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화요일 밤, 재단 수장고 작업 마무리』
비상등이 켜졌을 때, 내 손은 작업대 끝을 잡고 있었다.
이헌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불이 꺼지기 전에는 보지 못했던 셔츠의 접힌 소매가 보였다. 나는 손부터 내려다봤다. 풀을 닦아 낸 손가락에 종이 가루가 남아 있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바닥에 상자가 있어요.”
이헌이 발치의 상자를 옆으로 밀었다. 나는 그제야 한 발 물러났다. 작업대 모서리가 허리에 닿았다.
천장 환풍기 소리가 멎어 있었다. 문 쪽에서 초록색 불이 들어왔지만 서가 안쪽까지 밝히지는 못했다.
“책부터 덮을게요.”
나는 작업대 위의 고서를 확인했다. 덧댄 종이가 아직 마르지 않아 책을 닫을 수는 없었다. 받침을 바로 놓고 위에 얇은 보호지를 얹었다. 도면 봉투는 이헌이 서류 가방에 넣었다.
“그건 버리지 마세요.”
“보관해 둘게요.”
“제가 다시 보자고 하면요.”
“보여 드릴 겁니다.”
나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뜬 시각을 확인하는 동안 이헌의 전화가 울렸다.
이헌은 받자마자 수장고 쪽을 한 번 돌아봤다.
“네. 지금 안에 있습니다.”
수화기 너머 말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껐다. 복원 기록지를 접지 않고 가방 안쪽에 넣었다.
“알겠습니다. 나가서 연락드리죠.”
전화를 끊은 이헌이 문을 열었다.
“보수 공사 중에 전원이 끊겼답니다. 복구에 시간이 걸려요.”
“수장고에 사람 있는 건 모르셨대요?”
“퇴실 확인이 빠졌다고 합니다.”
나는 작업대 옆 습도계를 봤다. 전지가 들어가는 화면은 켜져 있었다.
“전기 들어오면 제습기부터 확인해 달라고 해 주세요. 꺼졌다가 저절로 안 켜지는 기계도 있어요.”
이헌은 휴대폰에 짧게 입력했다. 내가 문밖으로 나서기 전에 작업대를 한 번 더 살폈다.
“잠금은 제가 합니다.”
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올렸다. 이헌이 내 뒤에서 문을 닫고 손잡이를 당겨 확인했다. 잠금장치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복도 끝 승강기 표시창은 꺼져 있었다.
“주차장으로 나가죠. 계단으로 내려가면 됩니다.”
“저 혼자 가도 돼요.”
“저도 그쪽에 차가 있습니다.”
이헌은 앞서 걷지 않고 옆으로 비켰다. 내가 먼저 비상계단 문을 밀었다. 안쪽으로 공기가 더 차가웠다.
문 위 피난 표시는 켜져 있었다. 아래쪽 등도 들어와 있었지만 계단 모서리는 어두웠다. 나는 잠깐 서서 바닥을 봤다. 밝은 복도에서 보이지 않던 발판의 선이 차츰 드러났다.
이헌이 문이 닫히지 않게 잡고 있었다.
“보입니까?”
“네. 이제 보여요.”
“천천히 가세요.”
나는 난간을 짚고 첫 발을 내디뎠다. 금속이 차가워 바로 손을 뗐다. 작업실에서 물을 자주 만진 탓에 검지 옆이 조금 갈라져 있었다.
2번째 발판에서 다시 난간을 잡았다. 손바닥을 전부 대지 않고 손가락만 걸쳤다.
문이 닫혔다. 복도에서 들어오던 빛이 사라졌다.
이헌은 내 옆을 지나 한 칸 아래로 내려갔다. 돌아서서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구두 앞코가 발판 끝에 닿지 않도록 자리를 잡고 나를 기다렸다.
“그렇게 앞을 보고 내려가실 거예요?”
“발밑은 보입니다.”
“저도 보여요.”
“그럼 내려가죠.”
나는 한 칸 내려갔다. 이헌도 한 칸 내려갔다. 내가 난간을 고쳐 잡느라 멈추면 구두 소리도 멎었다.
계단참까지 내려가는 동안 가방이 허벅지에 두 번 부딪혔다. 나는 끈을 짧게 당겼다. 책을 누르는 데 쓰는 판이 안에 들어 있어서 가방이 무거웠다.
“들어 드릴까요?”
“도구가 있어서요. 제가 드는 게 편해요.”
이헌은 가방에서 눈을 떼고 아래를 봤다.
계단참 창은 닫혀 있었다. 유리 너머에는 벽이 보였다. 바깥으로 통하는 창은 아니었다. 나는 난간에서 손을 떼고 검지를 엄지로 눌렀다.
“손 다쳤어요?”
“아니요. 차가워서요.”
이헌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멈췄다. 나는 그 손을 보고 먼저 말했다.
“괜찮아요. 난간 안 잡으면 제가 더 불편해요.”
이헌은 꺼내려던 것을 도로 넣었다.
나는 가방에서 얇은 천을 꺼냈다. 도구를 감싸 온 천이었다. 풀 자국이 없는 부분을 접어 손바닥에 대고 난간을 잡았다.
“이러면 돼요.”
“네.”
내려가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이헌도 걸음을 맞췄다. 소매 끝이 눈높이 아래에서 움직였다. 수장고에서 종이컵을 들던 손에 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쪽을 보지 않으려고 계단 벽에 붙은 안내판을 읽었다. 주차장으로 가는 화살표가 아래를 가리켰다.
“아까 도면요.”
이헌이 멈췄다. 나도 한 칸 위에 섰다.
“아버지께 바로 보여 드리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요?”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요.”
“사본을 먼저 남겨 두세요. 누가 가져가도 다시 볼 수 있게.”
나는 가방 끈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저희 아버지가 없애실까 봐요?”
“누가 가져갈지는 모릅니다.”
대답이 끝난 뒤에도 나는 내려가지 않았다. 이헌은 재촉하지 않았다. 계단 아래에서 환기 장치가 덜컥거렸다. 잠깐 돌다가 다시 멈췄다.
“아버지는 공장 문만 열 수 있으면 된다고 하셨어요.”
나는 벽에 붙은 안내판 끝을 봤다. 들뜬 귀퉁이에 먼지가 붙어 있었다.
“약혼하면 직원들 월급도 줄 수 있고, 기계도 다시 돌릴 수 있다고요.”
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종이에는 공장 자리에 다른 게 그려져 있었어요.”
말을 하고 나니 입술이 말랐다. 나는 다문 입을 한 번 풀었다.
“다음에는 제가 사본을 챙길게요.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것도 제가 정하고요.”
“그러세요.”
이헌이 몸을 돌렸다. 나는 다시 난간을 잡았다. 천이 접히며 손가락 밑에서 뭉쳤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가방 안쪽에서 난 소리에 발이 멎었다. 나는 계단참에 도착한 뒤 휴대폰을 꺼냈다. 다은에게서 온 문자였다.
『창가 책은 프레스에서 뺐어. 오늘은 먼저 간다. 문 잘 잠가.』
나는 한 손으로 답을 적었다.
『고마워. 재단 전기가 나가서 이제 내려가는 중.』
곧바로 답이 왔다.
『혼자야?』
화면 위에 손가락을 올린 채 멈췄다. 한 칸 아래에서 기다리는 이헌의 어깨가 보였다.
나는 짧게 적었다.
『직원분이랑 나가고 있어. 내일 보자.』
전송하고 화면을 껐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휴대폰을 넣는 손이 서둘렀다.
이헌이 아무것도 묻지 않아 더 그랬다.
“작업실 직원이에요.”
“네.”
“퇴근한다고 해서요.”
“늦게까지 기다렸습니까?”
“아니요. 먼저 갔어요.”
말을 덧붙일수록 이상했다. 나는 가방 덮개를 닫고 잠금쇠를 눌렀다. 제대로 걸리지 않아 다시 눌렀다.
이헌의 시선이 내 손에 닿았다가 내려갔다.
“윤나경 씨.”
나는 고개를 들었다.
계단 벽에 붙은 등이 이헌의 얼굴 한쪽을 비췄다. 약혼식장에서 인사하던 때와 달리 넥타이 매듭이 조금 내려가 있었다. 나는 그 밑의 셔츠 단추를 보다가 눈을 돌렸다.
“그날 밤 일.”
무슨 밤인지 묻지 못했다.
난간을 잡은 손 안에서 천이 미끄러졌다. 나는 손을 펴 천을 다시 접었다. 손가락을 가지런히 놓는 동안 이헌은 기다렸다.
“그 얘기는 수장고에서 했잖아요.”
“안 했던 말이 있습니다.”
나는 아래쪽 문을 봤다. 작은 유리창 너머는 어두웠다. 누가 오면 저 문부터 열릴 터였다.
“여기서 꼭 해야 해요?”
이헌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내가 싫다고 하면 멈출 사람이라는 건 알았다. 그런데 먼저 내려가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천을 접은 채 기다렸다.
이헌이 낮게 말했다.
“실수 아니었어요.”
나는 난간에서 손을 뗐다.
천이 손바닥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차가웠던 손끝이 뒤늦게 느껴졌다. 나는 천을 떼어 가방 앞주머니에 넣었다. 모서리가 밖으로 나와 다시 밀어 넣었다.
“제가 먼저 했어요.”
“알아요.”
“술도 마셨고요.”
“그것도 압니다.”
이헌은 한 칸 아래에 그대로 서 있었다. 내가 내려오기를 기다리지도, 올라오지도 않았다.
나는 계단 끝에 닿아 있던 구두를 안쪽으로 당겼다.
“이름도 몰랐어요.”
“네.”
“누군지 알았으면 안 그랬을 거예요.”
이헌의 턱이 조금 내려갔다. 나는 그 짧은 움직임을 보고도 말을 멈추지 못했다.
“다음 날 어디서 만날지도 몰랐고요. 저는 그냥…….”
그 뒤를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주원이 다른 여자와 객실로 들어간 일을 여기서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 일을 말하면 내가 한 입맞춤의 이유를 전부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헌의 입술에서 먼저 떨어지지 않았던 시간까지 설명되지는 않았다.
나는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
“없던 일로 하자는 건 아니에요.”
말이 낮아졌다. 이헌이 내 얼굴을 봤다.
“저도 기억하니까.”
계단 아래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동시에 아래를 봤다. 발소리는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다물고 기다렸다. 잠시 뒤 이헌이 시선을 돌렸다. 다시 내 쪽이었다.
한 칸을 내려가면 나란히 설 수 있었다. 나는 발을 옮기지 않았다.
“주원 씨는 실장님을 삼촌이라고 불러요.”
이헌의 손이 난간에서 떨어졌다.
“약혼식 날 저한테도 그렇게 부르라고 했고요.”
나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내려다봤다. 작업이 끝나고 목에 걸었던 실에서 빼 다시 낀 반지였다. 어둠 속에서도 테두리는 보였다.
반지를 돌리려다 손을 내렸다. 여기서 반지를 빼면 그것도 대답이 됐다.
“우린 안 돼요.”
이헌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가방 끈을 쥔 채 기다렸다. 약혼을 하지 말라는 말을 다시 들을 수도 있었다.
이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하는 말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찾는 동안 이헌은 몸을 돌렸다. 계단 한 칸을 내려간 뒤 멈췄다. 나는 난간을 잡지 않은 손을 벽 쪽으로 내렸다.
한 발 내디뎠다. 이헌도 내려갔다.
구두 굽이 발판에 닿을 때마다 소리가 났다. 나는 발을 조금 옆으로 놓았다. 가방이 벽에 스치지 않게 끈을 당겼다.
방금 한 말을 거두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주차장에 나가 차를 타는 모습을 떠올릴 수도 없었다.
나는 난간을 다시 잡았다가 바로 놓았다. 천을 꺼내려면 가방을 열어야 했다. 잠금쇠에 손을 대고도 열지 않았다.
이헌이 걸음을 멈췄다.
나는 아래를 보던 눈을 들었다. 이헌은 내 손을 한 번 보고, 발판을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한 칸을 내가 내려갈 때까지 기다렸다.
남은 계단은 짧았다. 아래쪽 문에 붙은 유리창으로 빛이 한 번 지나갔다. 나는 멈춰 섰다. 빛이 사라져도 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 뒤에는 계단이 있었고 앞에는 이헌이 있었다. 나는 위층으로 되돌아가려던 것도 아닌데 어깨를 조금 돌렸다. 가방 모서리가 난간에 닿았다. 금속 부속이 부딪쳐 소리가 났다.
이헌이 고개를 돌렸다.
나는 가방을 몸 앞으로 옮겼다.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지만 나오는 말이 없었다. 이헌은 나를 기다리는 대신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손잡이가 내려갔다. 문 아래 틈으로 흰빛이 들어왔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볼 내용도 없는데 화면부터 켰다. 다은에게 보낸 문자가 그대로 떠 있었다. 직원분이랑 나가고 있다고 적은 줄을 엄지로 가렸다.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경비복 소매가 먼저 보였다. 손전등 빛이 문턱을 훑더니 계단을 따라 올라왔다. 이헌의 구두에서 멈춘 빛이 내 발끝까지 닿았다.
내가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자, 이헌도 반대쪽으로 한 걸음 떨어졌다.
(11화 끝)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오전, 본가 회장님 장부 원본 수선』『수요일, 회장님 장부 원본 볼 수 있어요.』수요일 아침, 본가 현관 앞에서 문자를 다시 읽고 화면을 껐다. 가방 안에는 얇은 종이와 붓, 실을 나눠 넣은 상자가 있었다. 금속 도구는 천으로 감쌌다.문이 열리자 이헌이 안쪽에 서 있었다.“추웠죠.”“오래 안 기다렸어요.”이헌의 눈이 내 가방으로 내려갔다. 나는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도구가 있어서 제가 들게요.”“네. 계단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현관 바닥에 녹은 눈이 묻어 있었다. 이헌이 발로 매트를 당겨 물기를 가렸다. 나는 그 위에서 신발을 벗었다.코트를 벗자 목에 건 실이 옷깃에 걸렸다. 반지가 나오기 전에 손가락으로 눌러 넣었다. 이헌은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회장님 혼자 계세요?”“지금은요. 서재에 계십니다.”복도 끝에 문이 열려 있었다. 이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서재 안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회장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신문 한쪽이 접혀 있었고, 안경은 그 위에 벗어 뒀다. 내 인사를 받은 회장이 가방부터 봤다.“그 안에 다 들었나.”“장부 상태를 보고 더 필요한 건 말씀드리겠습니다.”“뜯어서 새로 만드는 건 싫어.”“기존 실을 살릴 수 있으면 살리겠습니다. 새 종이도 필요한 자리에만 붙이고요.”회장이 신문을 밀어 놓았다.“앉아서 기다리게.”나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저녁 성탄 장터』다은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우리 손을 봤다. 나는 이헌의 손에서 손가락을 뺐다. 다은이 붕어빵 봉투를 접었다.“나경아.”“응.”“이분, 내가 아는 그분 맞아?”이헌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강이헌입니다.”“서진그룹 실장님이요?”“네.”다은이 내 왼손을 봤다. 회색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이헌의 오른손에도 같은 장갑이 있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다은이 천막 기둥 옆으로 비켰다. 나도 따라갔다. 이헌은 지나가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우리 옆에 섰다.“나경이랑 할 얘기가 있는데요.”다은이 이헌에게 말했다. 평소 거래처 전화를 받을 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오늘은 제가 데려가도 되죠?”이헌은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은이랑 갈게요.”“알겠어요.”이헌이 별 장식 봉투를 내밀었다. 받으려는데 다은이 손을 뻗었다.“그건 제가 들게요.”봉투가 다은에게 넘어갔다. 나는 이헌의 오른손을 가리켰다.“장갑은요.”이헌이 장갑을 벗어 내게 줬다. 나는 빈 장갑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손바닥이 닿았던 안쪽이 아직 따뜻했다.다은은 그걸 보고 입술을 눌렀다.“차는 안 타도 돼요. 저희 집 가까워요.”“네. 조심히 가세요.”이헌은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오후 작업 마감, 저녁 성탄 장터』코트 소매를 펴다가 작업실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주원이 문 앞에서 했던 말이 일주일째 걸렸다.원하는 건 꼭 갖는 사람.나는 가방 안쪽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이헌이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입구에서 기다릴게요. 늦어도 괜찮아요.』답을 쓰려는데 문자가 하나 더 왔다.『작업 끝내고 와요.』나는 작업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장터 입구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목도리를 고쳐 매는 동안 앞에 선 아이가 아버지에게 안겼다. 아이 어깨 너머로 이헌이 보였다.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내가 손을 들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줄 바깥으로 걸었다.“많이 기다리셨어요?”“방금 왔어요.”“얼마나 방금인데요?”이헌이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8분이요.”“그건 방금 아닌데요.”“그럼 조금 기다렸어요.”이헌이 내 가방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제가 들게요. 오늘 도구는 안 가져왔어요.”“알겠어요.”손이 곧 내려갔다. 나는 빈손이 된 이헌의 손등을 보다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지난번에는 시집을 사이에 두고 앉았고, 그 전에는 서류를 펼쳐 놓았다. 오늘은 꺼낼 종이가 없었다.“어디부터 볼까요?”이헌이 안내판을 봤다.“윤나경 씨 가고 싶은 데요.”“이런 데 자주
『오늘 일정: 12월 7일 토요일, 주원 씨 집에서 신년 행사 준비』현관 앞에서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초인종 옆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손을 들었다가 코트 소매부터 내렸다.어제 석진 앞에서 접어 쥐었던 손수건이 주머니 안에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빨았는데도 다림질할 틈이 없었다. 손수건 모서리를 밀어 넣고 초인종을 눌렀다.안에서 냄비 뚜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잠깐만요.”주원이 문을 열었다. 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끈 한쪽이 풀려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생각보다 일찍 왔네.”“약속한 시간인데요.”주원이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봤다.“그러네. 들어와요. 슬리퍼는 거기.”현관에 여자 구두는 없었다. 신발장 위에는 검정 휴대폰과 열쇠가 놓여 있었다. 나는 구두를 벗어 나란히 붙이고 갈색 가방을 들었다.“코트 줘요.”“제가 걸게요.”주원이 옷장 문을 열어 줬다. 빈 옷걸이에 코트를 걸고 돌아서자 탄 냄새가 났다.주원도 코를 찡그렸다.“아, 불.”주원이 주방으로 뛰어갔다. 나는 가방을 식탁 의자에 놓고 따라갔다.◈프라이팬 한쪽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주원은 불을 끄고 뒤집개로 계란을 들어 올렸다. 밑면이 검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이거 원래 이렇게 빨리 타요?”“불이 너무 셌어요.”“영상에서는 센 불로 시작하던데.”“계란 붓기 전에 줄여야 해요.”주원은 싱크대 옆에 세워 둔 휴대폰을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이헌이 내 의자 옆에서 손을 내렸다.“주원이 약혼녀입니다, 형님.”나는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무릎 위 파일이 기울어 견적서 모서리가 밖으로 나왔다. 집게를 눌러 종이를 밀어 넣었다.석진은 이헌을 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색 손목시계 위로 셔츠 끝을 당겼다.“알지.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식사 중이었니?”“마쳤습니다.”나는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헌은 탁자에 남은 서류를 모았다. 내 휴대폰은 화면을 아래로 향한 채 놓여 있었다.석진이 문 쪽으로 비켜섰다.“나가는 길이면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주원이한테 듣는 것보다 직접 듣고 싶은 게 있어서.”“여기서 하셔도 됩니다.”이헌이 말했다.석진은 손목을 내린 채 웃었다. 열린 문 밖으로 조현석의 책상이 보였다.나는 휴대폰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괜찮아요. 말씀 듣고 갈게요.”이헌이 나를 봤다. 나는 가방 안에 파일을 세워 넣고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 의자와 탁자 사이를 빠져나오려는데 이헌이 길을 비켜 줬다.손등 사이가 10cm쯤 남았다. 나는 그 손을 지나 문으로 갔다.◈조현석이 옷걸이에서 내 겉옷을 꺼냈다.“견적서는 받으셨습니까?”“네. 감사합니다.”나는 겉옷을 입고 가방끈을 어깨에 걸었다. 조현석은 내 방문증을 보고는 회수함 쪽을 가리켰다.“내려가실 때 저기에 넣으시면 됩니다.”“잠깐 이야기하고 내려갈게요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사진을 더 키우자 서명의 테두리가 깨졌다. 나는 화면을 원래 크기로 돌리고 납품 확인서를 옆에 놓았다. 창가에서 다시 봐도 펜이 들어간 자리는 달랐다.“그렇게 보면 눈 아파.”다은이 작업대에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휴대폰을 거치대에 세웠다.“원본을 봐야겠어. 복사하면서 없어진 부분도 있을 테니까.”“어제 그 서류?”“응. 아버지가 안 썼다는 거.”다은은 확인서가 구겨지지 않게 찻잔을 멀리 옮겼다.“혼자 가서 따지지는 말고.”“오늘은 물어보러 가.”나는 시집 견적서를 출력했다. 표지 보강과 책등 수선, 본문 세척을 나눠 적은 종이였다. 아래쪽에 작업 전 확인이 필요하다는 문장을 넣고 서명했다.다은이 출력물을 보다가 내 가방을 봤다.“그런데 견적서는 보내도 되잖아.”파일 집게를 누르던 손을 멈췄다.“사진을 직접 보여 주려고.”“사진도 보낼 수는 있고.”나는 집게를 닫았다. 다은은 더 묻지 않고 파일 모서리를 맞춰 줬다.휴대폰에는 아침에 받은 이헌의 답장이 있었다.『점심 무렵에 오면 됩니다. 조 비서에게 말해 둘게요.』그 아래에 내가 보낸 답이 붙어 있었다.『시집 견적서 가지고 갈게요.』나는 화면을 끄고 납품 확인서를 별도 파일에 넣었다. 견적서와 섞이지 않게 가방 안쪽에 세워 넣은 뒤 앞치마를 벗었다.◈전략기획실 앞에서 방문증을 다시 확인했다. 이름 아래에 방문 목적이 적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