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해일은 보온병에 담은 혈청 커피를 들고, 자신의 바로 아랫집에 위치한 은재의 집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필요도 없는 몇 걸음만 내려가면 되는 거리였다.
해일은 마치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비밀 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거실 한가운데에 대자로 뻗어 있는 은재가 눈에 들어왔다.
은재는 눈을 감고 있었고 살짝 거친 숨을 쌕쌕거리고 있었다.
해일이 본 은재의 집은 딱 ‘IT 개발자’의 그것이었다. 책상 위에는 듀얼 모니터와 노트북이 켜져 있었고, 벽에는 코드가 빼곡한 화이트보드가 걸려 있었다.
온기가 없어 차갑기만 한 자신의 집과는 정 반대의 집이었다.
해일은 어지럽다고 생각하며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가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커튼은 닫혀 있었지만, 방 안에는 모니터 불빛이 새벽을 대신하고 있었다.
해일은 한숨을 쉬며 은재 옆으로 가서 발로 툭툭 차며 말을 걸었다.
“야, 하은재. 너는 인간이었으면 이미 과로로 죽었을 거다.”
은재는 대자로 누운 채 눈만 굴렸다.
“형, 왔어? 커피.... 커피 가져 왔어?”
은재는 해일을 보자마자 혈청 커피부터 찾았고, 그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응. 근데 그 꼴로 내가 정성스럽게 탄 혈청 커피를 마실 자격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이 형이.... 지금 뭐라는거야? 정성?? 하 참!! 나 오늘 열마나 열심히 버그를 쫓아 사냥했는지 알면 그런 소리는 못할걸?”
해일은 자신의 말에 일일이 반박하는 은재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혈청 커피가 담긴 보온병을 식탁 위에 내려 놓으며 머그잔을 찾았다.
“그래~~ 어련하시겠습니까~~ 어서 일어나서 이리 와! 커피 먹어!”
은재는 겨우 팔에 힘을 주어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눈 밑에는 새벽을 통째로 지새운 흔적이 고스란히 드리워져 있었다. 아까 봤을 때보다 다크서클이 한층 더 내려와 있었다.
“형... 내... 커피....”
은재는 좀비 마냥 온 몸에 힘을 빼고 휘적거리며 식탁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해일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어 버렸다.
“기다려. 지금 머그잔에 따라줄 테니까.”
그는 부엌 쪽으로 걸어가 머그잔을 꺼냈다. 보온병을 열자, 은은한 향이 공기를 가득 채웠다.
커피와 혈청이 섞인 그 묘한 냄새에 해일은 잠시 코끝을 스쳤다.
“형...... 역시 커피 향....너무 좋다.....”
은재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중얼거렸다. 해일은 변태 같이 말하는 은재를 보며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만 애써 모른척하며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은재는 해일이 건넨 커피를 받아들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단숨에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본 해일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야. 혈청 커피 팩은 식탁 위에 올려뒀으니까, 먹고 싶을 때 알아서 마셔.”
“형~ 역시 나한테 꼭 필요한 뱀파이어야! 알지?”
은재는 눈을 반짝이며, 거의 숭배하듯 해일을 올려다보았다.
“우웩! 야, 진짜 소멸되고 싶냐? 그만 좀 해!!”
해일은 얼굴을 찡그리며 도망치듯 은재의 집을 뛰쳐나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은재는 배를 잡고 대굴대굴 구르며 웃었다. 한참을 웃던 그는 다시 천장을 바라보며 대자로 누워 중얼거렸다.
“역시... 해일 형이 최고야.”
은재가 이렇게 일에 매달리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았다.
다른 뱀파이어들보다 훨씬 강한 사냥 본능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 본능을 억누르기 위해 그는 스스로를 일에 몰아넣었다. IT 개발, 코딩, 디버깅 — 집중하면 할수록 피의 충동은 잦아들었다.
그래서 은재에게 코드는 단순한 일이 아니라, 억제제였다. 다른 뱀파이어들보다 더 자주, 더 독한 혈청 커피를 마셔야 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은재가 해일 곁에 악착같이 붙어 있는 이유는 단순한 의존이 아니었다.
자신의 사냥 본능을 끝내 억누르지 못해 인간을 해치게 된다면— 뱀파이어 헌터에게 끌려가기 전에, 차라리 해일이 자신을 먼저 심판해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지율과 해일도 은재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혈청 커피가 떨어지지 않도록 늘 챙겨주었다.
특히 해일은 겉으로는 무심한 듯했지만, 언제나 은재를 주시하며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았다.
은재에게 있어서 혈청 커피는 자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생명수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하루에도 수백잔의 혈청 커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뱀파이어 정부와 인간 정부는 오래전부터 비밀리에 협약을 맺고 있었다.
살인을 저지른 인간들만 모이는 교도소에서는 항상 죄수들의 공간이 부족했고,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 한국은 이들의 처우를 놓고 고민을 하고 다년간의 회의를 거쳤다.
그래서, 인간 정부는 일반 국민들에게는 비밀로 한 채로 사형 판결을 받은 사형수들을 합법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통제 가능한 뱀파이어’를 고용했다.
은재는 그런 제안을 받은 몇 안 되는 존재 중 하나였다. 사냥 본능이 억누르기 힘들 때면 그는 그 일을 맡았다.
보통의 죄없는 인간의 피를 흘리지 않고도 본능을 해소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었으니까.
게다가 수입도 나쁘지 않았다 — 그에게는 일종의 정화 의식이자, 또 다른 사냥이었다.
은재가 사형 집행관으로 일할 때마다 그 기록은 뱀파이어 정부에 보고되어야 했다.
문제는, 그 보고서를 대신 써주는 사람이 해일이었다는 것이다.
보고서에 작성되는 것은 은재의 사냥 본능이 올라오는 주기와 다른 사형 집행관인 뱀파이어들과의 순서 등을 적었고, 은재와 해일의 싸인 인간 담당자의 서명과 뱀파이어 정부의 담당자 서명까지 받아야 끝이 났다.
보통 은재의 사냥 본능이 폭발하는 시기는 1년에 한 번 이었지만 최근에는 8개월에서 9개월의 주기로 줄어들어 해일은 계속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은재는 늘 해일에게 빚진 마음으로 살았다 — 감사와 두려움, 그리고 의존이 뒤섞인 채로....
해일이 가져다 준 혈청 커피를 마시며 은재는 잠시 눈을 감았다.
최근 사냥 본능이 꿈틀대고 있었고, 억눌러야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혈청 커피는 없었다.
그래서 급하게 해일에게 연락한 것이었는데 해일의 도움으로 다행히 꿈틀대는 본능을 누를 수 있었다.
“하..... 이제 좀 살 것 같네....”
낮 동안 은재는 오랜만에 여유로운 휴식을 취했다.
지난밤 내내 코드와 씨름한 끝에 맞이한 짧은 평화였다.
물론 해가 지면 다시 수식과 오류의 전쟁이 시작되겠지만, 그건 은재에게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 방면에서 천재라 불릴 만했으니까.
“혈청 커피도 수혈했으니 이제 진짜 쉬어도 되겠군...”
은재는 여전히 거실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한 숨을 내쉬었다.
뱀파이어들이 각자의 집에서 낮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인간들은 분주히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은재가 근무하는 IT 회사 블러드앤코드(㈜Blood & Code)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야간조인 뱀파이어들이 남겨둔 작업 기록과 보고서를 인간 직원들이 검토하며, 그 뒤를 이어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진짜 괴물인가?”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들이 밤새 처리해 놓은 버그 수정 내역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했다.
인간 직원들이 며칠을 붙잡아도 못 고치던 문제들이, 아침이 되면 언제나 깔끔히 해결되어 있었다.
“도대체 어떤 천재들만 모여있길래 이렇게 완벽한거지?”
“우리는 아무리 찾아도 못 찾는 버그들 아니었어요? 어떻게 찾는거지?”
주간 직원들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들은 못 찾는 것들은 은재를 비롯한 뱀파이어들이 짧은 시간에 버그들을 찾아 해결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회사의 큰 돈을 벌어다 주는 존재들이 야간조들이었고, 주간조들은 질투가 나도 걸고 넘어갈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짜증나는 인간들인데 깔 수가 없네...”
“대리님은 야간조 직원들 본 적 있으세요?”
“아니...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네...”
주간조 직원들은 미스터리한 그들을 생각하며 어깨를 살짝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블러드앤코드(㈜Blood & Code)의 뱀파이어 직원들의 존재는 오직 임원진들만이 알고 있는 극비사항이었다.
사무직 직원들은 그 사실을 영원히 알 수 없었다.
그들에게 ‘야간조’는 단지 미스터리한 엘리트 팀이었고, 밤마다 기적처럼 버그를 해결해내는 괴물들이었다.
지율이 사장으로 있는 카페 **루비 아워(Ruby Hour)**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강남 한복판, 오래된 다세대 주택의 골목 끝자락에 자리한 이 작은 카페는 낮에는 인간들의 세상이었다.
루비 아워의 인간 직원들은 여느 카페처럼 바쁘게 움직였다.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대에는 늘 손님들이 몰려들었고, 그 외의 시간에는 비교적 한산했다.
하지만, 그 한산한 시간에도 카페는 조용하지 않았다.
인스타그램에서 ‘감성 사진 맛집’으로 유명해진 덕분에 MZ세대들이 인증샷을 남기러 끊임없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낮의 루비 아워는, 언제나 은은한 음악과 셔터 소리로 가득했다.
루비 아워의 매니저인 이솔은 카운터 앞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커피 머신이 내뿜는 김과 주문표가 쌓이는 소리가 교차했다.
그는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환한 미소를 지었지만, 손끝은 이미 뜨거운 컵의 열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낮의 루비 아워는 언제나 그랬다 — 사람의 향기와 카페인의 열기로 끓어오르는 시간.
이솔은 처음 루비 아워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무척 만족스러웠다. 일이 한가하고, 다른 카페보다 월급도 훨씬 높았으니 그럴 만했다.
하지만 어느 날, 지율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거짓말인 줄 알고 ‘에이~ 사장님 거짓말도 참~~’이라며 어색하게 웃었었다.
하지만, 자신의 고용주인 지율이 뱀파이어임을 증명하기 위해 뾰족한 송곳니를 보여줬을 때 얼마나 기겁을 했었는지 모른다.
그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지율이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다가오는 걸음 소리에도 몸을 떨기도 했었지만 지율은 이솔이 무서워 하는 반응에도 그녀가 적응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그는 언제나 온화했고, 인간 직원들을 배려해주는 뱀파이어었다. 그 덕분에 이솔은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다만, 요즘 들어 점점 늘어나는 손님들과 쉴 틈 없는 하루가 그의 체력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오늘 퇴근할 때쯤, 이솔은 지율에게 자신의 몸 상태를 솔직히 이야기하고 며칠이라도 연차를 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뱀파이어들의 괴물 같은 체력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솔은 인간이었고 주말의 휴식은 한계가 있었기에 휴가가 필요했다.
루비 아워의 주간 마감 시간이 거의 다가오는 저녁 시간... 한 무리의 손님이 카페를 빠져나가자, 이솔은 드디어 짧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지우 씨, 나 잠깐 휴식 좀 하고 올게요. 매장 잘 보고 있어요.”
“네, 매니저님. 다녀오세요.”
지우의 대답을 듣고 이솔은 카운터를 벗어났다.
온몸이 무거웠고 다리도 무거워 제대로 걷기 힘들었지만 잠깐의 휴식을 위해 카페 한 켠에 마련 된 직원 휴게실에 들어서서 소파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어 앉았다.
이솔은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휴가 받으면... 잠깐 바다라도 보고 올까.”
이솔은 혼잣말을 하며 한 숨을 쉬었다. 요 며칠 동안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일에 집중하기 힘들어졌다.
이제 루비 아워가 마감이 되고 다른 직원들이 퇴근 하면 지율이 출근할 터였다.
지율이 출근하면 휴가를 가고 싶다고 자신의 생각을 말해야 하는데, 사장에게 당연한 요구를 하는일이 생각보다 쉬운일은 아니었기에 이솔은 차근 차근 생각을 정리하며 그에게 연차 사용에 대해 할 이야기들을 고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야근 뱀파이어 : 밤의 연인, 낮의 비밀》을 연재하고 있는 초록 개미입니다.7월부터 지금까지 3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직장 생활과 집필을 병행하며 매일 바쁘게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 잠시 숨을 고르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오랜 고민 끝에독자 여러분께 양해를 구하고 잠시 휴재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이에 《야근 뱀파이어 : 밤의 연인, 낮의 비밀》은 약 2개월간 휴재를 진행하려 합니다. 이 기간 동안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서 그동안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정리하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돌아보려 합니다. 또한 앞으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어떤 방향으로 풀어나가야 할지, 마지막까지 어떻게 이어가야 작품을 더 좋은 모습으로 완성할 수 있을지 차분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이 작품은 제가 지난해부터 오랜 시간 고민하고, 한 장면 한 장면을 여러 번 수정하며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풀어온 만큼 제게도 무척이나 애정이 깊은 작품입니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품었던 마음과 앞으로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그래서 단순히 연재를 이어가기 위해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하기보다는, 잠시 멈춰 작품을 제대로 돌아보고 남은 이야기를 더 충실하게 풀어내고 싶습니다.약 2개월 동안 충분히 재충전하고 이야기를 정리한 뒤 반드시 연재를 재개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처음부터 마음속에 그려왔던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야근 뱀파이어 : 밤의 연인, 낮의 비밀》을 꼭 완결하
회의 끝에 이지우의 처분이 결정되자 이현명은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은 없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나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이현명은 그렇게 말한 뒤 회의실을 빠져나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선황이 떠난 후 현목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고, 그곳에는 비서와 백도진이 함께 자리했다.현목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이지우, 그녀의 소멸은 결정되었으니 공식적으로 판결을 내리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좋겠군.”현목의 말에 비서와 백도진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맞습니다. 이번 기회에 모든 뱀파이어들에게도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백도진은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며 현목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그렇습니다, 폐하.”비서 역시 곧바로 의견을 보탰다.“이번 판결 자리에는 뱀파이어 기자들과 방송국 관계자들도 함께 참석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현목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음.... 맞는 말이야.”현목은 백도진과 비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그렇다면 백도진, 자네는 판결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하게.”“네. 폐하.”현목은 이번에는 비서를 바라보았다.“자네는 기자들과 방송국 관계자들을 섭외하고, 준비가 끝나는 대로 보고서를 올리도록 하게.”“알겠습니다, 폐하.”“그럼, 각자 자리로 돌아가게.”현목의 말이 떨어지자 비서와 백도진은 각자의 업무를 진행하기 위해 정중히
이현명과의 통화를 마친 현목은 자신의 앞에 긴장한 듯 서 있는 백도진을 바라보았다.자신의 사위이자 뱀파이어 죄수들을 관리하는 책임자인 백도진이었다.“선황 폐하께서 내일 궁에 들리신다고 하셨다.”현목의 무뚝뚝한 말투는 백도진을 긴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뻣뻣하게 굳은 목을 겨우 움직인 백도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네. 알겠습니다, 폐하.”뱀파이어들의 황제이자 자신의 장인어른.두 가지 위치가 겹쳐지자 백도진은 온몸에 잔뜩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현목은 그런 백도진을 가만히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자아가 사라진 이지우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보이는 것은 백도진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현목 역시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백도진은 마치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잔뜩 긴장해 있었다.조금만 더 건드리면 정말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현목은 그런 백도진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자네..... 내가 무서운가?”“.....”백도진은 순간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달싹 거리고 있었고 그 질문을 듣고 있던 뒤쪽의 비서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정말 몰라서 그러십니까?’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었지만, 황제의 앞에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백도진과 비서는 잠시 눈이 마주쳤지만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 모른 척하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보았다.살짝 시선을 내리깐 백도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하지만 곧 자신의 앞에 앉아 묵직한 아우라를 내뿜고 있는 장인이자 황제인 현목을 바라보았다.결국 솔직하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ldquo
화려한 궁이 아닌 새로운 보금자리로 거처를 옮긴 이현명은 생각보다 길어진 여행 탓에 이제야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제대로 둘러보게 되었다.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집 안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기본적인 가구들만 배치되어 있는 탓인지 집 안은 넓은 만큼이나 공허한 느낌이 강했다.이현명은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다가 한마디를 내뱉었다.“집이 넓군.”자신의 집을 처음 본 소감치고는 지극히 심플한 한마디에 지율은 결국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기본적인 가구만 배치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지율은 빈 공간을 둘러보며 말했다.“앞으로 선황 폐하께서 취향에 맞게 하나씩 꾸미시면 됩니다.”“그런가?”이현명은 다시 한번 집 안을 둘러보았다.넓은 거실과 비어 있는 공간들은 궁과 비교하면 소박하기 그지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안했다.“흠.....”이현명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그렇다면 천천히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가면 되겠군.”“네.”지율은 미소를 지었다.“선황 폐하께서 직접 꾸미신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집이 될 것 같습니다.”이현명은 그 말을 듣고 작게 웃었다.“그래.....”“그럼 저는 이만 루비 아워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지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넨 뒤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몇 걸음 옮기던 지율이 현관문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신경 써줘서 고맙네.”
오랜 시간 이어진 회의 끝에 마침내 완벽한 프로포즈를 위한 준비가 모두 마무리되었다.그리고 기다리던 날.루비 아워에서 진행된 해일의 프로포즈는 예상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해일의 진심 어린 고백과 준비된 순간들을 마주한 이솔이.... 감동의 눈물을 펑펑 쏟아낸 것이다.정작 프로포즈를 준비한 해일을 비롯해 지율과 하윤, 은재까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모두 당황하고 있었다.“이솔 씨, 괜찮아요?”해일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이솔의 눈가를 살폈다.“너무 갑작스러웠나?”해일이 조심스럽게 이솔을 다독이자, 이솔은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해일을 올려다보았다.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해일 씨, 저..... 정말 감동했어요.”이솔은 다시 한번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언제 다 준비한 거예요?”해일은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몰래 준비하느라 꽤 오래 걸렸지.”“정말.....”이솔은 감동한 듯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해일은 그런 이솔의 모습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솔 씨.”“네.”“나랑.... 오래도록 함께해 줄래요?”이번에는 이솔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해일은 이솔의 허락을 듣는 순간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아주 오랜 시간을 돌아 마침내 이솔과 이어질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그토록 바
은재가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하윤에게 조금씩 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한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그동안 은재는 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하윤에게 다가갔다.처음에는 그런 은재의 행동에 당황하던 하윤도 조금씩 긴장을 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은재와 함께 있는 시간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한편 해일은 이솔에게 완벽한 프로포즈를 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반지를 고르는 것부터 프로포즈 장소를 꾸미는 일까지 하나하나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지율과 하윤, 은재의 도움을 받았다.특히 은재는 해일의 프로포즈 준비를 돕기 위해 루비 아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리고 하윤 역시 자연스럽게 그 곁에서 함께 준비를 도왔다.은재는 하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하윤은 좀처럼 자신의 곁을 온전히 내어주지 않았다.'하... 어렵네......'은재는 답답한 듯 머리를 쓸어넘겼다.분명 자신이 먼저 다가가면 하윤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막상 자신이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시작하자 하윤은 오히려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였다.그 모습을 볼 때마다 은재는 점점 더 안달이 났다.“이유가 뭐지....?”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은재가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리자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해일이 다가왔다.“무슨 고민이야?”“하윤씨가 자꾸 나를 피하고 있어서.”은재가 답답한 표정으로 말하자 해일은 잠시 하윤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내가 경험자로서 조언하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