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하은재의 혈청 커피에 대한 집착은 이미 ‘변태적’ 수준이었다.
그 변태적인 집착은 주변에서 보인이들로 하여금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의 것이었다.
그가 커피를 마실 때마다 느끼는 황홀한 표정에, 지율은 오늘도 혀를 내둘렀다.
왜 은재가 그렇게 혈청 커피에 집착하는지 지율은 그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그저 한숨 한 번 내쉬고 웃을 뿐이었다.
“지율아, 나 이제 일하러 가볼게~! 오늘도 수고해라~!”
“그래, 형도 수고하고.”
해일은 카운터 앞에 걸쳐 둔 팔을 때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뒤돌아섰다.
“아! 지율아! 혹시 배달 주문 들어오면 나한테 바로바로 알려줘야되~! 알았지?”
“알았어, 알았어.”
지율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은재의 혈청 커피에 대한 사랑 만큼 해일의 워커 홀릭도 혀를 내두를 정도라 지율은 ‘피식’하고 미소를 지으며 뱀파이어 손님들을 위한 카페 영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시작했다.
지율은 카페의 불빛을 밝히고 인간들을 위한 메뉴판을 뱀파이어 전용 메뉴판으로 번경하기 시작했다.
루비 아워의 조명이 천천히 붉게 빛나기 시작하면서 또 다른 밤이,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지율은 밤의 카페 루비 아워가 완전히 깨어날 준비를 마쳤음을 느꼈다.
그는 조용히 냉장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오며, 각기 다른 색의 혈청 팩들이 눈앞에 가지런히 빛났다 — 붉은색, 흑적색, 그리고 희미한 자주빛까지. 지율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혈청 팩들을 종류별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O형, AB형, RH-, 그리고 특별 제작된 ‘루비 블렌드’. 오늘 밤 어떤 손님들이 찾아올지 모르기에, 모든 비율을 정확히 맞춰야 했다.
조용한 냉장고의 윙— 하는 소음 사이로, 카페의 스피커에서는 잔잔한 재즈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지율이 혈청 팩을 종류별로 정리하고 있을 때, 카페 문 위의 종이 딸랑— 하고 울렸다.
이어 들려온 건 익숙한 목소리였다.
“사장님~! 저희 출근했습니다!!”
지율은 고개를 들고, 재료들이 정리된 공간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어서 와, 얘들아!”
그의 입가엔 자연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카페 안에는 이미 은은한 재즈가 흐르고 있었고, 붉은 조명이 벽면을 따라 퍼져나가고 있었다.
밤의 루비 아워, 뱀파이어들의 시간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손님들 오실거야. 어서 준비하자~!”
지율의 말에 알바생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누군가는 혈청 잔을 닦고, 누군가는 조명 밝기를 조절했다.
뱀파이어 알바생들은 이미 카페 구석에 자리 잡고 노트북을 펼쳐 일하고 있는 은재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뱀파이어 사회에서 꽤 유명한 존재였다.
강한 사냥 본능을 지녔지만, 그 본능을 인간을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조율한 — 이례적인 뱀파이어로 알려져 있었다.
다른 뱀파이어들은 하은재를 보며 조만간 그 사냥 본능에 굴복해 인간들을 사냥하며 타락할 것이라 욕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하은재는 그 모든 편견들을 깨버리며 일상에 잘 스며들었다.
하은재라는 존재는 피를 갈망하면서도 인간을 사랑했고, 본능과 타협하며 인간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그런 뱀파이어였다.
뱀파이어 알바생들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존경과 장난기가 섞인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는 은재를 ‘변태 천재’라 부르기도 했지만, 그 별명 속에는 묘한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밤의 카페 루비 아워는 낮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로 변했다.
짙은 어둠 속, 루비 아워를 중심으로 한 안전 구역은 뱀파이어들이 인간들과 조용히 공존하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그들은 결코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고, 대신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이 밤을 함께 살아갔다.
알바생들의 손끝이 마지막 컵을 정리하자, 문 위의 종이 딸랑— 하고 울리며 뱀파이어 손님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떤 손님은 일을 시작하기 전, 하루의 첫 혈청 커피를 주문했고, 또 어떤 이들은 은재처럼 노트북을 펼쳐 자신의 ‘밤 근무’를 시작했다.
낮의 루비 아워가 젊은 인간들이 사진을 찍고 웃는 인스타의 명소라면, 밤의 루비 아워는 뱀파이어들의 삶이자, 그들의 생명 그 자체였다.
루비 아워의 조용한 밤공기를 가르며, 은재의 스마트폰이 띠링 하고 울렸다.
화면에는 인간 동료 최도윤의 이름이 떠 있었다. 그는 은재가 속해 있는 회사, **블러드앤코드(㈜Blood & Code)**의 오전 근무자였다.
메시지 내용은 짧지만 급했다.
‘대리님, 오늘 우리 회사 게임 중 하나에서 버그가 발견돼서 문의글이 계속 올라온다고 합니다. 확인 좀 부탁해요.’오늘 우리 회사 게임 중 하나에서 버그가 발견돼서 문의글이 계속 올라온다고 합니다. 확인 좀 부탁해요.’
은재는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답장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오늘 저녁 안으로 해결해 놓을게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전송 버튼을 누른 그는 노트북을 닫고, 잠시 숨을 고르더니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언제나 그랬듯 ‘혈류 보충’이 먼저였다.
“블러드 라떼, 라지 사이즈로. 혈청 샷은... 세 펌핑.”
지갑을 꺼내며 덤덤히 말한 그는 금액을 지불했다. 알바생은 익숙한 표정으로 주문을 접수하며 웃었다.
“네, 은재 형~ 주문 받았습니다.”
은재는 팔짱을 끼며 장난스럽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 커피 한 방울, 샷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예민하게 체크 하는거 알지?”
“예~ 예~ 아무렴요~! 알다마다요!!”
뱀파이어 직원은 하루 이틀 듣는 것이 아니었기에 흘려 들었지만 그의 까다로운 입맛을 알기에 제대로 해야 했다. 옆에서 은재의 주문을 듣고 있던 지율도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은재는 언제나 그렇듯 ‘루비 아워’의 밤을 진지하게, 그리고 우스꽝스럽게 살아내는 뱀파이어였다.
알림벨을 받아 든 은재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버그를 잡아내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고, 루비 아워 카페는 뱀파이어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처음 보는 뱀파이어 3명이 들어왔다.
처음 보는 뱀파이어들의 등장에 카페 안에 있던 다른 뱀파이어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동자는 안정되어 있지 않았고, 불안정한 기운을 뿜으며 날카롭고 사냥꾼의 그것을 온 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카운터에서 그들과 정면으로 마주한 직원은 순간 긴장감으로 온 몸을 굳혔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주문하시겠어요?”
순식간에 긴장된 공기가 카페 안을 휩쓸자 루비 아워를 이용 중이던 뱀파이어들은 카운터를 주시하며 위험한 상황 발생에 대처하기 위해 준비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지율은 커피 머신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손님들을 바라봤다. 루비빛 조명 아래에서 그들의 눈동자는 짐승처럼 빛났다.
“처음 보는 손님들 이네요? 주문 하실건가요?”
은재는 작게 욕을 읖조리며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가엔 피로 대신 냉기가 서렸다.
세 명의 낯선 뱀파이어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카운터 앞에 서서 말했다.
“블러드 라떼. 혈청이 아닌 찐짜 피로.”
진짜 피로 만든 커피를 주문하는 손님을 보며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건... 메뉴에 없습니다.”
짧은 정적 뒤, 공기가 찢어질 듯 긴장감이 터졌다.
카페 안의 다른 뱀파이어 손님들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주변으로 거리를 좁히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세 명의 뱀파이어를 중심으로 공기가 묘하게 뒤틀렸다.
좀 전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그들의 눈빛은 사라지고, 대신 사냥감 앞의 짐승 같은 본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율은 커피 잔을 내려놓고 카운터 위에 손을 얹었다.
그의 미세한 움직임에 카페 안의 뱀파이어들이 잠시 멈칫했다.
루비 아워 — 이 거리를 중심으로 한 이 작은 마을은 뱀파이어 정부에서 인정 받은 안전 구역이었다. 이곳의 변하지 않는 룰은 간단하지만 무거운 것이었다.
‘인간의 피를 흘리지 않는다.’ 그 규칙이 있었기에 인간 사회도 그들의 존재를 묵인하고, 인간과 뱀파이어 서로의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 규직이기에 절대 지켜야 했는데 지금 그 규칙을 깨려하고 있었다.
지율의 시선이 세 명의 낯선 뱀파이어를 향했다.
“여긴.... 피를 흘리는 곳이 아닙니다.”
그 말에, 세 낯선 이들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
“그래? 뱀파이어라면 인간의 피를 먹어야 정상 아닌가?”
그 말에 카페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지율은 그들의 목소리 속에서 서툰 떨림을 느꼈다.
경험 없는 냄새, 아직 피의 향에 취해 있는 신생(新生)들의 기운.
‘변한 지.... 얼마 안 됐군.’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낮게 중얼거렸다. 루비 아워의 공기가 점점 붉게 변했다.
조명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동자에서 번지는 사냥 본능이 벽과 천장에 스며들고 있었다.
주문을 받던 직원들도 뒤로 물러나 눈동자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있는 모든 뱀파이어들은 평화적인 존재들로 절대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
당당하게 루비 아워에 들어와 실제 인간의 피를 요구하는 이 신생 뱀파이어들은 자신들을 향한 적대적인 분위기와 날카로운 공기로 인해 몸을 떨었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지율은 자신들을 무서워 하면서도 물러나지 않는 그들을 보며 경고했다.
“이곳은 안전 구역입니다. 인간의 희생 없이 피를 공급하는 곳이니 그냥 돌아가 주시길 부탁 합니다.”
그러나 세 명 중 하나가 낮게 웃었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 믿나?”
지율의 이마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지금 루비 아워에 있는 단골 뱀파이어들은 짧게는 50년에서 길게는 300년이라는 세월을 규칙과 질서를 지키며 살아왔고, 뱀파이어 사회에서 많은 경험을 쌓아 온 이들이었다.
이들이 신생 뱀파이어를 향해 뿜어내는 적대적인 기운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일텐데 이들은 그 기운을 버티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해일이 필요했다.
그라면 단 한마디로 이 광기를 눌러버릴 수 있었다.
마치 그 생각을 읽은 듯, 카페 문 위의 작은 종이 딸랑— 하고 울렸다.
붉은 조명 아래, 항공 점퍼를 걸친 해일이 헬멧을 손에 든 채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율아. 나 늦었냐?”
지율은 안심한 듯 짧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 딱 좋을 때 왔네.”
해일이 천천히 그들 앞으로 걸어갔다. 발걸음은 조용했지만, 한 걸음마다 공기가 진동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단순한 위압감이 아니었다 —
수백 년을 피로 살아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심판자의 기류’**였다.
신생 뱀파이어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심판자의 위압감 넘치는 그 기운은 저절로 숨이 턱 막히는 것이었다.
이 존재 앞에서는 숨을 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다는 것을 느끼며 신생 뱀파이어들은 긴강감에 몸을 굳히며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려 해일을 바라보았다.
해일은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 헬멧을 카운터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미소 지을 때마다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했다.
“신생이군.”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묘하게 울렸다.
지우는 순간 뒷걸음질을 했다.지율의 단호한 행동과 무서운 표정이 그녀를 더 얼어붙게 만들기 충분했기 때문이었다.무서움 때문이었는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 앉은 지우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고, 서러움에 더 어깨를 들썩이며 얼굴을 숙이는 그녀를 지율은 무표정하게 내려다 볼 뿐이었다.지율은 그동안 뱀파이어들의 정체가 인간 사회에 들어나지 않도록 노력 해왔고, 자칫 자신들의 정체가 들어나는 순간 오랜 시간 쌓아 올린 모든 균형이 무너질 수 있었다.그래서 그는 가능한 한 인간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피하며 살아왔다.루비 아워에서 마주하는 인간들 역시 직원들이거나, 뱀파이어의 존재를 알고 있는 극히 제한된 이들뿐이었다.그런데 지우가 그 깨져서는 안 되는 불가침의 선을 넘었다.지우가 자신의 정체를 몰랐다는 사실은 변명이 되지 않았다.그녀는 상처받은 감정 하나에 휘둘려 익명 게시판에 지율의 이름을 언급했고, 그의 거절을 이유로 루비 아워의 이름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지율은 숨을 길게 들이켰다.“지우씨.”지율은 낮게 숨을 고르며 그녀의 어깨에 시선을 떨구었다.“얼굴 들어서.... 날 봐요. 내가 진짜 인간처럼 보이나요?”그의 목소리가 떨어지는 순간, 지율의 눈동자가 천천히 변했다.평소에는 따뜻한 갈색을 띠던 눈빛이 피처럼 붉게 번져 올라갔고, 얇게 감춰져 있던 송곳니가 길고 뾰족하게 모습을 드러냈다.지우는 숨이 넘어갈 듯 울고 있던 것을 멈추고 지율의 부름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그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순간— 그녀의 다리가 풀리듯 힘이 빠지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입술은 파랗게 떨리고, 숨은 끊어질 듯 가쁘게 들이켜졌다.“하... 하아... 하.... 저...
지우는 방 밖에서 들리는 웅성 거림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가 보았다.“엄마, 누구야?”등 뒤에서 들리는 딸의 목소리에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지우야! 방에 들어가 있어! 나오지말고 얌전히 기다려!”복도에서는 인터폰을 타고 들리는 모녀의 대화 소리에 요원들은 경고를 하기 시작했다.“어머니! 숨긴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저희 요구를 계속 거부하는 경우 문을 강제 개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지우는 놀란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엄마, 뭐야? 뭔데!!!”그 순간, 현관문 스마트키가 부서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아!!! 열게요!! 열게요!!”지우의 어머니는 공포에 휩싸여 손이 떨리며, 정신을 다잡으려 하다가 결국 현관문을 급히 열었다.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정부 요원들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검은 정장과 군복 차림의 요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배치되어, 지우의 앞을 가로막았다.“이지우 씨 되시죠?”“네... 그..런데요?”지우는 겁을 먹은 눈빛과 떨리는 목소리고 답을 하자 상대 남자는 날카로운 눈을 더 치켜 떴다.“저희는 정부에서 나왔습니다. 잠깐 저희와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지우는 순간 얼어붙었다.자신 앞에 서서 신분증을 내밀며 ‘동행’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마주한 지우는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머릿속이 새하얘졌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잠.... 잠깐요. 무슨... 무슨 일인데요?”
지우가 루비 아워를 그만둔 지 일주일이 지났다.아무리 머릿속을 뒤집어도 자신이 지율에게 들었던 이야기들과 그로 인해 일자리를 잃었다는 것, 그 근본적인 이유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그리고, 이솔에게 느꼈던 질투심, 그리고 지율에게 자신의 마음이 거절당했다는 절망감이 한데 뒤엉켜 버린 탓이었다.그 감정들이 조금씩 부패하듯 마음속 깊이 스며들면서, 지우는 더 이상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루비 아워를 떠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그날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어디에도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 속앓이만 계속하던 지우는, 결국 자신이 주로 눈팅만 하던 익명 게시판을 떠올렸다.그곳이라면, 얼굴도 이름도 드러내지 않은 채 마음속 깊이 쌓인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익명이라는 그림자 뒤에 숨으면 누군가에게 위로 한마디쯤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결국 결심했다. 자신이 겪은 일을 익명으로 털어놓기로. 그러나 그 선택이, 지우에게 있어 최악의 한 수가 될지는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지우는 익명 게시판의 작성 칸을 열어놓고 잠시 손가락을 멈춘 채 숨을 골랐다.하지만 한 번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쏟아져 나왔다.그는 **‘루비 아워’**라는 상호명과 지율의 실명을 적어 넣으며, 자신이 겪었다고 믿는 일들을 하나하나 풀어놓기 시작했다.지율에게 느꼈던 그리움, 사랑 고백이 거절되던 순간의 절망감, 그리고 이솔에 대한 복잡한 질투까지.... 마치 누군가에게라도 꼭 알아주길 바라는 듯, 지우는 기억 속 감정들을 빠짐없이 글로 적었다.“내가 사장님만 바라보면서 루비 아워에 쏟은 정성이 얼만데....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지우는 이성적인 판단을 전혀 할 수 없
지우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지율이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해일과 은재는 그를 위로하며 고생하고 있는 그 시간..... 이솔은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었다.이솔은 버스 창문에 머리를 살짝 기대며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햇빛은 유리에 부딪혀 눈부신 반짝임을 만들고, 도심은 점점 멀어지며 산과 들이 펼쳐지고 있었다.“또 여행을 가도 되는 걸까....”그녀는 잠시 고민했지만, 곧 작은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돌아가면 더 열심히 하면 되지.”지난 휴가 때 우연히 보았던 강릉의 바다는 아직도 선명했다.거센 파도 대신 잔잔하고, 바람도 부드러워 마음을 편하게 해주던 그 순간. 그 기억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다시 찾아갈 이유가 있었다.이번 여행을 다녀오면 해일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훨씬 선명해질 거라 믿으며, 이솔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환하게 웃었다.강릉 터미널에 도착한 이솔은 바로 택시를 타고 바로 바다로 향했다.그동안 고민으로 답답했던 마음은 바다를 보면 해결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이솔은 강릉의 바다를 보며 자신의 모든 고민들을 깊은 바다 속으로 던져버린 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자고 마음 먹었다.루비 아워에서 근무를 시작 후 몇 년동안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여행을 해본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해보며 해일에 대한 생각도 해보았다.루비 아워로 돌아가면 자신은 해일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예전의 무심한 눈빛으로 그를 보는 것이 가능할까.... 고민을 해보았다.해일이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은, 강릉으로 오기 직전에서야 비로소 또렷하게 깨달았다.그가 보내온 작은 신호들, 가까워지려는 눈빛과 말투... 뒤늦게 떠올려보니 모두 의미가 있었다.그리고 이솔은
지우는 잠시 말을 잃었다. 사무실 안의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심장만이 요동쳤다.‘출근을 하지 말라니?’순간 머릿 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끼며 지율을 바라보았다.“사장님....?” 목소리가 떨렸지만, 끝내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지율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시선을 돌렸다.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그 냉정함이 지우의 마음을 더 깊이 찔렀다.지우는 입을 달싹거렸지만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는 지율을 보니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말씀드린 대로 오늘 퇴근하세요. 그리고... 다시 출근할 일은 없을 겁니다.”지우는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처를 껴안은 채, 단호하게 자신을 밀어내는 지율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강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사장님... 오늘은 정말 죄송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그녀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직원 휴게실로 들어가 자신의 사물함을 열어 가방을 챙겨 나왔다.지율에게는 목례만 한 채, 무겁게 발걸음을 옮겨 루비 아워를 나섰다.밖으로 나오자마자 지우는 코너를 돌아 골목길로 접어들었다.마음속 울분과 상실감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며 눈물이 쏟아졌다. 발걸음도 채 가뿐히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무거웠고, 결국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지율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비 아워 매니저 자리가 앞으로 2주 동안 비게 된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할지 빠르게 판단해야 했다.마음속으로는 복잡한 감정이 일렁였지만, 일단 현실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루비 아워 문이 열리고 인간 직원들이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했다.평소와 달리 김매니저가 아닌 지율이 있는 모습을 보고, 직원들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지우는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루비 아워 문을 밀었다.차가운 아침 공기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매장 안에서,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며 지난 밤 정리해둔 생각들을 다시 떠올렸다. 어제 내내, 마음 한편이 뒤죽박죽이었다.짜증, 섭섭함,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조금의 질투까지.하지만 감정만을 앞세워 말을 꺼내면, 오히려 더 어린 티만 날 것 같았다.정확하게. 침착하게. 버벅거리지 말고. 지우는 스스로에게 여러 번 되뇌었다.지율 앞에 서면 늘 마음이 괜히 조급해지고 목소리도 이상하게 높아졌지만, 오늘만큼은 그러면 안 됐다.그는 사장이고, 자신은 직원이다. 그리고 자신의 불만과 감정은 분명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문제였다.지우는 직원 휴게실 안 자신의 사물함 앞에 서서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좋아.... 오늘은 꼭 제대로 말하자.’루비 아워 매장 한켠에는 지율이 늘 그랬듯, 퇴근 전 매니저에게 꼼꼼히 인수인계를 정리해 둔 서류들이 놓여 있었다.지우는 직원 휴게실 문 밖으로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살폈다.심장이 괜히 조금 빨리 뛰었다.오늘은 꼭 말해야 해. 흔들리지 말자. 문을 밀고 나간 순간, 지율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지우 씨, 인수인계해야 하니까 이쪽으로 와요.”그 목소리는 따뜻했고, 말끝은 다정하게 내려앉았다.딱 그 한마디에 지우는 숨이 잠깐 멎은 것 같았다.가슴이 간질거리고, 눈길을 피하고 싶을 만큼 떨렸다.하지만—오늘만큼은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됐다. 지우는 황홀함에 휘말릴 뻔한 자신을 다잡으며 머릿속의 생각을 다시 정리했다.그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