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연애 사정

사내 연애 사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7
By:  슈가로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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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사귄 연인에게 청첩장으로 이별을 통보받은 날, 차율은 낯선 호텔 방에서 눈을 뜬다. 그날 밤의 남자는 월요일 아침, 같은 사무실에 있었다.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부장 백호빈, 말없이 곁을 지키는 대리 이청운. 세 사람의 사내 연애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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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내 연인의 청첩장

“……으.”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흐릿한 주홍빛 조명이 시야 가득 번졌다.

낯선 천장이었다. 자취방의 누렇게 뜬 벽지 대신, 고급스러운 몰딩이 둥글게 천장을 두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차율은 버릇처럼 협탁 위를 더듬었다. 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뿔테안경이 손에 걸리지 않았다.

대신 손끝에 닿은 건 매끄러운 실크 시트였다. 그리고 그 아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제 맨살.

숨이 턱 막혔다.

기억이 없었다. 회식 자리에서 잔을 비운 것까지는 어렴풋한데, 그다음부터는 필름이 통째로 잘려 나간 것처럼 하얬다.

그런데 그 하얀 틈 사이로, 목소리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나랑 잡시다.’

‘홍 과장님, 선 넘지 마시죠.’

‘당신이, 몸으로 확인해봐요. 내가 정말 그 정도로 최악인지.’

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음성, 그리고 그를 향해 쏘아붙이는 오만한 목소리.

취해서 맥이 풀리긴 했어도 그건 분명 제 목소리였다.

‘미쳤어. 홍차율, 너 진짜 미쳤구나.’

그 순간이었다.

사각.

등 뒤에서 시트가 스치는 소리가 났다.

차율은 숨을 멈췄다. 목덜미의 솜털이 한꺼번에 곤두섰다.

누군가 있었다. 바로 옆에.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안경 없는 눈에 비친 건 흐릿한 윤곽뿐이었다. 시트 밖으로 드러난 넓은 등. 베개에 반쯤 파묻힌 검은 머리칼.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어깨.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려고 하면 볼 수도 있었다. 조금만 더 다가가 눈을 가늘게 뜬다면.

하지만 차율은 그러지 않았다.

아는 얼굴이면 어떡하지.

그 생각 하나가 모든 걸 멈춰 세웠다. 모르는 사람이면 그냥 사고로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라면. 매일 아침 얼굴을 마주쳐야 하는 사람이라면.

차율은 소리 없이 침대를 빠져나왔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끌어안고 욕실로 숨어들어, 우스울 만큼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채웠다.

다시 문을 열고 나왔을 때도, 남자는 깨지 않았다.

신발을 찾아 신고 문고리에 손을 얹은 순간이었다.

위이잉.

반대편 협탁 위에서 휴대폰 하나가 짧게 울렸다. 어둑한 방 안에 액정 불빛이 하얗게 번졌다.

잠금 화면에 떠오른 알림. 그 위의 이름 석 자.

차율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보이지 않았다. 번진 글자들이 빛 무리처럼 뭉개져 흔들릴 뿐이었다.

안경만 있었더라면…….

아니, 차라리 잘됐다. 모르는 게 낫다고 방금 스스로 정하지 않았던가.

불빛이 꺼지고 방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침대 위의 등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철컥.

육중한 호텔 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복도의 찬 공기가 뺨을 훑고 지나가자, 그제야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괜찮아. 모르는 척하면 돼. 평생 모를 사이로 끝내면 그만이야.

차율은 그렇게 몇 번이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목덜미가 이상하게 허전하다는 것도.

엄마가 남긴 단 하나의 목걸이가, 그 방 어딘가에 남겨졌다는 것도.

그리고 그 남자가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다는 것도.

이 모든 건, 청첩장 한 장에서 시작됐다.

*

떠나는 겨울이 아쉬움을 남기듯,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쏟아졌다. 춘분(春分)에 내리는 때아닌 눈은 세상을 새하얀 침묵으로 덮어 버렸다.

딸랑-.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선 여자는 왜소한 체구였다. 얼굴을 반쯤 가린 체크무늬 목도리와 투박한 떡볶이 코트.

봄옷 차림의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 홍차율만은 여전히 한겨울의 한복판에 멈춰 있는 듯했다.

김이 하얗게 서린 안경을 벗어 닦자, 구석 자리에서 초조하게 다리를 떨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선명해졌다.

4년을 만난 익숙함은 뒷모습만으로도 그의 상태를 읽어내게 했다.

오늘의 녹현은 유난히 초조해 보였다.

“녹현 씨!”

차율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최녹현은 그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렸다.

촌스러운 안경, 맹한 눈동자, 몸매를 전부 가리는 긴 치마까지 확인한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차율은 그 표정을 애써 모른 척하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됐어? 걱정했잖아.”

“……그냥, 뭐. 바빴어.”

석 달 만의 연락치고는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

화라도 내야 하는 걸까.

따지고 싶은 건 산더미 같았지만, 차율은 그저 녹현이 무사히 제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먼저 안도했다.

탁-.

녹현이 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거 주려고 만나자고 한 거야.”

금박으로 새겨진 문구가 차율의 시야에 박혔다.

‘하나 되는 날’

최녹현 ♥ 김보라

“청……첩장?”

안경 너머로 차율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4년을 사귄 연인. 이별 통보조차 없이 석 달을 잠적한 남자가 돌아와 내민 것이 다른 여자와의 청첩장이라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이해해 줄 거지?”

뻔뻔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차율은 멍하니 청첩장을 내려다봤다.

석 달 만에 결혼이라니.

아니, 그것보다 우리는 대체 언제 헤어진 거지?

하지만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식어 버린 커피잔을 쥔 녹현의 손가락이 대답해 주는 것 같았다.

그의 네 번째 손가락. 걸리적거린다며 자신이 사 준 커플링을 팔아치웠던 그 자리에 화려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차율의 시선을 느낀 녹현이 슬쩍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마치 이제 와 숨기기라도 하듯.

‘숨길 마음이 있긴 했구나.’

그것을 배려라고 생각하며 안도하려던 것도 잠시였다. 곧이어 녹현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비수보다 날카로웠다.

“솔직히 너도 알잖아. 너 여자로서 매력 없는 거.”

“…….”

“나도 남자야. 4년이나 만났으면 좀 받아 줄 법도 한데, 꼴에 여자라고 좀 튕겨?”

“…….”

“너 목석이잖아. 어휴. 질린다, 질려.”

가시 돋친 말들이 차율의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 그래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침묵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녹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랑 하는 거? 상상만 해도 최악이야. 어떤 남자가 너 같은 애랑 자고 싶겠냐? 여자 같지도 않은데.”

“…….”

“굳이 결혼식에 올 필요는 없어. 옛정 생각해서 축의금만 보내든지.”

녹현은 남은 커피를 단숨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늦게 고개를 숙이는 차율을 두고, 그는 승리자라도 된 양 카페를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차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경알이 뿌옇게 흐려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저 세상이 조금 흐릿해 보였을 뿐이었다.

대충 눈가를 훔친 차율은 무심하게 시계를 확인했다. 점심시간이 5분 남아 있었다.

검지로 안경을 밀어 올린 차율은 테이블 위의 청첩장을 반듯하게 챙겨 가방에 넣었다.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그가 내민 청첩장도, 쏟아낸 모욕도.

4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담담했다.

문득 녹현과 연락이 끊겼을 때, 친구 지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게 잠수 이별이잖아.’

그때마다 차율은 아니라고 했다.

녹현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라고.

그 시간이 지나면 돌아와 자신과 결혼을…….

이제야 확실히 알았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징조는 있었다. 늘 약속에 늦던 남자가 오늘만큼은 먼저 카페에 와 있었다.

그게 이별의 예고였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차율은 짧게 숨을 내쉬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오후 2시. 점심시간의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사무실에는 기계적인 키보드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렸다.

[20대 타깃 마케팅 전략 최종본 : SNS 인플루언서 및 숏폼 챌린지 큐레이션.]

푸드하임 마케팅1팀의 에이스, 홍차율 과장.

연애는 엉망이었을지 몰라도 일에서만큼은 달랐다. 독보적인 에이스답게 모니터 속 기획안에는 빈틈이 없었다.

“홍 과장님, 오늘도 회식 안 옵니까?”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에 차율의 시선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백호빈 부장.

젊은 나이에 초고속 승진을 거머쥔 능력에 서글서글한 눈웃음까지 갖춰 사내 여직원들에게 인기 1순위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차율의 손끝이 잠시 멈칫했다. 평소라면 남은 업무를 핑계 삼아 매끄럽게 쳐냈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뇨. 오늘은 갑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호빈의 짙은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이내 반색한 그가 차율의 책상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잘 생각했어요. 이번에 민지 씨가 좋은 곳 예약했다고 했거든요.”

“……네.”

“근데 의외네요. 오늘도 안 올 줄 알았는데.”

호빈이 짓궂게 웃으며 덧붙였지만, 차율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어색하게 길어지자 호빈이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좋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네.”

간결하다 못해 서늘한 축객령이었다.

호빈은 잠시 차율의 얼굴을 살피다 이내 기분 좋은 미소를 남기고 멀어졌다.

그가 사라진 뒤에야 차율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식어 버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혀끝을 타고 넘어가는 씁쓸함이 요동치던 속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사실 차율은 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업무와 상관없는 대화에 끼어들 자리를 찾는 일은, 차율에게 회식 자체보다 더 피곤한 일이었다. 상사의 말에 언제 웃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조차 또 하나의 업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이상하게도 한번 가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최녹현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차율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천천히 내리고 있었고, 흰 눈으로 뒤덮인 도시는 세상일과는 상관없다는 듯 고요해 보였다.

그래, 눈이 오니까.

날씨 탓이다. 그냥 아주 우연히, 날씨가 이래서 가는 것뿐이다.

스스로를 속이는 문장들이 눈발처럼 흩날렸다.

* * *

“홍 과장님, 오늘 기세가 무서운데요? 천천히 좀 드시죠.”

호빈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차율의 잔을 붙잡았지만, 차율은 가볍게 그의 손을 제지하고 다시 잔을 채웠다.

“괜찮아요. 다 좋자고 마시는 건데.”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차율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다. 카페에서 청첩장을 챙겨 나올 때까지만 해도.

하지만 독한 술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꽁꽁 얼려 두었던 마음 한구석이 비참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매력 없는 여자.’

‘목석.’

‘여자 같지도 않은…….’

녹현의 비수 같은 말들이 술기운을 타고 머릿속을 헤집었다.

4년의 세월을 고작 청첩장 한 장으로 갈음해 버린 잔인함이 뒤늦게 차율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술이 원래 이렇게 맛있는 거였나?”

“홍 과장님 완전 딴사람 되셨네.”

“자, 2차 갈까요? 오늘은 제가 쏩니다!”

차율이 비틀거리면서도 당당하게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호기로운 외침도 잠시, 핑그르르 도는 어지럼증에 세상이 기우뚱하게 기울었다.

쏟아지는 함박눈 사이로 중심을 잃고 고꾸라지려던 찰나─

“어, 어?”

누군가의 단단한 팔이 차율의 허리를 거칠게 낚아챘다.

두꺼운 코트 너머로 전해지는 묵직한 체온과 코끝을 간질이는 낯설고 서늘한 향기에 차율은 순간 몸을 굳혔다.

제 허리를 받치고 있는 커다란 손바닥의 감촉에 움찔하며 고개를 들자, 술기운에 흐려진 시야 너머로 누군가의 턱선이 아른거렸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 확인하기에는 의식이 너무도 위태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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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샤샤
@샤샤
재밋습니다 근데 호빈이가 맞나요?? 아닌거가튼데
2026-10-21 00:09:41
1
0
Hoho Haha
Hoho Haha
하룻밤 상대 찾기인가 아무리 술을 먹었어도 그렇게 떠오르는게 없을까... 좀 비현실적;;; 이청운대리같음 그날밤 세번이나 한 상대방 아직 다 안읽었지만 백부장이랑 이대리랑 아는사이같음 그래도 재미는 있음 누구인지 밝히는거 너무 오래 끌지 않길 바라며 매일 읽는중
2026-11-05 17:5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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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49 Chapters
2화. 선을 넘은 밤
“으…….”깨질 듯한 두통과 낯선 천장, 은은한 주홍빛 조명.둥둥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차율은 협탁 위를 더듬었다. 하지만 있어야 할 안경 대신 손끝에 걸린 것은 낯선 감촉이었다.그것은 분명 어제 입고 있었던 붉은색 레이스 속옷이었다.“…….”순간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차율은 떨리는 손으로 두툼한 구스 이불을 살짝 들췄다.따뜻한 어둠 아래 숨어 있던 맨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매끄러운 시트 위에 남은 흔적들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기억은 끊겨 있었다.회식 자리 이후의 풍경은 누군가 필름을 통째로 잘라 낸 것처럼 하얬다. 그러나 눈앞이 핑 도는 순간, 눅진한 알코올 향과 함께 기억 하나가 벼락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랑 잡시다.’ ‘선 넘지 마시죠.’ ‘당신이 직접 확인해 봐요. 내가 정말 그 정도로 최악인지.’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와 그를 향해 쏘아붙이던 오만한 음성.취해서 맥이 풀리고 발음까지 꼬여 있었지만, 그건 분명 자신의 목소리였다.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눈앞의 남자에게 저돌적으로 다가가던 제 모습까지 파편처럼 떠올랐다.‘미쳤다. 미쳤어, 홍차율.’자기 입으로 그런 망측한 말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최녹현과 몇 년을 만나면서도 단 한 번 먼저 손을 내민 적 없던 자신이,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남자에게 그런 말을 했다니.그러나 자책보다 먼저 밀려온 것은 지독한 공포였다.사락-.등 뒤에서 이불이 스치는 묵직한 인기척이 들려왔다.차율은 그대로 숨을 멈췄다.이제야 자신의 옆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시트 밖으로 드러난 남자의 등이 흐릿한 시야에 들어왔다.넓은 어깨 아래로 균형 잡힌 근육이 이어졌고, 골반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이불 아래로 드러난 선은 어젯밤의 열기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시야가 아찔해진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등골을 타고 올라온 소름이 뺨을 지나 귀 끝까지 번졌다. 차율은 남자를 깨울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조심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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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사라진 목걸이
휴대폰에 남은 카드 승인 내역이 이토록 잔인한 이정표가 될 줄은 몰랐다.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려온 호텔 로비. 사정을 설명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내내 차율의 손바닥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죄송합니다, 고객님. 객실 청소팀에 확인해 봤는데 습득된 목걸이는 없다고 합니다.”단호한 직원의 목소리에 차율의 사고가 순간 멈췄다. 힘없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호텔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 방을 벗어난 뒤 다른 곳에 들른 적도 없는데.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차율을 힐끔거리던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혹시 함께 계셨던 일행분이 챙기신 건 아닐까요?”“아. 네…….”힘없는 대답을 내놓은 차율은 직원의 눈에 의구심이 서리는 것을 느끼고 서둘러 연락처만 남긴 채 호텔을 빠져나왔다.회전문을 밀고 나온 세상은 얄미울 정도로 화창했다. 새벽의 안개는 온데간데없고, 나뭇잎 사이로 잘게 부서진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지독하게 시린 제 속과는 정반대의 날씨였다.“비나 좀 내리지…….”차율은 힘없이 투덜거리며 손바닥으로 눈부신 햇빛을 가렸다.직원의 말은 무시할 수 없는 가설이었다. 목걸이가 객실 안에서 떨어졌다면, 자신보다 늦게 방을 나선 사람이 발견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문제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거였다.‘기억해 내, 홍차율. 제발.’관자놀이를 누르며 억지로 기억의 파편을 끌어올려 봤지만, 떠오르는 건 하나같이 낯 뜨거운 장면뿐이었다.서로 뒤엉킨 체온과 거친 숨소리. 허리를 부서질 듯 움켜쥐던 커다란 손, 그리고 귓가에 닿던 낮고 은밀한 목소리…….한 조각을 붙잡을 때마다 기억은 엉뚱하게 더 짙고 농밀한 장면으로 번져 갔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불쑥 튀어나왔다.“미치겠네, 진짜…….”그저 사고로 묻어 버리려 했던 하룻밤이 이제는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가 되어 버렸다.뺨이 뜨겁고 목은 바짝 말랐지만, 부끄럽다고 피할 수만은 없었다.목걸이를 찾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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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남대리
그날.그 단어가 남주함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순간, 차율의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쳤다.짐작조차 하기 싫은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하필이면 사내 최고의 기피 대상인 남주함이 그날 밤의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몸이 싸늘하게 굳었다.게다가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사람들이 무슨 오해를 하든 말든, 왜 이런 질문을 굳이 바짝 붙어 속삭이는 건지.“아. 네.”차율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짧게 답했다. 회식 자리의 추태만으로도 충분히 도마 위에 올랐을 텐데, 굳이 제 손으로 이야깃거리를 보탤 생각은 없었다.띵-.5층에 도착하자 차율은 기다렸다는 듯 빠져나왔다.“홍 과장님,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까칠하세요?”“…….”“그날은 그렇게 귀여우셨으면서.”평소라면 헛소리라 치부했을 말이 오늘은 유난히 날카롭게 꽂혔다. 차율이 멈춰 서자 주함이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삐딱하게 웃으며 다가왔다.“이렇게 매력 있는 사람인 줄 알았으면 진즉에 내 깔 삼는 건데.”“남주함 대리님. 지금 뭐 하는……!”“이거.”주함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투박한 검은색 뿔테안경이었다.차율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그날 밤 호텔에 두고 왔다고 생각했던 제 안경이 왜 남주함에게 있는 걸까. 같은 부서라는 것 외에는 개인적으로 엮일 일조차 거의 없었던 사람이었다.안경 하나만으로 그를 그날 밤의 남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니라는 증거도 없었다.차율이 안경을 낚아채려 손을 뻗자 주함이 약 올리듯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안경 쓰지 말죠? 안 쓴 게 훨씬 예쁜데.”“남 대리!”“그래야 우리 홍 과장님도 그런 연애를…… 윽!”주함이 머리카락에 손을 대려는 순간, 차율의 구두 끝이 그의 정강이를 정확히 걷어찼다.주함이 비명을 삼키며 주저앉았다. 차율은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주워 렌즈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남 대리는 입 좀 예쁘게 놀릴 필요가 있겠네요.”“…….”“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보자기인 줄 아나.”평소 조용하고 무던하기만 했던 차율에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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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핑계
차율은 의아했다.당연히 자신을 향해 꽂히는 시선들의 이유가 회식 자리에서 떠벌린 전 남친 이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팀원들의 눈에는 어딘가 조심스러운 동정이 묻어 있었지만, 디자인팀이나 영업팀 직원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차율이 지나갈 때마다 하던 말을 멈추고 놀란 얼굴로 그녀를 훑어보는가 하면, 두 번씩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사람까지 있었다.“홍 과장님, 안경 벗으니까 너-무 예쁘세요! 못 알아볼 뻔했다니까요?”타 부서와의 회의를 마치고 나오던 길, 디자인팀 아란이 건넨 진심 어린 칭찬에 차율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아주 어렸을 때부터 고도 근시용 두꺼운 안경을 몸의 일부처럼 달고 살았다. ‘예쁘다’라는 말은 애초에 자신의 인생과 별 관계가 없는 단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지금 끼고 있는 렌즈도 예전에 지온이 안경을 벗은 얼굴이 훨씬 낫다며 억지로 사 준 것이었다. 정작 차율에게는 까마득히 잊힌 물건이었지만.결국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본 이유는 회식 자리의 추문이 아니라, 고작 안경 하나에 가려져 있던 얼굴 때문이었다.그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묘한 해방감을 안겼다.덕분에 아침부터 집요하게 집적거리던 남주함의 태도 역시 조금은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그래. 그냥 안경 벗은 게 신기해서 저러는 거겠지.’생각해 보면 남주함은 안경 하나를 손에 넣었다고 그 난리를 쳤다.만약 정말 그날 밤의 상대였다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두고 진작 더 노골적으로 아는 척을 했을 인간이었다. 목걸이까지 발견했다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그 저급함에 대한 확신이 오히려 남주함을 후보에서 밀어내 주었다.다행이라 생각하던 찰나, 문득 다른 사람이 떠올랐다.은근히 끈질긴 남주함에게서 자신을 몇 번이고 떼어 놓은 사람.물론 그 사람이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부장님, 아까 회의안 건은 어떤 부분이…….”호빈을 따라 들어간 부장실.짧은 침묵이 흐르는 동안 차율은 혹시 자신이 놓친 문제가 있었나 싶어 조금 전 회의 내용을 빠르게 되짚었다.하지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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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원 플러스 원
청운이 먼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차율은 그제야 멈춰 있던 숨을 천천히 내쉬며 뒤따랐다.한 팀이 전부 들어와도 넉넉할 만큼 큰 회의실에 단둘이 마주 앉으니 공간이 유난히 휑하게 느껴졌다.열띤 토론은커녕 어색한 침묵만 감도는 가운데, 청운은 말없이 차율을 바라봤고 차율은 그 시선이 괜히 신경 쓰여 애꿎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입안이 바짝 말라 가던 순간, 두 사람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저번에…….”“소, 소비자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얘기하려는 거죠?”먼저 운을 뗀 쪽은 청운이었지만, 당황한 차율의 높은 목소리에 그대로 묻혀 버렸다.본의 아니게 말을 잘라 버린 꼴이 되자 차율의 얼굴에 낭패감이 번졌다.“아, 무슨 말씀 하시려던 게…….”“네.”또 한 번 말이 겹쳤다.차율이 난감한 얼굴로 입을 다무는 사이, 청운은 잠시 숨을 골랐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본론으로 들어갔다.“챌린지보다 인플루언서 협업을 먼저 진행하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하지만 아직 인플루언서 리스트업도 끝나지 않았는데요?”일 이야기가 나오자 차율의 눈빛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방금 전까지 어색함에 눈치를 보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청운 역시 익숙하다는 듯 자료를 펼쳤고, 조금 전까지 휑하기만 했던 회의실에는 금세 두 사람의 의견이 오가기 시작했다.오후 8시.퇴근한 사람들의 흔적만 남은 사무실에서 마지막까지 켜져 있던 자리 하나가 마침내 어두워졌다.차율의 자리였다.신입 시절부터 제 일이든 남의 일이든 맡은 일이라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렸던 그녀에게 야근은 이제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었다.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책상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종이컵 하나가 놓였다.“이제 퇴근해요?”진한 원두 향 위로 부드러운 중저음이 얹혔다.고개를 들자 백호빈이 서 있었다.“아. 이제 하려고요.”대답을 하면서도 차율은 그가 내민 컵을 바라보기만 할 뿐 선뜻 손을 뻗지 못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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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견인
“그럼, 저 좀 태워주시겠어요? 남 대리님.”차율이 놀라 뒤를 돌아봤다.“부장님?”턴 게이트를 통과해 오는 사람은 백호빈이었다.여유로운 미소를 달고 오는 호빈과 달리 주함의 표정은 대놓고 굳었다.“또…! 백 부장님이시네요?”“네. 또 저네요.”아침보다 한층 날이 선 주함의 목소리와 달리, 호빈은 여전히 평온했다.“이번엔 빠지시죠. 사적인 일인데.”“그렇다면 얼마든지.”호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방해할 생각이 없다는 듯 한발 물러서는 모습에 오히려 차율이 멈칫했다.주함도 예상 밖이라는 얼굴을 했지만 당황은 잠시였다. 금세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차율에게 다가오며 손을 뻗었다.“그럼 가시죠, 과장님.”차율은 그 손을 피해 호빈 쪽으로 몸을 돌렸다.“부, 부장님도 같이 가시죠. 제가 사는 건데.”“아. 그래도 되나요?”남주함과 단둘이 술을 마시는 것보다는 나았다.호빈의 입가에 느린 웃음이 걸렸다.“그럼 얻어먹겠습니다.”단둘만의 자리를 기대했던 주함은 갈 곳을 잃은 손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추려는지 턱 근육이 불룩하게 움직였다.호빈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먼저 회사 밖으로 향했다.차율도 또 주함과 둘만 남겨질세라 얼른 그 뒤를 따라붙었다.그러나 입구에 다다른 호빈의 걸음이 갑자기 멈췄다.“이 대리님?”차율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회사 밖에 서 있는 이청운은 아침과 다를 것 없는 차림이었다.다만 무슨 일인지 숨이 조금 거칠었다.평소 좀처럼 흐트러지는 법이 없는 사람이 꽤 급하게 뛰어온 것처럼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이고 있었다.“대리님?”차율이 부르자 청운이 고개를 들었다.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가 잠깐 숨을 삼켰다.“퇴근하신 거 아니었어요?”“…맞습니다.”“그런데…….”어쩐 일이세요?차마 이어지지 못한 물음에 아주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두고 간 게 있어서요.”차율은 저도 모르게 청운의 손을 봤다.빈손이었다. 가방도, 서류도 없는.두고 간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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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손해 본 밤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걷는 동안 차율은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누구와도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누구에게도 특별히 가까워 보이지 않는 정도.눈은 어느새 완전히 그쳐 있었지만 길가에는 미처 녹지 못한 흔적이 희끗하게 남아 있었다. 차율은 발밑에서 질척하게 뭉개지는 눈을 내려다보다 잠시 엉뚱한 생각을 했다.지금이라도 인사만 하고 돌아가 버릴까.애초에 술자리를 만든 남주함도 사라졌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호빈과 청운이 나란히 몇 걸음 앞서가고 있었다.이제 와 혼자 돌아서는 것도 그것대로 이상한 그림이었다.차율이 결국 체념하듯 두 사람을 따라붙었을 때,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호빈이었다.“이 근처에 괜찮은 데가 있는데, 거기로 갈까요?”차율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전 괜찮아요.”“저도 상관없습니다.”청운의 대답까지 듣고 나자 호빈이 자연스럽게 앞장섰다.골목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니 오래된 간판을 단 포장마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평범한 가게였다.호빈이 익숙하게 문을 열자 안쪽에서 중년 여성이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어머, 백 부장!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그러게요, 이모. 제가 요즘 좀 바빴죠.”스스럼없는 호빈의 태도에 차율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평소 세련된 식당만 다닐 것 같은 이미지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가게 안에는 연탄불 냄새와 구수한 국물 냄새가 뒤섞여 있었고, 여기저기서 터지는 웃음소리로 제법 북적였다.세 사람은 그 소란에서 조금 떨어진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앉고 나니 다시 문제가 생겼다.조용했다.너무 조용했다.애초에는 주함과 단둘이 될 뻔한 술자리였다가 호빈이 합류했고, 어느 순간 청운까지 끼어 넷이 됐다. 그리고 정작 시작도 하기 전에 주함이 사라져 지금은 이 셋만 남았다.생각할수록 희한한 조합이었다.차율은 어색함을 감추려 메뉴판을 펼쳤다.“뭐…… 드시고 싶은 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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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버릇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올 리 없었다.차율은 남주함의 메시지가 뜬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잔을 들었다.조금 전의 다짐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입술만 적실 정도로 한 모금 넘겼지만, ‘손해 본 밤’이라는 네 글자는 좀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주함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무 의미 없이 던진 말일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하필이면 ‘밤’이라는 단어가 붙은 탓인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그때 정적을 깨듯 호빈의 휴대폰이 울렸다.호빈은 대수롭지 않게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가 화면을 확인하는 순간 미세하게 표정을 굳혔다.아주 잠깐이었다.“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요. 회사 일이라.”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한 호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밖으로 나갔다.차율은 닫히는 문을 잠시 바라보다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테이블에 남은 사람은 이제 자신과 청운뿐이었다.그나마 간간이 말을 이어 주던 사람까지 사라지자 정적은 전보다 훨씬 갑갑하게 느껴졌다.청운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잔을 들었다.차율도 괜히 어묵 하나를 건져 앞접시에 놓았다.둘 사이에 오가는 것은 젓가락이 접시에 닿는 작은 소리뿐이었다.‘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나.’그렇다고 청운에게 사적으로 물어볼 만한 것도 없었다. 아니, 있다고 해도 이 사람이 제대로 대답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결국 침묵을 먼저 견디지 못한 쪽은 차율이었다.“이 대리님은…… 이런 자리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아요.”“네.”예상은 했지만 너무도 즉답이었다.차율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오셨어요?”“…….”청운의 시선이 차율에게 향했다.잠깐의 침묵 끝에 돌아온 것은 질문이었다.“제가 있는 게 불편하십니까?”“아, 아뇨! 그런 뜻으로 물어본 게 아니에요.”차율은 화들짝 놀라 두 손까지 내저었다.그제야 자신의 반응이 지나쳤다는 걸 깨닫고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쓸데없는 걱정이 스쳤지만 상대는 이청운이었다.타인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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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아무렇지 않은 척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차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떴다.어젯밤에는 술을 거의 마시지도 않았다. 소주 한 잔조차 다 비우지 않았으니 숙취일 리는 없었다.문제는 잠이었다.집에 돌아와 누워서도 남주함이 보낸 ‘손해 본 밤’이라는 말과 청운의 “습관인가 봐요”라는 한마디가 번갈아 떠오르는 바람에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결국 깊이 잠든 건 새벽이 다 돼서였다.“하…….”차율은 이마를 짚은 채 한동안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출근을 미룰 수는 없었다. 가까스로 씻고 옷을 챙겨 입은 뒤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눈가가 뻐근하고 속까지 묘하게 울렁거렸다.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얼굴도 가관이었다.창백한 피부에 퀭한 눈.누가 봐도 제대로 못 잔 사람의 몰골이었다.“과장님, 괜찮으세요? 얼굴이…….”“아…… 네. 괜찮아요.”“어제 많이 드셨나 봐요.”“예?”차율이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티, 티 나요?”“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거울 좀 봐요. 티 나다 못해 넘쳐요, 아주.”여혜주의 말에 차율은 머쓱하게 얼굴을 문질렀다.술 때문은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었지만, 그러자니 어젯밤에 왜 잠을 설쳤는지까지 설명해야 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혜주는 주변을 한 번 살피더니 차율의 팔을 슬쩍 잡았다.“과장님. 잠깐만요.”얼떨결에 끌려 들어간 곳은 탕비실이었다.혜주는 문밖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문을 닫고, 커피머신에서 뽑은 커피 한 잔을 차율에게 내밀었다.“일단 이거 드세요.”“고마워요.”차율이 종이컵을 받아 들자 혜주가 기다렸다는 듯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근데 과장님.”“네?”“어제 백 부장님이랑 이 대리님하고 술 마셨어요?”차율의 손이 멈췄다.“그걸 어떻게…….”“남 대리님이 말하고 다니던데요.”“남… 대리가요?”짧은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왔다.“하…….”“그래서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이길래 그 두 분하고 같이 마신 거예요?”혜주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차율은 잠시 어젯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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