨어질까 봐 무서워 최시현의 어깨를 붙잡고 몇 번이나 내려달라고 소리쳤다.그때였다.“임소이!”가로등 아래에서 누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놀라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송경태였다.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만큼 수척해졌고,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무엇보다 나와 최시현을 바라보는 눈빛이 섬뜩할 만큼 살벌했다.나는 최시현의 품에서 내려와 송경태를 담담하게 마주했다.“마음 정했어? 언제 법원 갈 거야?”송경태가 이를 악물었다.“넌...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송경태에게는 언제나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중요했다.그런 사람이 이제 와서 믿음을 운운하는 꼴이 우스웠다.그때 송경태의 시선이 최시현에게 향했다. 노골적인 적의를 숨기지도 않은 채 물었다.“이 자식은 누구야?”최시현이 입을 열려 하기에 나는 한발 먼저 나섰다.“알 것 없어. 언제 법원 갈 건지, 그것만 얘기해.”송경태는 보름이 넘도록 나를 찾아다니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듯했다.그토록 애타게 나를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마주했건만, 내 곁에 다른 남자가 있는 모습을 본 순간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송경태는 이성을 잃은 채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쏟아 냈다.“벌써 새 남자까지 구해 놨을 줄은 몰랐네. 우리 엄마 말이 맞았어. 넌 내 인생을 망친 여자야. 내가 정말 눈이 멀었지...”“닥쳐!”송경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최시현이 달려들었다.두 사람은 곧바로 엉겨 붙었고, 주먹이 오갈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서로 물러서지 않고 맞붙은 탓에 싸움은 점점 격해졌다.“그만해! 둘 다 그만하라고!”몇 번이나 말리려고 달려들었지만 끼어들 틈조차

  • 아득했던 터널을 지나 내 인생 리부팅   제8화

    “꼴좋네. 누가 어머니한테 일러바치래? 윤라희, 너 이제 진짜 지긋지긋해.”조금 전까지 서운한 기색을 보이던 윤라희의 얼굴이 순간 굳어 버렸다.“경태야...”믿을 수 없다는 듯 송경태를 바라보는 윤라희의 두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내가 누구 때문에 알려 드린 건데! 다 너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네가 얼마나 아빠가 되고 싶어 했는지 아니까 나는...”“그만해!”송경태가 매섭게 말을 끊었다. 그리고 윤라희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이 와중에도 또 거짓말이네. 넌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적이었어. 3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변한 게 없네. 내가 어떻게 너 같은 여자랑 만났는지 후회될 정도야.”말을 마친 송경태는 더 이상 윤라희와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송경태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머니와의 인연을 끊을 수도,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그날 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송경태는 불 하나 켜지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운 집을 보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그는 침실과 거실을 오가며 집 안 곳곳을 뒤졌다. 혹시 다른 방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방문을 하나씩 열어 보기도 했다.하지만 집 안을 샅샅이 뒤져도 애타게 찾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송경태는 절망에 빠졌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꺼낸 그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당연히 연결될 리 없었다.두 번, 세 번...열 번이 넘도록 전화를 걸고 나서야 송경태는 포기한 듯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다 멈칫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협의이혼 의사 확인 신청서를 본 송경태는 한동안 그 앞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다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그대로 벽에 집어 던졌다.휴대전화 액정이 산산조각 났다.송경태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한참을 버티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생전에 내게 남겨 준 집으로 돌아왔다.

  • 아득했던 터널을 지나 내 인생 리부팅   제7화

    정옥순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었다.“라희한테 뭐라고 하지 마! 내가 물어본 거야!”정옥순은 송경태를 호되게 제지하더니 나를 향해 삿대질했다.“당장 내일 이혼해. 내가 처음부터 저런 여자랑은 안 된다고 했지? 네가 정신이 나가서 기어코 결혼하겠다고 고집부리더니 결국 이렇게 됐구나! 네 자식까지 제멋대로 지워 버렸잖아!”분을 삭이지 못하던 정옥순이 느닷없이 옆에 있던 의자를 집어 들더니 그대로 나를 향해 내리쳤다.순간 송경태가 재빨리 내 앞을 가로막았다.송경태는 날아드는 의자를 붙잡아 바닥에 내던진 뒤 끝내 참았던 감정을 터뜨렸다.“우리 일에 제발 좀 끼어들지 마세요!”거실에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아버지도 어머니 때문에 못 버티고 이혼했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제 인생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하세요? 대체 몇 사람 인생을 망쳐야 만족하시겠어요!”정옥순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이번에는 부들부들 떨며 아들을 향해 삿대질했다.“너... 지금 뭐라고 했어?”목소리는 날카로웠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저런 계집애 하나 때문에 네가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 그래, 잘났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말을 마친 정옥순은 돌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무도 미처 막을 새 없이 대리석 테이블 모서리에 머리를 세게 들이받더니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송경태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이 휘둥그레졌다.“엄마!”송경태는 곧장 달려가 정옥순을 업고 밖으로 뛰쳐나갔다.두 사람이 사라지자, 곁에서 모든 걸 지켜보던 윤라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이내 기다렸다는 듯 턱을 치켜들며 나를 내려다봤다.“눈치가 있으면 이제 알아서 나가요. 여기 계속 붙어 있어 봤자 더 우스워질 뿐이니까.”평소 같았으면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의기양양한 윤라희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엄마가 마지막으로 담가 준 김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통에 처박던 모습이 떠올랐다.꾹꾹 눌러 참아 왔던 분노가 한순간에 치밀어 올랐다.나는 천천히

  • 아득했던 터널을 지나 내 인생 리부팅   제6화

    송경태의 표정이 순식간에 멍해졌다.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한동안 굳어 있던 송경태가 겨우 입을 열었다.“임소이 환자... 지금 수술 중이라고요?”간호사는 귀찮은 기색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임신중절 수술 중이세요. 시작한 지 꽤 됐으니까 곧 나오실 거예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술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마취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내가 이동 침대에 누운 채 실려 나오자, 송경태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비틀거리듯 다가온 송경태의 시선이 내 배에 꽂혔다.임신 5개월에 접어들며 제법 불러 있던 배는 어느새 평평해져 있었다.송경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이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보호자분!”간호사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송경태가 정신을 잃었다.나도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다시 눈을 떴을 때도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목이 말라 테이블 위의 물을 향해 손을 뻗자, 곁에 있던 송경태가 먼저 컵을 집어 내 입가에 가져다 댔다.물을 몇 모금 넘기고 나서야 송경태의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몇 년은 늙어 버린 듯한 얼굴이었다.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꽉 움켜쥔 주먹 위로 핏줄이 선명하게 불거져 있었다.긴 침묵 끝에 송경태가 겨우 입을 열었다.“왜 그랬어...”갈라진 목소리가 힘겹게 새어 나왔다.“왜 나한테 말도 없이 아이를 지웠어?”분노를 누르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당장이라도 모진 말을 쏟아 낼 것처럼 이를 악물고 있으면서도 정작 나를 보지는 못했다.송경태의 시선은 줄곧 병실 바닥에 박혀 있었다.나는 그런 송경태를 잠시 바라보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우리 이혼하자.”송경태의 어깨가 굳었다.“당신이랑 윤라희 씨 사이에서 빠져 줄게. 그러니까 당신도 이제 나 좀 놔줘.”송경태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고작 내가 산전 검진에 같이 안 갔다고 이러는 거야?”힘없이 새어 나오던 웃음 끝에 눈물 한 방울이 바닥

  • 아득했던 터널을 지나 내 인생 리부팅   제5화

    한편, 윤라희에게 달려간 송경태는 처음으로 화를 냈다.윤라희가 자살 소동까지 벌여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생각해 보면 윤라희는 예전부터 늘 자기중심적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며 수없이 사고를 쳤고, 송경태를 곁에 두고도 새로운 사람이 눈에 들어오면 여지를 주며 애매한 관계를 이어 갔다.유럽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윤라희는 송경태와 상의 한마디 없이 이별을 통보하고 훌쩍 떠나 버렸다.어릴 때야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런 행동까지 참고 넘어갔을지 몰라도, 이제 송경태도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였다.더 이상 윤라희와 이런 식으로 미성숙한 연애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송경태가 아무 말 없이 돌아서자, 윤라희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았다.“그러게, 누가 내 연락을 계속 무시하래? 전화도 안 받고...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눈이 다 부었잖아.”윤라희는 입술까지 삐죽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투정을 부렸다.예전처럼 송경태가 돌아서서 달래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하지만 송경태는 윤라희의 팔을 거칠게 떼어 냈다. 윤라희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노골적인 혐오감이 서려 있었다.그런 눈빛은 처음이었는지 윤라희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이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장난 한번 친 거잖아.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임소이가 내 욕이라도 했어?”윤라희의 눈가가 붉어졌다.“나는 임소이한테 너까지 양보했잖아. 대체 나한테 뭘 더 바라는 건데? 내가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어?”송경태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었다. 관자놀이에는 핏줄까지 불거져 있었다.“소이가 언제 네 욕을 했는데?”결국 송경태도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소이는 너에 대해 한마디도 한 적 없어!”그 말만큼은 사실이었다.‘소이는 라희를 험담한 적 없어. 내가 라희에게 가겠다고 했을 때도 아무 말 없이 보내 줬지. 라희는 어떻게 아무런 근거도 없이 소이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는 걸까!’“소이는 뒤에서 누군가를 험담하는 사람이 아

  • 아득했던 터널을 지나 내 인생 리부팅   제4화

    [네가 끼어들어서 헤어진 거라며? 그렇게 남의 남자를 뺏고 싶었냐? 불륜녀 주제에 뻔뻔하기는.][임신했다면서요? 그냥 빨리 애 지워요. 괜히 낳아서 라희 작가님 마음 아프게 하지 말고.][마음이 다른 여자에게 가 있는 남자를 붙잡고 있으면 뭐가 달라져요? 불쌍한 두 사람 그만 괴롭히고 이제 좀 놔주세요.]논란은 시간이 지날수록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관련 기사는 사흘 내내 포털 메인을 장식했다.송경태는 내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송경태는 내가 먼저 고개 숙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우리 관계에서 주도권은 언제나 송경태에게 있었다.내가 입는 옷부터 먹는 음식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했다.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휴대전화에 위치 추적 기능까지 설치해 내 동선마저 감시하고 있었다.송경태가 다정하게 대하는 사람은 언제나 윤라희였다.내게 남은 것은 일방적인 통제와 차가운 무관심뿐이었다.어쩌면 이번에도 내게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없어도 송경태는 얼마든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지만, 송경태가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그리고 예전처럼 내가 먼저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날개가 꺾인 새처럼 다시 송경태의 품으로 기어들어 가 얌전히 갇혀 있기를 바랐을 테니까.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결국 나흘째 되던 날, 송경태가 집으로 돌아왔다.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송경태는 우산을 제대로 쓰지 않은 듯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밖에서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머리카락 끝에서는 쉴 새 없이 물이 떨어졌다.송경태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가라앉은 눈빛에는 서운함과 상처받은 기색이 뒤섞여 있었다.그러다 나를 향해 몇 걸음 다가오더니 문득 걸음을 멈췄다.자신이 흠뻑 젖어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듯했다.송경태는 서둘러 젖은 외투를 벗어 던지고 나서야 나를 품에 안았다.머리 위에서 허스키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산전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