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4년 사귄 연인에게 청첩장으로 이별을 통보받은 날, 차율은 낯선 호텔 방에서 눈을 뜬다. 그날 밤의 남자는 월요일 아침, 같은 사무실에 있었다.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부장 백호빈, 말없이 곁을 지키는 대리 이청운. 세 사람의 사내 연애 사정.
View More“……으.”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흐릿한 주홍빛 조명이 시야 가득 번졌다.
낯선 천장이었다. 자취방의 누렇게 뜬 벽지 대신, 고급스러운 몰딩이 둥글게 천장을 두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차율은 버릇처럼 협탁 위를 더듬었다. 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뿔테안경이 손에 걸리지 않았다.
대신 손끝에 닿은 건 매끄러운 실크 시트였다. 그리고 그 아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제 맨살.
숨이 턱 막혔다.
기억이 없었다. 회식 자리에서 잔을 비운 것까지는 어렴풋한데, 그다음부터는 필름이 통째로 잘려 나간 것처럼 하얬다.
그런데 그 하얀 틈 사이로, 목소리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나랑 잡시다.’
‘홍 과장님, 선 넘지 마시죠.’
‘당신이, 몸으로 확인해봐요. 내가 정말 그 정도로 최악인지.’
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음성, 그리고 그를 향해 쏘아붙이는 오만한 목소리.
취해서 맥이 풀리긴 했어도 그건 분명 제 목소리였다.
‘미쳤어. 홍차율, 너 진짜 미쳤구나.’
그 순간이었다.
사각.
등 뒤에서 시트가 스치는 소리가 났다.
차율은 숨을 멈췄다. 목덜미의 솜털이 한꺼번에 곤두섰다.
누군가 있었다. 바로 옆에.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안경 없는 눈에 비친 건 흐릿한 윤곽뿐이었다. 시트 밖으로 드러난 넓은 등. 베개에 반쯤 파묻힌 검은 머리칼.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어깨.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려고 하면 볼 수도 있었다. 조금만 더 다가가 눈을 가늘게 뜬다면.
하지만 차율은 그러지 않았다.
아는 얼굴이면 어떡하지.
그 생각 하나가 모든 걸 멈춰 세웠다. 모르는 사람이면 그냥 사고로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라면. 매일 아침 얼굴을 마주쳐야 하는 사람이라면.
차율은 소리 없이 침대를 빠져나왔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끌어안고 욕실로 숨어들어, 우스울 만큼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채웠다.
다시 문을 열고 나왔을 때도, 남자는 깨지 않았다.
신발을 찾아 신고 문고리에 손을 얹은 순간이었다.
위이잉.
반대편 협탁 위에서 휴대폰 하나가 짧게 울렸다. 어둑한 방 안에 액정 불빛이 하얗게 번졌다.
잠금 화면에 떠오른 알림. 그 위의 이름 석 자.
차율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보이지 않았다. 번진 글자들이 빛 무리처럼 뭉개져 흔들릴 뿐이었다.
안경만 있었더라면…….
아니, 차라리 잘됐다. 모르는 게 낫다고 방금 스스로 정하지 않았던가.
불빛이 꺼지고 방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침대 위의 등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철컥.
육중한 호텔 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복도의 찬 공기가 뺨을 훑고 지나가자, 그제야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괜찮아. 모르는 척하면 돼. 평생 모를 사이로 끝내면 그만이야.
차율은 그렇게 몇 번이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목덜미가 이상하게 허전하다는 것도.
엄마가 남긴 단 하나의 목걸이가, 그 방 어딘가에 남겨졌다는 것도.
그리고 그 남자가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다는 것도.
이 모든 건, 청첩장 한 장에서 시작됐다.
*
떠나는 겨울이 아쉬움을 남기듯,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쏟아졌다. 춘분(春分)에 내리는 때아닌 눈은 세상을 새하얀 침묵으로 덮어 버렸다.
딸랑-.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선 여자는 왜소한 체구였다. 얼굴을 반쯤 가린 체크무늬 목도리와 투박한 떡볶이 코트.
봄옷 차림의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 홍차율만은 여전히 한겨울의 한복판에 멈춰 있는 듯했다.
김이 하얗게 서린 안경을 벗어 닦자, 구석 자리에서 초조하게 다리를 떨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선명해졌다.
4년을 만난 익숙함은 뒷모습만으로도 그의 상태를 읽어내게 했다.
오늘의 녹현은 유난히 초조해 보였다.
“녹현 씨!”
차율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최녹현은 그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렸다.
촌스러운 안경, 맹한 눈동자, 몸매를 전부 가리는 긴 치마까지 확인한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차율은 그 표정을 애써 모른 척하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됐어? 걱정했잖아.”
“……그냥, 뭐. 바빴어.”
석 달 만의 연락치고는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
화라도 내야 하는 걸까.
따지고 싶은 건 산더미 같았지만, 차율은 그저 녹현이 무사히 제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먼저 안도했다.
탁-.
녹현이 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거 주려고 만나자고 한 거야.”
금박으로 새겨진 문구가 차율의 시야에 박혔다.
‘하나 되는 날’
최녹현 ♥ 김보라
“청……첩장?”
안경 너머로 차율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4년을 사귄 연인. 이별 통보조차 없이 석 달을 잠적한 남자가 돌아와 내민 것이 다른 여자와의 청첩장이라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이해해 줄 거지?”
뻔뻔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차율은 멍하니 청첩장을 내려다봤다.
석 달 만에 결혼이라니.
아니, 그것보다 우리는 대체 언제 헤어진 거지?
하지만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식어 버린 커피잔을 쥔 녹현의 손가락이 대답해 주는 것 같았다.
그의 네 번째 손가락. 걸리적거린다며 자신이 사 준 커플링을 팔아치웠던 그 자리에 화려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차율의 시선을 느낀 녹현이 슬쩍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마치 이제 와 숨기기라도 하듯.
‘숨길 마음이 있긴 했구나.’
그것을 배려라고 생각하며 안도하려던 것도 잠시였다. 곧이어 녹현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비수보다 날카로웠다.
“솔직히 너도 알잖아. 너 여자로서 매력 없는 거.”
“…….”
“나도 남자야. 4년이나 만났으면 좀 받아 줄 법도 한데, 꼴에 여자라고 좀 튕겨?”
“…….”
“너 목석이잖아. 어휴. 질린다, 질려.”
가시 돋친 말들이 차율의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 그래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침묵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녹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랑 하는 거? 상상만 해도 최악이야. 어떤 남자가 너 같은 애랑 자고 싶겠냐? 여자 같지도 않은데.”
“…….”
“굳이 결혼식에 올 필요는 없어. 옛정 생각해서 축의금만 보내든지.”
녹현은 남은 커피를 단숨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늦게 고개를 숙이는 차율을 두고, 그는 승리자라도 된 양 카페를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차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경알이 뿌옇게 흐려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저 세상이 조금 흐릿해 보였을 뿐이었다.
대충 눈가를 훔친 차율은 무심하게 시계를 확인했다. 점심시간이 5분 남아 있었다.
검지로 안경을 밀어 올린 차율은 테이블 위의 청첩장을 반듯하게 챙겨 가방에 넣었다.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그가 내민 청첩장도, 쏟아낸 모욕도.
4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담담했다.
문득 녹현과 연락이 끊겼을 때, 친구 지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게 잠수 이별이잖아.’
그때마다 차율은 아니라고 했다.
녹현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라고.
그 시간이 지나면 돌아와 자신과 결혼을…….
이제야 확실히 알았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징조는 있었다. 늘 약속에 늦던 남자가 오늘만큼은 먼저 카페에 와 있었다.
그게 이별의 예고였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차율은 짧게 숨을 내쉬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오후 2시. 점심시간의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사무실에는 기계적인 키보드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렸다.
[20대 타깃 마케팅 전략 최종본 : SNS 인플루언서 및 숏폼 챌린지 큐레이션.]
푸드하임 마케팅1팀의 에이스, 홍차율 과장.
연애는 엉망이었을지 몰라도 일에서만큼은 달랐다. 독보적인 에이스답게 모니터 속 기획안에는 빈틈이 없었다.
“홍 과장님, 오늘도 회식 안 옵니까?”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에 차율의 시선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백호빈 부장.
젊은 나이에 초고속 승진을 거머쥔 능력에 서글서글한 눈웃음까지 갖춰 사내 여직원들에게 인기 1순위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차율의 손끝이 잠시 멈칫했다. 평소라면 남은 업무를 핑계 삼아 매끄럽게 쳐냈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뇨. 오늘은 갑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호빈의 짙은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이내 반색한 그가 차율의 책상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잘 생각했어요. 이번에 민지 씨가 좋은 곳 예약했다고 했거든요.”
“……네.”
“근데 의외네요. 오늘도 안 올 줄 알았는데.”
호빈이 짓궂게 웃으며 덧붙였지만, 차율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어색하게 길어지자 호빈이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좋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네.”
간결하다 못해 서늘한 축객령이었다.
호빈은 잠시 차율의 얼굴을 살피다 이내 기분 좋은 미소를 남기고 멀어졌다.
그가 사라진 뒤에야 차율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식어 버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혀끝을 타고 넘어가는 씁쓸함이 요동치던 속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사실 차율은 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업무와 상관없는 대화에 끼어들 자리를 찾는 일은, 차율에게 회식 자체보다 더 피곤한 일이었다. 상사의 말에 언제 웃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조차 또 하나의 업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이상하게도 한번 가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최녹현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차율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천천히 내리고 있었고, 흰 눈으로 뒤덮인 도시는 세상일과는 상관없다는 듯 고요해 보였다.
그래, 눈이 오니까.
날씨 탓이다. 그냥 아주 우연히, 날씨가 이래서 가는 것뿐이다.
스스로를 속이는 문장들이 눈발처럼 흩날렸다.
* * *
“홍 과장님, 오늘 기세가 무서운데요? 천천히 좀 드시죠.”
호빈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차율의 잔을 붙잡았지만, 차율은 가볍게 그의 손을 제지하고 다시 잔을 채웠다.
“괜찮아요. 다 좋자고 마시는 건데.”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차율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다. 카페에서 청첩장을 챙겨 나올 때까지만 해도.
하지만 독한 술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꽁꽁 얼려 두었던 마음 한구석이 비참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매력 없는 여자.’
‘목석.’
‘여자 같지도 않은…….’
녹현의 비수 같은 말들이 술기운을 타고 머릿속을 헤집었다.
4년의 세월을 고작 청첩장 한 장으로 갈음해 버린 잔인함이 뒤늦게 차율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술이 원래 이렇게 맛있는 거였나?”
“홍 과장님 완전 딴사람 되셨네.”
“자, 2차 갈까요? 오늘은 제가 쏩니다!”
차율이 비틀거리면서도 당당하게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호기로운 외침도 잠시, 핑그르르 도는 어지럼증에 세상이 기우뚱하게 기울었다.
쏟아지는 함박눈 사이로 중심을 잃고 고꾸라지려던 찰나─
“어, 어?”
누군가의 단단한 팔이 차율의 허리를 거칠게 낚아챘다.
두꺼운 코트 너머로 전해지는 묵직한 체온과 코끝을 간질이는 낯설고 서늘한 향기에 차율은 순간 몸을 굳혔다.
제 허리를 받치고 있는 커다란 손바닥의 감촉에 움찔하며 고개를 들자, 술기운에 흐려진 시야 너머로 누군가의 턱선이 아른거렸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 확인하기에는 의식이 너무도 위태로웠다.
숫자 하나만 고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차율은 판매 예측표 옆에 손익표를 띄웠다. 납품 물량을 줄이니 개당 원가까지 달라졌다. 청운이 매장별 배치안을 여는 동안 호빈에게 전화를 걸었다.“부장님, 확정치가 나왔는데 차이가 큽니다. 예측부터 다시 잡아야겠어요.”-자료 보내 줘요. 팀에도 연락할게요.설명을 마치기도 전에 차 키 챙기는 소리가 들렸다.*열한 시 반, 마케팅1팀이 회의실에 모였다.다들 평소보다 편한 차림이었다. 도윤의 앞머리는 덜 말라 이마에 붙어 있었고, 주함은 콩이의 목줄과 노트북 가방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콩이도 야근이에요?”도윤이 허리를 숙이자 콩이가 꼬리를 흔들었다. 주함은 목줄을 짧게 잡으며 한숨을 쉬었다.“혼자 둘 수가 없어서요.”의자 옆에 담요와 물그릇을 놓아 준 뒤에야 노트북을 폈다. 콩이는 담요보다 주함의 발등에 먼저 턱을 얹었다.“판매 예측은 제가, 점포별 배치는 이 대리님이 맡을게요. 혜주 씨는 장표 정리, 지수 씨는 수치 대조 부탁해요. 도윤 씨는 그래프 바꾸고요.”“원가와 최소 생산량은 내가 볼게.”“최종 파일은 남 대리님한테 모아 주세요.”주함이 공유 폴더를 정리하는 사이 차율은 첫 장을 바꿨다.매출 증가율 대신 준비해 둔 고객 조사부터 보여 주기로 했다. 왜 아침을 거르는지, 어떤 제품이라면 사겠다고 했는지.“이 표 앞으로 당길까요
“성과가 좋아도 전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인사팀 과장은 차율이 내민 실적표를 내려놓았다.“물류 기획 인력 보강이 우선이라서요. 아직 검토 중입니다. 현재 업무와 부서 의견도 함께 보겠습니다.”“제가 빠지면 진행 중인 사업은 누가 이어받는지도 검토해 주세요.”차율이 담당 업무표를 얹자 인사팀 과장의 펜이 사업 이름 옆에 멈췄다.화요일 10시에 시작한 면담은 십오 분 만에 끝났다.일을 못해서 보내는 게 아니라니, 잘했다는 말만으로는 남을 수 없다는 건가.자리로 돌아오자 노 차장이 회의실로 불렀다. 먼저 와 있던 호빈이 제안 요청서를 내밀었다.“한성유통 PB 간편식 제조 파트너 선정 건이에요. 경쟁사는 미가앤푸드고, PT는 삼 주 뒤예요.”가격도 생산 규모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차율이 납품 조건을 넘기는 동안 노 차장이 일정을 짚었다.“홍 과장이 제안 총괄하고 발표까지 맡아. 이 대리는 점포 데이터 붙이고. 생산 쪽 조율은 내가 할게.”호빈이 수첩에 메모하며 덧붙였다.“가격 조건은 제가 검토할게요. 인사팀에는 기존 실적과 진행 업무를 묶어서 의견 내고요.”차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주한다고 전보가 취소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자신이 이 팀에서 계속할 일을 보여줄 수는 있었다.*그날 저녁, 청운과 제안서를 펼쳐 놓
지난밤 차율은 서랍에서 수첩을 꺼내 화살표들을 다시 훑고 덮었다. 피곤한 사람의 기억이 흐린 걸 붙잡고 따질 일은 아니었다.다음 날 정오, 호빈의 차가 아파트 앞에 섰다.“더우니까 냉면 먹어요. 2주 동안 그 생각만 했어요.”그가 데려간 곳은 강 건너 오래된 냉면집이었다. 호빈은 가위를 집어 차율의 면부터 잘라 주고 제 그릇을 당겼다.“출장지에서 제일 힘들었던 게 뭔지 알아요? 밥 먹을 때마다 맞은편이 비어 있는 거.”차율은 웃음을 참으며 육수를 마셨다. 어젯밤 서랍 앞에서 굳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 지금 마주 앉은 사람이 이렇게 웃고 있는데.식사가 끝나 갈 무렵 호빈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본 그의 얼굴이 굳었다.잠깐 나갔다 온 호빈은 자리에 앉으며 짧게 말했다.“아버지예요. 다음 주에 GK 쪽이랑 저녁 하재요. 안 간다고 했어요.”“저 때문이면 가셔도 돼요.”“차율 씨 때문 아니에요. 가면 또 결혼 얘기만 하실 거라서.”호빈은 웃으며 계산서를 집었다.차율은 그 웃음 뒤에 남은 굳은 기색을 보았지만 모른 척했다. 오늘은 그를 더 지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호빈이 돌아오고 사무실은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노 차장은 결재 서류를 넘기며 홀가분하게 웃었다.
호빈의 비행기는 금요일 밤 아홉 시에 내렸다.[도착했어요. 짐 찾고 바로 갈게요. 집 앞에서 봐요.]차율은 답장을 보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머리를 빗으면서도 자꾸 핸드폰을 확인했다.한참 뒤 집 앞에 내려갔을 때 낮 동안 달궈진 아스팔트에서 열기가 올라오는 듯했다. 차율은 현관 앞 계단에 앉아 기다리다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검은 SUV를 보고 일어났다.운전석에서 내린 호빈은 정장 재킷을 팔에 걸치고 있었다. 2주 사이 얼굴이 조금 탔고, 눈 밑은 어두웠지만 차율을 보자마자 웃었다.“보고 싶었어요.”호빈이 망설임 없이 차율을 끌어안았다. 셔츠에서 기내의 건조한 냄새와 낯선 호텔 비누 향이 섞여 났다. 차율은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2주 동안 메시지로만 오가던 사람이 품 안에 있으니 그동안 쌓아 둔 말들이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엉켰다.“피곤하죠. 내일 봐도 되는데.”“내일까지 어떻게 기다려요.”호빈이 몸을 떼며 차율의 얼굴을 살폈다. 웃음기가 조금 옅어졌다.“초록이, 무슨 말 했어요?”차윤은 그의 팔에서 손을 내렸다. 자신이 꺼내기도 전에 그 이름부터 나왔다.두 사람은 골목 끝 놀이터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캔커피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차율은 가로등 아래로 모이는 날벌레를 봤다.“결혼한대요.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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