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조경순의 이야기가 나오자 서지혁의 말투에도 장난기 어린 웃음이 섞였다.“그 사람도 하병우 씨랑 마찬가지야. 요즘 아주 살맛 나게 지내고 계시더라고.”조경순이 하병우에게 품었던 감정이 한때나마 진심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명확한 사실은 새로 나타난 젊은 남자가 하병우에게 입은 해묵은 상처 따위는 깨끗이 잊게 할 만큼 압도적인 자극이었다는 점이다.아마 조경순 스스로도 깨달았을 것이다. 하병우의 그 못된 버릇을 고쳐서 억지로 재결합해 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며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게다가 하병우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인간이라 평생 의심하고 감시하며 사느니 차라리 각자 갈 길 가는 게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녀에게는 하민지가 있으니 앞날이 크게 걱정될 것도 없었다.생각을 고쳐먹자마자 그녀의 상태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얼굴의 상처는 화장으로 가려질 만큼 회복되었고 머리도 새로 하고 염색까지 마쳤다. 옷차림 역시 훨씬 젊고 세련된 스타일로 바뀌었다.딸인 하민지와 같이 살다 보니 연하남을 집에 들이기는 껄끄러웠던지 밖으로 집을 따로 한 채 얻어주기까지 했다.이제 연하남은 더 이상 단순한 소년이 아니었다. 조경순에게 있어서만큼은 제법 구실을 갖춘 남자가 된 그는 찻집 일까지 그만두고 오로지 그녀를 보필하는 데만 전념했다.그 남자는 나이가 어려도 생각보다 영악했고 계산기 두드리는 속도도 빨랐다. 조경순에게 기생하며 산다는 사실에 대해 처음에는 꽤나 거부감을 드러내며 자존심을 세우기도 했다. 사지 육신 멀쩡한데 왜 남의 돈을 쓰냐며, 찻집 일이 마음에 안 들면 좀 더 번듯한 직장을 구해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실제로 그는 새 직장을 찾아 나섰고 하루는 조경순이 퇴근 시간에 맞춰 그를 데리러 간 적이 있었다.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차를 세워두고 기다리던 찰나, 조경순의 눈에 그 남자가 동료 여직원과 함께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들어왔다.두 사람이 대놓고 웃고 떠드는 건 아니었지만 분위기만큼은
서지혁은 오늘 회사를 가지 않고, 대신 서정우의 주치의를 찾아갔다.검사 결과가 모두 나왔는데 이식 수술에 들어가기에 앞서 항암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서지혁은 최종적으로 확정된 치료 계획을 확인하기 위해 의사를 찾아가기로 했다.하시윤은 당연히 그 길에 동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병실 문턱까지 서지혁을 따라나섰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서정우는 가정부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상태가 많이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작고 가녀린 모습이었다.어른들이 자신의 병에 대해 의논하러 간다는 걸 눈치챘는지 서정우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겁에 질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하시윤은 마음이 약해져 발길을 돌렸다.“지혁 씨 혼자 다녀와. 어차피 의사 선생님이 하는 전문적인 얘기는 내가 들어도 잘 모르잖아. 지혁 씨가 알아서 잘 듣고 오고 난 여기서 정우랑 같이 있을게.”서지혁도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더니 짧게 대답했다.“그래, 그러자.”하시윤은 만삭의 몸이라 아이를 안아줄 수 없었다. 그래서 가정부에게 아이를 침대에 눕히게 한 뒤, 곁에 앉아 녀석을 품에 끌어안았다.서정우는 그녀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뺨을 맞대더니 작고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저 이제 주사 맞아야 해요?”하시윤이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이번에 주사만 잘 맞으면 몸속에 있는 나쁜 병균들이 거의 다 사라질 거야. 그다음에는 아주 작은 수술 하나만 하면 돼. 우리 정우 몸에 몰래 들어온 괴물을 싹 쫓아버리는 거지. 그럼 이제 우리 정우도 건강한 어린이가 될 수 있어.”“정말 나을 수 있어요?”서정우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그럼 저도 다른 친구들이랑 똑같아지는 거죠?”아이가 덧붙였다.“예전에 할머니도 주사 다 맞으면 나을 거라고 그러셨는데...”뒷말은 잇지 않았지만 하시윤은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병이 낫기는커녕 지루하게 이어지며 아이를 괴롭혀왔기 때문이다.하시윤은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엄마는 거짓말
서지혁은 고개를 끄덕여 알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려 연씨 가문과의 협력 건을 꺼냈다.연상훈이 드디어 태도를 누그러뜨렸으나 협력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다른 사람으로 교체된 상태였다. 연재윤이 다리를 놓아 이 일이 성사된 거지만 정작 그는 판에서 밀려나 버렸다.서경민 역시 이 사정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담담하게 대답했다.“연재윤이 워낙 제멋대로라지. 연상훈이 워낙 보수적인 사람이라 부자 사이가 통 안 맞는 모양이야. 아비 입장에서 버릇 좀 고쳐주겠다고 잠시 내친 모양인데 어쨌든 자식이라고 제 자리에 앉힌 걸 보면 기대를 걸긴 하겠지. 그러니 아주 포기하진 않을 거야.”하지만 서지혁의 생각은 달랐다.“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닙니다.”그가 말을 이었다.“새로 협력 프로젝트를 맡은 연성 그룹 쪽 담당자가 문제예요. 제가 알기로 그 친구, 결코 깨끗한 사람이 아니거든요.”서지혁은 소파에 몸을 기대며 하시윤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녀의 약지 끝에 걸린 반지를 부드럽게 매만지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도 느릿했다.“연재윤이 연성 그룹에서 어떤 대접을 받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제가 신경 쓰는 건 프로젝트 자체예요. 파트너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언제 뒤탈이 생길지 모른다니까요.”“오호, 그래?”서경민은 그 사실까지는 몰랐던 모양이었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그가 덧붙였다.“내 알기로 그 담당자는 연성 그룹에서 꽤 오래 일한 인재야. 정말 문제가 있다면 그쪽에서 진작 눈치를 챘겠지.”“얼마 전 연성 그룹 프로젝트팀에서 직원 하나를 잘랐는데 그게 좀 이상하더라고요. 평범한 직원이 혼자서 그 거액의 자금을 횡령하고 데이터까지 조작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뒤를 봐주는 윗선이 있다는 소리죠.”거기까지 말한 서지혁이 말을 멈췄다.“뭐, 우리랑 아주 깊이 얽힌 일은 아니니 상관없습니다. 아빠만 괜찮으시다면 계속 진행하시죠. 다만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저한테 책임을 묻지만 마십시오.”서경민이 별일 아니라는 듯 가
최씨 가문 남매가 떠난 뒤에도 하시윤의 머릿속에는 그 마지막 말이 마치 잔상처럼 남았다.사실 그녀와 서지혁이 지나온 그 험난한 세월을 생각하면 이제는 누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고 말고 할 단계를 이미 지났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그런 단순한 잣대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니까.하지만 타인의 입에서 나온 그 순수한 걱정은 굳어있던 그녀의 마음을 속절없이 녹여버렸다. 그 온기가 가슴 한구석을 다정하게 파고들었다.병실에 잠시 머물던 하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정우를 보러 갔다.아이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곁을 지키던 가정부는 그녀를 보자 얼른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하시윤 씨, 오셨어요?”하시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정우가 꽤 오래 자네요?”가정부가 대답했다.“든든히 먹여서 그런지 평소보다 좀 더 깊게 자는 것 같아요.”다행히 지금은 고통스러운 증상이 없었다. 발작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평범한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아이를 지켜보던 가정부가 덧붙였다.“조금 전에 심연정 씨가 다녀갔어요.”심연정.예상치 못한 이름은 아니었기에 하시윤은 그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가정부가 말을 이었다.“정우가 한창 자고 있을 때라 옆에서 잠시 머물다 가셨어요.”심연정이라는 인물이 딱히 곱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정부의 어조에는 묘한 감회가 섞여 있었다.“정우 선물도 사 오셨더라고요.”가정부가 옆에 놓인 물건을 가리켰다. 아이가 며칠 전부터 갖고 싶다며 입에 달고 살던 장난감이었다. 그걸 심연정이 사 올 줄은 몰랐다.하시윤은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꽤 커다란 인형이었는데 이번에는 저번처럼 흉측하지 않고 제법 귀여운 모양새였다.“심연정 씨가 참 많이 변했어요.”곁에서 지켜본 가정부가 느끼는 온도 차는 확실했다. 예전에 본가로 서정우를 보러 왔을 때의 심연정은 늘 건성으로 아이의 안부를 묻곤 했다. 사람을 대할 때도 특유의 오만함이 깔려 있었고 시선 역시 늘 차가웠다.하지만 오늘은 달랐
하시윤은 서정우가 꿈나라로 간 뒤에야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그러고는 타이밍 좋게 안으로 들어온 가정부에게 아이가 깨면 전화해달라는 제스처를 취한 후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어차피 할 일이 따로 없었기에 그녀는 30분 정도 영상을 시청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런데 자려고 눈을 감자마자 병실 문이 드르륵하고 열렸다.하시윤은 당연히 간호사일 줄 알고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이에 눈을 살짝 떠보자 바로 옆까지 다가왔던 누군가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안 잤어요?”“심연정 씨가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하시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가 입원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온 거예요?”한동안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탓인지, 하시윤은 지금 그녀가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심연정은 놀란 마음을 진정한 후 다시 옆으로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하시윤 씨 보려고 일부러 온 건 아니에요. 그냥 병원으로 왔다가 입원했다길래 잠깐 들린 것뿐이에요.”“심연정 씨 아버지는 이미 퇴원하셨잖아요. 혹시 또 입원하셨어요?”하시윤이 몸을 살짝 일으키며 물었다.심태진 얘기에 심연정의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굳었다.“아니요. 오늘은 내가 아파서 온 거예요.”심연정은 하시윤이 행여라도 오해할까 봐 이유까지 친히 설명해 주었다.“요 며칠 접대하는 일이 많아졌더니 아침에 갑자기 위가 아프더라고요. 그보다 하시윤 씨는 검사 다 받았어요? 괜찮은 거죠?”“네.”“그럼 이제 얼마 안 남았네요.”심연정이 가볍게 웃었다.“아이도 무사히 태어나고 정우 몸도 괜찮아지면 그때는 하시윤 씨의 처지가 결정이 나겠죠. 내가 없이도 서씨 가문에서 하시윤 씨를 받아줄지 한번 지켜볼게요.”“왜 당연히 그쪽에서 나를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내가 내 의지로 그 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거잖아요. 왜 나를 선택 당하는 쪽으로 보는지 솔직히 이해가 잘 안 가네요.”하시윤이 말에 심연정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코웃음을 쳤다.“지혁이
서지혁은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하시윤은 또 정원에 있었다.“할머니가 뒷목 잡고 쓰러지는 모습을 기어이 볼 생각이야?”서지혁이 다가오며 물었다.하시윤은 그 말에 미소를 짓고는 옆에 있는 꽃다발 두 개를 가리켰다.“이건 정우 거고, 이건 내 거야.”“안 힘들었어? 꽃다발이 저번보다 더 큰 것 같은데?”“괜찮아.”하시윤은 손을 쭉 뻗으며 스트레칭한 후 서지혁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가자. 짐 다 쌌어.”입원 얘기를 들은 가정부들은 임산부에게 좋은 국을 끓여 정성스럽게 통에 담았다.하시윤은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인사한 후 도시락통을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서지혁에게 성문영이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간 얘기를 꺼냈다.“친척한테 일이 조금 생겼다고 와달라고 했대.”“그런데 왜 지혁 씨 어머니한테 전화하지?”“몰라, 안 물어봤어.”서지혁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계단으로 향했다.“어디가. 짐 다 챙겼다니까? 이거 하나가 다야.”“내 거 안 챙겼을 거 아니야.”“응?”하시윤은 서지혁의 말에 눈을 깜빡이다 뒤늦게 반응했다.그녀가 입원하게 되면 서지혁은 당연히 그녀 곁에 있을 거고 그러면 그 역시 짐을 싸야만 했다.서지혁은 빠르게 이것저것 담고는 하시윤과 마찬가지로 캐리어 하나만 들고 내려왔다.잠시 후, 병원.서지혁이 미리 얘기해 둔 덕에 입원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고 하시윤은 병실에서 옷만 갈아입은 다음 곧장 서정우의 병실로 향했다.서정우는 막 약을 받아먹은 뒤 침대 머리맡에 기대 가정부가 들려주는 동화를 듣고 있다가 하시윤을 보고는 바로 입꼬리를 활짝 올렸다.“엄마!”아이는 반가운지 연신 하시윤을 향해 손을 오므렸다가 또 폈다.“엄마!”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무언가가 떠오른 듯 멈칫하며 다시 손을 거두어들였다.“엄마, 여기 앉아요.”목소리도 급 차분해졌다.하시윤은 그런 아이를 보며 가슴이 찡했다. 이건 큰 움직임 때문에 위가 자극돼 몇 번이고 토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조건 반사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