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구연정이 강루인에게 과장해서 말한 건 아니었다.주영도의 수술 후 상태는 정말 좋지 않았다.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그는 정신적인 자기 학대에 시달리고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세우고 괴롭혔다.주영도는 사람을 시켜 강루인이 해외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조사했다.그녀가 겪은 일과 고통을 낱낱이 알게 되었다.종이에 적힌 글자는 차갑기 그지없었지만 그 글을 통해 주영도는 그녀의 삶이 그보다 훨씬 더 힘들고 처절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죄책감과 자책감이 그를 통째로 휘감았다.그제야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너무도 많은 빚을 졌다는 걸 알았다. 이생으로는 다 갚을 수 없을 만큼.모두가 주영도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지만 아무도 그에게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유일하게 그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을 테니까.구연정은 강루인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차마 주영도에게 말하지 못했다. 주영도가 견디지 못할까 두려웠다.“좀 쉬어.”주영도는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분주히 움직이는 구연정을 바라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노윤환한테 간병비 보내라고 할게. 이제 오지 마.”구연정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눈빛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꼭 이렇게까지 매정해야 해?”주영도는 시선을 거두며 더 이상 그녀를 보지 않았다.“이렇게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너한테 더 잔인한 거야. 너도 알아야 해. 현실을 인정해야 하고.”구연정이 물었다.“우리, 친구조차 될 수 없어?”주영도는 짧게 대답했다.“연락하지 않는 게 너한테도, 나한테도 좋아.”“너도 이제 적은 나이 아니잖아. 네 새 인생 시작해.”구연정이 되물었다.“그럼 너는?”주영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연정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자기가 앞으로 어떻게 살든,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님을 뜻한다.구연정은 고개를 숙이며 두 눈에 담긴 어둠을 감췄다. 구연정의 마음속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씁쓸함이 가득했다.사실 그녀도 오래전부터 현
강루인은 그 전화가 왜 걸려 왔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지수현은 새로운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사람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장소도 바꿨고, 웨딩 기획팀도 바꿨으며, 날짜도 뒤로 미뤘다.지수현의 이유는 이랬다.“분명 하늘이 나한테 너무 서두르면 안 된다고 알려 준 거야. 급할수록 더 천천히 진행하라는 뜻이지.”그래서 이번에는 처음부터 아주 진지하고 세심하게 다시 계획을 짰다.기획팀과 장소를 바꾼 이유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자신들과 더 잘 맞는 팀을 찾아 진행하겠다고 했다.강루인은 그의 미신적인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아무런 평가도 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준비하도록 내버려 두었고, 자신은 그저 결혼식 당일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어 주기만 하면 됐다.눈 깜짝할 사이 두 달이 흘렀다.봄이 찾아오고 만물이 다시 살아났다.지수현의 몸도 거의 회복됐고 완전히 낫는 것은 시간문제였다.하지만 지수현을 돌보는 일에 있어 강루인은 여전히 소홀함이 없었다. 그녀는 반드시 그의 허약해진 몸을 전부 회복시켜 줄 생각이었다.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던 강루인은 주차장에서 구연정과 마주쳤다.상대를 발견하고도 강루인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트렁크에 물건을 싣는 손길도 멈추지 않았다. 마치 구연정이라는 사람이 눈앞에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강루인, 잠깐 얘기할 수 있어?”강루인은 그녀를 투명 인간 취급했지만, 구연정이 먼저 다가왔다.트렁크 문을 닫은 후 강루인은 똑바로 서서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영도 씨 얘기하려고 온 거면 비켜 줘. 길 막지 마. 나 바빠.”말을 마친 강루인은 구연정이 대답할 틈조차 주지 않고 차에 타려 했다.구연정이 뒤따라왔다.“강루인, 병원에 가서 한 번만 봐주면 안 돼?”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강루인이 자신의 길을 막고 선 구연정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에는 짜증이 가득했다.“비켜.”구연정이 급히 말했다.“영
빈소.“뭘 그렇게 봐?”박정금은 휠체어에 앉은 주영도가 자꾸만 밖을 바라보는 걸 지켜보다 물었다.주영도의 두 눈은 먹물을 풀어놓은 것처럼 빛이 없었다. 그는 시선을 거두며 담담하게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박정금은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 헤아릴 여력이 없었다.“네가 힘든 건 알아. 그래도 네 할아버지 장례는 네가 처리해야 해. 계속 숨어서 사람을 안 만나면 안 돼.”이제 주영도는 명실상부한 주씨 가문의 실권자였다. 집안 전체가 그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박정금이 바라던 결과이기는 했지만, 막상 이렇게 되고 나니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그녀는 주영도를 원망했다. 교통사고의 진실을 자신에게 숨긴 것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아무리 원망해도 그에게 사고가 생기길 바란 적은 없었다.주영도의 현재 상황을 보니 그녀는 원망보다 연민이 앞섰다.주세웅의 장례식은 여전히 성대했다. 올 사람은 다 왔고, 안 와도 될 사람까지 왔다. 하지만 주영도가 가장 기다리던 강루인만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문을 바라봤다. 할아버지의 장례일까지도 강루인은 오지 않았다.‘루인은 할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던가? 사람이 죽었는데, 원수의 죽은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지도 않은 거야?’강루인이 오지 않자 주영도가 먼저 연락했다. 하지만 보낸 문자는 바다에 던져진 돌처럼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아무런 반응이 없는 휴대폰을 보며 주영도의 눈빛은 어두워졌다.박정금은 그가 누구를 기다리는지 몰랐지만 노윤환은 알고 있었다.사장님의 그 애절한 사랑을 보며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때늦은 후회는 결국 늦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아쉽다고 했다.세상에는 후회 약이 없다. 놓쳤으면 놓친 거다.주세웅의 발인 날은 지수현이 퇴원하는 날이기도 했다. 주영도가 문자를 보냈을 때 강루인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주영도 씨가 문자 보냈어.”지수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휴대폰을 그녀에게 건네지는 않았다.강루인 역시 문자 내용에 별 관심이
그들이 나가고 강루인이 들어왔다.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려던 바로 그때, 병상에 누워 있던 주영도가 눈을 떴다.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주영도가 눈을 뜨자마자 엘리베이터 안의 강루인이 보였다. 메마른 우물처럼 캄캄하던 그의 눈에 한 줄기 빛이 스쳤다.하지만 시선이 마주친 건 고작 0.5초 남짓.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혀 버렸다.“루인아.”주영도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입술은 움직였지만, 며칠 동안 한마디도 하지 못한 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노윤환은 그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그는 병상을 미는 손에 힘을 더 주며 의료진을 도와 서둘러 주영도를 옮겼다.‘그만 봐. 부르지도 마. 이미 저 사람은 당신 사람이 아니니까.’주영도는 이불 아래에서 주먹을 꽉 쥐고 다시 눈을 감았다.‘차라리 못 본 게 좋아. 이렇게 초라하고 망가진 모습은 보여 주기 싫으니까.’...주승우 쪽의 판결도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주씨 가문에 또 일이 터졌다.주세웅이 죽었다.섣달그믐날, 병원에서 주세웅이 숨을 거뒀다는 연락이 왔다.소식을 들은 김옥순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곧바로 병원에 실려 갔다.올해 주씨 가문의 새해는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고 어수선했으며 적막했다.한때 위세를 떨치던 대가문이 사람 꼴도 귀신 꼴도 아닌 지경이 되었고, 멀쩡하고 건강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실 거의 90세에 가까운 주세웅의 나이를 생각하면 호상이라 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죽기 전 그의 모습은 결코 품위 있다고 할 수 없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말도 못 한 채 침을 흘리는 상태는 그의 자존심을 끊임없이 짓밟았을 것이다.강루인은 주세웅이 그런 자신의 몰골을 견디지 못해 화병으로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그 소식을 들었을 때, 강루인은 가족과 함께 한창 새해를 맞으며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경호원은 지은우와 함께 아래층에서 한참 동안 불꽃놀이를 했다. 강루인은 실컷 놀고 지친 아이를 씻겨 주었고, 지금은 침대 위에 대자로 뻗어 새근새근
올해 설은 결국 병원에서 보내게 되었다.지수현은 병원에서 새해를 맞는 것이 왠지 불길하다고 생각하며 내내 못마땅한 표정이었다.강루인은 병실을 정리하며 물었다.“너 아직도 미신을 믿는 거야?”지수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우리 집에 가면 안 돼?”강루인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안 돼.”“의사 선생님도 그러셨잖아. 아직 병원에서 경과를 더 지켜봐야 해서 지금은 퇴원하면 안 된다고.”지수현은 집에서 새해를 맞고 싶은 마음에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으려 했다.“그럼 섣달그믐날 집에 갔다가 설날에 다시 오면 안 돼?”강루인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그냥 얌전히 있어. 괜히 몸에 무리가 가면 어떡하려고.”지수현의 회복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 만한 일이라면 그녀는 그 무엇도 원하지 않았다.“어디에 있든 나랑 은우가 항상 곁에 있을 거야.”병실은 전체적으로 흰색을 기본으로 꾸며져 있어 차갑고 온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공간이었다.하지만 강루인의 손길이 닿으면서 어느새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덕분에 지수현의 마음마저 따뜻하게 녹아내렸다.그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안아 줘.”그 모습에 강루인은 조용히 앞으로 다가갔다.지수현은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턱을 어깨에 기대더니 어리광을 부리듯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내가 다 나으면 우리 결혼식 다시 올릴까?”강루인은 그의 복부 상처에 무리가 갈까 걱정되어 최대한 몸을 뒤로 빼고 손을 들어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래.”“어머, 내가 타이밍을 잘못 잡았나?”그때 문밖에서 함지율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에 강루인이 고개를 돌리자 문 앞에는 함지율과 지은우가 서 있었다.함지율은 한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은우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하지만 아이는 손가락 사이로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두 사람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아빠, 엄마.”지은우는 총총걸음으로 달려오더니 동그랗고 커다란 눈으로 지수현을 바라보며
주이준에 이어 주승우까지 감옥에 들어가게 되면서 둘째 집안은 대가 끊길 위기에 처했다.게다가 주세웅은 이미 중풍으로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설령 그가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하고 싶어도 마음만 앞설 뿐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결국 그는 김옥순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주영도는 누구도 만나려 하지 않았고 병실을 찾아온 사람들은 모조리 문전박대를 당했다.덩치 좋은 경호원들이 병실 앞을 굳게 지키고 있었기에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노윤환은 주영도를 대신해 김옥순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어르신, 대표님께서 지금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도 충분히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으니 이만 돌아가시죠. 대표님께서 더 이상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노윤환은 김옥순의 팔을 부축해 그대로 밖으로 모셨다.그러면서도 틈만 나면 주영도의 상태를 들먹이며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대표님은 지금 언제 다시 일어나실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마음고생도 심하실 텐데 어르신께서 조금만 양해해 주십시오.”김옥순이 이번에 찾아온 것도 사실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마음에서였던 것은 아니었다.그녀 역시 떠밀리다시피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김옥순에게는 큰손자도 안쓰럽고 둘째 손자 역시 안타까웠다.두 사람이 원수라도 된 듯 서로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으니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마음만 타들어 갔다.김옥순은 두 사람 모두 무사하기를 바랐지만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주승우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선택한 순간부터 이 모든 일이 원만하게 끝날 리 없었다.지팡이를 짚은 김옥순의 손은 가늘게 떨렸고 탁해진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그녀는 상황이 대체 왜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예전에는 분명 가족끼리 화목하고 평온하게 서로를 아끼며 잘 지냈었다.도대체 어쩌다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고, 누군가는 상처를 입고, 또 누군가는 해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