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선두에 선 기자는 기세등등하게 몰아붙였다.그는 말하면서도 어깨에 멘 카메라를 이해리에게 들이대며 계속 촬영했다.뒤에서도 기자 한 명이 달려와 현장에 있던 학생들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여러분은 이해리 씨가 어떻게 여러분을 속였는지도 모르잖아요. 여러분을 국내로 데려온 뒤에는 영원히 다시 해외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는 겁니다. 해외에서 누릴 수 있는 좋은 앞날을 다 포기하고 고작 국내에서 이해리를 돕겠다니요?”순식간에 현장은 그들 때문에 아수라장이 됐다.이해리도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경비를 불렀다.경비들이 기자들을 밖으로 내보낸 뒤 이해리는 다시 몸을 돌려 자기 학생들을 바라봤다.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다들 들었지? 국내에 남기로, 내 실험실에 남기로 한다면 앞으로도 이런 일을 수없이 겪을 수 있어.”“지금 국내외에서 여론전이 한창이야. 우리가 하는 모든 실험은 국제 선진 기술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 우리가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거야.”“그러니 확실히 해두고 싶어. 너희가 정말 진심으로 국내에 남고 싶은 건지 말이야.”거기까지 말한 이해리는 회의실 문을 활짝 열었다.“물론 떠날 권리도 있어. 오늘 실험실을 나가겠다고 결정한다면 이전 약속대로 너희가 아무런 문제 없이 외국으로 돌아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길을 터줄게.”말을 마친 이해리의 가슴은 불안하게 두근거렸다.사실 몇 명이나 남아 줄지 자신이 없었다.이해리는 문가에 선 채 조용히 그들의 결정을 기다렸다.그때 주세훈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전 돌아갈 생각 없어요. 이미 선배를 따라 돌아오기로 결정한 이상, 국내 실험실에서 제대로 일할 겁니다. 전 선배를 따를 거예요.”주세훈은 방 안에서 가장 먼저 자기 뜻을 분명히 밝힌 사람이었다.그를 시작으로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이 생겼다. 모두 남겠다고 말했다.처음에는 흔들리던 사람들도 서로 눈치를 보다가 결국 남는 쪽을 택했다.결국 떠나
넓은 회의실 안에서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회의실에는 죽은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이해리가 처음 그들을 데려왔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특히 정지안이 환영 만찬을 마련했을 때 모두가 무척 기뻐했다.하지만 실시간 검색어 논란이 갈수록 거세지면서 어린 연구원들도 겁에 질렸다.“전에 이런 일을 겪어 본 적이 없으니 무서울 수밖에 없다는 건 알아요.”이해리는 여전히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을 설득했다.이렇게 큰일이 벌어진 이상 선배이자 모든 결정을 내린 책임자인 이해리에게는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었다.하지만 지금 그녀 역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다.해외에 있을 때 결정을 너무 급하게 내린 것 같았다. 세바스찬이 일을 망치지 않았다면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장단점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렇게 성급하게 움직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되돌릴 수 없었다.이해리는 미간을 가볍게 누르며 다시 한번 모든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려 했다.이해리의 시선이 천천히 사람들을 훑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엄숙했지만 표정은 한없이 부드러웠다.누구나 그녀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심으로 아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모두 에드워드의 제자이자 연구실의 미래를 책임질 희망이었다.그래서 이해리는 더욱 부드러운 말투를 내려고 애썼다.“해외에 있을 때 여러분에게 이해관계를 제대로 설명했어야 해요. 하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그 점은 여러분에게 사과할게요. 분명 제 잘못이에요. 이제 다시 여러분에게 묻고 싶어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특별히 계획한 일이 있는지 말해 주세요.”말을 이어 가던 그녀의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전에 물어봤다면 여러분이 확실하게 답하지 못할 거로 생각했어요. 제가 너무 독단적이고 조급했어요. 이제 여러분에게 선택할 기회를 줄게요.”하지만 모두는 이해리가 당연히 자신들이 국내에 남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큰 수고를 들여 해외에서 데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후배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건 우리에게 치욕이에요. 애초에 그들을 국내로 데려온 건 국내 연구 기관에 정착하기 위해서였어요. 이전에도 여러분은 제게 협력 제안을 한 적이 있죠. 이제 제가 그 기회를 드리겠다는데 나빠질 이유가 있어요?”그 말을 들은 여자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복잡한 눈빛으로 물었다.“그러니까 이제 우리와 협력하는 방안을 고려하겠다는 뜻입니까?”“네. 해외 사람들의 협박에 굴복하고 싶지 않아요.”이것이 이해리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답이었다. 동시에 그녀의 진심이기도 했다.상대는 잠시 말없이 이해리를 바라보다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실현 가능한지 내부 논의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그 사람이 상급자에게 보고하러 가는 것임을 알아챈 이해리는 곧바로 큰 목소리로 덧붙였다.“이 연구실을 이끌고 반드시 연구 성과를 내겠다고 약속할게요. 원하신다면 현재 준비 중인 연구 단지까지 함께 국내 기관과 협력할 수 있어요. 지금 이 순간 우리나라가 우리에게 최대한의 보호를 제공해 주길 바랄 뿐이에요.”그 말을 들은 여자는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알겠습니다. 요구 사항을 빠짐없이 보고하겠습니다.”말을 마친 상대는 사무실을 나갔다. 이해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회의실 탁자를 바라보며 표정이 여전히 어두웠다.오늘 이 자리에서는 확실한 답을 얻지 못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책임자가 들어와 이해리의 제안을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지금 당장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추후 협력할 기회가 생기면 먼저 연락드리겠습니다.”이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그래도 진지하게 검토해 주셨으면 해요. 제가 보인 성의도 결코 적지 않으니까요.”“물론입니다.”한편 정도원은 이 일에 관해 알게 됐다.윤유나가 어디에서 알아낸 것인지 모를 단서를 내놓자 정도원은 드물게 그녀를 좋게 바라봤다.“제법인데? 이제 이런 일도 해내고? 그나저나 이해리가 이렇게 대담해질 줄은 몰랐군! 이 일을 폭로해서 대중이 이해
전화기 너머에서 정중하지만 차가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안녕하세요, 이해리 씨.”잠시 뒤 이해리는 미간을 문지르며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관련 기관으로부터 출석 요청을 받은 것이었다.해외 정부 기관과 달리 국내 관계 기관의 출석 요청은 이해리에게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특히 실시간 검색어 사건까지 벌어진 직후였다.그녀는 관계 기관이 여론에 영향을 받아 연구실을 국내로 옮긴 결정이 잘못됐다고 판단한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전화를 끊은 이해리가 정지안에게 물었다.“저, 가 봐야겠죠?”“당연히 가야 해. 국내 관계 기관이잖아. 가지 않으면 오히려 더 이상하게 보일 거야.”정지안은 조금 전의 장난스러운 태도를 곧바로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걱정되면 내가 미리 사람을 통해 알아봐 줄 수도 있어...”“괜찮아요. 이런 때 인맥을 쓰면 오히려 일이 더 복잡해질까 봐 걱정돼요.”이해리는 이번 출석 요청이 불안했지만 정지안이 개입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정지안은 아직 해외에서 그녀가 저지른 일을 몰랐다. 지금 그가 움직였다가 그 일들까지 전부 드러날지 누가 알겠는가.그 생각에 이해리가 미간을 찌푸렸다.“괜찮아요. 제가 직접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볼게요.”어차피 한 차례 면담일 뿐이었다. 국내 기자들 앞에서 이미 많은 것을 설명했다. 국내 기관이 상황을 제대로 판단한다면 오히려 이해리에게 더 좋은 기반과 지원을 제공해야 했다.하지만 해외에서도 계속 압박하고 있었다. 그들이 여론을 이용해 국내 기관에 압력을 넣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한 이해리는 최대한 조심하기로 했다.결정을 내린 그녀는 다음 날 아침 일찍 관계 기관으로 향했다.이해리를 맞이한 사람은 전날 전화했던 여자였다. 상대가 입을 열자 이해리는 곧바로 목소리를 알아들었다.다행히 기관 관계자는 돌려 말하지 않고 곧바로 상황을 설명했다.“이해리 씨를 부른 이유는 지도 교수님의 연구실 소유와 관리 권한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현재 에드워드 씨가 입원 중인 것은 알고 있
“맞아. 지금 우리 연구실을 노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줘. 다만 낯이 익다는 느낌뿐이고 누군지도 모르며 사진까지 없다면, 나도 어떻게 알아볼 수가 없어...”이해리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나타난 여자를 모두가 의심하고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정체를 알 방법이 없었다.가능성은 여러 가지였다.첫째, 상대가 연예 매체 기자나 일반 기자일 수 있었다. 연구실 사람에게 접근해 내부 정보를 캐내려는 목적일지도 몰랐다.둘째, 이해리에게 악의를 품은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 경우에도 연구실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려는 것은 같겠지만 최종 목표는 이해리를 공격하는 것이었다.생각할수록 이해리의 적은 정말 많았다. 그래서 그녀는 갑자기 정지안에게 고개를 돌려 다른 의견이 있는지 물으려 했다. 하지만 정지안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고양이만 놀아 주고 있었다.정지안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해 둔 바가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지금은 오로지 고양이와 노는 데 집중했다.이 고양이는 자신과 이해리가 함께 키우는 아이였으니 당연히 둘만 따를 것이었다. 정지안은 그런 사실을 은근히 드러내며 이해리와 자신의 친밀함을 과시했다.두 사람이 대화를 멈추고 자신을 보는 것을 알아차린 정지안이 고개를 들었다.“왜? 내가 도울 일이라도 있어?”그 모습을 본 이해리는 미간을 문질렀다.“이 일에 대해 지안 씨의 생각은 어떤지 물어보려고요.”그러자 정지안은 갑자기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차라리 얘한테 물어보지 그래.”고양이가 ‘야옹’ 하고 울었다. 무척 순진한 얼굴이었다.정지안은 고양이를 안고 자신이 진짜 연인이라는 위치를 과시하려 했다. 그런데 맞은편의 주세훈이 고양이를 향해 똑같이 ‘야옹, 야옹’ 소리를 냈다.그 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진짜 고양이 같았다. 고양이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정지안의 품에서 빠져나와 주세훈에게 달려갔다.주세훈은 그렇게 고양이와 장난을 쳤다. 낯을 전혀 가리지 않는 고양이
주세훈은 멈칫했다.“왜 당신이 여기 있죠? 전 선배를 만나러 왔어요.”“주세훈 씨가 선배를 찾으러 왔다는 건 나도 알아요.”정지안은 일부러 쉽게 들여보내지 않으며 그를 까다롭게 대했다. 두 사람이 팽팽히 맞서던 순간 이해리가 돌아왔다.“이게 무슨 일이야? 주세훈, 네가 왜 여기 있어?”이해리는 방금 에드워드를 찾아뵙고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집 앞에 도착하자 주세훈과 정지안이 마주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이 날카롭게 대치하는 듯해 이해리는 곧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갔다.“무슨 일이에요?”하지만 정지안도 주세훈도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특히 정지안은 갑자기 지나치게 얌전해졌다.그는 먼저 다가와 이해리의 가방을 받아 들었다.“퇴근했어? 말한 시간보다 왜 늦었어?”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주세훈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했다. 정지안이 은근히 애정을 과시하자 주세훈은 화가 났다.사실 정지안은 자신과 이해리가 이렇게 다정한 모습을 보이면 주세훈이 화가 나 돌아갈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주세훈은 문 앞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이해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꼭 말씀드려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요.”이해리도 주세훈이 이 시간에 갑자기 찾아온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아까 연구실에서는 말하지 않았어?”‘굳이 집까지 찾아올 필요가 있었을까?’환영 만찬이 있던 날부터 이해리는 정지안과 주세훈 사이가 어쩐지 좋지 않은 듯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주세훈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아까 선배님을 불러 세우려고 했는데 통화 중이셔서, 그냥 여기로 와 보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조금 전 일이 있어서 늦었어. 무슨 말인지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해.”정지안이 보는 앞이었지만 이해리는 주세훈이 중요한 정보를 가져온 것 같아 그를 집 안으로 들였다.주세훈이 들어서자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달려왔다. 고양이는 정지안과 이해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