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임신 5개월에 접어들 때까지 송경태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첫사랑을 만나러 다니느라 넉 달째 산부인과에 함께 가지 않았다.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였지만, 송경태는 또다시 약속을 어겼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짜증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어쩌라고? 네 뱃속에 있는 애, 나 혼자 만든 줄 알아? 엄마인 네가 좀 더 신경 쓰는 게 그렇게 힘들어? 산부인과 한 번 같이 못 갔다고 애가 잘못되기라도 해?” 나는 아무 말 없이 병원 대기실에 걸린 TV를 바라봤다. 마침 화면에서는 재계 인사들의 자선 행사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화면 속 윤라희를 바라보는 송경태의 얼굴에는 한없이 다정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알았어...” 평소와 다른 내 반응을 눈치챈 송경태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나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내 순번이 되었다. 송경태가 첫사랑을 위해 거액을 들여 불꽃 이벤트를 열어 줬다는 뉴스를 보고 수군거리던 간호사들 중 한 명이 내게로 다가왔다. “임소이 님, 산전 검진은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검진 예약은 취소해 주세요.” 잠깐의 침묵 끝에,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대신 일주일 뒤로 임신중절 수술 예약해 주세요.”
View More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일단... 이혼부터 정리되고 나서 이야기하고 싶어.”순간 최시현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활짝 웃더니 나를 번쩍 안아 들고 그 자리에서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돌았다.덕분에 나도 덩달아 웃음이 터졌다.그러면서도 떨어질까 봐 무서워 최시현의 어깨를 붙잡고 몇 번이나 내려달라고 소리쳤다.그때였다.“임소이!”가로등 아래에서 누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놀라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송경태였다.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만큼 수척해졌고,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무엇보다 나와 최시현을 바라보는 눈빛이 섬뜩할 만큼 살벌했다.나는 최시현의 품에서 내려와 송경태를 담담하게 마주했다.“마음 정했어? 언제 법원 갈 거야?”송경태가 이를 악물었다.“넌...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송경태에게는 언제나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중요했다.그런 사람이 이제 와서 믿음을 운운하는 꼴이 우스웠다.그때 송경태의 시선이 최시현에게 향했다. 노골적인 적의를 숨기지도 않은 채 물었다.“이 자식은 누구야?”최시현이 입을 열려 하기에 나는 한발 먼저 나섰다.“알 것 없어. 언제 법원 갈 건지, 그것만 얘기해.”송경태는 보름이 넘도록 나를 찾아다니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듯했다.그토록 애타게 나를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마주했건만, 내 곁에 다른 남자가 있는 모습을 본 순간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송경태는 이성을 잃은 채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쏟아 냈다.“벌써 새 남자까지 구해 놨을 줄은 몰랐네. 우리 엄마 말이 맞았어. 넌 내 인생을 망친 여자야. 내가 정말 눈이 멀었지...”“닥쳐!”송경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최시현이 달려들었다.두 사람은 곧바로 엉겨 붙었고, 주먹이 오갈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서로 물러서지 않고 맞붙은 탓에 싸움은 점점 격해졌다.“그만해! 둘 다 그만하라고!”몇 번이나 말리려고 달려들었지만 끼어들 틈조차
“꼴좋네. 누가 어머니한테 일러바치래? 윤라희, 너 이제 진짜 지긋지긋해.”조금 전까지 서운한 기색을 보이던 윤라희의 얼굴이 순간 굳어 버렸다.“경태야...”믿을 수 없다는 듯 송경태를 바라보는 윤라희의 두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내가 누구 때문에 알려 드린 건데! 다 너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네가 얼마나 아빠가 되고 싶어 했는지 아니까 나는...”“그만해!”송경태가 매섭게 말을 끊었다. 그리고 윤라희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이 와중에도 또 거짓말이네. 넌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적이었어. 3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변한 게 없네. 내가 어떻게 너 같은 여자랑 만났는지 후회될 정도야.”말을 마친 송경태는 더 이상 윤라희와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송경태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머니와의 인연을 끊을 수도,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그날 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송경태는 불 하나 켜지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운 집을 보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그는 침실과 거실을 오가며 집 안 곳곳을 뒤졌다. 혹시 다른 방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방문을 하나씩 열어 보기도 했다.하지만 집 안을 샅샅이 뒤져도 애타게 찾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송경태는 절망에 빠졌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꺼낸 그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당연히 연결될 리 없었다.두 번, 세 번...열 번이 넘도록 전화를 걸고 나서야 송경태는 포기한 듯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다 멈칫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협의이혼 의사 확인 신청서를 본 송경태는 한동안 그 앞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다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그대로 벽에 집어 던졌다.휴대전화 액정이 산산조각 났다.송경태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한참을 버티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생전에 내게 남겨 준 집으로 돌아왔다.
정옥순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었다.“라희한테 뭐라고 하지 마! 내가 물어본 거야!”정옥순은 송경태를 호되게 제지하더니 나를 향해 삿대질했다.“당장 내일 이혼해. 내가 처음부터 저런 여자랑은 안 된다고 했지? 네가 정신이 나가서 기어코 결혼하겠다고 고집부리더니 결국 이렇게 됐구나! 네 자식까지 제멋대로 지워 버렸잖아!”분을 삭이지 못하던 정옥순이 느닷없이 옆에 있던 의자를 집어 들더니 그대로 나를 향해 내리쳤다.순간 송경태가 재빨리 내 앞을 가로막았다.송경태는 날아드는 의자를 붙잡아 바닥에 내던진 뒤 끝내 참았던 감정을 터뜨렸다.“우리 일에 제발 좀 끼어들지 마세요!”거실에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아버지도 어머니 때문에 못 버티고 이혼했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제 인생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하세요? 대체 몇 사람 인생을 망쳐야 만족하시겠어요!”정옥순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이번에는 부들부들 떨며 아들을 향해 삿대질했다.“너... 지금 뭐라고 했어?”목소리는 날카로웠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저런 계집애 하나 때문에 네가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 그래, 잘났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말을 마친 정옥순은 돌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무도 미처 막을 새 없이 대리석 테이블 모서리에 머리를 세게 들이받더니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송경태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이 휘둥그레졌다.“엄마!”송경태는 곧장 달려가 정옥순을 업고 밖으로 뛰쳐나갔다.두 사람이 사라지자, 곁에서 모든 걸 지켜보던 윤라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이내 기다렸다는 듯 턱을 치켜들며 나를 내려다봤다.“눈치가 있으면 이제 알아서 나가요. 여기 계속 붙어 있어 봤자 더 우스워질 뿐이니까.”평소 같았으면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의기양양한 윤라희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엄마가 마지막으로 담가 준 김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통에 처박던 모습이 떠올랐다.꾹꾹 눌러 참아 왔던 분노가 한순간에 치밀어 올랐다.나는 천천히
송경태의 표정이 순식간에 멍해졌다.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한동안 굳어 있던 송경태가 겨우 입을 열었다.“임소이 환자... 지금 수술 중이라고요?”간호사는 귀찮은 기색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임신중절 수술 중이세요. 시작한 지 꽤 됐으니까 곧 나오실 거예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술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마취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내가 이동 침대에 누운 채 실려 나오자, 송경태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비틀거리듯 다가온 송경태의 시선이 내 배에 꽂혔다.임신 5개월에 접어들며 제법 불러 있던 배는 어느새 평평해져 있었다.송경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이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보호자분!”간호사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송경태가 정신을 잃었다.나도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다시 눈을 떴을 때도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목이 말라 테이블 위의 물을 향해 손을 뻗자, 곁에 있던 송경태가 먼저 컵을 집어 내 입가에 가져다 댔다.물을 몇 모금 넘기고 나서야 송경태의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몇 년은 늙어 버린 듯한 얼굴이었다.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꽉 움켜쥔 주먹 위로 핏줄이 선명하게 불거져 있었다.긴 침묵 끝에 송경태가 겨우 입을 열었다.“왜 그랬어...”갈라진 목소리가 힘겹게 새어 나왔다.“왜 나한테 말도 없이 아이를 지웠어?”분노를 누르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당장이라도 모진 말을 쏟아 낼 것처럼 이를 악물고 있으면서도 정작 나를 보지는 못했다.송경태의 시선은 줄곧 병실 바닥에 박혀 있었다.나는 그런 송경태를 잠시 바라보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우리 이혼하자.”송경태의 어깨가 굳었다.“당신이랑 윤라희 씨 사이에서 빠져 줄게. 그러니까 당신도 이제 나 좀 놔줘.”송경태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고작 내가 산전 검진에 같이 안 갔다고 이러는 거야?”힘없이 새어 나오던 웃음 끝에 눈물 한 방울이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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