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구도현과 결혼한 지 8년. 매년 결혼기념일만 되면 구도현은 항공사에서 갑자기 비행 스케줄이 잡혔다며 집을 비웠고 돌아올 때면 값비싼 귀걸이를 선물하며 내 마음을 달래고는 했다. 그런데 올해 결혼기념일, 나는 우연히 구도현과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됐다. “도현아, 너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윤채희랑 같이 있잖아. 네 아내는 아직도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애가 생길 리가 있나. 집에 가서 남겨 주는 게 얼마나 된다고.” 구도현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채희는 나 하나 믿고 모든 걸 버리고 왔어. 그러니까 내가 책임지고 가정을 만들어 줘야지.” “내 아내는... 유산한 뒤로 마음이 완전히 식었어. 때가 되면 이혼하자고 할 거야. 불공평하긴 하겠지만 돈으로 충분히 보상해 주면 되겠지.” 하지만 구도현에게 그럴 기회가 있을지는 몰랐다. 바로 그 결혼기념일, 나는 난소암 말기 진단을 받았으니까. 구도현이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도 더는 그 사람을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구도현, 이제 우리 서로 놓아주자. 앞으로는 다시 만나지 말자.’
더 보기나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천천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항암치료실로 향했다.그래도 지금은 내 발로 걸을 수 있고 밥도 먹을 수 있었다.‘조금만 더 지나면 침대에 누운 채 온몸에 여러 관을 꽂고 겨우 숨만 이어 가게 되겠지.’난 남은 시간만큼 구도현을 단 한 번도 보고 싶지 않았다.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도현 씨, 지금 선택해. 하나는 오늘 나랑 가정법원에 가서 이혼 절차를 끝내는 거고 다른 하나는 이혼소송 하는 거야. 당신이 골라.”내 말에 구도현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몇 분 뒤 경찰들이 병원으로 들이닥쳤고 윤채희와 구도현은 모두 경찰과 함께 가게 됐다.윤채희는 내 앞을 지나면서도 끝까지 험한 말을 퍼부었다.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정신 상태도 이미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구도현은 마지막까지 이번 검사만이라도 곁에서 함께하게 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대신 서유진에게 전화를 걸어 병원으로 와 달라고 부탁했다.내 연락을 받은 서유진은 곧바로 차를 몰고 병원으로 달려와 나를 데리고 나갔다.나는 이제 구도현이 있는 곳을 완전히 떠나기로 했다.공항에 도착하자 서유진이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물었다.“서윤아, 구도현 씨한테 정말 아무 말도 안 해도 되겠어?”내 기분을 건드릴까 조심스러워하는 서유진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감은 채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헤어지기로 마음먹은 이상 더는 미련이 남을 일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은 구도현이 너무 미웠다.아무 죄도 없던 내 아이는 구도현과 윤채희의 사랑 때문에 희생됐고 이제 내게 남은 시간마저 얼마 없었다.고작 마지막 한 달을 위해 가진 돈을 전부 치료비로 쏟아붓느니 차라리 그동안 가 보고 싶었던 곳들을 직접 눈에 담고 싶었다.그리고 이제야 알았다. 그토록 가 보고 싶었던 해원시는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비행기로 고작 세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그런데도 구도현은 9년 동안 번번이 나를 해원시에 데려가 주겠다고 약속만 했다. 결혼기념일이 돌아
그 순간, 구도현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윤채희는 그런 구도현의 손을 붙잡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도현아, 이러지 마...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나랑 결혼 안 할 거야? 난 네 아이까지 가졌잖아!”구도현은 차분한 얼굴로 윤채희를 바라봤다.“윤채희, 난 서윤의 병부터 치료할 거야.”윤채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저었다.“구도현, 거짓말하지 마. 그러면 나한테 했던 약속은 전부 거짓말이었어? 난 널 하나 믿고 다 포기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정말 네가 미워 죽겠어!”나는 한동안 윤채희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윤채희도 어느 정도는 피해자였다. 구도현이 수없이 헛된 약속을 하지 않았다면 모든 걸 버리고 여기까지 찾아왔을 리 없었다.결국 구도현이 가장 사랑한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었다. 누군가가 곁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마음이 식는 순간 그동안 쏟아붓던 사랑조차 아무렇지 않게 거둬 갈 사람이었다.“왜 그러는 거야? 아이가 갖고 싶다고 한 것도 너잖아! 그래서 나도 임신한 거고...”윤채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네가 그랬잖아. 한서윤은 네 아이도 못 가지는 여자고 넌 애초에 한서윤을 사랑하지도 않는다고!”“구도현, 한서윤이 아프니까 이제 와서 무슨 좋은 사람인 척하는 거야?”흥분하던 윤채희는 오히려 점점 차분해졌다. 차갑게 선을 긋는 목소리로 구도현이 저질러 온 일들을 하나씩 폭로했다.주변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의 표정도 미묘하게 굳어졌고 구경하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낮은 수군거림이 퍼졌다.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구긴 구도현은 성큼성큼 윤채희에게 다가가더니 목을 움켜쥐었다.“이 미친년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그러고는 곧장 나를 돌아봤다.“서윤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야. 네가 어떻게 되든 난 계속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날 버리지 마. 응? 치료만 제대로 받으면 난소암도 분명 나을 수 있어.”나를 바라보는 구도현의 눈에는
윤채희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도발적인 눈빛으로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다가왔다.그리고 거만한 표정으로 내 머리에 씌워져 있던 모자를 낚아챘다.다음 순간, 윤채희는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머리카락 하나 남지 않은 맨머리가 그대로 드러나자 나는 수치심이 온몸을 덮쳤다.윤채희는 역겹다는 듯 코까지 막으며 비웃었다.“한서윤 씨, 머리카락이 진짜 다 빠졌네요? 하하하. 지금 서윤 씨의 꼴이 어떤지 거울이라도 한번 볼래요?”그러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욕설을 퍼부었다.“이렇게까지 할 거면 그냥 죽어 버리지 그래요? 일부러 이러는 거잖아요. 정말 서윤 씨 때문에 미치겠어요. 서윤 씨가 집 나간 뒤로 도현이가 하루 종일 넋이 나가 있다고요!”“대체 왜 아직도 안 죽는 건데요?”윤채희는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키며 악을 썼고 화가 얼마나 났는지 가슴까지 거칠게 들썩였다.그때 아랫배가 욱신거리며 아파져 오자 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이상하게도 병원에 올 때마다 윤채희와 마주쳤고 그럴 때마다 윤채희는 빠짐없이 비아냥거렸으며 구도현은 늘 윤채희의 편에 섰다.이제는 익숙할 정도였다. 나는 아픔을 참으며 겨우 몸을 바로 세우고 윤채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모자 돌려줘요. 그쪽이랑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모자를 빼앗으려고 손을 뻗자 윤채희는 약이라도 올리듯 모자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밟았다.그러고는 내 몸을 세게 밀쳤다.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한 나는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고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한서윤 씨, 저한테 빌어 봐요. 그러면 제가 모자를 돌려줄 수도 있어요”윤채희의 날카로운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묻어났다.내가 이렇게 처참한 꼴로 바닥에 쓰러진 모습이 꽤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소란이 커지자 구도현과 의사 몇 명이 급히 이쪽으로 다가왔다.“윤채희, 지금 뭐 하는 거야!”구도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윤채희를 나무란 뒤 곧장 내 옆에 쪼그려 앉아 나를 일으켜 세웠다. 구도현이 먼저 나를 챙기자
“서윤아, 우리 이렇게 끝내면 안 되잖아. 지금은 그냥 네 곁에서 치료받는 것만 도와주고 싶어.”하지만 이제 와서 구도현이 무슨 말을 해도 공허하게만 들렸다.나는 멍한 얼굴로 서 있는 구도현을 바라봤다.‘입술까지 떨고 있는 걸 보니 정말 나한테 미안하기라도 한 걸까.’“나도 이혼을 생각한 적은 있어. 하지만 끝까지 결심은 못 했어. 서윤아, 내가 정말 널 사랑하지 않았다면 진작 그 합의서를 내밀었겠지. 우리가 함께 보낸 9년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어?”구도현은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게다가 넌 지금 이렇게 아프잖아. 나 없이 어떻게 버티겠어. 내가 어떻게 널 혼자 두고 가겠어?”나는 차갑게 되물었다.“윤채희가 당신 하나 믿고 모든 걸 버리고 왔다며? 그래서 당신이 책임지고 가정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했잖아. 지금은 윤채희가 당신 아이까지 가졌는데 그 여자는 버릴 수 있어?”그 순간, 구도현의 얼굴이 굳었다.“난 이미 마음 정했어. 더 이상 날 설득하지 마. 오늘 가정법원 가서 이혼 마무리하자.”구도현이 꿈쩍도 하지 않자 나는 문을 닫으려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한 걸음도 떼기 전에 구도현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이제는 구도현의 손조차 뿌리칠 힘이 없었고 고개를 들자 구도현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싫어. 나 정말 후회해. 이혼 안 할 거야. 채희 아이는 낳으면 내가 밖에서 책임지면 돼. 네 병만 나으면 우리 다시 아이 가지자. 응?”구도현은 그렇게 외치며 가방에서 이혼 합의서를 꺼내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나는 지친 얼굴로 구도현을 바라봤다.“도현 씨, 이제 그만 놔줘. 더는 날 괴롭히지 마.”“결혼한 9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당신한테 잘못한 적 없어. 당신 하나 챙기겠다고 내 삶도 다 포기했어.”목이 메었지만 나는 끝까지 말을 이었다.“당신 친구들은 나더러 멍청하고 바보 같다고 했어. 당신 거짓말은 개도 안 믿을 거라는데 나는 믿었어. 당신도 그 사람들 앞에서 날 그렇게 말했잖아.”구도현의 표정이 서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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