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본가 장부 수선 마무리』
나는 가방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맡기신 건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
회장은 책상 위의 장부를 당겼다. 끈이 눌린 자리를 살피던 손이 멈췄다.
“그럼 됐네.”
더 묻지 않았다. 나는 기록지 한쪽에 수선한 자리를 짚어 드린 뒤 서재를 나왔다. 이헌이 문을 닫았다. 문고리에서 손을 뗄 때까지 나는 복도에 서 있었다.
안에서는 서류 넘기는 소리가 났다.
“외투 가져올게요.”
이헌이 현관으로 갔다. 나는 가방 안쪽에 손을 넣었다. 휴대폰 모서리에 손끝이 닿았다가 빠졌다. 여기서 화면을 켜면 서재 문이 열려도 못 볼 수 있었다.
이헌이 코트를 벌려 주려다 내 가방을 봤다.
“놓고 입어요. 제가 들고 있을게요.”
“바닥에 안 닿게만 해 주세요.”
가방을 건네고 팔을 넣었다. 소매 안에서 옷이 말려 올라가 손목을 당겼다. 이헌은 기다렸다가 가방을 돌려줬다. 검은 외투는 아직 팔에 걸쳐 있었다.
“회사로 가세요?”
“조금 있다가요.”
나는 현관 유리 너머를 봤다. 정원 길에는 눈이 치워져 있었다. 담장 아래에만 군데군데 흰 눈이 남았다.
“잠깐 걸어도 될까요?”
이헌이 외투를 입었다.
“정원으로 나가요.”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가방 밑이 젖어 있었다. 서재에서 천을 걷을 때 묻은 건지, 바닥에 남은 눈이 닿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가방을 기울여 바닥의 이음매부터 확인했다.
“안까지 들어갔어요?”
“겉만요. 이대로 차에 놓으면 자국이 남겠어요.”
현관에 있던 천으로 물기를 눌러 닦았다. 끝에 묻은 흙은 남았다. 이헌이 문을 잡고 기다렸다.
밖으로 나오자 코트 단추 사이로 찬 공기가 들어왔다. 나는 목깃을 여미고 정원 길을 따라 걸었다. 서재 창문 앞을 지날 때는 휴대폰을 꺼내지 않았다.
이헌도 내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
정원 안쪽에는 수도가 있었다. 아래에 놓인 물통은 뒤집혀 있었고, 수도꼭지 끝에 얼음이 붙어 있었다.
이헌이 손잡이를 조금 돌렸다. 물은 나오지 않았다.
“얼었네요.”
나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마른 걸로 닦으면 돼요.”
이헌은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꼈다. 수도꼭지 끝을 장갑 낀 손으로 감쌌다. 나는 옆에서 손수건을 접었다.
“그걸로 녹겠어요?”
“끝만 얼었나 해서요.”
잠깐 기다린 이헌이 손을 뗐다. 다시 손잡이를 움직였지만 물은 나오지 않았다. 장갑 끝만 젖어 있었다.
이헌은 손잡이를 원래대로 잠갔다.
“안 되네요.”
“장갑까지 젖었잖아요.”
“말리면 됩니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입술로 눌렀다. 이헌이 내 얼굴을 봤다.
“웃어도 돼요.”
“일하실 때도 그렇게 직접 해 보고 결정하세요?”
“수도는 제 일이 아니라서요.”
이번에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헌도 조금 웃었다. 장갑을 벗어 외투 주머니에 넣는 손을 보다가 나는 가방 밑을 닦았다.
마른 흙이 떨어졌다. 손수건의 깨끗한 면으로 다시 눌렀다. 이헌은 가방을 대신 가져가려 하지 않고 내가 닦는 쪽을 받쳐 줬다.
“됐어요.”
손이 떨어졌다. 나는 손수건을 따로 접어 가방 바깥 주머니에 넣었다.
정원 끝의 벤치는 말라 있었다. 나는 가방을 올리고 안쪽을 확인했다. 도구를 감싼 천에도, 기록지에도 물기는 없었다. 상자 뚜껑을 열어 바늘까지 확인하고 닫았다.
이헌은 벤치에서 떨어져 서 있었다. 본가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내가 정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실장님.”
이헌이 돌아봤다.
“아까 장부에 끼워져 있던 서류요.”
“네.”
“사진을 같이 봐 주세요.”
화면을 켜자 마지막에 찍은 매듭 사진이 나왔다. 나는 앞쪽으로 넘겼다. 결재란이 보이는 사진에서 손을 멈췄다.
이헌이 가까이 왔다. 어깨 사이는 30cm쯤 벌어져 있었다. 나는 화면을 이헌 쪽으로 기울였다.
“여기에는 점이 없어요.”
이헌은 휴대폰을 받지 않았다. 허리를 조금 숙여 화면을 봤다.
“끝부분 확대해도 돼요?”
나는 손가락을 벌려 서명을 키웠다.
“이렇게요?”
“네. 옆에 찍힌 것도 보여 줘요.”
다음 사진에는 다른 결재란이 있었다. 서명의 마지막 획 옆에 점이 붙어 있었다. 이헌은 두 사진을 번갈아 본 뒤 몸을 세웠다.
“원본은 아니었죠?”
“사본이었어요. 그래서 빠졌을 수도 있어요.”
“복사할 때요?”
“네. 작은 점은 흐려질 수 있으니까요. 사진으로는 종이에 원래 없었는지까지 알 수 없고요.”
나는 화면을 원래 크기로 줄였다.
“이것만 보고 다르다고 정하면 안 돼요.”
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한테 물어봤어요?”
“아무한테도요.”
“회장님한테도?”
“끝이 말렸다고만 했어요. 그건 실제로 말려 있었고요.”
이헌은 닫힌 서재 창문 쪽을 봤다. 나는 휴대폰을 끄지 않았다.
“제가 먼저 여쭤봤어야 했을까요?”
“아니요. 지금은 묻지 않는 게 좋겠어요.”
“왜요?”
“누가 그 서류를 넣었는지부터 모르니까요. 질문이 누구한테 전해질지도 모르고요.”
나는 화면 속 결재란을 다시 봤다. 서류의 위쪽은 손가락에 가려져 있었다. 지금은 서명만 확인하면 됐다.
“그럼 같은 시기에 쓰신 걸 더 봐야겠네요.”
“제가 찾아볼게요.”
“찾으시면 서명만 잘라서 보내지 말아 주세요. 종이 전체가 있어야 해요. 접힌 자리나 복사된 정도도 같이 봐야 하니까요.”
이헌이 휴대폰을 꺼냈다.
“사진 보내 줄 수 있어요?”
나는 두 장을 골랐다가 손을 멈췄다. 앞뒤를 찍은 사진도 함께 선택했다.
“순서대로 보낼게요. 다른 사람한테 주실 땐 저한테 먼저 말해 주세요.”
“그럴게요.”
전송이 끝나자 이헌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이헌은 사진이 들어온 것만 확인하고 화면을 껐다.
“원래 사진은 지우지 말아요.”
“작업 사진은 안 지워요.”
“다행이네요.”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지퍼를 닫으려는데 실이 하나 끼었다. 도구를 싸 둔 천에서 풀린 실이었다. 잡아당기지 않고 손톱으로 빼냈다.
이헌이 그 손을 보고 있었다.
“회장님이 마지막에 하신 말씀 들으셨죠?”
“들었어요.”
“제가 사진 찍은 걸 아신 걸까요?”
“알았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확실하지 않은 걸 안다고 말할 수는 없고요.”
이헌은 내 가방의 지퍼가 닫힌 뒤에야 말을 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요.”
나는 손잡이를 쥐었다.
“그 말은 제가 빠지라는 뜻이에요?”
“아니요.”
대답이 빨랐다. 이헌은 본가에서 시선을 돌려 나를 봤다.
“손이 빨개졌어요. 안에서 마저 얘기하자는 뜻이었어요.”
나는 손을 내려다봤다.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가락 끝이 굳어 있었다. 코트 주머니에 넣자 안감이 차게 닿았다.
“중요한 얘기 할 때는 끝까지 말씀해 주세요.”
“알겠어요.”
“제가 혼자 잘못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요.”
이헌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제 잘못이네요.”
나는 가방을 벤치에서 내렸다. 이헌이 먼저 걷지 않고 기다렸다.
◈
현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걸음을 늦췄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실장님과 복원 의뢰를 받은 사람으로 돌아가야 했다. 같은 집 안에 있어도 따로 서 있어야 했다.
이헌이 뒤를 봤다.
“더 할 말 있어요?”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도 바로 꺼내지 못했다. 나는 빈 벤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헌도 따라 돌아섰다.
“실장님은 제가 이 집에 오는 게 괜찮으세요?”
“일 때문에 오는 거요?”
“일 말고는 올 이유가 없잖아요.”
입 밖에 내고 보니 틀린 말이었다. 주원의 약혼녀라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가 다시 내렸다.
“아니요. 그 말이 아니라.”
이헌은 재촉하지 않았다.
“서류를 더 보면 실장님을 만나게 되잖아요. 작업 설명도 해야 하고요. 저는 그게 싫지 않아요.”
이헌의 시선이 내 얼굴에 멈췄다.
“그래서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점이 없는 걸 필요 이상으로 붙잡고 있는 건지.”
나는 가방 손잡이의 박음질을 봤다. 실이 빠진 곳은 없었다. 엄지가 같은 자리를 거듭 눌렀다.
이헌이 낮게 말했다.
“그 사진은 다른 사람이 보여 줬어도 확인했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윤나경 씨가 못 본 걸 봤다고 한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만나려고 핑계를 찾는 건 맞아요.”
말을 마치고 입술을 다물었다. 이헌은 외투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뺐다. 내 쪽으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저도요.”
바람에 코트 자락이 벌어졌다. 나는 단추를 채우지 못하고 이헌을 봤다.
“장부 작업 끝날 때까지 기다린 거요. 같이 나갈 이유가 필요했어요.”
“통화가 계속 왔잖아요.”
“돌아가서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지금은요?”
이헌이 현관 쪽을 봤다가 다시 내게 눈을 맞췄다.
“조금 더 늦어도 됩니다.”
나는 손잡이를 놓았다가 다시 잡았다. 여기서 더 묻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도 입이 열렸다.
“그럼 저한테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라고 하지 마세요.”
이헌이 숨을 들이켰다. 말이 나오기 전까지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경아.”
손가락이 멈췄다.
“미안, 둘만 있을 때만.”
이헌은 바로 말을 고쳤다. 내 얼굴을 살피더니 한 걸음 물러났다.
“싫으면 안 할게요.”
나는 대답 대신 이헌의 외투 소매 끝을 봤다. 안쪽으로 셔츠가 조금 나와 있었다. 서재에서 실을 묶는 동안에도 곁에 있던 옷이었다.
“싫다는 말은 안 했어요.”
이헌의 손이 주머니 앞에서 멈췄다.
“갑자기 부르셔서요.”
“네.”
“한 번만 더요.”
말하고 나서 나는 본가를 돌아봤다. 현관문은 닫혀 있었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다시 이헌을 봤을 때는 아까보다 조금 가까워져 있었다. 내가 옮긴 걸음이었다.
이헌은 목소리를 더 낮췄다.
“나경아.”
나는 가방을 몸 앞에 붙였다. 자꾸 웃음이 나서 잠깐 고개를 숙였다. 이헌은 내가 다시 볼 때까지 기다렸다.
“네.”
대답은 작게 나왔다.
이헌이 손을 들려다 내렸다. 나는 그 손을 봤지만 잡지 않았다. 대신 가방 손잡이를 한 손으로 옮겼다. 비어 있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안쪽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동시에 현관을 봤다. 정원으로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헌은 한 걸음 옆으로 비켜 길을 열었다.
“들어가요. 손부터 녹여요.”
이번에는 그 말을 다르게 알아듣지 않았다.
“실장님도 장갑 말리세요.”
“그러죠.”
나는 먼저 길을 걸었다. 이헌은 바로 따라오지 않았다. 벤치에 놓고 온 것이 없는지 확인한 뒤 몇 걸음 뒤에서 걸어왔다.
현관 앞 계단에 오르기 전, 나는 가방을 열었다. 휴대폰이 안쪽에 있는지 확인하려던 손이 반지에 닿았다. 코트 안에 걸어 둔 실이 가방 끈에 걸려 있었다.
나는 끈을 조금 들어 빼냈다. 백금 반지가 옷깃 아래로 내려갔다.
뒤따라온 이헌의 구두가 멈췄다.
나는 반지를 더 만지지 않고 코트 단추를 채웠다. 이헌도 아무 말 없이 현관 옆에 섰다. 문손잡이에 손을 대기 전, 내 가방 쪽으로 시선이 내려왔다.
“사진은 확인하고 연락할게요.”
“네. 같은 시기에 쓴 걸로요.”
“기억하고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헌이 문을 열려는데 위층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창문 걸쇠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고개를 들자 2층 창가에 경란이 서 있었다.
진주 귀걸이가 창문 가까이 보였다. 경란은 내 얼굴을 보고, 이헌 쪽으로 눈을 옮겼다. 나는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이헌도 위를 봤다.
경란은 창가에서 물러나지 않은 채 커튼을 내렸다.
(30화 끝)
『오늘 일정: 12월 24일 화요일 저녁, 서진 본가 성탄 모임』“접지칼이에요. 아까 보셨던 거요.”나는 상자를 가방에 넣지 않고 뚜껑을 열었다. 경란의 시선이 흰 손잡이에서 받침 아래로 내려갔다.“밑에는?”“닦는 천이 들어 있어요.”천을 꺼내 펼쳤다. 아무 무늬도 없는 천이었다. 경란은 한쪽 끝을 잡았다가 놓았다.“저런 것까지 챙겨 줬네.”나는 천을 접어 받침 아래에 넣었다.“도구에 묻은 풀을 그대로 두면 다음 종이에 옮거든요. 쓰고 나면 닦아 둬야 해요.”“네가 뭘 쓰는지 이헌이가 어떻게 알았을까.”뚜껑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상자 모서리를 맞춰 닫았다.“복원 맡기신 책 때문에 작업실에 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 보셨나 봐요.”“의뢰인한테 그런 것도 보여 줘?”“작업하는 걸 궁금해하시면요.”경란은 내 가방 안을 잠깐 보았다. 선물 포장지 옆으로 평소 쓰던 도구집이 나와 있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 지퍼를 조금 열었다. 닳은 접지칼 끝이 보였다.“이건 오래 써서 끝이 얇아졌어요. 오늘 받은 건 두꺼운 종이에도 쓸 수 있겠어요.”경란은 도구집을 들여다보다 몸을 바로 세웠다.“그래. 일에 쓰는 거면 잘 써야지.”“네. 잘 쓰겠습니다.”나는 도구집과 상자를 차례로 넣었다. 경란은 내가 가방을 닫는 것까지 보고 돌아섰다.거실 입구에서 주원이 수건을 들고 나왔다. 바닥의 물기를 닦으려 하자 할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오늘 일정: 12월 24일 화요일 저녁, 서진 본가 성탄 모임』커튼이 다 내려간 뒤에도 나는 2층 창을 올려다봤다. 이헌이 현관문을 연 채 기다렸다. 그날은 안에서 손만 녹이고 바로 나왔다. 경란에게서는 6일 동안 아무 연락이 없었다.12월 24일 저녁, 나는 같은 현관 앞에 다시 섰다. 2층 창가의 커튼은 걷혀 있었다.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는데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구두 밑창에 붙은 눈이 매트에 떨어졌다.“나경 씨, 손 시려?”주원이 내 뒤에서 문을 닫았다.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괜찮아요.”“장갑 좀 끼고 다녀. 오늘 사진도 찍을 건데 손 빨갛겠다.”주원은 내 가방을 받아 들려다 안에서 종이봉투가 나오자 웃었다.“내 선물?”“회장님 드릴 거예요.”“나는 빈손으로 들어왔는데. 옆에 서 있어야겠다.”거실에서는 접시 놓는 소리가 났다. 경란은 식탁 끝에서 냅킨을 펴고 있었다. 진주 귀걸이 아래로 머리카락 한 올이 붙어 있었다.“늦지는 않았네. 외투 벗고 앉아.”인사를 마치고 몸을 돌렸을 때 이헌이 보였다. 식탁 건너 창문 옆이었다. 소매를 두 번 접은 손에 물잔을 들고 있었다.“오셨습니까.”“네, 삼촌.”입안에 남은 호칭을 삼켰다. 이헌은 물잔을 내려놓았다. 우리 사이에는 의자가 여섯 개 놓여 있었다.주원이 내 옆 의자를 빼 주었다.“자기, 오늘은 일 얘기 금지야. 아버지도 약속하셨고.”석진이 금색 시계를 보고 웃었다.“아직 내가 아무 말도 안 했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본가 장부 수선 마무리』나는 가방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맡기신 건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회장은 책상 위의 장부를 당겼다. 끈이 눌린 자리를 살피던 손이 멈췄다.“그럼 됐네.”더 묻지 않았다. 나는 기록지 한쪽에 수선한 자리를 짚어 드린 뒤 서재를 나왔다. 이헌이 문을 닫았다. 문고리에서 손을 뗄 때까지 나는 복도에 서 있었다.안에서는 서류 넘기는 소리가 났다.“외투 가져올게요.”이헌이 현관으로 갔다. 나는 가방 안쪽에 손을 넣었다. 휴대폰 모서리에 손끝이 닿았다가 빠졌다. 여기서 화면을 켜면 서재 문이 열려도 못 볼 수 있었다.이헌이 코트를 벌려 주려다 내 가방을 봤다.“놓고 입어요. 제가 들고 있을게요.”“바닥에 안 닿게만 해 주세요.”가방을 건네고 팔을 넣었다. 소매 안에서 옷이 말려 올라가 손목을 당겼다. 이헌은 기다렸다가 가방을 돌려줬다. 검은 외투는 아직 팔에 걸쳐 있었다.“회사로 가세요?”“조금 있다가요.”나는 현관 유리 너머를 봤다. 정원 길에는 눈이 치워져 있었다. 담장 아래에만 군데군데 흰 눈이 남았다.“잠깐 걸어도 될까요?”이헌이 외투를 입었다.“정원으로 나가요.”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가방 밑이 젖어 있었다. 서재에서 천을 걷을 때 묻은 건지, 바닥에 남은 눈이 닿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가방을 기울여 바닥의 이음매부터 확인했다.“안까지 들어갔어요?”“겉만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오전, 본가 회장님 장부 원본 수선』『수요일, 회장님 장부 원본 볼 수 있어요.』수요일 아침, 본가 현관 앞에서 문자를 다시 읽고 화면을 껐다. 가방 안에는 얇은 종이와 붓, 실을 나눠 넣은 상자가 있었다. 금속 도구는 천으로 감쌌다.문이 열리자 이헌이 안쪽에 서 있었다.“추웠죠.”“오래 안 기다렸어요.”이헌의 눈이 내 가방으로 내려갔다. 나는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도구가 있어서 제가 들게요.”“네. 계단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현관 바닥에 녹은 눈이 묻어 있었다. 이헌이 발로 매트를 당겨 물기를 가렸다. 나는 그 위에서 신발을 벗었다.코트를 벗자 목에 건 실이 옷깃에 걸렸다. 반지가 나오기 전에 손가락으로 눌러 넣었다. 이헌은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회장님 혼자 계세요?”“지금은요. 서재에 계십니다.”복도 끝에 문이 열려 있었다. 이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서재 안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회장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신문 한쪽이 접혀 있었고, 안경은 그 위에 벗어 뒀다. 내 인사를 받은 회장이 가방부터 봤다.“그 안에 다 들었나.”“장부 상태를 보고 더 필요한 건 말씀드리겠습니다.”“뜯어서 새로 만드는 건 싫어.”“기존 실을 살릴 수 있으면 살리겠습니다. 새 종이도 필요한 자리에만 붙이고요.”회장이 신문을 밀어 놓았다.“앉아서 기다리게.”나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저녁 성탄 장터』다은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우리 손을 봤다. 나는 이헌의 손에서 손가락을 뺐다. 다은이 붕어빵 봉투를 접었다.“나경아.”“응.”“이분, 내가 아는 그분 맞아?”이헌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강이헌입니다.”“서진그룹 실장님이요?”“네.”다은이 내 왼손을 봤다. 회색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이헌의 오른손에도 같은 장갑이 있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다은이 천막 기둥 옆으로 비켰다. 나도 따라갔다. 이헌은 지나가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우리 옆에 섰다.“나경이랑 할 얘기가 있는데요.”다은이 이헌에게 말했다. 평소 거래처 전화를 받을 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오늘은 제가 데려가도 되죠?”이헌은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은이랑 갈게요.”“알겠어요.”이헌이 별 장식 봉투를 내밀었다. 받으려는데 다은이 손을 뻗었다.“그건 제가 들게요.”봉투가 다은에게 넘어갔다. 나는 이헌의 오른손을 가리켰다.“장갑은요.”이헌이 장갑을 벗어 내게 줬다. 나는 빈 장갑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손바닥이 닿았던 안쪽이 아직 따뜻했다.다은은 그걸 보고 입술을 눌렀다.“차는 안 타도 돼요. 저희 집 가까워요.”“네. 조심히 가세요.”이헌은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오후 작업 마감, 저녁 성탄 장터』코트 소매를 펴다가 작업실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주원이 문 앞에서 했던 말이 일주일째 걸렸다.원하는 건 꼭 갖는 사람.나는 가방 안쪽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이헌이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입구에서 기다릴게요. 늦어도 괜찮아요.』답을 쓰려는데 문자가 하나 더 왔다.『작업 끝내고 와요.』나는 작업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장터 입구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목도리를 고쳐 매는 동안 앞에 선 아이가 아버지에게 안겼다. 아이 어깨 너머로 이헌이 보였다.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내가 손을 들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줄 바깥으로 걸었다.“많이 기다리셨어요?”“방금 왔어요.”“얼마나 방금인데요?”이헌이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8분이요.”“그건 방금 아닌데요.”“그럼 조금 기다렸어요.”이헌이 내 가방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제가 들게요. 오늘 도구는 안 가져왔어요.”“알겠어요.”손이 곧 내려갔다. 나는 빈손이 된 이헌의 손등을 보다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지난번에는 시집을 사이에 두고 앉았고, 그 전에는 서류를 펼쳐 놓았다. 오늘은 꺼낼 종이가 없었다.“어디부터 볼까요?”이헌이 안내판을 봤다.“윤나경 씨 가고 싶은 데요.”“이런 데 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