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rt
죽기 전에 하는 이혼

죽기 전에 하는 이혼

작가:  삼나무완결
언어: Korean
goodnovel4goodnovel
10챕터
192조회수
읽기
보관함에 추가

공유:  

보고서
개요
장르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구도현과 결혼한 지 8년. 매년 결혼기념일만 되면 구도현은 항공사에서 갑자기 비행 스케줄이 잡혔다며 집을 비웠고 돌아올 때면 값비싼 귀걸이를 선물하며 내 마음을 달래고는 했다. 그런데 올해 결혼기념일, 나는 우연히 구도현과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됐다. “도현아, 너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윤채희랑 같이 있잖아. 네 아내는 아직도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애가 생길 리가 있나. 집에 가서 남겨 주는 게 얼마나 된다고.” 구도현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채희는 나 하나 믿고 모든 걸 버리고 왔어. 그러니까 내가 책임지고 가정을 만들어 줘야지.” “내 아내는... 유산한 뒤로 마음이 완전히 식었어. 때가 되면 이혼하자고 할 거야. 불공평하긴 하겠지만 돈으로 충분히 보상해 주면 되겠지.” 하지만 구도현에게 그럴 기회가 있을지는 몰랐다. 바로 그 결혼기념일, 나는 난소암 말기 진단을 받았으니까. 구도현이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도 더는 그 사람을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구도현, 이제 우리 서로 놓아주자. 앞으로는 다시 만나지 말자.’

더 보기

1화

제1화

마지막 요리를 완성해 식탁으로 향하자 구도현과 친구들이 나누던 대화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그중 한 명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에 들린 접시를 받아 갔다. 하지만 나머지는 하나같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고 입으로는 결혼기념일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전혀 진심처럼 들리지 않았다.

구도현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되찾았고 얼굴 어디에서도 당황하거나 찔리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전 그런 말을 한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태연했다.

“힘들었지? 얼른 앉아서 밥 먹자.”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 둔 검사 결과지를 꺼내지 못했다.

구도현은 다정한 남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의자를 빼 주더니 가방에서 결혼기념일 선물을 꺼냈다. 이번에도 별다른 것이 없는 값비싼 다이아몬드 귀걸이였다.

벌써 아홉 번째였다.

나는 구도현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서윤아, 두 시간 뒤에 비행 임무가 하나 잡혔어. 오늘은 같이 못 있을 것 같아.”

구도현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똑같은 약속을 대체 몇 번이나 들었는지 셀 수도 없었다.

“이번 비행만 끝내고 나면 제대로 시간 낼게. 응?”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있던 친구들이 거들었다.

“형수님, 도현이 형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하는 것도 다 형수님을 편하게 살게 해 주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안 그랬으면 저렇게 비싼 귀걸이를 어떻게 사 주겠어요.”

“도현이 형이 형수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검사 결과지를 움켜쥔 나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결국 나는 힘없이 손을 풀었고 울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기념일이 뭐 별거 아니잖아. 일이 더 중요하지.”

내가 쉽게 받아들이자 구도현의 미간에 남아 있던 근심도 금세 사라졌다. 구도현은 당연하다는 듯 나를 품에 끌어안고 턱을 들어 올린 뒤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난 정말 복이 많네. 이렇게 이해심이 많은 아내를 다 얻다니... 얌전히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옆으로 늘어뜨린 손을 꽉 쥐었다.

“이번 비행 임무는 꼭 당신이 가야 해? 오늘만이라도 같이 있으면 안 돼? 기념일이 지나기 전에 할 말이 있어.”

구도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순간 굳었다. 그래도 구도현은 애써 다정한 표정을 유지하며 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나랑 떨어지기 싫은 건 알겠는데 이번 임무는 정말 빠질 수가 없어. 내 말 잘 듣고 오늘은 친구들이랑 같이 밥 먹고 있어. 내가 나중에 꼭 보상할게.”

구도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식탁 위에 놓인 휴대폰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구도현은 재빨리 휴대폰을 집어 들더니 서둘러 외투를 챙겨 입으며 말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할 말은 내가 다녀와서 나중에 하자.”

대충 한마디를 남긴 구도현은 그대로 돌아서 나갔고 곧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구도현이 나가자 집 안은 순식간에 다시 시끄러워졌고 웃음소리가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친구들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로 내 잔에 주스를 따라 주었다.

“형수님,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그래도 저희가 있잖아요. 도현이 형도 저희한테 형수님이랑 밥 잘 먹으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괜히 화내고 그러시면 안 돼요.”

가식으로 가득한 얼굴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는 오히려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술이 들어갈수록 목소리는 커졌고 말에는 점점 거리낌이 없어졌다. 나중에는 내가 같은 자리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했다.

“와, 내가 한서윤이면 진짜 살기 싫겠어.”

“도현이 형이 윤채희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는데. 요즘 둘이 애 가지려고 준비한다던데?”

“한서윤 그 멍청한 여자는 자기한테 문제가 있어서 애가 안 생기는 줄 알잖아.”

“야, 입 좀 다물어. 근데 도현이 형이 보내 준 사진이랑 영상 봤냐? 윤채희 몸매가 장난 아니던데?”

“떨어져 있으면 더 애틋해지는 거 몰라? 어차피 도현이 형은 곧 이혼하고 새 인생 시작할 건데 이제 와서 뭘 신경 써?”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리가 깨질 듯 아파졌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지만 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펼치기
다음 화 보기
다운로드

최신 챕터

더보기

독자들에게

굿노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굿노벨에 등록하시면 우수한 웹소설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세상을 모색하는 작가도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맨스, 도시와 현실, 판타지, 현판 등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읽거나 창작할 수 있습니다. 독자로서 질이 좋은 작품을 볼 수 있고 작가로서 색다른 장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어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성한 작품들은 굿노벨에서 더욱 많은 관심과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댓글 없음
10 챕터
제1화
마지막 요리를 완성해 식탁으로 향하자 구도현과 친구들이 나누던 대화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그중 한 명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에 들린 접시를 받아 갔다. 하지만 나머지는 하나같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고 입으로는 결혼기념일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전혀 진심처럼 들리지 않았다.구도현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되찾았고 얼굴 어디에서도 당황하거나 찔리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조금 전 그런 말을 한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태연했다.“힘들었지? 얼른 앉아서 밥 먹자.”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 둔 검사 결과지를 꺼내지 못했다.구도현은 다정한 남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의자를 빼 주더니 가방에서 결혼기념일 선물을 꺼냈다. 이번에도 별다른 것이 없는 값비싼 다이아몬드 귀걸이였다.벌써 아홉 번째였다.나는 구도현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서윤아, 두 시간 뒤에 비행 임무가 하나 잡혔어. 오늘은 같이 못 있을 것 같아.”구도현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똑같은 약속을 대체 몇 번이나 들었는지 셀 수도 없었다.“이번 비행만 끝내고 나면 제대로 시간 낼게. 응?”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있던 친구들이 거들었다.“형수님, 도현이 형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하는 것도 다 형수님을 편하게 살게 해 주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안 그랬으면 저렇게 비싼 귀걸이를 어떻게 사 주겠어요.”“도현이 형이 형수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요.”검사 결과지를 움켜쥔 나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결국 나는 힘없이 손을 풀었고 울지도 따지지도 않았다.“기념일이 뭐 별거 아니잖아. 일이 더 중요하지.”내가 쉽게 받아들이자 구도현의 미간에 남아 있던 근심도 금세 사라졌다. 구도현은 당연하다는 듯 나를 품에 끌어안고 턱을 들어 올린 뒤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난 정말 복이 많네. 이렇게 이해심이 많은 아내를 다 얻다니... 얌전히 집에서 기
더 보기
제2화
깊은 밤이 되자 조금 전에 거실에서 떠들던 소리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침대에 웅크려 앉아 있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협탁 위에 놓인 구도현과의 사진을 집어 들고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보았다. 사진 속 그때의 행복이라도 다시 느껴 보고 싶었지만 이내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구도현은 진작부터 자신의 SNS를 내게 보이지 않도록 막아 두었다.그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랑을 나누는 상대가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나한테 들키게 둘 수 있겠는가.나는 구도현이 나의 순진한 모습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구도현이 좋아했던 건 내가 아니라 자신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나의 믿음이었다.무려 9년 동안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구도현의 태블릿에 시선이 갔다. 잠금번호에 윤채희의 생일을 입력하자 너무도 쉽게 화면이 열렸다.구도현의 SNS를 하나씩 확인할수록 나는 심장에 날카로운 못이 박히는 것 같았다.구도현은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일을 핑계로 나를 두고 윤채희를 만나러 갔다.SNS 계정의 배경도 온통 구도현과 윤채희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 안에서 나와 관련된 것이라고는 예전에 아이를 잃었을 때 받은 검사 결과지뿐이었다.게시물마다 두 사람을 축복하는 댓글이 가득했지만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구도현은 단호하게 답을 남겼다.[결혼이 사람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 난 그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을 뿐이야.]그 순간 눈물이 화면 위로 뚝뚝 떨어지며 시야까지 흐려졌고 손발은 점점 차갑게 식어 갔다. 나는 결국 태블릿을 꺼 버렸지만 머리가 저릴 만큼 가슴이 아픈 건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앞치마 안에 넣어 두었던 검사 결과지를 꺼냈다. 몇 번이나 접었다 펴서 구겨진 종이였다. 잔인한 진단 결과를 다시 확인하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또다시 터졌다.한참 뒤 겨우 감정을 추스른 나는 변호사이자 유일한 친구인 서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유진아, 구도현이 바람피우고 있었어..
더 보기
제3화
나는 이혼 합의서를 거실의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구도현이 보면 분명 좋아하겠지.’9년을 살아온 집을 정말 떠나려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그때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병원에서 재검사를 받으러 오라는 메시지였다.나는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고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향했고 가는 내내 구도현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이혼 합의서를 발견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그런 생각을 하며 병원에 들어섰는데, 고개를 드는 순간 그토록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구도현이었다. 구도현은 산부인과 앞에 서 있었고 곁에는 윤채희가 있었다.윤채희는 구도현의 품에 안겨 있었고 구도현은 다정한 얼굴로 윤채희의 코끝을 살짝 건드렸다.누가 봐도 둘은 다정한 부부 같았다.내 시선이 너무 오래 머물렀던 걸까.구도현도 곧 나를 발견했고 흠칫 놀라면서 윤채희를 안고 있던 팔을 황급히 거두더니 어색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서윤아, 네가 왜 여기 있어?”구도현은 긴장한 듯 침을 삼키며 옆에 선 윤채희에게 계속 눈짓을 보냈다.“비행 임무가 끝나고 방금 돌아왔어. 채희가 몸이 좀 안 좋다는데 우연히 마주쳐서 검사받는 것만 같이 와 준 거야.”구도현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너도 알잖아. 나랑 채희는 그냥 친구야. 채희가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는 사람도 없는데 모른 척할 순 없잖아. 괜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막힘없이 쏟아지는 변명은 늘 그럴듯했다.이 정도만 둘러대면 내가 당연히 속아 넘어갈 거라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예전의 나라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내가 너무 조용히 넘어가자 오히려 구도현이 당황한 눈치였다.구도현은 입을 벌렸다가 몇 번이나 말을 삼켰다. 그동안 잠자코 있던 윤채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고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도현이랑 저는 정말 친한 친구 사이예요. 서윤 씨, 설마 신경 쓰이는 건 아니죠? 괜히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부탁해서
더 보기
제4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구도현은 미간을 찌푸렸고 한숨을 내쉰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화났어?”그래도 눈치는 있는 편이었다.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아니, 그냥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자서 그래.”분위기가 점점 무거워지자 윤채희는 눈치를 살피더니 일부러 힘없는 척 구도현의 품으로 기대었다.“미안해. 도현아,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부탁하지 말 걸 그랬어. 나 때문에 서윤 씨가 기분이 상했잖아. 다 내 잘못이야.”구도현은 망설임도 없이 윤채희를 끌어안았고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네가 뭘 잘못했겠어. 신경 쓰지 마. 우리 사이에 그런 걸 따질 필요가 있어?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잖아.”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맞추며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했다.나는 시선을 돌리고 두 사람을 지나쳐 가려 했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구도현이 내 팔을 붙잡았다.“서윤아, 시간 나면 내가 해외여행 데려가 줄게. 결혼기념일도 제대로 못 보내서 네가 서운한 거 알아.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너한테 한 약속은 꼭 지킬게.”팔을 붙잡힌 탓에 걸음을 멈추고 구도현을 바라봤지만 구도현은 곧바로 윤채희의 어깨를 감싸안고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어울렸다. 하지만 이미 상처 입을 만큼 입은 내 마음은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았고 그런 모습을 보고도 놀라울 만큼 담담했다.나는 구도현이 원하던 대로 이혼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제 앞으로 구도현이 있는 곳에 내가 나타날 일도 없을 것이다.검사 결과는 좋지 않았다. 난소암은 치료가 가능한 경우도 있었지만 나는 이미 말기까지 진행된 상태라 약으로 버티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남은 시간도 많지 않았다.이제 와서는 살아야겠다는 마음마저 희미해졌다. 어쩌면 죽음이야말로 나를 모든 것에서 놓아주는 마지막 해방일지도 몰랐다.‘구도현... 이제야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겠네.’...병원을 나온 뒤 2주가 지났지만 구도현은 내가 집을 떠났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더 보기
제5화
나는 뻑뻑해진 눈을 문질렀다. 쉴 새 없이 울리는 휴대폰 진동 때문에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구도현은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 몇 번이나 이어지는 벨 소리를 견디다 못해 결국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구도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또 집 나가서 사람을 애태우는 거야? 이렇게 하면 내가 미안해할 줄 알았어? 그리고 누가 내 책장을 마음대로 뒤지래? 그 이혼 합의서는 난 인정 못 해.”구도현은 내가 끼어들 틈조차 주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이혼하고 싶어 한 건 구도현이 아니었나...’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합의서에 서명한 걸 두고 왜 따지는 건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몸의 불편함을 애써 참았다.요즘은 입맛도 거의 없었고 이유 없이 출혈이 생기는 날도 있었다.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나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구도현의 말을 끊었다.“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혼하는 게 당신한테도 나한테도 더 낫겠다고 말이야.”구도현은 몇 초 동안 말이 없었다가 이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서윤아,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건데? 있으면 좀 말을 해. 우리 얘기 좀 하자.”“결혼기념일 때문이면 나도 이제 쉬는 날 생겨서 집에 가려고 했어. 그 귀걸이가 얼마짜리인지 알기나 해?”구도현의 목소리에는 당혹감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지금 구도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에 선했다.구도현은 늘 내가 절대 자신을 떠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잠시 뒤 구도현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자기야, 그냥 돌아오면 안 돼? 나랑 채희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넌 계속 아이를 갖고 싶어 했잖아. 우리 같이 노력하면 되잖아.”아이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게 너무 늦어 있었다.나는 오래전에 엄마가 될 기회를 잃었다. 다른 말은 몰라도 구도현만큼은 아이 이야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
더 보기
제6화
목소리의 주인공은 윤채희였다.‘벌써 윤채희를 집에까지 데려간 걸까. 그러면서 내게 전화를 걸어 돌아오라고 붙잡는 이유가 대체 뭘까?’“서윤 씨, 도현이가 서윤 씨 때문에 요즘 얼마나 죽어라 일했는지 알아요? 그렇게 겨우 며칠 휴가 낸 건데 서윤 씨가 괜히 심술부리면서 난소암 말기라는 거짓말까지 하잖아요.”윤채희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도현이가 서윤 씨를 얼마나 생각하는데요. 그러면 안 되죠.”윤채희의 가식적인 말투에 나는 속이 메스꺼워졌다.‘내가 왜 이러는지 구도현과 윤채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둘 다 그렇게 연기하면 안 피곤해요?”나는 더 참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도현 씨, 나랑 이혼하고 싶었던 건 당신이잖아. 그래서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데 뭐가 불만이야? 나도 서명했으니까 숙려 기간만 끝나면 가정법원 가서 이혼 절차 마무리해.”할 말을 모두 마친 나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오히려 속이 후련해졌다.구도현은 윤채희를 그렇게 사랑하고 있었고 내게 남은 시간은 이제 얼마 되지 않았다. 차라리 죽기 전에 두 사람 사이에서 완전히 빠져 주는 편이 나았다. 죽고 나서까지 괜한 이야기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도 않았다.지금 구도현을 놓아주는 건 결국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기도 했다.나는 구도현에게 받은 아홉 쌍의 귀걸이를 모두 처분했다. 그 돈이면 당분간 치료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걸 정리했는데도 구도현은 계속 나를 찾아다녔다.“한서윤, 내가 반드시 널 찾아낼 거야.”그렇게 두 달 동안 나를 찾아 헤맨 끝에 구도현은 결국 내가 사는 곳을 알아냈다.나는 미리 아파트 경비실에 구도현을 들여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 둔 상태였다.그런데 구도현은 아예 담을 넘어 단지 안으로 들어왔다.문을 열고 나를 마주한 순간, 구도현의 얼굴이 굳었다. 몰라보게 야윈 내 모습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비싼 약을 먹고 정기적으로 항암치료까지 받고 있었지만 암세포는 계속 퍼
더 보기
제7화
“서윤아, 우리 이렇게 끝내면 안 되잖아. 지금은 그냥 네 곁에서 치료받는 것만 도와주고 싶어.”하지만 이제 와서 구도현이 무슨 말을 해도 공허하게만 들렸다.나는 멍한 얼굴로 서 있는 구도현을 바라봤다.‘입술까지 떨고 있는 걸 보니 정말 나한테 미안하기라도 한 걸까.’“나도 이혼을 생각한 적은 있어. 하지만 끝까지 결심은 못 했어. 서윤아, 내가 정말 널 사랑하지 않았다면 진작 그 합의서를 내밀었겠지. 우리가 함께 보낸 9년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어?”구도현은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게다가 넌 지금 이렇게 아프잖아. 나 없이 어떻게 버티겠어. 내가 어떻게 널 혼자 두고 가겠어?”나는 차갑게 되물었다.“윤채희가 당신 하나 믿고 모든 걸 버리고 왔다며? 그래서 당신이 책임지고 가정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했잖아. 지금은 윤채희가 당신 아이까지 가졌는데 그 여자는 버릴 수 있어?”그 순간, 구도현의 얼굴이 굳었다.“난 이미 마음 정했어. 더 이상 날 설득하지 마. 오늘 가정법원 가서 이혼 마무리하자.”구도현이 꿈쩍도 하지 않자 나는 문을 닫으려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한 걸음도 떼기 전에 구도현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이제는 구도현의 손조차 뿌리칠 힘이 없었고 고개를 들자 구도현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싫어. 나 정말 후회해. 이혼 안 할 거야. 채희 아이는 낳으면 내가 밖에서 책임지면 돼. 네 병만 나으면 우리 다시 아이 가지자. 응?”구도현은 그렇게 외치며 가방에서 이혼 합의서를 꺼내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나는 지친 얼굴로 구도현을 바라봤다.“도현 씨, 이제 그만 놔줘. 더는 날 괴롭히지 마.”“결혼한 9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당신한테 잘못한 적 없어. 당신 하나 챙기겠다고 내 삶도 다 포기했어.”목이 메었지만 나는 끝까지 말을 이었다.“당신 친구들은 나더러 멍청하고 바보 같다고 했어. 당신 거짓말은 개도 안 믿을 거라는데 나는 믿었어. 당신도 그 사람들 앞에서 날 그렇게 말했잖아.”구도현의 표정이 서서히
더 보기
제8화
윤채희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도발적인 눈빛으로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다가왔다.그리고 거만한 표정으로 내 머리에 씌워져 있던 모자를 낚아챘다.다음 순간, 윤채희는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머리카락 하나 남지 않은 맨머리가 그대로 드러나자 나는 수치심이 온몸을 덮쳤다.윤채희는 역겹다는 듯 코까지 막으며 비웃었다.“한서윤 씨, 머리카락이 진짜 다 빠졌네요? 하하하. 지금 서윤 씨의 꼴이 어떤지 거울이라도 한번 볼래요?”그러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욕설을 퍼부었다.“이렇게까지 할 거면 그냥 죽어 버리지 그래요? 일부러 이러는 거잖아요. 정말 서윤 씨 때문에 미치겠어요. 서윤 씨가 집 나간 뒤로 도현이가 하루 종일 넋이 나가 있다고요!”“대체 왜 아직도 안 죽는 건데요?”윤채희는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키며 악을 썼고 화가 얼마나 났는지 가슴까지 거칠게 들썩였다.그때 아랫배가 욱신거리며 아파져 오자 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이상하게도 병원에 올 때마다 윤채희와 마주쳤고 그럴 때마다 윤채희는 빠짐없이 비아냥거렸으며 구도현은 늘 윤채희의 편에 섰다.이제는 익숙할 정도였다. 나는 아픔을 참으며 겨우 몸을 바로 세우고 윤채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모자 돌려줘요. 그쪽이랑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모자를 빼앗으려고 손을 뻗자 윤채희는 약이라도 올리듯 모자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밟았다.그러고는 내 몸을 세게 밀쳤다.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한 나는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고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한서윤 씨, 저한테 빌어 봐요. 그러면 제가 모자를 돌려줄 수도 있어요”윤채희의 날카로운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묻어났다.내가 이렇게 처참한 꼴로 바닥에 쓰러진 모습이 꽤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소란이 커지자 구도현과 의사 몇 명이 급히 이쪽으로 다가왔다.“윤채희, 지금 뭐 하는 거야!”구도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윤채희를 나무란 뒤 곧장 내 옆에 쪼그려 앉아 나를 일으켜 세웠다. 구도현이 먼저 나를 챙기자
더 보기
제9화
그 순간, 구도현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윤채희는 그런 구도현의 손을 붙잡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도현아, 이러지 마...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나랑 결혼 안 할 거야? 난 네 아이까지 가졌잖아!”구도현은 차분한 얼굴로 윤채희를 바라봤다.“윤채희, 난 서윤의 병부터 치료할 거야.”윤채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저었다.“구도현, 거짓말하지 마. 그러면 나한테 했던 약속은 전부 거짓말이었어? 난 널 하나 믿고 다 포기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정말 네가 미워 죽겠어!”나는 한동안 윤채희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윤채희도 어느 정도는 피해자였다. 구도현이 수없이 헛된 약속을 하지 않았다면 모든 걸 버리고 여기까지 찾아왔을 리 없었다.결국 구도현이 가장 사랑한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었다. 누군가가 곁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마음이 식는 순간 그동안 쏟아붓던 사랑조차 아무렇지 않게 거둬 갈 사람이었다.“왜 그러는 거야? 아이가 갖고 싶다고 한 것도 너잖아! 그래서 나도 임신한 거고...”윤채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네가 그랬잖아. 한서윤은 네 아이도 못 가지는 여자고 넌 애초에 한서윤을 사랑하지도 않는다고!”“구도현, 한서윤이 아프니까 이제 와서 무슨 좋은 사람인 척하는 거야?”흥분하던 윤채희는 오히려 점점 차분해졌다. 차갑게 선을 긋는 목소리로 구도현이 저질러 온 일들을 하나씩 폭로했다.주변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의 표정도 미묘하게 굳어졌고 구경하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낮은 수군거림이 퍼졌다.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구긴 구도현은 성큼성큼 윤채희에게 다가가더니 목을 움켜쥐었다.“이 미친년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그러고는 곧장 나를 돌아봤다.“서윤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야. 네가 어떻게 되든 난 계속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날 버리지 마. 응? 치료만 제대로 받으면 난소암도 분명 나을 수 있어.”나를 바라보는 구도현의 눈에는
더 보기
제10화
나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천천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항암치료실로 향했다.그래도 지금은 내 발로 걸을 수 있고 밥도 먹을 수 있었다.‘조금만 더 지나면 침대에 누운 채 온몸에 여러 관을 꽂고 겨우 숨만 이어 가게 되겠지.’난 남은 시간만큼 구도현을 단 한 번도 보고 싶지 않았다.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도현 씨, 지금 선택해. 하나는 오늘 나랑 가정법원에 가서 이혼 절차를 끝내는 거고 다른 하나는 이혼소송 하는 거야. 당신이 골라.”내 말에 구도현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몇 분 뒤 경찰들이 병원으로 들이닥쳤고 윤채희와 구도현은 모두 경찰과 함께 가게 됐다.윤채희는 내 앞을 지나면서도 끝까지 험한 말을 퍼부었다.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정신 상태도 이미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구도현은 마지막까지 이번 검사만이라도 곁에서 함께하게 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대신 서유진에게 전화를 걸어 병원으로 와 달라고 부탁했다.내 연락을 받은 서유진은 곧바로 차를 몰고 병원으로 달려와 나를 데리고 나갔다.나는 이제 구도현이 있는 곳을 완전히 떠나기로 했다.공항에 도착하자 서유진이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물었다.“서윤아, 구도현 씨한테 정말 아무 말도 안 해도 되겠어?”내 기분을 건드릴까 조심스러워하는 서유진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감은 채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헤어지기로 마음먹은 이상 더는 미련이 남을 일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은 구도현이 너무 미웠다.아무 죄도 없던 내 아이는 구도현과 윤채희의 사랑 때문에 희생됐고 이제 내게 남은 시간마저 얼마 없었다.고작 마지막 한 달을 위해 가진 돈을 전부 치료비로 쏟아붓느니 차라리 그동안 가 보고 싶었던 곳들을 직접 눈에 담고 싶었다.그리고 이제야 알았다. 그토록 가 보고 싶었던 해원시는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비행기로 고작 세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그런데도 구도현은 9년 동안 번번이 나를 해원시에 데려가 주겠다고 약속만 했다. 결혼기념일이 돌아
더 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작품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