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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Author: 비담
주영도의 태도가 오늘 저녁 메뉴를 논하는 것처럼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반면 강혜미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 그의 차가운 눈빛에 등골이 오싹해졌고 마른침을 삼키더니 눈시울이 갑자기 붉어졌다.

“형부, 언니한테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형부 자식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죠. 방금 그 말은 우리 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딸이 속상해하는 모습에 연상미는 마음이 아팠다.

“주 서방, 남자가 일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져야지. 이렇게 모른 척하면 안 돼.”

강혜미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인정 안 하면 이 아이 데리고 확 죽어버릴 거예요.”

그러더니 문밖으로 달려나가려 했다. 연상미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혜미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죽긴 왜 죽어? 네가 죽으면 나랑 네 아빠 어떻게 살라고. 나한테 딸이라곤 너 하나밖에 없어.”

모녀는 비극적인 연기라도 펼치듯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연상미는 강혜미를 끌어안고 주영도를 노려봤다.

“인정 안 하면 주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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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소.“뭘 그렇게 봐?”박정금은 휠체어에 앉은 주영도가 자꾸만 밖을 바라보는 걸 지켜보다 물었다.주영도의 두 눈은 먹물을 풀어놓은 것처럼 빛이 없었다. 그는 시선을 거두며 담담하게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박정금은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 헤아릴 여력이 없었다.“네가 힘든 건 알아. 그래도 네 할아버지 장례는 네가 처리해야 해. 계속 숨어서 사람을 안 만나면 안 돼.”이제 주영도는 명실상부한 주씨 가문의 실권자였다. 집안 전체가 그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박정금이 바라던 결과이기는 했지만, 막상 이렇게 되고 나니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그녀는 주영도를 원망했다. 교통사고의 진실을 자신에게 숨긴 것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아무리 원망해도 그에게 사고가 생기길 바란 적은 없었다.주영도의 현재 상황을 보니 그녀는 원망보다 연민이 앞섰다.주세웅의 장례식은 여전히 성대했다. 올 사람은 다 왔고, 안 와도 될 사람까지 왔다. 하지만 주영도가 가장 기다리던 강루인만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문을 바라봤다. 할아버지의 장례일까지도 강루인은 오지 않았다.‘루인은 할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던가? 사람이 죽었는데, 원수의 죽은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지도 않은 거야?’강루인이 오지 않자 주영도가 먼저 연락했다. 하지만 보낸 문자는 바다에 던져진 돌처럼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아무런 반응이 없는 휴대폰을 보며 주영도의 눈빛은 어두워졌다.박정금은 그가 누구를 기다리는지 몰랐지만 노윤환은 알고 있었다.사장님의 그 애절한 사랑을 보며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때늦은 후회는 결국 늦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아쉽다고 했다.세상에는 후회 약이 없다. 놓쳤으면 놓친 거다.주세웅의 발인 날은 지수현이 퇴원하는 날이기도 했다. 주영도가 문자를 보냈을 때 강루인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주영도 씨가 문자 보냈어.”지수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휴대폰을 그녀에게 건네지는 않았다.강루인 역시 문자 내용에 별 관심이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776화

    그들이 나가고 강루인이 들어왔다.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려던 바로 그때, 병상에 누워 있던 주영도가 눈을 떴다.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주영도가 눈을 뜨자마자 엘리베이터 안의 강루인이 보였다. 메마른 우물처럼 캄캄하던 그의 눈에 한 줄기 빛이 스쳤다.하지만 시선이 마주친 건 고작 0.5초 남짓.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혀 버렸다.“루인아.”주영도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입술은 움직였지만, 며칠 동안 한마디도 하지 못한 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노윤환은 그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그는 병상을 미는 손에 힘을 더 주며 의료진을 도와 서둘러 주영도를 옮겼다.‘그만 봐. 부르지도 마. 이미 저 사람은 당신 사람이 아니니까.’주영도는 이불 아래에서 주먹을 꽉 쥐고 다시 눈을 감았다.‘차라리 못 본 게 좋아. 이렇게 초라하고 망가진 모습은 보여 주기 싫으니까.’...주승우 쪽의 판결도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주씨 가문에 또 일이 터졌다.주세웅이 죽었다.섣달그믐날, 병원에서 주세웅이 숨을 거뒀다는 연락이 왔다.소식을 들은 김옥순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곧바로 병원에 실려 갔다.올해 주씨 가문의 새해는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고 어수선했으며 적막했다.한때 위세를 떨치던 대가문이 사람 꼴도 귀신 꼴도 아닌 지경이 되었고, 멀쩡하고 건강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실 거의 90세에 가까운 주세웅의 나이를 생각하면 호상이라 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죽기 전 그의 모습은 결코 품위 있다고 할 수 없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말도 못 한 채 침을 흘리는 상태는 그의 자존심을 끊임없이 짓밟았을 것이다.강루인은 주세웅이 그런 자신의 몰골을 견디지 못해 화병으로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그 소식을 들었을 때, 강루인은 가족과 함께 한창 새해를 맞으며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경호원은 지은우와 함께 아래층에서 한참 동안 불꽃놀이를 했다. 강루인은 실컷 놀고 지친 아이를 씻겨 주었고, 지금은 침대 위에 대자로 뻗어 새근새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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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설은 결국 병원에서 보내게 되었다.지수현은 병원에서 새해를 맞는 것이 왠지 불길하다고 생각하며 내내 못마땅한 표정이었다.강루인은 병실을 정리하며 물었다.“너 아직도 미신을 믿는 거야?”지수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우리 집에 가면 안 돼?”강루인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안 돼.”“의사 선생님도 그러셨잖아. 아직 병원에서 경과를 더 지켜봐야 해서 지금은 퇴원하면 안 된다고.”지수현은 집에서 새해를 맞고 싶은 마음에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으려 했다.“그럼 섣달그믐날 집에 갔다가 설날에 다시 오면 안 돼?”강루인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그냥 얌전히 있어. 괜히 몸에 무리가 가면 어떡하려고.”지수현의 회복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 만한 일이라면 그녀는 그 무엇도 원하지 않았다.“어디에 있든 나랑 은우가 항상 곁에 있을 거야.”병실은 전체적으로 흰색을 기본으로 꾸며져 있어 차갑고 온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공간이었다.하지만 강루인의 손길이 닿으면서 어느새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덕분에 지수현의 마음마저 따뜻하게 녹아내렸다.그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안아 줘.”그 모습에 강루인은 조용히 앞으로 다가갔다.지수현은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턱을 어깨에 기대더니 어리광을 부리듯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내가 다 나으면 우리 결혼식 다시 올릴까?”강루인은 그의 복부 상처에 무리가 갈까 걱정되어 최대한 몸을 뒤로 빼고 손을 들어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래.”“어머, 내가 타이밍을 잘못 잡았나?”그때 문밖에서 함지율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에 강루인이 고개를 돌리자 문 앞에는 함지율과 지은우가 서 있었다.함지율은 한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은우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하지만 아이는 손가락 사이로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두 사람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아빠, 엄마.”지은우는 총총걸음으로 달려오더니 동그랗고 커다란 눈으로 지수현을 바라보며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7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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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773화

    “주영도가 여동생한테 화가 나서 다시 수술실로 실려 갔대.”지수현은 강루인이 깎아준 과일을 하나씩 집어 먹으며 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그 말을 들은 강루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과일을 깎으며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휠체어 하나 빌려다 줄까?”지수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휠체어는 왜? 바람 쐬러 데리고 나가려고?”강루인이 태연하게 대답했다.“구경거리가 생겼는데 직접 보면 더 재미있잖아.”지수현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내가 남의 일에 너무 참견하는 것 같아서?”강루인은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보기엔 네가 너무 한가한 것 같아.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뭐 하러 그렇게까지 신경 써?”그 한마디에 지수현의 입꼬리가 또다시 귀에 걸릴 듯 올라갔다.그는 강루인이 주영도를 철저히 외면하는 태도가 마음에 쏙 들었다.주영도는 몸이 튼튼한 사람이라고 하기엔 화만 나도 기절할 정도였고 그렇다고 허약하다고 하기엔 죽지 않는 바퀴벌레처럼 질기게 버텨냈다.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이틀 뒤였다.이번에는 주초원도 더 이상 주영도를 자극하지 않았다.괜히 또 건드렸다가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두려웠던 것이다.주영도 역시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뻔한 여동생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기에 곧바로 병실에서 내쫓았다.주초원도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사실 그녀 역시 이곳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다.애초에 주영도는 주승우 쪽을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그는 늘 원한은 품은 사람에게 갚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고 주세웅에게만큼은 마지막 여지를 남겨두려 했다.하지만 주영도가 한발 물러섰더니 상대는 오히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했던 것이다.숲속에서 벌어진 습격은 결국 처음부터 주영도의 목숨을 노린 것이었다.상대가 그에게 살길을 남겨둘 생각조차 없었다면 주영도 역시 더 이상 형제간의 정을 따질 필요가 없었다.주이준이 세운 계획은 주영도 명의로 된 지분을 모두 빼앗은 뒤 그를 죽이는 것이었다.그렇게 되면 주승우가 최대 주주 자리에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772화

    강루인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그만 욕해. 난 신경 안 써.”그러면서도 그녀는 계속해서 지수현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강루인의 세심한 보살핌 덕분인지 지수현의 불쾌한 기색도 금세 누그러졌다.그는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주영도가 척추를 다쳐서 앞으로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대.”강루인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말했다.“그 사람들한테서 들었어.”“어떻게 생각해?”지수현은 말을 건네면서도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강루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그건 의사가 판단할 일이지 내가 생각할 일이 아니야.”지수현은 밥을 한술 떠서 입에 넣고 천천히 씹으며 물었다.“보러 가고 싶지는 않아?”그는 의식을 되찾자마자 사람을 시켜 주영도의 상태부터 알아보게 했다.덕분에 주영도 역시 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과 현재 상태가 어떠한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주영도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소식에 지수현은 솔직히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정말이지 너무 아까웠다.그는 이미 조화까지 준비해서 보낼 생각이었는데 괜히 기대만 잔뜩 한 셈이었다.역시 싫어하는 인간답게 주영도는 마지막까지 사람을 괜히 기대하게 했다.강루인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내가 가길 바라는 거야?”지수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아니.”그는 강루인을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에게 보낼 만큼 관대한 사람이 아니었다.지수현은 애초에 주영도를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강루인은 그를 살짝 흘겨보며 말했다.“그럼 쓸데없이 사람 떠보지 마. 괜히 너만 괴롭잖아.”그는 병상에 누워서도 쓸데없는 생각만 하는 듯했다.원하던 대답을 얻은 지수현의 입가에는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강루인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수현이었다.만약 그에게 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지금쯤 하늘을 찌를 듯 치켜 올라가 있었을 것이다.두 사람이 따뜻하고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과 달리 주영도가 있는 병실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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