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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나쁘지 않네요

Penulis: 필루사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3-21 13:45:18

다음 날 아침 8시 50분. 마케팅 1팀 사무실.

루다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해 자리에 앉았다. '아, 어제 괜히 뒷담화를 해선...'

어제 햇살강쥐님에게 '극혐하는 빌런 상사'라며 신명 나게 뒷담화를 날렸던 기억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혹시 햇살강쥐 계정을 강태준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어쩌지? 엄청난 찜찜함과 불안감이 몰려와, 어제 밤새 뒤척이느라 한숨도 자지 못한 탓이었다.

'아니야, 설마...'

애써 합리화하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지만, 여전히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본인이든 조카의 심부름이든, 어제 그 어색하고 뻘쭘했던 중고 거래 현장을 떠올리면 당장 오늘 아침 기획안 수정본을 들고 그 서늘한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곤욕이었다.

"이루다, 너 안색이 왜 그래? 어제 당근 거래하다가 사기라도 당했어?"

동기인 지원이 파티션 너머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며 물었다. 루다는 밤새 한숨도 못 자 퀭해진 눈으로 지원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사기를 당하는 게 마음 편했을지도 몰라. 나 오늘 기획안 수정본 들고 팀장석 가면, 숨 막혀서 두 발로 못 걸어 나올 수도 있어."

"얘가 아침부터 재수 없는 유언을 남기고 있어!"

그때였다. 사무실 입구의 유리문이 열리며, 익숙하고도 서늘한 구두 굽 소리가 바닥을 때렸다. 강태준 팀장이었다. 완벽하게 세팅된 포마드 머리와 먼지 한 톨 없이 각 잡힌 네이비 수트. 어제 역삼역 3번 출구에서 베이커리 쇼핑백을 들고 어색하게 서 있던 그 인간적인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루다는 헉, 숨을 들이마시고 모니터 뒤로 거북이처럼 목을 바짝 숨겼다. 제발, 제발 나를 찾지 마라.

"이루다 대리."

하지만 얄궂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정확히 루다의 파티션을 향해 꽂혔다. 타닥거리던 키보드 소리가 일제히 멈추고, 팀원들의 동정 어린 시선이 루다에게 집중되었다.

루다는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무릎을 진정시키며, 밤새 뜯어고친 기획안을 두 손에 꼭 쥔 채 팀장석으로 다가갔다.

"네, 팀장님. 어제 지시하신 타깃층 분석 보완해서 다시 가져왔습니다."

태준은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고 루다의 기획안을 무심하게 받아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하얀 종이 위를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사각, 사각. 서류 넘어가는 소리만 사무실의 적막을 갈랐다.

1초, 2초, 3초. 평소라면 벌써 미간을 잔뜩 구기며 "이게 뭡니까" 하고 서류가 허공을 날았을 타이밍이었다. 루다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래, 다 엎어버려라. 나도 더러워서 사표 쓸 거다.'

"……수정안."

태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루다는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나쁘지 않네요. 이번엔 꼼꼼하게 봤군요. 이대로 진행하세요."

"……네?"

루다는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방금 저 얼음 마왕의 입에서 '나쁘지 않네요'라는 긍정어가 나왔다고?

루다뿐만이 아니었다. 옆자리에서 텀블러로 물을 마시던 지원이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고, 다른 팀원들도 경악한 얼굴로 팀장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케팅 1팀이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던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사실 태준의 머릿속은 지금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기 합리화 회로'가 돌아가는 중이었다.

'어제 15만 원이라는 헐값에 닌텐도를 넘겨받은 것에 대한, 상사로서의 아주 이성적이고 관대한 보상 체계일 뿐이다. 나 강태준은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하고, 받은 만큼 돌려주는 프로니까.'

그는 스스로의 완벽한 논리에 깊이 취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어제 동공 지진을 일으키던 저 맹한 얼굴의 루다 대리에게 마음이 약해져서가 아니었다.

물론, 어젯밤 소파에 기대 컨트롤러를 쥐면서도 그녀의 억울한 얼굴이 자꾸 화면 위로 오버랩됐다는 사실은 자기 합리화의 영역 밖이었지만, 그 부분은 오늘 하루가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힐 오류일 뿐이었다. 반드시.

태준은 팀원들의 경악 어린 시선을 무시한 채, 애써 태연하게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이 대리."

"네, 넵!"

"앞으로 제 조카 계정과 연락할 일이 생기거든, 사적인 대화는 자제하시죠. 특히 상사 뒷담화 같은 건 더더욱."

그의 입가에 아주 찰나, 조소인지 미소인지 모를 묘한 호가 그려졌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루다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씨. 본건가...? 근데 왜 불같이 화를 안 내는 거지? 심지어 기획안도 한 번에 통과시켜주고. 희망 고문을 하다가 나를 더 비참하게 말려 죽이려는 고도의 심리전인가? 아니야 봤으면 이대로 넘어 갔을리가 없어.'

"가서 업무 보시죠."

태준이 다시 차가운 얼굴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루다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도망치듯 제 자리로 돌아왔다. 의자에 주저앉은 순간, 책상 위 스마트폰에서 짤막한 진동이 울렸다.

[햇살강쥐 : 루다공주 님! 닌텐도 밤새 해봤는데 진짜 최고예요! 오늘 하루도 파이팅하세요!]

[햇살강쥐 : 삼촌이 괴롭히면 저한테 다 이르시고요! ^_^]

"어머, 세상에……."

천사 같은 햇살강쥐님의 다정한 응원에 루다의 입가에 절로 몽글몽글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따뜻한 온기에 홀린 듯 고개를 들어 팀장석 쪽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서슬 퍼렇던 태준의 듬직한 뒷모습이 보였다. 평소라면 모니터가 뚫어져라 업무에 집중하고 있어야 할 태준이, 웬일인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무릎 근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책상 밑으로 뭔가를 숨긴 채 비밀스럽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실루엣. 그 모습이 마치 몰래 간식을 까먹는 초등학생 같기도, 혹은 소중한 사람에게 답장을 보내는 소년 같기도 했다.

'설마...?'

루다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상념을 털어냈다.

'아니지,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 그럴 리가 없지.'

루다는 화면 속 조카의 다정한 메시지와, 불과 3미터 앞 팀장석에 앉아 있는 서늘하고 쪼잔한 악마 삼촌을 번갈아 보며 깊고 아득한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저 집안은 유전자가 어떻게 되어먹은 걸까.

루다는 조용히 한 번 더 채팅창을 내려다보았다. '삼촌이 괴롭히면 저한테 다 이르시고요.' 그 짧은 문장이 왜인지 오전 내내 찌뿌둥했던 마음 한구석을 살며시 건드렸다. 당근 앱 속의 햇살강쥐는 여전히 따뜻한 봄볕 같은 사람이었다.

창문 너머로 3월의 흐린 하늘이 보였다. 꽃샘추위가 물러가고 진짜 봄이 오려면 아직 며칠이 더 걸릴 것 같았다.

루다의 위태롭고 기묘한 이중생활은 이제 막, 돌이킬 수 없는 험난한 강을 건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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