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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번의 확인

309번의 확인

Por:  달빛열매Completado
Idioma: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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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수술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나는 남편 하이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이는 지웠어.] 답장은 곧바로 돌아왔다. [확인] 나는 그 짧은 두 글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크게 웃어버릴 뻔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랬다. 위험한 현장 점검을 나가기 전에 하이신에게 미리 알렸을 때도, 돌아온 답은 늘 [확인]이었다. 혹시 하루 동안 연락이 끊기면 꼭 나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을 때도, 하이신은 똑같이 [확인]이라고만 했다. 공사장 붕괴 사고에 휘말려 흙더미 아래 묻힌 채 사흘 내내 연락이 끊겼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온 공포 속에서, 나는 하이신에게 구조 요청 메시지를 309통이나 보냈다. 하이신은 309번의 [확인]을 돌려보냈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내가 그동안 받았던 답장들은, 처음부터 전부 자동 응답이었다. 하이신은 내 메시지를 읽지도 않았다. 그러니 보름 전, 내가 지사 파견을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도. 오늘 아이를 지우겠다고 말한 것도. 하이신이 알 리 없었다. 이 남자의 따뜻함과 다정함은 언제나 자신의 SNS 피드를 가득 채운 여자, 고선영에게만 향했다. [우리 천 일째 되는 날. 선영이 생일이기도 한 날.] 사진 속에는 하이신과 고선영의 대화창이 올라와 있었다. 빽빽하게 쌓인 대화 메시지였다. 나는 그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렀다. 댓글도 남겼다. [좋은 날이네.] 그날은 내가 공사장 붕괴 사고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날이었다. 또한 내가 하이신을 완전히 떠나기로 마음먹은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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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ítulo 1

제1화

나는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듯 잠들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자 아랫배의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직도 몸이 어딘가 낯설었다.

모든 것이 텅 비어 있었다. 푹 꺼진 아랫배도, 불 꺼진 캄캄한 이 집도.

나도 모르게 하이신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

새벽 3시가 넘었는데, 왜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핸드폰 잠금을 풀고, 화면을 가득 채운 ‘확인’들을 본 뒤에야 정신이 돌아왔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났다.

거의 2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아직 하이신의 자동 답장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달칵-

현관 쪽에서 소리가 났다.

밖으로 나가자 젖은 옷을 벗고 있던 하이신과 마주쳤다.

하이신은 비에 흠뻑 젖은 상의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나서 말했다.

“선영이가 내가 만든 오리백숙 먹고 싶다길래 갖다주고 오는 길인데, 돌아올 때 비가 쏟아지더라.”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해?”

“응.”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이신이 욕실로 들어가며 지나가듯 물었다.

“오늘 병원엔 왜 갔어?”

이어서 드라이어를 꺼내 콘센트에 꽂고, 스위치를 눌렀다.

“아이 지우러.”

내 목소리는 드라이어 소리에 묻혔다.

하이신은 늘 이런 식이었다. 내 말을 들을 시간조차 남겨 두지 않았다.

나는 하이신의 목에 걸린 끈 목걸이를 흘끗 봤다.

붉은색이었다.

하이신이 흰 셔츠를 입으면 늘 안쪽에서 비쳐 보이는 물건.

한여름에도 재킷을 하나 더 걸칠지언정, 하이신은 그걸 풀 생각은 없었다.

고선영이 쇼핑하다 받은 사은품에 불과한 물건인데도 그랬다.

“당신의 결혼반지는?”

나는 문틀에 기대어 물었다.

하이신은 드라이어를 끄고 손으로 젖은 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뺐어.”

“난 옥죄이는 느낌이 싫어.”

“그럼 목에 건 건 왜 안 빼?”

답을 알면서도 물었다.

“이건 다르지.”

하이신이 말했다.

“이건 부드럽잖아. 반지는 손에 걸리적거리고 불편하기만 해. 그런 걸 좋다고 끼는 건 너뿐이야.”

나는 다시 고개를 내려 약지의 반지를 보았다.

‘결혼반지라고...’

내 결혼반지는 진작 빼 두었다. 지금 낀 건 번화가 액세서리 가게에서 산 2천 원짜리였다. 큐빅도 어설프게 박힌 싸구려였다.

하이신만 눈치채지 못했다.

실은 그가 너무 오랫동안 나를 보지 않았고, 내 손을 잡은 지도 오래였다.

“됐고. 일찍 자.”

하이신은 내 정수리를 쓱쓱 문지르고는 돌아서서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임신한 뒤로 우리는 한 침대에서 잔 적이 없었다.

하이신은 자기가 늦게 자서 내 잠을 방해할까 봐 그런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매일 밤 야근을 마친 고선영을 데리러 갔다.

둘이 밖에서 야식까지 먹이고, 다시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준 뒤에야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면 새벽 3시가 되어 있었다.

사실 집에 와서도 둘의 연락은 계속 이어졌다.

한번은 새벽 다섯 시에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는데, 손님방 불이 아직도 켜져 있었다.

안쪽에서는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전의 나라면 방에 들어가서 하이신에게 물었을 거다.

둘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하느냐고.

세상에 그렇게나 나눌 이야기가 많냐고.

그렇다면 왜 나와 마주할 때는 늘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굴었느냐고.

이제는 다 중요하지 않았다.

내 핸드폰 화면이 갑자기 켜졌다. 지사 파견 계약 관련 안내였다.

나는 확인 버튼을 누르고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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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나는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듯 잠들었다.한숨 자고 일어나자 아랫배의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아직도 몸이 어딘가 낯설었다.모든 것이 텅 비어 있었다. 푹 꺼진 아랫배도, 불 꺼진 캄캄한 이 집도.나도 모르게 하이신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새벽 3시가 넘었는데, 왜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핸드폰 잠금을 풀고, 화면을 가득 채운 ‘확인’들을 본 뒤에야 정신이 돌아왔다.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났다.거의 2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아직 하이신의 자동 답장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달칵-현관 쪽에서 소리가 났다.밖으로 나가자 젖은 옷을 벗고 있던 하이신과 마주쳤다. 하이신은 비에 흠뻑 젖은 상의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나서 말했다.“선영이가 내가 만든 오리백숙 먹고 싶다길래 갖다주고 오는 길인데, 돌아올 때 비가 쏟아지더라.”“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해?”“응.”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하이신이 욕실로 들어가며 지나가듯 물었다. “오늘 병원엔 왜 갔어?”이어서 드라이어를 꺼내 콘센트에 꽂고, 스위치를 눌렀다.“아이 지우러.”내 목소리는 드라이어 소리에 묻혔다.하이신은 늘 이런 식이었다. 내 말을 들을 시간조차 남겨 두지 않았다.나는 하이신의 목에 걸린 끈 목걸이를 흘끗 봤다.붉은색이었다. 하이신이 흰 셔츠를 입으면 늘 안쪽에서 비쳐 보이는 물건.한여름에도 재킷을 하나 더 걸칠지언정, 하이신은 그걸 풀 생각은 없었다.고선영이 쇼핑하다 받은 사은품에 불과한 물건인데도 그랬다.“당신의 결혼반지는?”나는 문틀에 기대어 물었다.하이신은 드라이어를 끄고 손으로 젖은 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뺐어.”“난 옥죄이는 느낌이 싫어.”“그럼 목에 건 건 왜 안 빼?”답을 알면서도 물었다.“이건 다르지.”하이신이 말했다.“이건 부드럽잖아. 반지는 손에 걸리적거리고 불편하기만 해. 그런 걸 좋다고 끼는 건 너뿐이야.”나는 다시 고개를 내려 약지의 반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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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다음 날 아침, 나는 하이신이 통화하는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하이신은 주방에서 온라인 영상을 보면서 거기에 따라 임산부 보양식을 만들면서, 잠 못 드는 고선영에게 자장가를 불러 주고 있었다.참 바쁜 사람이었다. 내가 주방으로 나오자, 하이신은 그제야 전화를 끊었다.“미지근한 물, 식탁에 있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식탁에 앉으니 집 안이 겨우 조용해졌다. 그제야 졸음이 몰려왔다.“잠 깨. 아침 먹어야지.”하이신이 접시를 가지런히 내려놓았다.내가 죽을 떠먹으려 하자, 하이신이 손을 뻗어 내 숟가락을 툭 쳐 냈다.“잠깐. 사진 좀 찍고.”찰칵-하이신은 화면을 몇 번 누르더니 고선영에게 사진을 보냈다.그제야 숟가락을 다시 내 손에 쥐여 주었다.“먹어.”나는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아 물었다. “그걸 왜 고선영 씨한테 보내?”“보고 싶대.”하이신이 말했다.“아직 어린애잖아. 뭐든 신기해해. 내가 너한테 사 준 잠옷까지 궁금해하더라.”“그래서 그것도 찍어 보냈구나.”내 말에 하이신이 잠깐 멈칫했다. 아마 내 기분이 안 좋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하이신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봤어. 당신이 고선영 씨 집에 놀러 갔을 때 찍은 그 사진. 고선영 씨가 내 거랑 똑같은 잠옷을 입고 있더라.”노출이 꽤 있는 레이스 슬립이었다.사진 속 고선영은 스스럼없이 하이신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고개만 살짝 숙여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차림이었다.그런 일은 이미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선영은 꼭 나를 밟고 올라서려는 사람 같았다.나랑 똑같은 웨이브 펌을 하겠다고 했다.내가 쓰는 립스틱과 똑같은 색의 제품을 샀다.심지어 내가 하이신과 여행 가서 공방 체험으로 만든 전통 부채까지, 똑같은 걸 갖고 싶다고 했다.당연히 똑같은 게 나올 리 없었다.그래서 고선영의 애교 섞인 부탁에 못 이겨 하이신은 내 부채를 바꿔치기했다.결국 부채 자루에 내 손으로 결혼기념일을 새겨 넣은 그 부채는, 그렇게 남의 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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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지사로 떠나기 전, 마침 회사에서 행사가 잡혔다.부장님이 단톡방에 공지를 올렸다.대충 훑어본 나는 바로 가기 싫어졌다. 불참한다고 보내려던 참에 부장님이 먼저 나를 태그했다. 이번 행사는 나를 위한 송별회라는 말까지 덧붙였다.그렇게까지 말하니 빠지기 어려웠다.나는 하이신에게 전화를 걸었다.“회사 행사인데, 동반자 한 명을 꼭 데려오래. 없으면 회사에서 임의로 파트너를 붙인대. 오늘 저녁 시간 돼?”전화기 너머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잘 안 들려. 잠깐만.]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됐어. 말해.]“어디야?”내가 물었다.[선영이랑 공연 보러 왔어.]하이신이 말했다. 잠깐 뜸을 들이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선영이가 보러 가겠다고 몇 달을 벼르던 공연이거든. 알람까지 맞춰 놓고 겨우 티켓팅에 성공했대.][근데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일이 생겨서, 내가 대신 온 거야.]나는 피식 웃었다. “그냥 물어본 거야.”“나한테 해명할 필요 없어.”전화기 너머 하이신의 숨소리가 조금 무거워진 것 같았다.나는 아까 했던 말을 한 번 더 되풀이했다. 하이신은 대답 없이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그날 밤, 나는 회사 건물 앞에서 하이신을 기다렸다.한 시간이 지나도 그는 오지 않았다.바람이 거세지더니 가랑비가 비스듬히 들이쳤다. 젖은 바짓단이 다리에 달라붙어 영 불편했다.나는 하는 수 없이 먼저 행사장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다시 나왔을 때, 하이신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다만 하이신은 고선영의 파트너 자격으로 와 있었다. “가을 언니! 여기요!”고선영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 테이블은 다들 짝이 맞춰져 있었고,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자리를 뜨려는데 부장님이 나를 그쪽으로 떠밀었다.“가을 씨, 남편분 저기 계시네요! 얼른 가요!”부장님은 나를 하이신 앞까지 밀어붙였다.그리고 하이신을 향해 눈썹을 씰룩이며 너스레를 떨었다.“파트너 왔는데, 일어나서 맞아야죠.”고선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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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2년 전, 고선영이 휴가를 내는 바람에, 나는 고선영의 설계 초안을 들고 공사 현장 답사를 나간 적이 있었다.그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현장에는 사람이 거의 나와 있지 않았다. 나는 도면을 확인하며 진흙탕 길을 한 걸음씩 걸었다.고선영을 너무 믿은 탓에 고개를 숙인 채 도면만 보았다.출입 금지 구역으로 잘못 들어간 줄도 몰랐다.쿠르릉-갑자기 무너진 흙더미가 나를 완전히 덮쳤다.다행히 커다란 콘크리트판이 흙과 자갈을 막아 주었다. 덕분에 나는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다.하지만 시야는 완전히 사라졌고, 귓가엔 내 거친 숨소리와 요란한 심장 박동뿐이었다. 어디가 아픈 건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오른팔은 부러진 것 같았다.움직일 수 없어 왼손으로 조금씩, 조금씩 더듬어 겨우 핸드폰에 닿았다.공간이 너무 좁아 손가락 끝만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나는 기억에 의지해 맨 위에 고정해 둔 채팅창을 눌러, 보이지도 않는 화면에 대고 하이신에게 메시지를 찍었다.힘이 조금씩 빠져나갔다.나는 흐느끼며 혀끝을 깨물었다. 피와 눈물이 섞여 목구멍으로 넘어갔다.머릿속에는 계속 하이신만 떠올랐다. 입으로도 계속 하이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야 겨우 버틸 수 있었다. 나는 몇 번이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여보... 나 무서워. 제발 살려줘...”“나 죽기 싫어...”일분일초가 지옥이었다.기절했다가 깨고, 깨면 울었다. 핸드폰이 언제 꺼졌는지도 몰랐다.나는 계속 하이신이 메시지를 봤을 거라고만 믿었다.하이신이 곧 사람들을 데리고 나를 구하러 와 줄 거라고 기대했다.쇼크로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도, 나는 하이신의 이름을 불렀다.끝까지 하이신이 나를 찾으러 올 거라고 믿었다.72시간 뒤, 구조대원이 마지막 흙 한 삽을 걷어 내고서야 나는 밖으로 끌려 나왔다.그때 내게 유일하게 남아 있던 것은 희미한 심장 박동뿐이었다.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의료진은 내 비상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하이신의 번호였다.여덟 번째 신호가 울리고서야 전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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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무대 위에 선 고선영은 얼굴을 붉힌 채 먼저 질문을 던졌다.“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른 사랑을 새로 시작하실 건가요?”장내가 술렁였다.나는 남의 일처럼 다리를 꼬고 앉아, 핸드폰 화면에서 다음 날 비행기표를 고르고 있었다.무대 위의 하이신은 질문이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하이신은 고개를 저었다.고선영의 웃음기가 옅어졌다. 흥도 눈에 띄게 식었다.“이제 오빠 차례예요.”“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하이신이 물었다.“그건 오빠가 제일 잘 알잖아요.”고선영이 되물었다.두 사람의 애매한 분위기에 사람들은 더 크게 떠들기 시작했다. 휘파람 소리와 야유가 점점 커졌다.팀장님은 팔꿈치로 나를 툭 쳤다.“저기, 가을 씨, 제가 남편분 내려오시라고 할까요? 두 분 먼저 들어가요.”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괜찮아요.”“어차피 오늘 지나면 제 남편도 아니니까요.”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하이신의 시선이 문 앞까지 나를 따라왔다. 곧 두꺼운 문이 그 시선을 가로막았다....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내가 막 집에 도착하자마자, 하이신도 뒤따라 들어왔다.“기분 안 좋아?”하이신이 다가오며 나를 품에 안으려 했다.나는 몸을 틀어 피했다.“아니.”“거짓말.”하이신이 말했다.“우리가 결혼한 지 몇 년인데. 네 행동 하나, 표정 하나쯤은 무슨 뜻인지 다 알아.”“네가 입만 삐죽여도 호빵을 먹고 싶은 건지 샌드위치를 먹고 싶은 건지 다 안다고.”나는 대꾸하지 않고 하이신을 오래 바라보았다.너무 오래 바라보자 하이신도 불안해진 듯했다. 그는 내가 대체 뭘 하려는 거냐고 계속 물었다.“날 제일 잘 안다며. 그럼 맞혀 봐.”나는 웃었다.내가 웃자 하이신은 금세 긴장을 풀었다.이어 소파에 털썩 앉았다.“내가 네 옆에 있어 주길 바라는 거지?”“그럼 내가 이틀 휴가 낼게.”“마침 네가 절에 가서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싶다고 했잖아. 같이 가자.”나는 대답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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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하이신이 ‘확인’이 아닌 다른 내용의 메시지를 보낸 건 처음이었다.나는 웃음을 머금은 채 머릿속으로 그려 봤다.‘집에서 그 서류들 발견하고,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화면이 쉴 새 없이 진동하며 뜨거워졌다.메시지가 한 통, 또 한 통 쏟아져 화면 반쪽을 빼곡히 메웠다.[어디 갔어? 화나서 이러는 거 아니지? 어리광 좀 부리지 마!][이혼을 왜 해? 아이까지 지웠다고? 너 진짜 미친 거야!][나 널 절대 용서 안 해.][...][답장해. 대체 어디야?][나한테 장난치는 거지? 임가을, 하나도 안 웃겨.][...][선영이랑 나는 정말 아무 사이 아니야.][돌아와, 부탁이야. 우리 얘기 좀 하자.][제발 네 위치만 알려줘. 임가을, 대체 어디 간 거야?][...]분노에서 추궁으로, 추궁에서 겁에 찬 애원으로.하이신은 끝내 내 답장을 받지 못했다.나는 손끝을 화면 위에 가만히 띄웠다.2년 전 공사장 붕괴 속에 갇혀 있을 때도 이랬다. 떨리는 손끝으로 하이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309통의 메시지. 돌아온 것은 309개의 차가운 ‘확인’이었다.그때 나는 죽음이 두려웠고, 아픔이 두려웠고, 다시는 하이신을 보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이젠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기내 방송이 전자 기기를 꺼 달라고 안내했다.나는 미련 없이 하이신을 차단하고, 남은 연락처까지 전부 한 번에 지웠다.비행기는 천천히 하늘로 비상했다.익숙한 도시는 뒤에서 멀어지더니, 별빛 같은 불빛 무리로 변했다가 이내 사라졌다.나는 눈을 감았다. 뱃속에 있던 아이가 떠올라, 코끝이 시큰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나는 하이신과 아이를 낳은 뒤의 삶을 수도 없이 상상했었다.우리 셋은 캠핑을 가고, 나비를 잡으러 들판을 뛰어다니고, 나는 아이와 뛰고, 하이신은 캠프장에 남아 고기를 굽는 그런 삶.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아이를 아버지 마음이 온통 다른 여자에게 가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게 할 수는 없었다.어릴 때부터 엄마가 외면당하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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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나는 캐리어를 끌고 입국장을 지나 공항 밖으로 나섰다.마중 나온 사람들이 갖가지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부둥켜안는 연인도, 웃으며 손 흔드는 가족도 있었다.나는 그사이를 지나쳤다. 조금은 쓸쓸했다.회사 부장님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집은 이미 준비해 두었고, 키는 경비실에 맡겼다는 내용이었다.나는 ‘확인했습니다’라고 답하고,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거리 풍경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네온사인이 흐릿한 빛의 띠로 이어졌다. 온통 낯선 것투성이였다.집에 도착해 씻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그런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이 오지 않았다.도무지 잠들 수가 없었다.눈을 감으면 지난 장면들이 눈앞에서 번쩍이며 떠올랐다.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었다.완전히 다 내려놨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그만큼 오래된 마음이니까. 그저 잊는 법을 배우고, 혼자인 삶에 천천히 익숙해지는 수밖에.어차피 잠이 오지 않아서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을 들고 차단 목록으로 들어가 하이신과의 채팅 기록을 열었다.나는 한 통씩 읽어 내려갔다.[자기야, 오늘 생선 사 왔어. 저녁에 들어와서 먹을래?][날씨 앱 보니까 오후에 비가 많이 온대. 나갈 때 꼭 우산 챙겨.][나 몸이 좀 안 좋아. 열이 나는 것 같은데, 오늘은 일찍 올 수 있어?][현장 쪽에 문제가 생겼어. 아무래도 내가 가서 확인해야 할 것 같아.][나 출발했어.][...]모든 메시지는 내가 보낸 것이었다.모든 메시지 뒤에는 외롭게 남은 ‘확인’이 붙어 있었다.나는 그 메시지들을 오래 바라보았다.하이신은 언제부터 내 메시지를 읽지 않았을까?하이신은 일이 바빴다고 했다. 메시지가 너무 많아 다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다음부터는 꼭 신경 쓰겠다고 했다.나는 그 말을 전부 믿었다.하이신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보다’, ‘내가 바라는 게 너무 많은가 보다’, ‘내가 배려가 부족한가 보다’라고 생각했다.나는 더 의젓해지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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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한 달을 쉬고 난 뒤, 나는 새 회사에 출근했다.급여는 본사보다 훨씬 높았다. 나는 경력 많은 디자이너로서 주로 신입 직원의 교육을 맡았다.일상은 단순했다. 새로 들어온 신입 직원들을 가르치고, 시간이 나면 내가 좋아하는 도면을 그렸다. 생활은 꽤 여유롭고 편안했다.나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마트에 가고, 혼자 집에 머무는 데 익숙해졌다. 오랜만에 나에게 찾아온 고요한 시간을 즐겼다.일과 생활이 제법 균형을 찾았다.그렇게 2년이 흘렀다.지난 기억은 점점 흐릿해졌고, 하이신의 모습도 서서히 옅어졌다.나는 본부장으로 승진했다.승진한 날, 회사에서는 작은 축하 자리를 마련했다.무대 위에 서서 아래에서 터져 나오는 박수를 들으며, 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조금 들었다. 자랑스러웠다.내게는 안정된 일이 있었고, 넓은 집이 있었고, 곁에는 좋은 동료들이 있었다.쉬는 날에는 근처에서 열리는 전시를 보러 가고, 산책하고, 내가 좋아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다.누군가의 무성의한 한마디 때문에 밤새 잠들지 못하는 일은 이제 없었다.누군가의 치우친 애정 때문에 나 자신을 갉아먹는 일도 더 없었다.가끔 본사 동료들에게서 소식이 들려왔다.하이신이 나를 미친 듯이 찾고 있다고 했다. 모두 눈치껏 내가 지사로 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하이신은 세상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를 찾아 헤맸다고 했다.지난 2년 동안 하이신은 온 나라를 뒤졌다.하이신은 원래 다니던 번듯한 직장을 그만두었고, 나와 함께 살던 집도 정리했다. 작은 원룸 하나만 남겼다.집 안에 남아 있던 내 물건은 모두 상자에 담아 두었고, 어디를 가든 그 상자들을 들고 다녔다고 했다.고선영과는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고 들었다.고선영이 울고 매달리며 여러 번 찾아왔지만, 하이신은 차갑게 내쫓았다. 정이라곤 조금도 남겨 두지 않았다고 했다.고선영이 준 그 빨간 끈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모습은, 다시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하이신은 결혼반지를 다시 손가락에 꼈다. 그새 살이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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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나는 늘 그렇듯 회사에 출근했다. 사옥 아래에 막 도착했을 때, 하이신이 보였다.하이신은 길가 플라타너스 아래 쪼그려 앉아 있었다.검은 코트 하나를 걸쳤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턱에는 수염이 삐죽 자라 있었고, 눈은 감겨 있었으며,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나는 하이신의 옆을 지나쳤다.마른 잎 하나가 내 발밑에서 바스락거리자, 하이신이 화들짝 잠에서 깼다.졸음이 아직 눈에 남아 있었지만, 나를 보자마자 하이신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했다.그러다 몇 번이나 넘어졌다. 옷은 나뭇가지에 걸려 찢어졌다.“가을아...”“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줘...”하이신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빠르게 따라왔다. 목소리는 심하게 쉬어 있었다.나는 하이신에게 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그냥 들어가려던 때, 하이신이 갑자기 나를 끌어안았다.익숙한 우디 향기가 코끝을 감쌌다. 예전에는 나를 안심시켜 주던 냄새였다. 지금은 구역질만 났다.나는 힘껏 벗어나려 했다.하지만 하이신은 죽기 살기로 나를 붙잡았다. 팔은 쇠고리처럼 단단했고, 사람을 자기 뼛속까지 밀어 넣으려는 것처럼 꽉 끌어안았다.“보고 싶었어... 너무 보고 싶었어...”“2년 동안 너를 찾았어... 정말 미칠 것 같았어... 가을아, 나 용서해 줘...”“내가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어... 맹세할게. 다시는 너한테 그렇게 안 해.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나 정말 너 없이는 못 살아...”나는 하이신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냈다. 얼음칼 같은 눈빛으로 그 얼굴을 사납게 훑었다.하이신의 몸이 굳었다.이 남자가 멈춘 틈을 타 나는 힘껏 밀어내고, 한마디만 남겼다.“꺼져.”그러고는 사옥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하루 종일 하이신은 밖을 지켰다.지사 동료들은 하이신을 본 적이 없었다. 다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창가에 붙어 눈밭에 선 사람을 살폈다.“저 사람 누구야? 왜 계속 저기 서 있어?”“밖에 영하 몇십 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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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나는 며칠 동안 하이신을 보지 못했다.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타지의 병원에서 돌봐 줄 사람도 없이 지내려면 꽤 힘들었을 것이다.차라리 그쯤에서 물러나길 바랐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신은 다시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사옥 아래에서, 길거리에서, 끝내는 우리 집 앞까지 찾아왔다.하이신은 신선한 생선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있었다. 내게 밥을 해 주고 싶다고 했다.나는 막 회식을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술기운이 남아 있어서 하이신을 제대로 막지 못했고, 그는 그 틈을 타 집 안으로 들어왔다.머리도 어지러워서 나는 굳이 따지지 않기로 했다.대신 당연하다는 듯 하이신에게 시켰다.“해장국 끓여 와.”“발 씻을 물 받아와서 내 발 씻어 줘.”하이신은 오히려 신이 나서, 내 발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수건으로 물기를 꼼꼼하게 닦아주었다.사실 하이신은 원래 자상한 사람이었다.신혼 땐 퇴근할 때마다 김이 오르는 따끈한 밥과 국이 차려져 있었다.내가 피곤하면 손목 위에 따뜻한 수건을 올려 주었고, 눈이 아프면 온열 안대를 챙겨 주었다.다만 그 자상함의 대상이 나중에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만약에, 정말 만약에 하이신이 한눈팔지 않았다면, 어쩌면 정말 평생을 함께했을지도 모른다.사랑했으니까.아무것도 재지 않고, 그렇게 순수하게 사랑했으니까.“그럼 이제 생선탕 끓일게.”하이신이 말했다.나는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고 그대로 잠들었다.잠에서 깼을 때, 하이신은 아직도 주방에 서 있었다. 눈은 붉게 충혈된 채 냄비 속 생선탕을 지키고 있었다.나는 하품을 하며 졸린 눈으로 식탁 앞에 앉았다.하이신은 예전처럼 내게 그릇을 꺼내 주고, 숟가락을 가져다주고, 그릇에 국을 떠 주었다.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묶어 주고, 이마 앞으로 흘러내린 잔머리를 핀으로 고정해 주었다.“됐어. 이제 가.”나는 담담하게 말했다.하이신의 눈에 상처받은 기색이 스쳐 갔다.“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될까?”“네가 탕 다 먹는 것만 보고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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