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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수장고 A열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8 16:32:37

『오늘 일정: 화요일 저녁 7시, 서진재단 방문』

휴대폰에 남은 답장을 열었다. 지하 수장고로 내려오라는 안내 아래에 출입문 위치가 적혀 있었다.

어제 노트북을 덮은 뒤에도 다은은 내 옆에 서 있었다. 나는 결국 화면을 다시 열어 보여 줬다. 약혼식에서 인사한 사람이 맞다고만 하고, 방문 시간을 적어 보냈다.

지금은 답장에 적힌 문 앞이었다.

가방에서 명함을 꺼냈다. 화요일 저녁 7시. 손으로 쓴 글씨 아래에 내 엄지가 닿았다. 명함을 안주머니에 넣고 초인종을 눌렀다.

문 안쪽에서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났다.

강이헌이 문을 열었다.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검은 재킷은 안쪽 의자에 걸려 있었다. 셔츠 소매를 두 번 접은 팔이 문을 잡고 있었다. 나는 출입문 옆 안내판부터 봤다.

『서진재단 도서관 수장고』

“도서관 담당자분은요?”

“퇴근했습니다. 책은 제가 보여 드려도 된다고 확인받았어요.”

나는 열린 문 안을 들여다봤다. 서가 사이에 켜진 조명 아래로 빈 통로가 보였다.

“오늘은 실물 확인만 할게요. 견적은 작업실에 돌아가서 보내고요.”

“네. 그러세요.”

이헌은 먼저 들어가지 않고 옆으로 비켰다. 내가 문턱을 넘은 뒤에야 문을 닫았다.

잠금장치가 맞물리는 소리에 돌아보자 문 안쪽 손잡이를 가리켰다.

“나가실 때는 저것만 누르면 됩니다.”

나는 손잡이를 확인하고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서가 끝에 작업대가 있었다. 그 위에 책을 놓을 받침과 목록이 준비돼 있었다. 물컵도 꽃도 없었다. 사진으로 봤던 책들이 옆 수레에 누워 있었다.

“가방은 여기 두셔도 됩니다.”

이헌이 빈 의자를 당겼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수첩과 연필을 꺼냈다. 그때 벽에 붙은 습도계가 눈에 들어왔다.

62%였다.

“여기 습도가 계속 이랬어요?”

이헌도 벽을 봤다.

“제가 왔을 때도 저 숫자였습니다.”

수레 아래쪽 책의 표지가 벌어져 있었다. 나는 몸을 숙여 책과 선반 사이를 살폈다.

“이러면 책이 다 휘어요. 제습기는 안 켜 두세요?”

“어디 있는지 확인할게요.”

이헌이 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지하 수장고입니다. 제습기 가동 상태 확인해 주세요.”

이헌은 통화를 하면서 벽 쪽으로 갔다. 나는 수레에서 가장 가까운 책의 번호를 목록과 맞췄다. 표지를 누르지 않고 옆에서 보니 종이 끝도 조금 벌어져 있었다.

“지금 켜면 되는 겁니까?”

휴대폰을 내린 이헌이 물었다.

“바람이 책에 바로 닿지 않게 해 주세요. 급하게 낮추는 것도 좋지 않아요. 보관 기준이 있는지 먼저 확인하시고요.”

이헌은 다시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들으셨죠. 기록도 같이 확인해 주세요.”

나는 수첩 첫 줄에 습도와 확인 시간을 적었다. 휴대폰으로 습도계를 찍기 전에 이헌을 봤다.

“작업 기록으로 사진 남겨도 될까요?”

“책과 보관 상태는 찍으셔도 됩니다. 다른 자료가 들어가면 제가 확인할게요.”

수레 너머에는 종이 상자가 쌓여 있었다. 나는 화면에서 상자가 빠지도록 위치를 옮겼다.

통화가 끝나자 이헌이 작업대 건너에 섰다.

“시설팀에서 원격으로 켰답니다. 잠시 뒤에 내려와서 확인하겠다고 했어요.”

“그럼 그동안 책 볼게요.”

가방에서 받침천을 꺼내 책 아래에 깔았다. 표지를 조금 열자 이헌의 손이 움직였다가 멈췄다.

“잡아 드릴까요?”

“반대쪽 받침을 조금 당겨 주세요. 책은 안 잡으셔도 돼요.”

이헌이 시키는 대로 받침을 옮겼다.

사진에서는 끊어진 실만 보였지만 실물을 보니 전에 덧댄 종이도 있었다. 가장자리의 풀이 굳어 누렇게 남아 있었다. 나는 벌어지는 만큼만 펼쳐 안쪽을 살폈다.

“이건 등을 다시 붙이는 것만으로는 안 돼요.”

“전부 뜯어야 합니까?”

“아직은 몰라요. 예전에 쓴 풀이 어디까지 들어갔는지 봐야 해요. 억지로 벌리면 종이부터 찢어져요.”

나는 책을 닫고 목록에 표시했다.

이헌은 재촉하지 않았다. 내가 책을 옮기면 빈 받침을 당겨 놓았고, 사진을 찍을 때는 손을 뺐다. 소매 끝이 책에 닿을 듯하자 팔꿈치까지 접어 올렸다.

나는 연필을 멈췄다.

바에서 시집을 펼치던 손도 저랬다. 찢어진 등을 손바닥으로 받치고, 내가 보겠다고 할 때까지 책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쪽도 볼까요?”

이헌의 말에 목록으로 눈을 내렸다.

“네. 아래에 있는 책부터요.”

수레에서 책을 옮기다 표지 밑에 낀 종이표가 떨어졌다. 이헌이 몸을 숙여 주웠다. 종이표에 적힌 번호를 읽더니 바로 끼우지 않고 내 앞에 놓았다.

“어디에 있었는지 못 봤습니다.”

“괜찮아요. 사진에 남아 있어요.”

휴대폰 사진을 확대해 위치를 찾았다. 나는 종이표를 따로 봉투에 넣고 번호를 옮겨 적었다.

“다시 꽂지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끊어진 종이가 안쪽에 걸려 있을 수도 있거든요.”

이헌이 빈손을 내려다봤다.

“주워 드리는 것도 조심해야겠네요.”

“모르면 물어보시면 돼요.”

말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이헌은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나는 먼저 다음 책으로 손을 옮겼다.

책을 받아 들 때마다 작업대 너머로 손이 가까워졌다. 나는 책을 가운데에 놓아 달라고 했다. 이헌은 그 뒤로 내가 손을 뗀 다음에 책을 옮겼다.

◈

27권을 모두 확인한 뒤에는 목록 한쪽이 연필 자국으로 채워졌다.

나는 상태가 다른 책끼리 나눠 놓고 수첩을 펼쳤다.

“일부는 여기서 작업해야겠어요. 옮기다가 더 벌어질 수 있어서요. 나머지는 반출 허가가 나면 작업실로 가져가고요.”

“필요한 절차를 적어 주시면 도서관에 전달하겠습니다.”

“담당자분하고도 직접 얘기하고 싶어요.”

“메일에 참조로 넣어 드릴게요.”

이헌이 서류철을 열었다. 내가 어제 물어본 내용에 답을 적어 둔 종이였다. 희망 납기와 반출 절차 아래에 예산 범위도 있었다.

금액을 읽고 다시 책들을 봤다.

너무 많지도, 눈에 띄게 적지도 않았다. 작업 시간을 잡아 보면 내가 보통 받는 값과 크게 다르지 않을 범위였다.

“다른 곳 견적도 받으셨나요?”

“지난번 복원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이번 견적은 윤나경 씨가 보내 주시면 됩니다.”

“제가 생각한 금액이 이것보다 높으면요?”

“사유를 적어 주세요. 도서관에서 검토할 겁니다.”

나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실장님이 정하시는 게 아니고요?”

“제가 시작한 의뢰는 맞습니다. 검수와 비용 처리는 도서관에서 합니다.”

나는 수첩에 적은 작업 시간을 다시 더했다. 재료를 새로 구해야 하는 책에는 따로 표시했다.

“한꺼번에 끝내는 조건이면 못 맡아요. 지금 작업실에 들어온 책도 있어서요.”

“가능한 일정으로 보내 주세요.”

“그럼 견적은 나눠서 낼게요. 먼저 손봐야 할 책과 기다려도 되는 책이 있어요.”

“알겠습니다.”

나는 종이 끝을 엄지로 쓸어 보고 서류철에 도로 끼웠다. 정말 책을 고치는 일이었다. 내가 따져야 할 건 시간과 비용, 책의 상태였다.

그런데도 수첩을 덮지는 못했다.

“왜 저희 작업실이었어요?”

이헌이 의자에 걸린 재킷 쪽을 봤다.

“책을 보고 먼저 말을 거셨잖아요.”

“그건 등이 찢어져 있어서요.”

“그냥 두면 어떻게 되는지도 말씀하셨고요. 그래서 맡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호텔에서 만난 사람한테요?”

“책 얘기를 할 때는 일을 하시는 분 같았습니다.”

나는 연필에 묻은 종이 가루를 손끝으로 털었다.

“그 시집도 가져오셨어요?”

“네.”

재킷 안주머니 위로 이헌의 시선이 잠깐 갔다. 하지만 책을 꺼내지는 않았다.

“오늘 같이 볼까요?”

“오늘은 이 책들만 보시죠. 정식으로 부탁드릴 때 가져오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고 목록 아래에 내 이름을 썼다.

출입문 쪽에서 소리가 났다.

연필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이헌이 문을 보더니 내게 말했다.

“시설팀일 겁니다.”

나는 수첩을 작업대 쪽으로 조금 더 당겼다.

이헌이 문을 열었다. 작업복을 입은 직원이 기계 상태를 보고 벽의 습도계를 확인했다. 이헌은 서가에서 떨어진 자리에 서서 설명을 들었다.

나는 목록에서 빠진 항목을 채웠다. 직원이 돌아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문이 닫힌 뒤에도 연필을 쥐고 있었다.

이헌이 작업대로 돌아왔다.

“확인할 게 더 있습니까?”

나는 끊어지지 않은 실 옆에 그어 놓은 표시를 한 번 덧그었다.

“책은 다 봤어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이헌이 서류를 모았다. 그 위에 내 수첩은 올리지 않았다.

나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그날 밤 일은요.”

서류를 맞추던 손이 멈췄다.

“책 얘기만 한 건 아니잖아요.”

이헌은 서류를 작업대에 놓았다.

“기억해요. 없던 일로 하자는 말은 안 할게요.”

나는 가방 입구를 벌렸다가 도로 놓았다.

작업대 하나가 사이에 있었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거리였다. 그런데 눈을 피하려면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려야 했다.

“저도 술 때문에 기억 안 난다고 할 생각 없어요.”

“네.”

“제가 먼저 한 것도 알아요.”

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매를 한 번 더 접으려다가 이미 팔꿈치에 걸린 천을 펴기만 했다.

나는 그 손을 보지 않으려고 목록을 뒤집었다.

“그때는 누군지 몰랐어요.”

“저도 몰랐습니다.”

“알았으면 안 그랬을 거예요.”

말을 끝낸 뒤 입술 안쪽을 눌렀다. 이헌은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그 말은 제가 대신 정할 수 없죠.”

“무슨 뜻이에요?”

“윤나경 씨가 하신 말 그대로 듣겠다는 뜻입니다.”

수장고 안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가방끈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에 가죽이 접혔다.

“앞으로는 일로만 뵙고 싶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너무 빨리 돌아온 답에 가방을 들지 못했다.

이헌이 작업대 옆으로 나왔다. 나는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멈춘 이헌은 재킷부터 집었다.

내 쪽으로 더 오지 않았다.

나는 바늘을 넣어 둔 가방 안쪽 주머니를 닫았다. 지퍼 끝이 손톱에 걸렸다가 빠졌다.

“약혼식에서도 그렇게 하셨어야죠.”

이헌이 재킷을 든 채 나를 봤다.

“처음 뵙겠다고 하시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인사하셨잖아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 꺼낼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식장 문 앞에서는 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는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작업대에 놓았다. 모서리가 눌린 쪽이 위로 향했다.

“이유가 궁금하면 오라고 하셨죠. 책은 봤어요. 이제 그 얘기를 듣고 싶어요.”

이헌은 명함을 집지 않았다.

“약혼을 다시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다시 생각할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지금 다는 말 못 해요. 대신 거짓말은 안 해요.”

나는 명함을 가방에 넣었다.

“그 말만 믿고 약혼을 그만둘 수는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건 실장님이 주원 씨 삼촌이라는 것뿐이에요. 저한테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

이헌의 손에서 재킷이 조금 내려갔다. 안주머니에 든 책 모서리가 천을 밀고 있었다.

나는 문 쪽으로 가방을 옮겼다. 이헌은 길을 막지 않았다.

“답을 못 하시면 제가 알아서 판단할게요.”

“그러셔야죠.”

“말씀은 안 하시면서 하지 말라고만 하시면 곤란해요. 저도 생각하고 결정한 일이에요.”

“그 결정에 필요한 걸 다 들으셨는지 걱정됩니다.”

나는 손잡이 앞에서 돌아섰다.

“누구한테 뭘 들어야 하는데요?”

이헌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나는 대답을 기다렸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가 멀어졌다.

“확인한 것부터 말씀드릴 겁니다.”

“언제요?”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겠습니다.”

나는 손잡이를 눌렀다. 문이 조금 열리자 복도에서 찬 공기가 들어왔다. 나가면 됐다. 견적서를 보내고 도서관 담당자와 일정을 잡으면 됐다.

그런데 손잡이를 놓지 못한 채 다시 물었다.

“내 약혼은 실장님 일이 아니잖아요.”

“당신이 다칠 거라서요.”

(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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