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아침 8시가 넘은 시간 세 뱀파이어는 각자 자신들의 집으로 흩어졌다. 같은 건물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각자 사는 집은 층이 다 달랐다.
해일은 자신의 집 현관문 앞에 서서 비밀 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집 안은 굉장히 온기가 없는 차가운 공기만 맴돌았다. 필요한 가구들만 배치가 된 거실과 먼지 한톨 보이지 않는 바닥...... 공기조차 정제된 느낌이었다.
모델하우스라기보다, 인간의 냄새가 지워진 공간에 가까웠다.
깔끔하고, 냉정하고, 어딘가 외로웠다.
“하....... 내 집이지만 온기라고는 없구만.....”
해일은 차가운 자신의 집을 둘러보며 한숨을 쉬었다.
해일이 뱀파이어가 된 것은 1665년, 현종 시대였다. 그때 그는 이제 막 서른을 넘긴 나이였다. 이미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고, 자식들은 모두 장성하여 각자의 가정을 꾸렸으며 손주까지 있었다.
조선시대의 서른이면 이미 인생의 중반을 지난 노년이었다.
그는 병에 걸려, 조용히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어딘가 어그러지고 있었다.
해일은 병상에 누운채 일어나지 못했고 몸은 점점 말라가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죽음을 기다리며 천장을 바라보며 하루 하루를 보냈지만 아내는 그렇지 못했다.
“서방님.... 제가 어떻게든 약을 구해볼게요.”
약을 구해보겠다고 하는 아내를 바라보며 해일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요....”
해일은 자신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 아내에게 자신을 보내달라는 말은 할 수 없었고, 슬픈 눈을 한 채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밝은 얼굴로 집의 문을 열고 들어와 병상에 누워있는 자신의 앞에 앉았다.
“서방님, 제가 약을 구했어요. 이 약이 아주 좋다고 합니다.”
해일은 상기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와 약을 번갈아 보았다.
“이... 콜록... 약은 어디서... 콜록... 구한거요....”
연신 나오는 기침 때문에 말을 천천히 이어가는 남편을 바라보며 아내는 잠시 슬픈 눈빛이 스쳐 지나갔지만 금방 지나쳐 해일은 그 표정을 읽어내지 못했다.
“서방님, 그것은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발.....”
해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상체를 살짝 일으켜 아내가 구해온 약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남편을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약은 생명을 주지 않고, 영원을 저주처럼 안겨주었다.
해일은 자신의 아내가 준 약을 먹은 뒤 다시 자리에 누워 천장을 멍하게 바라보다 스르륵 눈이 감기며 잠에 빠져 들었다.
그날 밤, 해일은 이상한 느낌에 잠에서 깨어났다. 피가 끓고, 몸은 비정상적으로 강해졌으며, 눈앞의 세상이 낯설게 빛났다.
인간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맥박의 리듬이, 그에게는 유혹처럼 속삭였다.
그는 날뛰기 시작하는 본능에 견디지 못했다.
“왜 이러는 거지..?”
해일은 이해할 수 없는 느낌에 혼란을 느꼈고, 맥박의 뛰는 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웠고 물어뜯고 싶었다.
그러다 자신의 옆에 잠들어있는 아내가 눈에 들어왔고, 그녀의 목을 물고 싶은 본능에 눈 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고 손을 뻗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향기 속에서 피 냄새를 맡았다. 그렇게 — 그는 처음으로, 사냥을 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를 자신의 손으로 사냥한 그날 밤, 해일은 충격에 휩싸인 채 집을 뛰쳐나왔다.
그는 아무도 찾지 못할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피의 향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사냥 본능은 그의 의지를 비웃듯 끊임없이 고개를 들었다. 숨을 끊고 싶었다.
그러나 그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의 몸은 이미 죽음을 초월해 있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그의 곁에서 사람과 짐승이 하나둘 쓰러져 갔다.
그는 괴물이 되어,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재앙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해일은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한 채 방황했다.
피 냄새만 맡아도 이성을 잃었고, 스스로를 증오하며 나날을 버텼다. 그때 —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 역시 뱀파이어였다. 하지만 해일과 달리, 눈빛이 맑았다.
“누구십니까?”
해일은 물었지만 남자는 그저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남자는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존재이며, 따라야 한다는 동물적인 감각이 지배했다.
“사람을 사냥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지만 부드러웠다.
그래서, 해일은 그 남자를 따라 나섰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해일은 피 대신 다른 욕망으로 본능을 제어하는 법,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법, 그리고 ‘영원’을 견디는 법을. 세월이 흘러, 그를 스승이라 불렀던 그 존재는 지금 — 2026년 현재, 뱀파이어들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해일은 스승을 만나 많은 것을 배웠고, 신생 뱀파이어들을 찾아 다니며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내며 인간들과 융합을 거부하며 사냥을 하는 뱀파이어 범죄자들을 찾아 심판하는 심판자가 되었다.
그렇게 성장해가는 해일은, 어둠 속을 헤매던 두 젊은 뱀파이어 — 지율과 은재 —를 빛으로 이끌어내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해일은 뱀파이어 사회의 중요한 위치에 올랐다.
그는 평소에는 인간들과 함께 일하며 배달과 요식업을 운영했고, 다른 때는 사냥 본능에 굴복한 뱀파이어들을 심판하는 자로 변했다.
그 덕분에 인간 헌터들과도 협력하며, 종족의 경계를 넘어서는 독특한 삶을 살았다.
그의 존재는 이제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 균형을 지키는 삶이었다.
해일은 언제나 열정적인 뱀파이어였다.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완벽했고, 성격도 깔끔하고 예민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일 밖의 문제에는 늘 약했다. 그의 외모와 커리어에 끌려 다가오는 여자 뱀파이어나 인간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그는 거절을 잘 못했다.
결국 휘둘리거나, 곤란한 상황에 끌려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지율과 은재는 늘 한마디씩 했다.
“형, 또야? 도대채 형의 어떤 매력에 끌리는거지? 이해할 수가 없다. 진짜....”
“형은 진짜 피보다 여자가 무서운 뱀파이어야.”
해일은 그럴 때마다 귀끝까지 붉어졌다. 그는 강한 자였지만, 감정에는 언제나 약한 존재였다.
자신의 아내를 사냥했다는 죄책감이 여자들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는 행동으로 나왔던 것이다.
여자들은 남자다운 해일의 외모에 이끌렸지만 로봇 처럼 뚝딱거리는 모습에 질려 떠나기도 했던 것이다.
다른 뱀파이어들은 ‘쑥맥’이라며 놀리기도 했으며 뱀파이어 왕은 한숨만 쉴 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해일은 피곤한 듯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스마트폰 어플을 이용해 로봇청소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오늘은 먼지 한 톨도 남기지 마라.”
해일의 명령에 응답이라도 하 듯 로봇 청소기는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바로 암막 커튼 쪽으로 향했다. 창가에서 새어 들어오는 햇빛 한 줄기조차 그의 피부를 자극했다.
커튼을 완전히 닫은 뒤, 비로소 해일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좀 살겠군.”
해일의 집에는 청소를 해주기 위해 정기적으로 오는 인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인간은 자신이 정해 준 영역만 정리를 해 줄 뿐 기본적인 청소는 해일이 직접 하고 있었다.
해일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앉은 그는 바닥을 돌아다니는 로봇청소기를 무심히 바라봤다.
그 작은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에 묘하게 안도감을 느꼈다.
뱀파이어는 잠이 필요 없는 존재지만, 피로는 여전히 그를 찾아왔다. 육체가 아닌 마음의 피로였다.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쉬어야지... 오늘은 정말, 피곤하네.”
이렇게 짧은 휴식이 찾아올 때마다 해일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은 늘 같았다.
자신의 손으로 죽게 만든, 그리운 아내. 삼백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 죄책감은 한 번도 옅어진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그는 늘 자신을 혹사시키듯 일했고, 멈추지 않으려 애썼다.
뱀파이어의 왕인 이현명은 해일에게 말했다.
“그녀는 환생하며 윤회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 한마디에 해일은 뱀파이어가 된 후 환생한 아내를 찾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았다.
수세기에 걸쳐 환생한 아내를 찾아다닌 그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어떤 때는 이미 죽음을 앞은 노파의 모습이었고, 어떤 순간에는 이미 가정을 꾸린 신혼 부부의 모습이었고, 어떤 때는 남성의 모습으로 직업 군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멀리서 환생한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며 해일은 눈물을 삼켜야만 했고, 이현명은 그를 위로해 주었다.
“때가 되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말이 해일을 붙잡고 있었다 — 지금까지도. 해일은 믿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되리라. 그래서 이 집도, 그가 일하는 회사도, 모두 그녀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그녀가 머물고 웃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두고 싶었다.
그 기다림이 해일의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피도, 영원도 아닌 — 단 한 사람을 향한 그리움이 그를 살아 있게 했다.
해일이 잠시 눈을 감고 아내를 떠올렸다.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는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리움이 천천히 가슴을 파고들며, 공기마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때, 조용한 방 안에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탁자 위 액정에 떠오른 이름 — ‘은재’. 해일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구었다.
“이 자식은 내가 슬퍼할 틈도 안 주네....”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비극 같은 하루 속에서도, 누군가는 늘 그를 현실로 끌어내곤 했다.
“하은재... 왜 전화했냐?”
해일은 은재가 또 무슨 말을 할지, 반쯤 기대에 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형.... 나 혈청 커피믹스 떨어졌어. 어떡해!!!”
“이 새끼.....”
해일은 이게 무슨 급한 일이라도 된 듯 호들갑 떠는 은재의 목소리에 잠시 진지하게 죽일까 말까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너 찾아본거냐?”
“형!! 없다고!! 정말이야! 빨리!!”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는 은재의 목소리를 들으며 해일은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은재는 자신이 땅굴을 파고 들어갈 때마다 현실로 이끌어내는 존재였다.
“알았어. 일단 끊어 봐.”
해일은 전화를 끊고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로봇청소기가 ‘삐’ 소리를 내며 바닥을 지나가고 있었지만 해일은 신경쓰지 않고 냉장고 문을 열어 상단 선반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정리된 소형 혈청 팩이 손끝에 닿자 해일은 혈청 팩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 놓았다.
“해일 형! 나 커피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이건 비상사태야! 혈청 카페인 금단증상으로 나 죽으면 어떻게해??!!”
“아이고, 별소릴 다 한다.”
해일은 피식 웃으며 커피포트에 물을 채웠다. 끓어오르는 물소리와 함께, 방 안엔 묘하게 따뜻한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은재야... 형 지금 커피 끓이고 있거든? 금방 가져다줄 테니까 진정 좀 해.”
해일은 보온병 뚜껑을 열고, 뜨거운 물에 혈청 믹스를 섞었다. 끓는 물 위로 피 향과 커피 향이 묘하게 섞이며 퍼졌다.
“형~ 근데 말이야... 혹시 집에 혈청 커피 팩 남는 거 있으면 몇 개만 가져다주면 안 될까?”
해일은 멈칫하더니, 보온병을 들고 전화를 붙잡은 채 소리쳤다.
“야! 넌 돈도 많은 새끼가 형꺼를 뜯어가고 싶냐? 루비 아워 매출이 네 손에 달렸는데, 거기서 좀 가져가면 되잖아!”
“아니~ 혈청 믹스커피는 형이 타주는게 제일 맛있단 말이야~”
은재의 천연덕스러운 목소리에 해일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 자식.... 진짜 피보다 커피에 진심이네.”
그는 피식 웃으며 보온병 뚜껑을 닫았다.
“알았어, 기다려라. 이 형이 직접 배달 간다~ 대신 배달비는 너네 집에 있는 피규어 하나 내가 가져간다!”
“형....... 배달비 너무 비싼데?? 엉?? 배달비 덤탱이 씌운다고 신고하는 수 있어!!”
“신고 같은 소리하고 있네..... 끊어!!!”
은재의 절규에 해일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통화를 종료했다.
해일은 어이가 없어 신세 한탄이 절로 나왔다.
“하.... 내가 이 아니에 애를 하나 더 키우는 구나... 내팔자야...”
한숨이 섞인 말이었지만 은재에 대한 애정이 담긴 손은 정성스럽게 혈청 커피를 제조하고 있었다.
시간은 차근 차근 흘러 승계식 당일이 되었다.고위 뱀파이어들이 모이고, 현 뱀파이어 황제인 이현명이 주관하는 아주 큰 행사였다.몇 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현명이 통치해 온 한국의 뱀파이어 세계에서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다는 소식은 세계의 뱀파이어 사회에서도 큰 뉴스거리였다.그래서, 승계식이 열리는 행사장은 고위 뱀파이어들과 각국의 뱀파이어 기자들이 모여들었다.그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시현은 그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준비한 핏물이 가득 고인 스테이크를 준비했고, 현목의 부인이 운영하는 와인바에서는 최고급 와인들이 공급되었다.지율이 운영하는 루비 아워에서는 다양한 혈청 커피가 놓여있었고, 하이브리드 뱀파이어들은 행사 진행이 원활하도록 서포트 해주고 있었다.하이브리드 뱀파이어의 등장은 세계 각국의 순혈 뱀파이어들의 또다른 큰 뉴스였다.‘한국에는 순혈 뱀파이어만 있는 것이 아니었군...’‘하이브리드 뱀파이어가 존재하는 것인가?’그 사실만으로도 각국의 기자들에게는 수많은 의문이 생겨났다.자신들의 나라에도 하이브리드 뱀파이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한국의 하이브리드 뱀파이어들은 순혈 뱀파이어들과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또한 순혈 중심의 뱀파이어 사회에서 그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수많은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쏟아지고 있었다.“하윤아 우리 괜찮은거 맞지?”“긴장하지마. 우리가 처신을 잘 해야 세계에 퍼져있는 하이브리드 뱀파이어들에게 도움이 될거야.”하이브리드 뱀파이어의 곁에는 지율이 지키며 행사 진행 전반에 걸쳐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지율은 행사장 곳곳을 살피며 하이브리드 뱀파이어들에게 필요한 지시를 내리고, 진행 상황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현목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하며 충분한 행복을 느꼈다.함께 식사를 하고, 오랜만에 정원을 거닐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그렇게 가족들과 보내는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며 며칠을 보낸 뒤, 목요일 아침이 되었다.현목은 다시 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이번에는 사위인 백도진이 직접 차를 운전했다.두 사람이 함께 차에 올라타자, 조금 전까지의 편안했던 분위기와는 달리 차 안에는 묘하게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한동안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현목이 먼저 입을 열었다.“자네, 그동안 잘해왔겠지만.....”백도진이 룸미러를 통해 현목을 바라보았다.“2주 뒤면 승계식이니 앞으로는 더 바빠질 걸세.”“예. 전하. 알고 있습니다.”백도진은 앞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저도 승계식까지는 최대한 업무에 집중할 생각입니다.”“그래야지.”현목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러다 현목이 조금 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승계식이 이루어지면.... 자네 장모는 궁으로 모셔오게.”“궁으로 말씀이십니까?”백도진이 의아한 듯 되묻자 현목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궁에는 왕비궁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나.”현목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지금 폐하께서는 혼인을 하지 않으셨으니 왕비궁이 비어 있었지.”“아....”
차를 몰아 궁을 빠져나와 자신의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향하는 현목은 삐져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2주가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궁에 머물며 승계식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황위에 오르는 일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닌 만큼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았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하지만 이제는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현목은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추면서도 입가에 번진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집에 가서 부인이랑 뭐부터 할까.......”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어디에서 어떻게 데이트를 해야 잘 했다고 칭찬을 받을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부인과 함께 시현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까.아니면 오랜만에 느긋하게 루비 아워에서 혈청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까.그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옆에 붙어 있을까.생각할수록 입가의 미소가 짙어졌다.“.....아니.”현목이 피식 웃었다.“일단 얼굴부터 봐야겠지.”그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운전하다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현목은 차량을 주차장에 세운 뒤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굉장한 부촌에 자리 잡은 현목의 집은 넓은 마당을 갖추고 있었다.아내가 좋아하는 텃밭이 한쪽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각종 나무와 꽃들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궁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익숙한 풍경이었다.현목은 마당을 잠시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현목의 장난스러운 웃음에 비서는 결국 머리를 쥐어뜯었다.“전하~!! 지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비서의 절규가 집무실을 쩌렁쩌렁 울렸다.그러자 현목은 한숨을 내쉬며 비서에게 다가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그의 양손을 잡아 얌전히 아해로 내려주었다.“이봐..... 그러다가 머리카락 다 빠지겠어.”“......”비서는 멍하니 현목을 바라보았다.자신의 머리카락을 걱정하는 현목을 바라보며 ‘지금 내 머리카락을 걱정할 때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벙찐 표정으로 잠시 할 말을 잃었다.그러나 이내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전하!”팡!“지금 제 가슴이!”팡!“이렇게 답답합니다!”팡!“정말 터질 것 같다고요!!!”비서의 절규에 현목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게.”“전하 때문에 걱정하는 겁니다!!”“내가 알아서 한다고 하지 않았나.”“그 말이 제일 불안합니다!!!”비서의 절규가 다시 한번 집무실을 울렸지만 현목은 결국 웃을 수 밖에 없었다.“하하하!”반면 비서는 웃을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대체 저분을 어떻게 말려야 하지?’비서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현목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정리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인기척에 현목은 잽싸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표정을 관리했다.“똑, 똑.”“전하, 기자들 도착했습니다.”문밖에서 들려오는 비서의 목소리에 현목은 목시늉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들어오게.”입가에 감돌던 음습한 미소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는 일국의 전하다운 정갈함과 범접할 수 없는 품위만이 매끄럽게 묻어났다.문이 열리며 비서가 들어섰고, 그 뒤로 카메라와 녹음기를 든 기자들이 머뭇거리며 발을 들였다.현목은 책상 위에 정갈하게 정돈된 서류에 손을 가볍게 올려놓은 채, 안경알 너머로 들어오는 이들을 향해 완벽하게 계산된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방금 전 서류에 서명하며 감돌던 기괴한 피로감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맑고 기품 있는 얼굴이었다.“바쁜 발걸음 하느라 고생들 하였소.”현목의 기품 있는 인사에 기자들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으며 셔터를 눌러대기 바빴다.사방에서 플래시 세례가 터져 나가자, 비서가 “큼!” 하고 얕은 헛기침을 던졌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자들이 살짝 놀라며 준비된 석상에 급히 자리를 잡았다.“전하, 안녕하십니까.”“바쁘신 와중에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기자들이 저마다 깍듯이 인사를 건네자, 현목은 그 인사를 너그럽게 받아주듯 온화한 미소를 띤 채 그들의 맞은편 상석에 천천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자... 그럼 인터뷰를 시작하지.”기자는 카메라의 영상 녹
실베르는 자신 있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전하. 우선 치수부터 재야 하는데, 괜찮으시면 팔을 벌려 주시겠습니까?”현목은 잠시 실베르의 표정을 살폈다.자신감이 넘치는 저 미소는, 이미 모든 상황을 자신이 주도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의 얼굴이었다.실베르가 치수를 재겠다고 하자 비서는 조용히 장비 가방을 받아 들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방 안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현목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치수라..... 그건 필요하겠지.”실베르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가까이에서 보니 붉은 홍채가 더욱 선명했다.어딘가 남다른 기품까지 느껴졌다. 마치 상대를 하나의 작품처럼 분석하는 듯, 그의 시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였다.“전하의 체격 비율은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이상적입니다.”그는 말하며 허리에 둘러찬 줄자를 풀어냈다.“어깨선이 곧게 뻗어 있고, 옆구리와 허리의 선도 균형이 좋습니다. 과한 장식을 얹어도 흐트러지지 않을 체형입니다.”실베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좋은 소재를 사용한다면 아주.... 아름다운 실루엣이 나오겠군요.”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름답다’는 말을 내뱉자 현목은 미간을 좁혔다.“나는 과한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과함은 디자인의 의도가 정하는 것이지, 장식의 양이 정하는 게 아닙니다.”실베르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전하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지, 전하를 가리는 것이 아니죠.”줄자가 현목의 어깨 위에 얹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