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전문대를 졸업하고 운 좋게 대기업 SG그룹에 입사한 김주임. 하지만 기대했던 회사생활은 군대식 문화, 끝없는 야근, 사내정치와 반복되는 진급 누락으로 얼룩졌다. 주식은 몇 년째 물려 있고, 정신없이 회사만 다니다 보니 어느새 결혼도 하지 못한 채 13년이 흘러버렸다. 어느 날, 술에 취해 횡단보도를 건너던 김주임은 달려오는 트럭과 부딪히고 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순간— 그는 13년 전, 모든 것이 시작된 입사 첫날로 돌아와 있었다. 회사의 미래도, 사람들의 속내도, 앞으로 벌어질 사건도 알고 있는 두 번째 인생. 13년 동안 잃어버린 인생을 되찾기 위한 직장인의 두 번째 회사생활이 시작된다.
Ver más1화. 13년차 주임
내 이름은 김기리. 오늘도 출근한다. 그리고 나는— 대기업 SG그룹에 다니는 13년 차 직장인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꽤 괜찮은 인생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대기업. 13년 근속. 나름대로 안정적인 직장. 그런데 하나만 더 붙여보자. 13년 차 주임. ……. 그래. 주임이다. “13년인데 아직도 주임이냐고?” 나도 안다. 그러니까 제발 묻지 마라. 나도 그게 제일 궁금하니까. 오전 7시 18분. 현관문을 열자 차가운 아침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하…….” 자동으로 한숨이 나온다. 정말. 1진짜. 정말로. 출근하기 싫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자취방과 회사가 가깝다는 것. 차를 탈 필요도 없다. 걸어서 10분. 물론 출근하기 싫은 사람에게 회사가 가깝다는 게 정말 장점인지는 모르겠다. 멀면 핑계라도 댈 텐데.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회사까지 터벅터벅 걸었다. 저 멀리 SG그룹 건물이 보였다. 13년 전 처음 저 건물을 봤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운 좋게 들어온 대기업. 부모님도 좋아하셨다. 친구들도 부러워했다. 나 역시 그랬다. ‘열심히 해야지.’ ‘여기서 인정받고 올라가야지.’ 그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13년이 지난 지금. 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집에 가고 싶다.’ 출근도 안 했는데 벌써 퇴근하고 싶었다. “안녕하십니까.”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습관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2“팀장님, 안녕하십니까.” 장성호 팀장이 안경 너머로 나를 힐끗 바라봤다. “어, 김주임.” 그리고 출근한 지 정확히 3분 만에 내 하루가 시작됐다. “어제 그 업무 규정하고 관련 자료 다 들고 와봐.” “네?” “그리고 어제 보고한 개선안 말이야.” 장 팀장이 서류를 책상에 탁 내려놓았다. “해결방안이 이것밖에 안 돼?” “아, 그 부분은 관련 부서하고 협의해서—” “협의?” 장 팀장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아. 왔다. “협의해서 언제 할 건데?” “오늘 오전 중으로 다시—” “홍파트장!”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옆자리에서 일하던 홍민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팀장님.” “같이 와봐.” “네.” 나는 자료를 들고 팀장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내 뒤로 홍민수가 따라왔다. 홍민수. 3내 맞후임. 나보다 회사에 정확히 1년 늦게 들어왔다. 지금 직급은? 파트장. 나는? 주임. 물론 홍민수가 나보다 나이는 세 살 많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내가 입사했을 때만 해도 녀석은 내 후임이었다. “김 선배님, 이것 좀 여쭤봐도 됩니까?” 하면서 따라다니던 놈이었다. 지금은 내가 녀석 앞에서 팀장에게 깨지고 있었다. “홍파트장, 자네가 보기에는 이게 보고가 된 것 같아?” 홍민수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보완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장 팀장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봐봐. 파트장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 “김주임.” “네.” “13년 했으면 이제 시키는 것만 하지 말고 생각을 해야지. 생각을.” 또 시작이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알겠습니다.” 4“오늘 안에 다시 해와.” “네.” “나가봐.” 자리로 돌아오는 길. 홍민수가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왔다. “선배님, 제가 자료 좀 같이 봐드릴까요?” “아냐.” “그래도—” “괜찮아.” 나는 웃었다. “내가 13년 차인데 그 정도는 해야지.” 농담처럼 말했다. 하지만 웃기지는 않았다. 꼬이고. 또 꼬였다. 내 회사생활은 딱 그 말로 설명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회사에서 승진을 못하면 본인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나도 완벽한 직원은 아니다. 성격이 유순하지도 않았고, 부당한 일을 보면 참지 못하는 편이었다. 말도 가끔 직선적으로 했다. 그런데 말이다. 밤 12시까지 일한 날이 몇 번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5주말에 갑자기 전화가 와서 출근한 적도 수없이 많았다. 문제가 터지면 현장으로 뛰어갔고. 담당자가 없으면 내가 대신 처리했다. 후배들 사고 친 것도 뒤에서 수습했다. 그렇게 버틴 세월이 13년이었다. 그런데. 동기들은 하나둘 대리를 달았다. 몇 명은 과장이 됐다. 후배들도 나를 추월했다. 나는 계속 누락됐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세는 것도 그만뒀다. 이제 사람들은 내 앞에서 진급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그게 더 비참하다. “수이 씨.” “네, 주임님.” “이거 전표처리 좀 부탁해요.” 나는 서류를 내밀었다. “네. 확인하고 처리할게요.” “감사합니다.” “주임님, 커피 드시러 가세요?” “네. 안 마시면 죽을 것 같아서.” 6수이가 웃었다. “아침부터 팀장님한테 또 불려가시던데요.” “봤어요?” “사무실 전체가 들었는데요?” “……역시 우리 팀장님 발성이 좋아.” “풉.” 나도 피식 웃었다. 이런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다. 커피를 뽑아 휴게실로 가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재훈 주임. 나와 친하게 지내는 후배다. 그리고 올해 진급에서 한 번 누락된 인간. 나는 녀석 앞에 앉았다. “이주임.” “네, 선배님.” “오늘 한잔 고?” 재훈이 나를 바라봤다. “갑자기요?” “누락 모임.” “아, 선배.” 재훈이 질색했다. “뭔 누락 모임입니까.” “왜. 회원 자격 있잖아.” “저는 한 번이고 선배님은…….” 녀석이 말을 멈췄다. 7“왜?” “아닙니다.” “끝까지 말해봐.” “목숨은 하나입니다.” “이 새끼가.”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그래. 이런 게 그나마 회사생활의 낙이었다. 재훈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도 선배님 내년에는 되실 겁니다.” “대리?” “그럼요.” “야.”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나 이제 대리 달아도 마흔이야.” “마흔 전에 달면 되죠.” “그게 위로냐?” “오늘 제가 술 사겠습니다.” “오?” “삼겹살 어떻습니까?” “역시 네가 내 후배 중 최고다.” “대신 1차만요.” “콜.” 그때였다. 지잉— 8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보니 홍민수 파트장이었다. “응, 홍파트장.” 아, 선배님. “응.” 오늘 저녁에 팀장님하고 파트원들 회식하기로 했는데 시간 괜찮으시죠? “오늘?” 나는 재훈을 쳐다봤다. 녀석이 불길한 표정을 지었다. “아…… 선약이 있긴 한데.” 잠시 침묵. 그러자 홍민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배님. 그래도 이런 때 팀장님한테 점수 좀 따셔야죠. “…….” 내년 진급도 있으시고. 참. 맞는 말이다. 기분 나쁘게 맞는 말. “그래.” 나는 한숨을 삼켰다. “참석할게.”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장소 보내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재훈이 나를 보며 웃었다. “삼겹살 취소입니까?” “파트 회식이래.” • • • • • 9“팀장님도?” “온단다.” 재훈이 장난스럽게 경례했다. “선배님, 오늘 점수 좀 제대로 따십쇼.” “뭘 따.” “관리팀 파트장 얼른 되셔야죠.” 나는 웃었다. “내가 이제 와서 무슨 파트장이냐.” “왜 못 합니까?” “됐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먹자.” “넵. 살아서 돌아오십쇼.” “그래.” 오늘은 정말. 점수 좀 따볼까. “팀장님, 제가 굽겠습니다.” 저녁 7시. 회사 근처 삼겹살집. 나는 집게를 들었다. 치이익— 불판 위에서 삼겹살이 익어갔다. “어, 그래.” 장 팀장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10“김주임 고생 많네.” 고생 많네. 회사에서 13년 동안 들었던 말 중 가장 허무한 말이다. 고생은 많이 했는데 남은 건 없었으니까. 그래도 웃었다. “아닙니다, 팀장님.” 오늘은 참자. 점수 따는 날이다. ‘웃어라, 김기리.’ ‘오늘 하루만 인간 김기리를 내려놓자.’ 장 팀장이 홍민수를 바라봤다. “홍파트장.” “네, 팀장님.” “요즘 파트원들 애로사항 없나?” “인력이 조금 부족합니다.” 홍민수가 대답했다. “최근 업무량도 늘었고 휴가자 생기면 대응이 빠듯합니다.” “그래?” “네. 인력 한 명 정도 보충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럼 업무하고 인원 현황 정리해서 보고 한번 해봐.” “알겠습니다.” 장 팀장이 술잔을 들었다. “그래도 다들 고생 많습니다.” “팀장님도 고생 많으십니다.” “한잔합시다.” 11짠— 잔이 부딪혔다. 한 잔. 두 잔. 세 잔. 분위기는 조금씩 풀렸다. 술이 들어가자 장 팀장도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다. 그러다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김주임.” “네.” “자네는 결혼 안 하나?” ……왔다. 대한민국 미혼 직장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질문. “아직입니다.” “나이가 이제 몇이지?” “서른아홉입니다.” “서른아홉?” 장 팀장이 눈을 크게 떴다. “빨리 해야겠네. 여자친구는?” “없습니다.” “집은 샀고?” “아직…….” “주식 같은 건 하지 말고 돈 모아서 집부터 사야지.” ……. 나는 삼겹살을 뒤집었다. 12‘제발.’ ‘그런 것 좀 묻지 마라.’ 공교롭게도 나는 주식도 했다. 그리고 아주 제대로 물려 있었다. 내가 산 뒤 귀신같이 떨어진 종목. 처음엔 금방 반등할 줄 알았다. 조금 떨어지면 물을 탔다. 또 떨어지면 또 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자산 대부분이 들어가 있었다. 주식은 물리고. 집은 없고. 결혼도 못 했고. 회사에서는 13년 차 주임. 갑자기 삼겹살이 목에 걸릴 것 같았다. 그때 홍민수가 웃으며 말했다. “팀장님.” “응?” “우리 김주임님 내년에는 대리 진급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순간. 내 손이 멈췄다. ‘야.’ ‘굳이 그걸 여기서.’ 장 팀장이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 13가볍게 웃었다. “일 잘하고 하면 알아서 되지 않겠나.” “…….” “여태까지 좀 부족한 게 있었으니까 잘 안 된 거겠지.”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졌다. “앞으로 잘 노력해봐.” 노력. 노오력. 13년. 그 한마디에 내 13년이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팀장님.” “응?” “제가…….” 참자. 오늘은 점수 따러 왔다. 참아야 한다. 그런데 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13년 동안 참아온 것 때문이었을까.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제가 못한 게 뭡니까?” 주변이 조용해졌다. 홍민수가 나를 바라봤다. 장 팀장의 표정이 굳었다. “뭐?” 14“아니.” 나는 애써 웃었다. “팀장님 말씀처럼 부족한 게 있었다고 하셔서요.” “…….” “제가 뭘 그렇게 못했는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장 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허.” 그가 몸을 뒤로 젖혔다. “이 자식 또 버릇 나오네.” “팀장님.” “또 버럭하는 거야?” “제가 버럭하는 게 아니라—” “또 덤벼보자는 거야?”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런 말씀이 아니잖습니까.” “그럼 뭔데?” “저도…….” 목소리가 떨렸다. “저도 할 만큼 했습니다.” 13년 동안 삼켰던 말이었다. “밤이고 주말이고 일했습니다.” “그래서?” “문제 터지면 제가 다 갔고, 다른 사람 일까지 받아서 했습니다.” 장 팀장이 코웃음을 쳤다. “자네는 그거만 해서 문제 아니야?” 15“……예?” “시키는 일 오래 한다고 일을 잘하는 거야?” 머리가 멍해졌다. “그럼 뭐가 문제라는 말씀입니까?” “봐.” 장 팀장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지금도 그렇잖아.” “뭐가 말입니까?” “자네는 항상 남 탓이야.” “…….” “왜 진급이 안 됐는지 본인부터 돌아봐.”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김주임.” 홍민수가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자 밤공기가 차가웠다. 젠장. 오늘은 점수를 따려고 했다. 삼겹살도 굽고. 술도 따라주고. 싫어도 웃으려고 했다. 그런데 결국 또 이 꼴이다. 16나는 혼자 다른 술집으로 들어갔다. “소주 하나 주세요.” 한 병. 또 한 병. 그리고 또 한 병. 언제부터였을까.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인 게. 장성호. 그 인간과의 악연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내가 막 회사생활에 적응해갈 무렵. 그와 크게 부딪힌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 일이 직접적인 이유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증거도 없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이상하게 내 진급은 계속 꼬였다. 평가. 부서 이동. 보직. 진급. 어디선가 계속 한 발씩 밀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13년 차 주임이 되어 있었다. “씨발…….” 술잔을 들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17전화가 울렸다. 친구였다. 받지 않았다. 조금 뒤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어머니.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 뒤집어 놓았다. 받을 수가 없었다. 명절도 싫었다. 가족 모임도 싫었다. “회사 잘 다니지?” “이번엔 승진하니?” “결혼은 언제 할 거야?” “집은?” “주식은 좀 올랐고?” 그들이 나쁜 뜻으로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그래서 더 싫었다. 대답할 게 없으니까. 나는 소주잔을 비웠다. 한 병. 두 병. 세 병. 네 병. 그 뒤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 18비틀. 밤거리. 집까지 걸어가고 있었다. 택시를 타야 했지만 이상하게 걷고 싶었다. 가로등이 두 개로 보였다. “김기리.”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너 인생 참…….” 웃음이 나왔다. “잘 살았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했을 때. 나는 정말 내 인생이 잘 풀릴 줄 알았다. 남들보다 출발이 좋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하면 대리. 과장. 파트장. 그리고 언젠가는 팀장도 될 줄 알았다.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고. 집도 사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평범하게 살 줄 알았다. 그런데 서른아홉. 내게 남은 건. 13년 차 주임이라는 명함. 물린 주식. 19월세 자취방. 그리고 내일도 보기 싫은 상사. “하…….” 나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신호가 바뀌었다. 터벅. 터벅. 길을 건넜다. 그 순간이었다. “어?” 발끝이 보도블록에 걸렸다. 술에 취한 몸이 앞으로 휘청거렸다. 쿵!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빠아아아앙—! 거대한 경적소리.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있었다. ‘아.’ 이상하게도 시간이 느려졌다. 도망가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황당할 정도로 단순했다. ‘내일 출근 안 해도 되겠네.’ 20콰아앙—! 세상이 뒤집혔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삐리리리리— 삐리리리리— “끄으…….” 시끄럽다. 알람 소리. 손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찾았다. “아…… 머리야.” 숙취가 죽여준다. 어제 몇 병이나 마신 거지? 네 병? 다섯 병? ‘그런데 나…….’ 뭔가 이상했다. 분명 트럭이. 눈을 떴다. 천장. 낯설면서 익숙했다. “뭐야.” 몸을 일으켰다. 방을 둘러봤다. 작은 원룸. 21낡은 책상. 싸구려 행거. 벽에 붙어 있는 달력.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야?” 내 자취방이 아니다. 정확히는. 지금 살고 있는 자취방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방을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곳. 첫 직장에 입사했을 때 살던 원룸. “말도 안 돼.” 침대 옆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요즘 쓰는 스마트폰이 아니었다. “이게 왜…….” 오래된 휴대전화. 액정에 날짜가 떠 있었다. 나는 눈을 비볐다. 다시 봤다. 2013년 1월 16일. “…….” 침묵. “뭐야.” 다시 봤다. 2013년. 22“핸드폰 고장 났나?” 벽에 붙은 달력을 봤다. 2013. 책상 위 서류를 봤다. SG그룹 신입사원 입사 안내. 숨이 멎었다. “잠깐만.”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어……?” 거울 속에는 서른아홉 살 김기리가 없었다. 풋풋한 얼굴. 주름도 없고. 피곤에 절어 축 처진 눈도 없다. 머리숱도……. “많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다시 휴대전화를 들었다. 2013년 1월 16일. SG그룹 입사 첫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잠깐.” 머릿속으로 숫자를 계산했다. 2013. 232026. “……13년.” 목소리가 떨렸다. “13년?” 그리고 몇 초 뒤. 좁은 원룸 안에서 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아악!” 나는 휴대전화와 달력을 번갈아 바라봤다. “13년 전이라고?!” 그 순간. 잊고 있었던 얼굴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장성호. 내 회사생활을 지옥으로 만든 인간. 그리고 오늘. 정확히 13년 전 오늘은— 그 인간을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나는 거울 속 스물여섯 살의 나를 바라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꿈인가? 죽기 직전 보는 환상인가? 아니면 정말로. 내가 돌아온 건가? 나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미친.” 13년 동안. 24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일. 돌이키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었던 선택. 전부 다시 할 수 있다면? 이번에도 똑같이 살 이유가 있을까? 없다. 절대로. “장성호.” 나는 그의 이름을 천천히 입에 담았다. 그리고 웃었다. “우리 다시 만나겠네.” 13년 차 만년 주임 김기리. SG그룹 신입사원으로 다시 출근합니다. 1화 끝2019년 2월 2일.토요일 오전 아홉 시 오십 분.온천천 공원.박정태는 먼저 와 있었다.등산복.운동화.종이컵 커피 두 개.회사 밖의 호랑이는 공원 벤치에 앉은 아저씨였다.머리가 많이 셌다.2014년 회사를 떠날 때보다 훨씬.그가 종이컵 하나를 내밀었다.“설탕 넣었다. 너 예전에 믹스 마셨잖아.”나는 받았다.지금은 믹스를 안 마신다.첫 번째 삶의 서른 중반부터 끊었다.두 번째 삶에서는 다시 마신 적이 없다.그런데 이 사람은.2013년의 신입이 믹스를 마시던 걸 기억했다.“감사합니다.”한 모금 마셨다.달았다.* * *“본사에서 전화 왔다.”박정태가 먼저 말했다.“장구미라는 사람이 작년에 진술서를 냈다더라. 본사가 그걸 보다가 네 신입 때 일까지 거슬러 올라갔대. 거기 내 이름이 나온다고. 당시 팀장으로.”“네.”“너 신입 때. 대표 보고자료 양식 바뀐 거 모르고 깨진 날 있었지.”“네.”“그다음 날 내가 널 깼지. 양식도 모르냐고.”박정태가 커피를 내려다봤다.“기억 안 났는데. 전화 받고 나서 기억났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감사 건.”박정태가 종이컵을 벤치 위에 내려놓았다.“본사에서 물어보더라. 2013년 긴급 변경. 당시 진술 기억하냐고. 정정할 의향 있냐고.”박정태가 나를 봤다.“네가 신청했냐?”“아닙니다. 저는 작년 5월에 팀장님께 문자 드린 게 전부입니다. 본사에는 장 과장님 진술과 섞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그건 팀장님이 직접 하셔야 하는 거라고.”박정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본사가 나한테 직접 물은 거구나.”* * *한참 말이 없었다.조깅하는 사람들이 지나갔다.유모차.개를 데리고 걷는 노부부.박정태가 말했다.“그때.”그리고 멈췄다.“긴급 변경 건을 구두로 진행하라고 했지.”“네.”“고객사가 급하다고 해서. 서류는 나중에 하라고.”“네.”“그런데 감사에서는 네가 절차를 충분히 확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바람이 불었다.“왜 그러셨습니까
장구미의 마지막 출근일.오후 다섯 시.장구미가 박스를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몇 명이 고개만 까딱했다.장성호는 자리에 없었다.본부장 보고라고 했다.나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갔다.*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장구미가 말했다.“기리야.”“네.”“우리 이제 괜찮은 거지?”나는 장구미를 봤다.“뭐가요.”“나 진술서도 썼고. 정정 신청도 했고. 사과도 했고.”장구미가 박스를 고쳐 들었다.“창원 가면 주말에 낚시 다닐 거야. 거기 저수지 좋대. 너도 한번 와. 밥 한번 먹자. 편하게.”편하게.엘리베이터 숫자가 내려오고 있었다.7.6.5.나는 생각했다.장구미는 오늘 많은 걸 했다.3년 전의 장구미라면 절대 못 했을 것들.진술서.본인이 한 일부터.정정 신청.자기 이름으로.단서.확인 안 된 건 확인 안 됐다고.그리고 사과.이유를 붙여서.그런데.그걸로 우리가 괜찮아지는 건가.* * *첫 번째 삶에서 나는 장구미를 13년 동안 미워했다.정확히는.미워하는지도 모르고 미워했다.두 번째 삶에서 나는 장구미를 5년 동안 기록했다.날짜.시각.무엇을 뺐는지.그 기록이.오늘 장구미의 진술서로 돌아왔다.그리고 장구미는.이제 괜찮은 거냐고 묻는다.4.3.“선배님.”“응.”“진술서 쓰신 거. 정정 신청하신 거. 그건 제가 고맙다고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그랬지.”“그건 원래 하셨어야 하는 거라서요.”“…….”“그런데 낚시는요.”장구미가 나를 봤다.“낚시는 아직입니다.”* * *2.1.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장구미가 타지 않았다.“아직?”“네. 아직.”장구미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기리야. 나 할 만큼 했잖아.”“네. 하셨습니다.”“그럼.”“선배님이 할 만큼 하신 거랑. 제가 괜찮은 거랑은 다른 것 같습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했다.장구미가 버튼을 눌렀다.다시 열렸다.“5년이었습니다. 두 번째 입사부터.”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두 번째 입사.그 말이 이상
11월 마지막 주.장구미의 마지막 주였다.송별회는 없었다.사무실에서 아무도 제안하지 않았다.장성호는 당연히.다른 사람들은 장성호 눈치를 봤다.장 과장이 팀장 찌르고 나간다.그게 공식적인 이야기가 됐다.* * *2016년 철호 형의 송별회에는 네 명이 왔다.장구미의 송별회는.열리지 않았다.나는 그게 옳은지 모르겠었다.장구미는 철호 형과 달랐다.철호 형은 회사가 투명하게 만든 사람이었다.장구미는 다른 사람을 투명하게 만든 사람이었다.나를.민수를.정비 기사 한 명을.그런데 마지막에.자기 이름으로 그걸 고쳤다.그 사람의 마지막 주에.아무도 밥을 먹자고 하지 않았다.* * *수요일.전진주가 내 자리로 왔다.“기리야.”“네.”“장 과장 금요일 마지막이지.”“네.”전진주가 목소리를 낮췄다.“점심 한번 하자. 셋이.”나는 전진주를 봤다.2016년 철호 형의 송별회에 온 사람.팀장 안 오는 자리에 왜 왔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사람.“선배님이 먼저 말씀하시는 거 처음입니다.”“나도 처음이다.”전진주가 입가를 만졌다.“장 과장 진술서. 3-2번에 팀장 지시 메일 첨부했잖아. 2017년 해외설비 확정 기재 건.”“네.”“그 메일 참조에 나도 있었어. 나도 알았어. 그때.”전진주가 웃었다.“근데 나는 아무것도 안 했지.”* * *금요일 점심.공장 밖 국밥집.2016년 민수와 앉았던 그 집.장구미.전진주.나.그리고 민수가 뒤늦게 왔다.“저도 가도 됩니까.”장구미가 민수를 봤다.“너는 왜.”“선배님 진술서 2-2번에 제 이름도 있었습니다. 2017년 발표에서 추적 검사 주관자를 빼셨다고.”민수가 자리에 앉았다.“그거 쓰신 거 감사해서요.”장구미가 멈췄다.“감사할 일이 아니야.”“네. 기리 선배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는 안 하고. 밥만 먹으려고 왔습니다.”전진주가 웃었다.장구미도 웃었다.* * *국밥이 나왔다.넷이 먹었다.별 얘기는 없었
장구미의 진술서는 화요일에 제출됐다.인사팀.감사팀.그리고 본인이 요청해서 참조로 강태원 본부장.사무실에 소문이 퍼지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장 과장이 팀장 찔렀대.”“나가면서 판 엎고 가는 거지.”“본사 오 대리까지 들어갔다며.”사람들은 3번만 이야기했다.2번은.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 *장성호는 그날 오후 회의실에 틀어박혔다.본부장실에 두 번 불려갔다.돌아와서 나를 봤다.그 눈을 나는 알았다.첫 번째 삶에서.2020년 어느 날.회식 자리에서 나를 공개적으로 망신 준 날.그 전에 저 눈을 봤다.“김 주임.”“네.”“잠깐.”회의실.장성호가 문을 닫았다.“너지.”“뭐가요.”“장구미 그거. 네가 시킨 거지.”나는 장성호를 봤다.“아닙니다.”“장구미가 혼자 그런 걸 쓸 애야? 2번, 3번, 4번. 그거 네 방식이잖아. 네가 쓰는 메일이랑 똑같아.”맞았다.형식은 내 방식이었다.그런데.“검토는 했습니다. 장 과장님이 요청하셔서. 내용은 장 과장님이 쓰셨습니다. 본인이 한 일부터요.”“그게 네가 시킨 거지.”“팀장님.”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장 과장님 진술서 2번에 제 이름이 두 번 나옵니다. 피해자로요. 제가 시켰으면 왜 거기에 제 이름을 넣었겠습니까. 3번만 쓰게 했겠죠.”장성호가 멈췄다.* * *“김 주임.”장성호가 의자에 앉았다.처음으로.나보다 낮은 눈높이.“너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압니다.”“나 징계 들어갈 수도 있어.”“압니다.”“2월 회의록 수정. 그거 나 혼자 한 거 아니야.”나는 장성호를 봤다.“본사에서 톤 맞추라고 했어. 영찬이가. 3월 설명회 있다고. 나는 전달한 거야.”“장 과장님 진술서 4번에 그렇게 돼 있습니다. 오 대리의 메신저가 직접 지시인지는 확인 못 했다고.”“그러니까.”“팀장님이 확인하시면 됩니다. 오 대리가 뭐라고 했는지. 팀장님 이름으로요.”장성호가 웃었다.“너 진짜 무섭다.”“팀장님.”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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