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이솔은 감았던 눈을 떴다.
지율에게 할 말을 정리하느라 제대로 쉬지 못했기 때문인지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
이솔은 기지개를 켜며 소파에서 일어나 다시 매장으로 나오니 어둠이 골목 위로 내려앉기 시작하고, 밤이 시작되는 지금 건물마다 하나둘 네온사인이 켜지고, 인간들은 퇴근길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루비 아워도 마감 시간이었다. 손님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알바생들이 바쁘게 뒷정리를 시작했다.
“매니저님, 오늘도 최고 매출이에요! 이 정도면 보너스 나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한 알바생의 볼멘소리에 이솔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오늘 사장님 오시면 한번 말씀드려볼게요.”
그의 말에 알바생들은 “진짜요?” 하며 들뜬 표정을 지었다.
이솔은 인간 직원들의 들뜬 표정을 보며 웃어보였지만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직원들과 마감 청소를 하며 밤에 찾아 올 뱀파이어 손님들을 위해 최대한 인간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 환기와 탈취제를 뿌리며 돌아다녔다.
다른 인간 직원들은 그런 이솔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그들은 뱀파이어의 존재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표정이었다.
마감 청소를 마무리 한 후 이솔은 매장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런 이솔을 바라보던 알바생 한 명이 이솔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매니저님, 저희 카페 커피 냄새로 향기로운데 환기는 왜 이렇게 열심히 하세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알바생을 바라보며 이솔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음..... 비밀??”
비밀이라는 이솔의 답변에 알바생은 놀란 표정을 해보였다.
“네???? 매니저님.... 비밀이라뇨... 너무해요!!”
알바생의 투정 섞인 말투에 이솔은 웃어보였다.
“사장님께서 환기는 꼭 해달라고 부탁하셨어요. 저도 진짜 몰라요.”
이솔은 사장님의 지시가 있어서 라고 했지만 사실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믿어 줄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였고 말이다....
“자~ 자~ 이제 퇴근 시간이네요. 다들 퇴근해요.”
이솔은 주변을 환기 시키며 알바생들을 퇴근 시킨 후 매장에 남아 소울 마켓의 사장인 지율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솔 혼자 남겨진 매장은 조용했고, 커피 향 대신 약간의 세제 냄새가 은은히 감돌았다.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지율이 곧 도착할 시간이었다.
그가 도착하고 인수인계가 완료되면 인간들의 시간은 끝이나고 뱀파이어들의 시간이 시작된다.
이솔은 매출 전표와 오전 근무를 하며 원두와 테이크 아웃 잔 등 재고를 파아해 둔 종이를 정리해 카운터에 올려 놓았다.
이솔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오늘 지율에게 꼭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요즘 손님이 많이 늘어 피곤하다는 것과 그동안 사용하지 못한 연차를 사용하고 싶다는 것. 등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문 위의 작은 종이 딸랑— 하고 울렸다.
이솔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문을 보았다. 붉은 조명 아래, 지율이 들어섰고 그 뒤로 해일과 은재가 여유로운 걸음으로 뒤따랐다.
“김매니저, 오늘도 수고했어요~”
지율의 밝은 인사에 이솔도 미소를 지었다.
“사장님 오셨어요?”
이솔은 그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자 지율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어요, 김매니저.”
그때 해일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의 예민한 감각이 먼저 이상을 감지한 것이다.
“음...? 김매니저, 오늘 컨디션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요?”
지율도 그 말에 시선을 돌렸다. 그는 김매니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낮게 물었다.
“그러게... 오늘 좀 힘들었어요?”
김매니저는 잠시 숨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장님, 저 오늘 드릴 말씀 있는데 시간 괜찮으실까요?”
그 한마디에 지율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 그는 잠시 눈빛을 내리깔았다.
이솔은 루비 아워의 중심이었다 — 능력 있고 성실하며, 인간 직원 중에서도 가장 신뢰할 만한 인물.
지율은 이솔이 진지한 표정으로 할말이 있다고 하자 순간 긴장했다. 그녀가 그만 둔다고 하면 어쩌지? 월급을 올려줘야 할까? 이솔을 어떻게 하면 붙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요. 안쪽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애써 덤덤한 척 말하는 지율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휴게실 안.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로 묘한 정적이 흘렀다. 공기는 무겁고, 커피 향은 옅었다.
“김매니저, 할 말이 뭘까요?”
지율이 조심스레 웃어보였다.
“나 지금 좀 무서운데..... 내가 생각하는 그런 무서운 그림은 안나왔으면 해요.....”
그의 말투엔 농담이 섞여 있었지만, 그 눈빛엔 진심 어린 긴장이 담겨 있었다.
이솔이 그만둔다면 — 루비 아워는 균형을 잃을 것이다. 지율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 사장님.”
이솔이 어떤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는 듯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꺼냈다.
“요즘 낮에 인간 손님들이 많이 늘었잖아요?”
지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만 해도 한산했던 카페는 이제 SNS 덕에 매일 북적이고 있었다. 인간 직원들이 힘들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월급 인상이나 보너스 지급을 고민하던 참이었다.
“그...렇죠?”
지율이 짧게 답하자, 이솔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요즘 제가 체력적으로 좀 힘든 상황이라, 연차를 좀 사용했으면 합니다. 저, 휴가가 필요해요. 사장님!!!”
마지막 문장은 거의 절규처럼 들렸다. 지율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군요. 김매니저, 그건... 아주 정당한 요청이에요.”
지율은 속으로 크게 안도했다. 다행히였다. 그가 두려워하던 “그만두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자신은 뱀파이어이기에 체력의 한계를 느낄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솔은 인간이었다.
요즘 인간들 사이에서 루비 아워가 유명해지며 낮에 일하는 인간 직원들은 몸이 10개라도 모자른 상황이었고, 이솔이 자신에게 연차를 사용하고 싶다고 하는 것도 당연했다.
자신이 먼저 이솔에게 연차에 대해 물어봐 주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에 굉장히 미안해졌다.
“그래요, 김매니저의 마음을 이해했어요.”
지율이 먼저 알아주지 못한 것에 미안한 듯 민망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뱀파이어라서, 인간인 김매니저가 체력적으로 힘들어하는 걸 미처 챙기지 못했네요. 그건 내 잘못이에요.”
그 말에 이솔의 어깨가 살짝 풀렸다. 혹시라도 자신의 말을 반려하거나, 휴가를 내는 걸 문제 삼을까 걱정했지만 지율의 태도는 늘 그렇듯 따뜻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이솔은 그가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고 연차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해 준 것에 고마움을 느꼈다. 드디어, 자신도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지율은 잠시 탁상 달력을 가져와 날짜를 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럼, 연차는.... 가만 보자.”
그는 손가락으로 날짜를 짚었다.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다음 주 월요일부터 열흘. 어때요?”
“열흘이요?”
이솔이 깜짝 놀라 크게 뜬 눈으로 지율을 바라보자 그는 활짝 웃어보였다.
“그래요. 생각해보니까 김매니저, 우리 루비 아워에서 정직원으로 근무한 지 지금 2년 정도 되었는데 그동안 연차도 제대로 못 썼잖아요. 사장인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어야 하는데 김매니저가 먼저 말을 꺼내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이솔은 지율의 사과의 말에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했지만 자신의 마음이 전달 된 것 같아 활짝 웃어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장님.”
“휴식도 일의 일부예요. 그동안 고생해 준 김매니저는 당연히 연차를 사용할 수 있고 사장인 나에게 요구하는 건 당연한 거에요. 힘들면 고민하지 말고 말해야 되요. 알았죠?”
지율은 이솔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돌아올 때는 예전보다 더 밝은 얼굴로 와요.”
이솔은 그의 친절하고 다정한 말투와 환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휴가를 즐기고 오라는 말에 안심이 되었다. 지율은 그녀에게 뒤이어 중요한 사항을 전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내일 출근하면 지우 씨에게 연차에 대해 설명해주고, 그 열흘 동안은 지우 씨가 임시로 매니저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인수인계 부탁드려요.”
“네, 사장님. 알겠습니다.”
이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지율은 생각난 듯 ‘아!!’하며 손뼉을 쳤다.
“아— 그리고 하나 더!”
그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그동안 우리 인간 직원들 정말 고생 많았잖아요. 이번 월급날 월급과 함께 보너스도 지급될 거라고 지우 씨에게도 꼭 전해주세요~”
이솔의 입가에는 정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방금 직원들이 보너스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푸념 섞인 투정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역시 사장님이세요.”
지율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대답했다.
“이건 사장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죠.”
그 말에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휴게실 문이 열리며, 지율과 이솔이 함께 나왔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아까보다 훨씬 가벼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은재가 눈을 가늘게 뜨며 툭 한마디 던졌다.
“뭐야... 분위기 왜 이렇게 좋아?”
지율이 장난스럽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 왜? 그런 썩은 동태눈으로 쳐다봐도 아무 타격 없거든?”
지율은 은재에게 다가가 이마를 쥐어박았다.
“아야!! 형!!! 썩은 동태눈깔이라니!!”
은재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투덜거렸다. 지율은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를 한 번 더 쥐어박았다.
이솔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긴장감이 완전히 풀린 듯했다.
지율은 자신의 뒤에서 쿡쿡거리며 웃고 있는 이솔을 바라보며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김매니저, 오늘 정말 수고 많았어요. 퇴근하고 내일 아침에 봐요.”
“네, 사장님! 두 분도 오늘 수고하세요~!”
이솔은 한결 가벼워진 웃음과 발걸음으로 퇴근할 준비를 하기 위해 가방을 챙겼다.
“잘 가요~”
해일과 은재도 동시에 손을 들어 인사했다. 잠시 뒤, 문 위의 작은 종이 딸랑— 하고 울리며 이솔이 카페를 나섰다. 그 뒷모습이 골목 끝으로 사라지자, 해일이 지율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지율아~ 김매니저랑 무슨 얘기 했어?”
지율은 카운터 뒤편으로 돌아가 혈청 커피 머신을 켜며 대답했다.
“요즘 주간에 우리 카페에 인간 손님들이 엄청 많이 늘어서 인간 직원들이 바빠서 쉴틈이 없었잖아. 김매니저는 유독 더 힘들었고..... 그래서 휴가에 대해서 이야기 했거든.
다음주에는 김매니저 열흘 동안 휴가 다녀 올거야.”
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렇지, 그렇지. 요즘 낮에는 진짜 미어터지더라.”
지율은 카운터 뒤로 자리를 옮겨 이솔이 정리해 놓은 자료들을 챙겨 놓고 뱀파이어 손님들을 위한 혈청들을 종류별로 정리해 놓으며 은재를 위한 혈청 라떼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 네 몫.”
은재는 신나게 웃으며 커피를 받아 들었다.
“역시 형이 타주는 혈청 커피가 제일 좋아~~!!”
그는 들뜬 표정으로 컵을 꼭 쥔 채 자신의 지정석으로 향했다.
은재에게 지율이 타주는 혈청 라떼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 중 단연 최고였다. 다른 바리스타가 타 준 커피는 거의 먹어본 적은 없었지만 자신의 입 맛에는 최고였고, 해일이 타 준 혈청 커피는 믹스로 나온 인스턴트 커피로 타주는 것 이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바로 바로 적용해주는 뱀파이어들은 지율과 해일 뿐이었다.
은재는 커피를 한 모금 천천히 음미했다. 붉은 빛의 액체가 입안에 퍼지자,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노트북을 켰다. 이제 그의 밤 근무가 시작되는 것이다.
카운터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율과 해일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지율아, 저 새끼 변태야....”
해일이 낮게 중얼거렸다. 지율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가장 열심히 일하는 변태 잖아. 안그래?”
두 뱀파이어의 한 숨 섞인 말은 은재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실베르는 자신 있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전하. 우선 치수부터 재야 하는데, 괜찮으시면 팔을 벌려 주시겠습니까?”현목은 잠시 실베르의 표정을 살폈다.자신감이 넘치는 저 미소는, 이미 모든 상황을 자신이 주도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의 얼굴이었다.실베르가 치수를 재겠다고 하자 비서는 조용히 장비 가방을 받아 들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방 안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현목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치수라..... 그건 필요하겠지.”실베르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가까이에서 보니 붉은 홍채가 더욱 선명했다.어딘가 남다른 기품까지 느껴졌다. 마치 상대를 하나의 작품처럼 분석하는 듯, 그의 시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였다.“전하의 체격 비율은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이상적입니다.”그는 말하며 허리에 둘러찬 줄자를 풀어냈다.“어깨선이 곧게 뻗어 있고, 옆구리와 허리의 선도 균형이 좋습니다. 과한 장식을 얹어도 흐트러지지 않을 체형입니다.”실베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좋은 소재를 사용한다면 아주.... 아름다운 실루엣이 나오겠군요.”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름답다’는 말을 내뱉자 현목은 미간을 좁혔다.“나는 과한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과함은 디자인의 의도가 정하는 것이지, 장식의 양이 정하는 게 아닙니다.”실베르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전하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지, 전하를 가리는 것이 아니죠.”줄자가 현목의 어깨 위에 얹혔다.
현목이 왕위 승계 서류에 도장을 찍고, 공식적으로 이현명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지정되었다.그 소식은 순식간에 뱀파이어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각종 뉴스 채널과 매체들은 ‘새로운 후계자 탄생’이라는 제목을 달고 속보를 쏟아냈고, 궁 주변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궁 앞에는 수많은 뱀파이어 기자들이 몰려들어 현목을 보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었다. “후계자님! 인터뷰 한 말씀만—!” “지금 심경이 어떠십니까?” 아우성이 끊이질 않았다.궁정 내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직원들은 쏟아지는 일정과 준비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황궁 전체가 한순간에 ‘새 국면’의 열기로 달아올랐다.정작 당사자인 현목은 밖으로 나갈 틈조차 없었다.후계자 교육, 서류 검토, 각 부서 보고까지 하루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그는 사실상 사무실에 갇힌 채 쉴 틈 없이 승계 준비에 매달리고 있었다.그때, 비서가 문을 두드리며 조심스럽게 들어왔다.“전하...! 오늘은 승계식에 입으실 의복을 맞추기 위해 의상 디자이너와 만나셔야 하고, 뱀파이어 기자단과의 공식 인터뷰도 예정되어 있습니다.”서류 더미 위에 얼굴을 묻고 있던 현목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눈 밑에는 이미 피곤이 스며 있었고,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이보게... 내 얼굴.... 어때 보이나?”현목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스케줄표를 검토하던 비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어두운 눈가, 굳은 어깨, 한숨이 밴 표정. 피곤이 얼굴 전체에 새겨져 있었지만, 감히 그 사실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비서는 억지로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멋지십
시간은 쉼 없이 흘러, 봄은 여름으로, 여름은 가을로, 가을은 다시 겨울을 지나 어느덧 또 한 번의 봄을 맞이했다.큰 사건 하나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나날들이었다. 그 고요한 시간 속에서, 크다면 크다고 할 수 있는 변화가 있었다.현목의 인간 딸과 백도진은 결혼식을 올린 뒤, 궁 안의 밀폐된 공간에서 그녀가 뱀파이어로 변하는 과정을 거쳤고 이후 신혼여행을 떠났다.한편, 그와는 다른 곳에서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지우 역시 뱀파이어로 변하며 이성을 잃고, 본능만 남은 채 죄수들의 사형 집행을 위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그 사실을, 이솔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이솔은 그저 행복한 것들만을 보고, 듣고, 느끼며 지우의 불행이 같은 시간 위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다.은재는 IT 개발자이자 사형 집행관으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 모두에 자부심을 느끼며 뱀파이어로서의 삶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었다.백도진과 현목의 딸이 결혼한 후 이솔은 지율에게 입양되어 인간이지만 정식으로 뱀파이어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그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해일과 연인이라는 것과 지율이 가장 믿는 인간이라는 것 현목의 딸도 인간이었다는 것 등의 이유가 받아들여지면서 이솔은 지율의 딸로서 앞으로의 미래를 과거 보다 자유롭게 그려갈 수 있다는 점에서 행복해 했다.하지만, 이런 따뜻하고 아무런 사건이 없는 일상은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법이었다.뱀파이어들의 궁에서 고위 관료 뱀파이어들은 갑작스러운 왕의 호출에 모여들기 시작했다.‘왕께서 무슨 일로.....’‘우리 잘못한 것 없는데.... 이보게 우리 뭐 실수한 것 있나?’‘없어.... 최근에는 아무 일도 없이 아주 안정된 날이 이어졌네.’
카페 루비 아워 지하 감옥에서 죄수 지우를 감시한 지도 어느덧 닷새째였다.그동안 해일에게서 쏟아진 온갖 잔소리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나날을 보낸 도진은, 이곳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그래서 궁에 전화를 걸어 울먹이며 하소연도 해봤지만, 돌아오는 말은 하나같이 같았다.‘이번 기회에 해일님께 제대로 배워라.’모두가 모른 척하기 바빴다.“난 왜 공무원이 된 거야.......”도진은 한숨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노트북 자판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이럴 거였으면 그냥 은재 형 따라 회사나 다닐걸......”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타자를 치고 있던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려왔다.“은재가 그렇게 좋으면, 지금이라도 공무원 때려치우지?”도진은 깜짝 놀라 거의 의자에서 튀어 오를 뻔했다.언제 다가온 건지조차 알 수 없게, 해일은 이미 그의 뒤에 서 있었다.해일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도진의 어깨 위에 팔을 얹고, 내려다보고 있었다.“아... 하, 핫.... 해일님! 아닙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잔뜩 기합이 들어간 도진의 모습은 어딘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지만, 해일은 오히려 표정을 더욱 굳혔다.그는 천천히 소파에 앉아 등을 깊게 기대고,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그래~~”해일이 느릿하게 웃었다.“당연히 열심히 해야지~!”누가 보더라도 적당히 좀 하지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해일은 거만함을 온몸으로 드러낸 채 도진을 바라보았다.“죄수 관리는 잘 하고 있지?”
해일은 오토바이를 몰아 루비 아워로 향하며 착잡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아직 이솔을 자신의 뒤에 태워 본 적도 없었는데, 죄수부터 태우게 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아휴... 내 팔자야....”지율이 이 광경을 보면 펄쩍 뛰어오를 게 분명했다. 그 생각에 한숨은 더 깊어졌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루비 아워에 도착한 해일은 기절한 지우를 안아 올려 안으로 들어서자 자신의 예상대로 지율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입을 살짝 벌린채 해일과 지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형.... 뭐야? 지우 씨가 왜 형한테 안겨 있어?”지율의 질문에 오히려 해일 쪽이 더 당황했다.“너, 그 표정 뭐야!!”해일이 버럭 소리쳤다.“난 이솔 씨밖에 없어! 이 죄수는 그냥 기절시킨 거라고!!”지율은 눈초리가 가늘어지기는 했지만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뭐... 형이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지하 감옥에 내려 놓고 와.”해일도 지금 여기서 더 설명했다가 꼬이기만 할 것 같아 일단 지우를 지하 감옥에 들여보내기 위해 루비 아워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은재도 뱀파이어 죄수들의 폭주 소식을 듣고 회사에 휴가를 낸 상황이라 루비 아워에서 대기하고 있던 참이었다.그래서, 해일에게 안겨서 들어오는 지우를 보자 헛웃음이 나오기는 했지만 일단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현목에게 전화를 걸었다.“아, 현목님. 루비 아워에 방금 해일 형이 도착했고요. 교도소에서 탈출한 여자 죄수는 일단 루비 아워 지하 감옥에 수감해 두었습니다. 궁 쪽 교도소 정리가 끝나면 오셔서 데려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잠시 후, 현목의 낮고
해일이 돌아온 후 모두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은 잠시 뒤로 미뤄둔 채, 저마다 맡은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그러나 같은 시간, 미래를 위해 서로를 위하고 마음을 나눌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이가 있었다.뱀파이어 세계의 본궁 뒤편, 죄인들을 가두는 감옥 한구석. 햇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차가운 의자 위에 지우는 멍한 눈빛으로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내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거지?’지우는 그저 지율을 좋아하는 마음에, 한 번만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 호소했을 뿐이었다.그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고, 설령 알고 있었다 한들 이렇게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 질문은 하루에도 수천 번씩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감옥은 여전히 어두웠고, 지우의 시간도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법과 죄인들의 형량을 관리하는 뱀파이어 고위 관료 백도진은 지난 두 달여 동안 지우가 감옥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를 꼼꼼히 확인해 왔다.그는 매일같이 보고서를 작성했고, 간수들에게서 지우에 대한 특이 사항은 없었는지 보고를 받은 뒤 그 내용을 다시 서류로 정리했다.“하.... 인간 여자 한 명 때문에, 내 일이 하나 더 늘었어....”백도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상사인 도윤각에게 제출할 서류들을 다시 펼쳤다.문장 하나, 수치 하나까지도 빠짐없이 훑어보며 틀린 부분은 없는지 꼼꼼하게 체크하기 시작했다.윤각의 승인을 받으면 뱀파이어 관련 사건을 다루는 인간 변호사와 판사에게도 해당 내용이 공유되어야 했다.그 탓에 백도진은 정신없이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며 보고서를 작성했고,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