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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했던 터널을 지나 내 인생 리부팅

아득했던 터널을 지나 내 인생 리부팅

By:  아정이는 고수파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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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5개월에 접어들 때까지 송경태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첫사랑을 만나러 다니느라 넉 달째 산부인과에 함께 가지 않았다.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였지만, 송경태는 또다시 약속을 어겼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짜증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어쩌라고? 네 뱃속에 있는 애, 나 혼자 만든 줄 알아? 엄마인 네가 좀 더 신경 쓰는 게 그렇게 힘들어? 산부인과 한 번 같이 못 갔다고 애가 잘못되기라도 해?” 나는 아무 말 없이 병원 대기실에 걸린 TV를 바라봤다. 마침 화면에서는 재계 인사들의 자선 행사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화면 속 윤라희를 바라보는 송경태의 얼굴에는 한없이 다정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알았어...” 평소와 다른 내 반응을 눈치챈 송경태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나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내 순번이 되었다. 송경태가 첫사랑을 위해 거액을 들여 불꽃 이벤트를 열어 줬다는 뉴스를 보고 수군거리던 간호사들 중 한 명이 내게로 다가왔다. “임소이 님, 산전 검진은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검진 예약은 취소해 주세요.” 잠깐의 침묵 끝에,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대신 일주일 뒤로 임신중절 수술 예약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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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송경태가 나를 찾아냈을 때, 나는 길가에 앉아 멍하니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번화가 한복판에 걸린 대형 스크린에서는 송경태와 윤라희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은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다.

그때 송경태가 싸늘한 얼굴로 내 시야를 가로막더니 내 팔을 잡아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이 밤중에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산전 검진 한 번 같이 못 가 준 게 그렇게 난리 칠 일이야? 제발 억지 좀 부리지 마!”

나는 순간 멍해졌다.

송경태와 결혼한 지난 2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은 늘 같았다.

“억지 좀 부리지 마.”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휴대전화를 확인하겠다고 했을 때도 송경태는 괜히 억지를 부리지 말라고 했다.

부부 동반 행사 같은 공식 석상에 함께 가고 싶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산전 검진에 한 번만 같이 가 달라는 부탁조차 송경태에게는 괜한 억지에 불과했다.

예전의 임소이라면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미안하다고 했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나는 어느새 제법 불러온 배를 내려다봤다. 송경태가 원하는 고분고분한 아내 노릇은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내가 대꾸조차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자, 송경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 시간에 어디 가려고?”

“사진 찍으러 가자.”

송경태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임신한 뒤 내가 송경태에게 부탁한 것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산전 검진에 함께 가는 것과 임신 기념사진을 같이 찍는 것.

하지만 송경태는 그중 어느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송경태는 뒤늦게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근처 스튜디오로 가자고 했다.

“거참... 요즘 자꾸 깜빡하네. 네가 좀 이해해 줘.”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송경태는 기억력이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윤라희의 생일은 물론이고 좋아하는 음식, 디저트까지 전부 기억했다.

심지어 윤라희가 작품을 하나씩 완성할 때마다 그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작품이 수십 개를 넘어 백여 개에 달하는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송경태는 유독 나와 관련된 일들만 기억하지 못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차가 멈췄다.

차에서 내려 고개를 든 순간, 내 몸이 그대로 굳었다.

윤라희의 개인 스튜디오였다.

그 여자가 청해시로 돌아온 날,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송경태가 그 여자를 위해 직접 발품을 팔아 개인 스튜디오를 마련해 줬다는 사실을.

스튜디오 이름은 ‘스튜디오 3650’이었다.

송경태와 윤라희가 사랑했던 10년, 꼬박 3,650일을 의미하는 이름이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연인으로 지내왔지만, 윤라희가 꿈을 좇아 유럽으로 떠나면서 헤어지게 됐다.

그리고 윤라희의 선택에 화가 난 송경태는 홧김에 나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렇게 2년이 흐른 뒤, 윤라희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날 비를 흠뻑 맞은 채 사과하는 윤라희를 마주한 순간, 송경태의 오랜 원망은 눈 녹듯 사라졌다.

이후 송경태는 주변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윤라희와 다시 예전처럼 지내기 시작했다.

하룻밤 사이 나는 멀쩡한 아내에서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불청객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억지로 이어 온 결혼 생활에 더 이상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다.

차 문고리를 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송경태가 내 손목을 잡고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송경태를 따라 스튜디오로 들어서자, 윤라희가 곧장 다가왔다.

늘씬한 몸매에 생머리를 느슨하게 틀어 올린 모습은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듯 우아했다.

임신으로 얼굴이 핼쑥해지고 손발까지 퉁퉁 부은 나와 나란히 서자, 윤라희의 모습은 확연히 대비됐다.

스튜디오 직원은 송경태를 이미 여러 번 본 사람처럼 반갑게 말을 걸었다.

“형부, 또 라희 언니 보러 오셨어요?”

송경태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곧바로 내 눈치를 살피듯 고개를 돌렸다.

윤라희도 당황한 듯 혀를 차며 직원을 나무랐다.

“무슨 소리야. 경태 부인이잖아.”

그러고는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소이 씨, 신경 쓰지 마세요. 제 밑에서 일하는 동생인데 생각 없이 말할 때가 있어요.”

윤라희는 자연스럽게 내 팔을 잡고 촬영용 의상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윤라희는 몇 번이나 곁눈질로 내 표정을 살피다가 내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해 보이자 비웃듯 입꼬리를 실룩댔다.

내 시선은 눈앞에 걸린 드레스 한 벌에 머물렀다.

은은한 아이보리색이 감도는 긴 드레스였다. 단정하면서도 성스러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드레스를 꺼내 입어 보려던 순간, 송경태가 손을 뻗어 막았다.

“다른 걸로 골라.”

예상 밖으로 단호한 반응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유를 묻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에는 송경태와 윤라희가 나란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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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송경태가 나를 찾아냈을 때, 나는 길가에 앉아 멍하니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번화가 한복판에 걸린 대형 스크린에서는 송경태와 윤라희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나란히 선 두 사람은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다.그때 송경태가 싸늘한 얼굴로 내 시야를 가로막더니 내 팔을 잡아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이 밤중에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산전 검진 한 번 같이 못 가 준 게 그렇게 난리 칠 일이야? 제발 억지 좀 부리지 마!”나는 순간 멍해졌다.송경태와 결혼한 지난 2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은 늘 같았다.“억지 좀 부리지 마.”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휴대전화를 확인하겠다고 했을 때도 송경태는 괜히 억지를 부리지 말라고 했다.부부 동반 행사 같은 공식 석상에 함께 가고 싶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산전 검진에 한 번만 같이 가 달라는 부탁조차 송경태에게는 괜한 억지에 불과했다.예전의 임소이라면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미안하다고 했겠지만, 이제는 달랐다.나는 어느새 제법 불러온 배를 내려다봤다. 송경태가 원하는 고분고분한 아내 노릇은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내가 대꾸조차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자, 송경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이 시간에 어디 가려고?”“사진 찍으러 가자.”송경태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임신한 뒤 내가 송경태에게 부탁한 것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산전 검진에 함께 가는 것과 임신 기념사진을 같이 찍는 것.하지만 송경태는 그중 어느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송경태는 뒤늦게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근처 스튜디오로 가자고 했다.“거참... 요즘 자꾸 깜빡하네. 네가 좀 이해해 줘.”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송경태는 기억력이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윤라희의 생일은 물론이고 좋아하는 음식, 디저트까지 전부 기억했다.심지어 윤라희가 작품을 하나씩 완성할 때마다 그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작품이 수십 개를 넘어 백여 개에 달하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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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사진 속 윤라희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내가 고른 것과 똑같았다.속이 울렁거렸다.나는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드레스를 내려놓고 다른 디자인을 골랐다.드레스를 들고 탈의실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스튜디오 직원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같은 옷을 입는다고 다 똑같이 어울리는 건 아니잖아요. 본인도 알아챘나 봐요. 바로 다른 옷으로 바꾸는 것 좀 봐요.”윤라희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대놓고 나를 비웃는 듯한 웃음이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유치한 도발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옷을 갈아입은 뒤 촬영용 의자에 앉자, 송경태가 내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카메라 셔터가 눌리기 직전이었다.“어머, 경태야...”윤라희가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바닥에 쓰러졌다.“나 여기가 너무 아파.”송경태는 내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그러고는 다급하게 윤라희에게 달려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나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스튜디오 직원이 안 됐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나는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고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었다.“계속 찍어 주세요.”직원이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촬영을 모두 마친 뒤 나는 완성된 사진을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스튜디오를 나왔다.어차피 나와 아이를 위해 남기는 추억이었다.그 사진에 송경태가 있든 없든 이제는 상관없었다.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매서웠다. 이대로 집까지 돌아가기는 무리일 것 같아 근처 호텔에 방을 잡았다.침대에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전화가 연달아 울렸다.송경태에게 걸려 온 전화라는 걸 확인한 나는 망설임 없이 수신을 거부했다.계속 전화를 받지 않자, 세 번이나 이어지던 전화는 그제야 잠잠해졌다.얼마나 지났을까. 잠결에 다시 휴대전화 알림음이 들렸다.이번에는 메시지였다.무심코 화면을 확인한 순간, 윤라희가 송경태의 품에 안겨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그런데 윤라희가 입고 있는 옷이 낯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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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순간 거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고, 조금 전까지 떠들썩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송경태가 내 어깨를 짓누르듯 잡고 목소리를 낮췄다.“라희가 버렸어. 오래 두면 김치도 상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너 생각해서 그런 거야.”나를 생각해서라는 그 말에 어이가 없었다.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송경태를 바라봤다.“당신도 알잖아. 이건 엄마가 남긴 마지막 음식이야. 내가 먹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윤라희 씨한테 먹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대체 누구 건강을 생각해서 버렸다는 거야? 왜 남의 물건에 마음대로 손대?”생각해 보면 송경태는 늘 이런 식이었다. 나를 꾸짖고 가르치려 들면서도 정작 아내로서 받아야 할 최소한의 존중조차 해 주지 않았다.내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참으려 해도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송경태는 당황한 듯 잠시 굳어 있다가 내 얼굴로 손을 뻗었다.나는 있는 힘껏 그 손을 쳐 냈다.“소이 씨!”갑자기 윤라희의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윤라희는 송경태를 보호하기라도 하듯 앞을 가로막더니 화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김치는 내가 버렸어요. 화가 나면 나한테 화내요. 왜 경태한테 그래요?”안준호도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고작 김치 한 통 가지고 이럴 일이에요? 소이 씨가 이러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불편해지잖아요.”류시우는 아예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라희는 생물학 전공자예요. 그러니 소이 씨보다 훨씬 잘 알겠죠. 소이 씨를 생각해서 버려 줬더니, 고마운 줄을 모르네.”누구 하나 내 입장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윤라희의 편을 들었고, 오히려 나를 별것도 아닌 일로 트집을 잡는 사람처럼 몰아갔다.게다가 사람들은 동정 섞인 눈빛으로 송경태를 바라봤다. 마치 어쩌다 저런 여자와 결혼했느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상관없었다.송경태의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말을 하든 이제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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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네가 끼어들어서 헤어진 거라며? 그렇게 남의 남자를 뺏고 싶었냐? 불륜녀 주제에 뻔뻔하기는.][임신했다면서요? 그냥 빨리 애 지워요. 괜히 낳아서 라희 작가님 마음 아프게 하지 말고.][마음이 다른 여자에게 가 있는 남자를 붙잡고 있으면 뭐가 달라져요? 불쌍한 두 사람 그만 괴롭히고 이제 좀 놔주세요.]논란은 시간이 지날수록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관련 기사는 사흘 내내 포털 메인을 장식했다.송경태는 내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송경태는 내가 먼저 고개 숙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우리 관계에서 주도권은 언제나 송경태에게 있었다.내가 입는 옷부터 먹는 음식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했다.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휴대전화에 위치 추적 기능까지 설치해 내 동선마저 감시하고 있었다.송경태가 다정하게 대하는 사람은 언제나 윤라희였다.내게 남은 것은 일방적인 통제와 차가운 무관심뿐이었다.어쩌면 이번에도 내게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없어도 송경태는 얼마든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지만, 송경태가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그리고 예전처럼 내가 먼저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날개가 꺾인 새처럼 다시 송경태의 품으로 기어들어 가 얌전히 갇혀 있기를 바랐을 테니까.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결국 나흘째 되던 날, 송경태가 집으로 돌아왔다.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송경태는 우산을 제대로 쓰지 않은 듯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밖에서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머리카락 끝에서는 쉴 새 없이 물이 떨어졌다.송경태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가라앉은 눈빛에는 서운함과 상처받은 기색이 뒤섞여 있었다.그러다 나를 향해 몇 걸음 다가오더니 문득 걸음을 멈췄다.자신이 흠뻑 젖어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듯했다.송경태는 서둘러 젖은 외투를 벗어 던지고 나서야 나를 품에 안았다.머리 위에서 허스키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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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한편, 윤라희에게 달려간 송경태는 처음으로 화를 냈다.윤라희가 자살 소동까지 벌여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생각해 보면 윤라희는 예전부터 늘 자기중심적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며 수없이 사고를 쳤고, 송경태를 곁에 두고도 새로운 사람이 눈에 들어오면 여지를 주며 애매한 관계를 이어 갔다.유럽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윤라희는 송경태와 상의 한마디 없이 이별을 통보하고 훌쩍 떠나 버렸다.어릴 때야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런 행동까지 참고 넘어갔을지 몰라도, 이제 송경태도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였다.더 이상 윤라희와 이런 식으로 미성숙한 연애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송경태가 아무 말 없이 돌아서자, 윤라희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았다.“그러게, 누가 내 연락을 계속 무시하래? 전화도 안 받고...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눈이 다 부었잖아.”윤라희는 입술까지 삐죽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투정을 부렸다.예전처럼 송경태가 돌아서서 달래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하지만 송경태는 윤라희의 팔을 거칠게 떼어 냈다. 윤라희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노골적인 혐오감이 서려 있었다.그런 눈빛은 처음이었는지 윤라희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이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장난 한번 친 거잖아.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임소이가 내 욕이라도 했어?”윤라희의 눈가가 붉어졌다.“나는 임소이한테 너까지 양보했잖아. 대체 나한테 뭘 더 바라는 건데? 내가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어?”송경태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었다. 관자놀이에는 핏줄까지 불거져 있었다.“소이가 언제 네 욕을 했는데?”결국 송경태도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소이는 너에 대해 한마디도 한 적 없어!”그 말만큼은 사실이었다.‘소이는 라희를 험담한 적 없어. 내가 라희에게 가겠다고 했을 때도 아무 말 없이 보내 줬지. 라희는 어떻게 아무런 근거도 없이 소이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는 걸까!’“소이는 뒤에서 누군가를 험담하는 사람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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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송경태의 표정이 순식간에 멍해졌다.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한동안 굳어 있던 송경태가 겨우 입을 열었다.“임소이 환자... 지금 수술 중이라고요?”간호사는 귀찮은 기색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임신중절 수술 중이세요. 시작한 지 꽤 됐으니까 곧 나오실 거예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술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마취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내가 이동 침대에 누운 채 실려 나오자, 송경태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비틀거리듯 다가온 송경태의 시선이 내 배에 꽂혔다.임신 5개월에 접어들며 제법 불러 있던 배는 어느새 평평해져 있었다.송경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이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보호자분!”간호사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송경태가 정신을 잃었다.나도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다시 눈을 떴을 때도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목이 말라 테이블 위의 물을 향해 손을 뻗자, 곁에 있던 송경태가 먼저 컵을 집어 내 입가에 가져다 댔다.물을 몇 모금 넘기고 나서야 송경태의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몇 년은 늙어 버린 듯한 얼굴이었다.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꽉 움켜쥔 주먹 위로 핏줄이 선명하게 불거져 있었다.긴 침묵 끝에 송경태가 겨우 입을 열었다.“왜 그랬어...”갈라진 목소리가 힘겹게 새어 나왔다.“왜 나한테 말도 없이 아이를 지웠어?”분노를 누르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당장이라도 모진 말을 쏟아 낼 것처럼 이를 악물고 있으면서도 정작 나를 보지는 못했다.송경태의 시선은 줄곧 병실 바닥에 박혀 있었다.나는 그런 송경태를 잠시 바라보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우리 이혼하자.”송경태의 어깨가 굳었다.“당신이랑 윤라희 씨 사이에서 빠져 줄게. 그러니까 당신도 이제 나 좀 놔줘.”송경태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고작 내가 산전 검진에 같이 안 갔다고 이러는 거야?”힘없이 새어 나오던 웃음 끝에 눈물 한 방울이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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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정옥순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었다.“라희한테 뭐라고 하지 마! 내가 물어본 거야!”정옥순은 송경태를 호되게 제지하더니 나를 향해 삿대질했다.“당장 내일 이혼해. 내가 처음부터 저런 여자랑은 안 된다고 했지? 네가 정신이 나가서 기어코 결혼하겠다고 고집부리더니 결국 이렇게 됐구나! 네 자식까지 제멋대로 지워 버렸잖아!”분을 삭이지 못하던 정옥순이 느닷없이 옆에 있던 의자를 집어 들더니 그대로 나를 향해 내리쳤다.순간 송경태가 재빨리 내 앞을 가로막았다.송경태는 날아드는 의자를 붙잡아 바닥에 내던진 뒤 끝내 참았던 감정을 터뜨렸다.“우리 일에 제발 좀 끼어들지 마세요!”거실에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아버지도 어머니 때문에 못 버티고 이혼했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제 인생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하세요? 대체 몇 사람 인생을 망쳐야 만족하시겠어요!”정옥순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이번에는 부들부들 떨며 아들을 향해 삿대질했다.“너... 지금 뭐라고 했어?”목소리는 날카로웠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저런 계집애 하나 때문에 네가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 그래, 잘났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말을 마친 정옥순은 돌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무도 미처 막을 새 없이 대리석 테이블 모서리에 머리를 세게 들이받더니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송경태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이 휘둥그레졌다.“엄마!”송경태는 곧장 달려가 정옥순을 업고 밖으로 뛰쳐나갔다.두 사람이 사라지자, 곁에서 모든 걸 지켜보던 윤라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이내 기다렸다는 듯 턱을 치켜들며 나를 내려다봤다.“눈치가 있으면 이제 알아서 나가요. 여기 계속 붙어 있어 봤자 더 우스워질 뿐이니까.”평소 같았으면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의기양양한 윤라희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엄마가 마지막으로 담가 준 김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통에 처박던 모습이 떠올랐다.꾹꾹 눌러 참아 왔던 분노가 한순간에 치밀어 올랐다.나는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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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꼴좋네. 누가 어머니한테 일러바치래? 윤라희, 너 이제 진짜 지긋지긋해.”조금 전까지 서운한 기색을 보이던 윤라희의 얼굴이 순간 굳어 버렸다.“경태야...”믿을 수 없다는 듯 송경태를 바라보는 윤라희의 두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내가 누구 때문에 알려 드린 건데! 다 너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네가 얼마나 아빠가 되고 싶어 했는지 아니까 나는...”“그만해!”송경태가 매섭게 말을 끊었다. 그리고 윤라희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이 와중에도 또 거짓말이네. 넌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적이었어. 3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변한 게 없네. 내가 어떻게 너 같은 여자랑 만났는지 후회될 정도야.”말을 마친 송경태는 더 이상 윤라희와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송경태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머니와의 인연을 끊을 수도,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그날 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송경태는 불 하나 켜지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운 집을 보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그는 침실과 거실을 오가며 집 안 곳곳을 뒤졌다. 혹시 다른 방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방문을 하나씩 열어 보기도 했다.하지만 집 안을 샅샅이 뒤져도 애타게 찾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송경태는 절망에 빠졌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꺼낸 그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당연히 연결될 리 없었다.두 번, 세 번...열 번이 넘도록 전화를 걸고 나서야 송경태는 포기한 듯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다 멈칫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협의이혼 의사 확인 신청서를 본 송경태는 한동안 그 앞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다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그대로 벽에 집어 던졌다.휴대전화 액정이 산산조각 났다.송경태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한참을 버티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생전에 내게 남겨 준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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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일단... 이혼부터 정리되고 나서 이야기하고 싶어.”순간 최시현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활짝 웃더니 나를 번쩍 안아 들고 그 자리에서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돌았다.덕분에 나도 덩달아 웃음이 터졌다.그러면서도 떨어질까 봐 무서워 최시현의 어깨를 붙잡고 몇 번이나 내려달라고 소리쳤다.그때였다.“임소이!”가로등 아래에서 누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놀라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송경태였다.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만큼 수척해졌고,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무엇보다 나와 최시현을 바라보는 눈빛이 섬뜩할 만큼 살벌했다.나는 최시현의 품에서 내려와 송경태를 담담하게 마주했다.“마음 정했어? 언제 법원 갈 거야?”송경태가 이를 악물었다.“넌...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송경태에게는 언제나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중요했다.그런 사람이 이제 와서 믿음을 운운하는 꼴이 우스웠다.그때 송경태의 시선이 최시현에게 향했다. 노골적인 적의를 숨기지도 않은 채 물었다.“이 자식은 누구야?”최시현이 입을 열려 하기에 나는 한발 먼저 나섰다.“알 것 없어. 언제 법원 갈 건지, 그것만 얘기해.”송경태는 보름이 넘도록 나를 찾아다니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듯했다.그토록 애타게 나를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마주했건만, 내 곁에 다른 남자가 있는 모습을 본 순간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송경태는 이성을 잃은 채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쏟아 냈다.“벌써 새 남자까지 구해 놨을 줄은 몰랐네. 우리 엄마 말이 맞았어. 넌 내 인생을 망친 여자야. 내가 정말 눈이 멀었지...”“닥쳐!”송경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최시현이 달려들었다.두 사람은 곧바로 엉겨 붙었고, 주먹이 오갈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서로 물러서지 않고 맞붙은 탓에 싸움은 점점 격해졌다.“그만해! 둘 다 그만하라고!”몇 번이나 말리려고 달려들었지만 끼어들 틈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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