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월요일, 제본소 밀린 작업 확인』
명함 뒷면의 글씨를 다시 읽었다.
화요일 저녁 7시. 장소는 없었다.
나는 갈색 가방에서 꺼낸 명함을 작업대에 놓았다. 주차장에서 챙긴 뒤 이틀 동안 가방 안에 둔 탓에 모서리가 조금 눌려 있었다.
창가 프레스기에는 금요일에 넣어 둔 책이 그대로 있었다. 나사를 풀고 누름판을 들었다. 덧댄 종이가 들뜨지 않았는지 살핀 뒤 책을 옆으로 세웠다.
“벌써 왔어?”
다은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종이봉투를 든 손으로 문고리를 붙잡느라 팔꿈치에 걸친 가방이 흘러내렸다.
나는 가방부터 받아 의자에 걸었다.
“올라오면서 먹었어?”
“하나만. 식으면 맛없잖아.”
다은은 봉투를 작업대에 올리려다가 내 손을 보고 멈췄다. 나는 손바닥을 편 채 문 옆 선반을 가리켰다.
“종이 있는 데 말고.”
“알아. 여기 놓으려고 했어.”
봉투를 내려놓은 다은이 내 왼손을 잡아 들었다.
“반지는?”
“일해야지.”
반지는 아침에 빼서 실에 꿰어 목에 걸었다. 앞치마 안쪽에서 작은 무게가 느껴졌다. 나는 목선을 조금 당겨 보여 주고 다시 넣었다.
“진짜 약혼했네.”
“토요일에 사진 봤잖아.”
“사진으로 보는 거랑 다르지. 어제도 보내 준 거 확대해서 봤어. 드레스 뒤에 단추는 원래 그렇게 생긴 거야?”
나는 프레스기 옆에 놓은 받침판을 포갰다.
“하나 떨어져서 다시 달았어.”
“거기까지 가서 바느질했어?”
“바늘 가져가길 잘했지.”
다은이 내 앞치마 주머니를 봤다. 흰 접지칼 옆으로 바늘을 꽂아 둔 천이 조금 나와 있었다.
“너는 그날도 일했구나.”
“단추 달았다고 일한 건 아니고.”
“그럼 신랑 얘기 해 봐. 사진 찍을 때 뭐라고 했어?”
나는 책 아래에 끼운 종이를 뺐다.
“손이 차다고.”
“그다음에는?”
“밥 먹자고.”
“평소랑 똑같네. 넌 약혼식에서도 밥 얘기를 해?”
“주원 씨가 했어.”
다은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내게 약혼식 사진을 보여 줬다. 내 옆에 선 주원이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었다.
“실물도 잘생겼더라. 어머님이 인사시킨 삼촌도 그렇고.”
사진 끝에 이헌의 어깨가 걸려 있었다. 회장 의자 뒤에 서 있던 때였다.
나는 화면 대신 작업대의 명함을 봤다.
“확대하지 마. 흐려져.”
“이미 해 봤어. 나이도 별로 차이 안 나 보이던데.”
“다은아, 풀부터 확인해 줘. 금요일에 만든 거.”
다은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내 얼굴을 살폈다.
“왜. 집안 어른 얘기 하면 안 돼?”
“오늘 보낼 책부터 끝내자.”
“알겠어. 대신 점심 먹으면서 마저 물어볼 거야.”
다은이 냉장고 쪽으로 가자 명함을 집었다. 버릴 종이를 모으는 통 위까지 가져갔다가 손을 멈췄다.
안에는 풀 묻은 종이가 들어 있었다. 이 위에 놓으면 다시 꺼내도 얼룩이 남을 수 있었다.
나는 명함을 서랍 안으로 옮겼다.
서랍을 닫으려는데 손잡이 옆에 끼운 주문서가 눈에 들어왔다. 내일 저녁 일정도 여기에 적어 두어야 할까.
서랍을 다시 열었다. 명함을 꺼내 노트북 아래에 끼웠다. 3번째로 놓은 자리에서는 흰 모서리만 보였다.
“쓰게?”
다은이 물었다.
나는 노트북에서 손을 뗐다.
“아니. 아직.”
“풀 말이야. 냄새 괜찮은데 이거 오늘 쓸 거냐고.”
다은이 통을 들어 보였다.
“응. 작은 붓으로 덜어 줘.”
나는 앞치마 끈을 다시 묶었다.
◈
오전 작업을 끝낼 무렵 계단에서 종이 가방 끄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 골목 아래 사는 할머니가 손잡이를 양손으로 쥐고 서 있었다. 가방 밑이 벌어져 책 모서리가 나와 있었다.
“올라오실 때 전화하시지 그러셨어요.”
“별로 무겁지도 않은데 뭘.”
나는 가방 바닥을 받쳤다. 다은이 빈 의자를 가져와 문 앞에 놓았다.
할머니는 앉자마자 가방 안을 들여다봤다.
“이거 고칠 수 있어?”
안에는 공책이 여러 권 들어 있었다. 윗부분은 말라 있었지만 아래쪽은 종이끼리 붙어 두꺼워졌다.
“언제 젖었어요?”
“그저께. 다용도실에서 물이 샜어. 상자까지 젖은 걸 늦게 봤지.”
“집에서 떼어 보셨어요?”
할머니가 맨 위 공책을 가리켰다.
“조금. 글씨까지 떨어져서 그만뒀어.”
나는 손을 씻고 돌아와 빈 작업대에 공책을 펼쳤다. 표지에 적힌 달은 읽을 수 있었다. 그 아래에는 쌀값과 버스비가 나란히 쓰여 있었다.
젖은 쪽을 들추지는 않았다. 마른 부분만 받쳐 벌리자 사이에서 영수증이 나왔다.
“영수증도 그대로 두셨어요?”
“영감이 끼워 둔 거야. 난 몰랐어.”
할머니는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40년을 썼어. 뭘 그리 적나 했는데 죄다 이런 거더라. 두부 사고, 전구 사고.”
다은이 따뜻한 물을 내왔다. 할머니는 컵을 받으면서도 공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들려 있는 종이 끝을 엄지로 쓸어 봤다. 글씨가 묻어나는지 확인한 뒤 손을 치웠다.
“억지로 떼지 않으신 건 잘하셨어요. 여기는 아직 축축해요.”
“말리면 저절로 떨어져?”
“안 붙은 데부터 조금씩 벌려야 해요. 다 마른 뒤에는 상태를 다시 보고요.”
다은에게 망 받침과 얇은 종이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받침 위에 공책을 놓고 벌어지는 쪽만 조금 열었다.
“이렇게 세워 놓을게요. 바람은 직접 세게 쐬면 안 되고요.”
할머니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럼 내가 집에서 해도 되겠네.”
“나머지 책도 가져오셨어요?”
“집에 더 있어. 멀쩡한 것도.”
“안 젖은 건 따로 빼 두세요. 젖은 책 위에 포개지 마시고요. 혹시 붙어 있으면 오늘처럼 그냥 가져오세요.”
나는 가장자리만 붙은 마른 장을 골랐다. 얇은 주걱을 틈에 넣고 멈췄다. 종이가 따라 들리지 않는 곳에서만 조금씩 움직였다.
할머니가 컵을 내려놓았다.
“손으로 잡아당기면 안 되는구나.”
“여기 보세요. 글씨 있는 부분이 붙어 있어요. 한꺼번에 당기면 이쪽도 떨어져요.”
떼어 낸 부분 아래로 연필 글씨가 보였다.
『구두 수선』
옆에는 금액이 적혀 있었고, 줄 끝에 작은 글씨가 더 있었다.
할머니가 안경을 올렸다.
“그거 내 구두야.”
나는 공책을 할머니 쪽으로 조금 돌렸다.
“기억나세요?”
“굽이 자꾸 빠져서 버린다고 했더니 갖고 갔어. 새로 사는 것보다 싸다면서.”
할머니가 손을 뻗다가 거뒀다. 나는 마른 쪽 가장자리를 짚어 드렸다.
“여기는 만지셔도 돼요.”
할머니는 그곳에 손가락을 얹었다.
“계산은 잘하는 사람이었어. 자기 약값은 가끔 빼먹고.”
다은이 내 뒤에서 빈 받침을 내려놓았다. 나는 공책의 펼친 쪽을 사진으로 남겼다. 원래 끼워진 영수증도 위치를 적고 따로 받쳤다.
“이 종이도 같이 보관해 드릴게요.”
“그건 버려도 되는데.”
“구두 맡긴 데서 준 거예요.”
할머니가 영수증을 다시 봤다.
“그럼 둬야겠네.”
나는 접수 용지에 공책 상태와 맡긴 수량을 적었다. 빠진 종이가 있는지는 다 마른 뒤 확인하기로 했다.
할머니는 내가 적는 손 옆으로 얼굴을 가까이 댔다.
“오래 걸려도 되니까, 글씨만 좀 남겨 줘.”
“떨어진 조각도 같이 챙길게요. 오늘은 말리는 데까지만 하고 연락드릴게요.”
견적을 쓰자 할머니가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퍼가 천에 걸려 열리지 않았다. 다은이 손을 내밀었지만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할 수 있어.”
나는 견적에서 표지 교체 비용을 지웠다.
“표지는 그대로 써도 되겠어요. 벌어진 데만 받쳐 주면 돼요.”
“그럼 얼마 빠져?”
금액을 다시 적어 보여 드렸다. 할머니는 지갑 여는 손을 멈추고 나를 봤다.
“너무 깎아 주는 거 아니야?”
“새 표지를 안 쓰니까요.”
“다음에는 돈 되는 거 가져올게.”
“안 젖은 책 가져오세요.”
할머니가 웃었다. 나는 지갑에 걸린 천을 손톱으로 눌러 빼 드렸다.
계단 아래까지 가방을 들어 드리고 돌아왔을 때 다은은 남은 붕어빵을 접시에 옮기고 있었다.
“네 것도 남겨 놨어.”
나는 손을 씻고 선반으로 갔다.
“너 하나만 먹었다며.”
“아침에는 하나였지.”
다은이 반으로 나눈 붕어빵을 내밀었다. 나는 팥이 떨어지지 않게 접시 위에서 받아 먹었다.
◈
점심 뒤에는 포장할 책을 가운데 작업대로 옮겼다.
다은이 상자를 접는 동안 나는 책마다 수선한 자리를 확인했다. 눌러 붙인 등이 마른 것을 보고 얇은 종이로 감쌌다.
“오늘 아버님 공장 가?”
다은이 테이프 끝을 찾아 문지르며 물었다.
“아니. 왜?”
“토요일에 안색 안 좋으시더라. 식 끝나고도 계속 서 계시던데.”
나는 포장지의 접힌 선을 눌렀다.
“사람 많은 데 계시면 피곤해하셔.”
“너도 그렇고?”
“나는 드레스가 불편했어.”
다은은 테이프를 끊어 상자 밑에 붙였다. 더 묻지 않고 내 쪽으로 상자를 밀어 줬다.
휴대폰이 울렸다. 주원이었다.
『작업 중이에요? 반지 빼 놓고 잃어버리면 안 돼요.』
나는 목에 건 실을 앞치마 안에서 짚었다.
『목에 걸었어요. 잘 챙기고 있어요.』
곧 답이 왔다.
『그게 편하겠네. 이번 주는 나도 바빠서 연락 좀 늦을 수 있어요.』
나는 알겠다고 보내고 휴대폰을 뒤집었다. 다은은 상자에 붙일 주소를 확인하고 있었다.
책을 넣은 뒤 뚜껑을 닫았다. 다은이 테이프를 길게 당기는 동안 노트북을 켰다.
화면 아래에 새 메일 알림이 떠 있었다.
보낸 곳은 서진재단 도서관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멈췄다. 노트북 밑에 끼운 명함이 손목 아래 닿았다.
메일 제목에는 고서 복원 견적 요청이라고 적혀 있었다.
“납품 확인 왔어?”
“아니. 새 의뢰.”
나는 첨부된 목록을 열었다.
27권이었다. 책마다 크기와 쪽수, 손상된 부분을 나눠 적어 두었다. 물에 젖은 흔적, 등 분리, 실 끊어짐. 사진 속 책에는 얇은 종이표가 끼워져 있었다.
작업대 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맨 위 책은 겉표지만으로 상태를 알기 어려웠다. 사진을 확대하자 책등 안쪽에 남은 실이 보였다. 끊어진 자리와 풀린 자리가 섞여 있었다.
나는 견적용 수첩을 펼쳤다.
“바로 답해야 돼?”
다은이 물었다.
“실물을 봐야 금액을 잡을 수 있어.”
“몇 권인데?”
“27권.”
다은이 상자에서 손을 뗐다.
“우리 둘이 할 수 있어?”
“기간부터 물어봐야지. 한꺼번에 끝내 달라는 거면 어렵고.”
메일로 돌아가 납기를 찾았다. 희망 일정은 협의할 수 있고, 현장 확인 뒤 견적서를 보내 달라고 적혀 있었다. 사진 촬영과 반출에 관한 안내도 붙어 있었다.
수첩에 확인할 것을 적었다. 종이 상태, 기존 수선 여부, 보관 환경.
마지막 줄을 적으려다 펜을 멈췄다.
본문 아래 담당자 이름이 있었다.
『서진그룹 전략기획실 강이헌』
메일을 위로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전화번호를 명함 앞면과 대조했다. 끝자리까지 맞았다.
나는 명함을 노트북 옆에 놓았다.
토요일에 문 앞에서 들은 말은 짧았다. 약혼을 하지 말라고 했고, 이유는 듣지 못했다.
지금 화면에 있는 건 책 사진과 목록이었다. 내가 확인해야 할 부분을 적을 자리도 넉넉했다.
답장 창을 열었다.
방문 가능한 시간을 묻는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 내일 저녁 7시를 먼저 꺼내면 명함을 읽었다는 뜻이 됐다. 모르는 척 다른 시간을 잡는 것도 이상했다.
나는 이름부터 적었다.
『안녕하세요. 나경제본소 윤나경입니다.』
커서가 이름 뒤에서 깜빡였다.
다은이 테이프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답장 창을 줄이고 목록을 다시 띄웠다.
“뭐래? 급하대?”
“그런 말은 없어.”
“그럼 사진 좀 보자. 등만 고치는 건지 봐야지.”
다은이 내 의자 뒤로 왔다. 나는 화면을 조금 돌려 줬다. 다은은 몸을 숙여 사진을 보다가 아래로 손가락을 옮겼다.
“담당자가 그룹 사람이네. 도서관에서 직접 맡기는 게 아니야?”
“확인해 봐야 해.”
다은의 손가락이 이름 앞에서 멎었다.
“강이헌? 이거 토요일에 그 삼촌 아냐?”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
(4화 끝)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오전, 본가 회장님 장부 원본 수선』『수요일, 회장님 장부 원본 볼 수 있어요.』수요일 아침, 본가 현관 앞에서 문자를 다시 읽고 화면을 껐다. 가방 안에는 얇은 종이와 붓, 실을 나눠 넣은 상자가 있었다. 금속 도구는 천으로 감쌌다.문이 열리자 이헌이 안쪽에 서 있었다.“추웠죠.”“오래 안 기다렸어요.”이헌의 눈이 내 가방으로 내려갔다. 나는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도구가 있어서 제가 들게요.”“네. 계단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현관 바닥에 녹은 눈이 묻어 있었다. 이헌이 발로 매트를 당겨 물기를 가렸다. 나는 그 위에서 신발을 벗었다.코트를 벗자 목에 건 실이 옷깃에 걸렸다. 반지가 나오기 전에 손가락으로 눌러 넣었다. 이헌은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회장님 혼자 계세요?”“지금은요. 서재에 계십니다.”복도 끝에 문이 열려 있었다. 이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서재 안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회장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신문 한쪽이 접혀 있었고, 안경은 그 위에 벗어 뒀다. 내 인사를 받은 회장이 가방부터 봤다.“그 안에 다 들었나.”“장부 상태를 보고 더 필요한 건 말씀드리겠습니다.”“뜯어서 새로 만드는 건 싫어.”“기존 실을 살릴 수 있으면 살리겠습니다. 새 종이도 필요한 자리에만 붙이고요.”회장이 신문을 밀어 놓았다.“앉아서 기다리게.”나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저녁 성탄 장터』다은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우리 손을 봤다. 나는 이헌의 손에서 손가락을 뺐다. 다은이 붕어빵 봉투를 접었다.“나경아.”“응.”“이분, 내가 아는 그분 맞아?”이헌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강이헌입니다.”“서진그룹 실장님이요?”“네.”다은이 내 왼손을 봤다. 회색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이헌의 오른손에도 같은 장갑이 있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다은이 천막 기둥 옆으로 비켰다. 나도 따라갔다. 이헌은 지나가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우리 옆에 섰다.“나경이랑 할 얘기가 있는데요.”다은이 이헌에게 말했다. 평소 거래처 전화를 받을 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오늘은 제가 데려가도 되죠?”이헌은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은이랑 갈게요.”“알겠어요.”이헌이 별 장식 봉투를 내밀었다. 받으려는데 다은이 손을 뻗었다.“그건 제가 들게요.”봉투가 다은에게 넘어갔다. 나는 이헌의 오른손을 가리켰다.“장갑은요.”이헌이 장갑을 벗어 내게 줬다. 나는 빈 장갑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손바닥이 닿았던 안쪽이 아직 따뜻했다.다은은 그걸 보고 입술을 눌렀다.“차는 안 타도 돼요. 저희 집 가까워요.”“네. 조심히 가세요.”이헌은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오후 작업 마감, 저녁 성탄 장터』코트 소매를 펴다가 작업실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주원이 문 앞에서 했던 말이 일주일째 걸렸다.원하는 건 꼭 갖는 사람.나는 가방 안쪽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이헌이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입구에서 기다릴게요. 늦어도 괜찮아요.』답을 쓰려는데 문자가 하나 더 왔다.『작업 끝내고 와요.』나는 작업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장터 입구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목도리를 고쳐 매는 동안 앞에 선 아이가 아버지에게 안겼다. 아이 어깨 너머로 이헌이 보였다.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내가 손을 들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줄 바깥으로 걸었다.“많이 기다리셨어요?”“방금 왔어요.”“얼마나 방금인데요?”이헌이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8분이요.”“그건 방금 아닌데요.”“그럼 조금 기다렸어요.”이헌이 내 가방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제가 들게요. 오늘 도구는 안 가져왔어요.”“알겠어요.”손이 곧 내려갔다. 나는 빈손이 된 이헌의 손등을 보다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지난번에는 시집을 사이에 두고 앉았고, 그 전에는 서류를 펼쳐 놓았다. 오늘은 꺼낼 종이가 없었다.“어디부터 볼까요?”이헌이 안내판을 봤다.“윤나경 씨 가고 싶은 데요.”“이런 데 자주
『오늘 일정: 12월 7일 토요일, 주원 씨 집에서 신년 행사 준비』현관 앞에서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초인종 옆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손을 들었다가 코트 소매부터 내렸다.어제 석진 앞에서 접어 쥐었던 손수건이 주머니 안에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빨았는데도 다림질할 틈이 없었다. 손수건 모서리를 밀어 넣고 초인종을 눌렀다.안에서 냄비 뚜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잠깐만요.”주원이 문을 열었다. 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끈 한쪽이 풀려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생각보다 일찍 왔네.”“약속한 시간인데요.”주원이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봤다.“그러네. 들어와요. 슬리퍼는 거기.”현관에 여자 구두는 없었다. 신발장 위에는 검정 휴대폰과 열쇠가 놓여 있었다. 나는 구두를 벗어 나란히 붙이고 갈색 가방을 들었다.“코트 줘요.”“제가 걸게요.”주원이 옷장 문을 열어 줬다. 빈 옷걸이에 코트를 걸고 돌아서자 탄 냄새가 났다.주원도 코를 찡그렸다.“아, 불.”주원이 주방으로 뛰어갔다. 나는 가방을 식탁 의자에 놓고 따라갔다.◈프라이팬 한쪽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주원은 불을 끄고 뒤집개로 계란을 들어 올렸다. 밑면이 검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이거 원래 이렇게 빨리 타요?”“불이 너무 셌어요.”“영상에서는 센 불로 시작하던데.”“계란 붓기 전에 줄여야 해요.”주원은 싱크대 옆에 세워 둔 휴대폰을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이헌이 내 의자 옆에서 손을 내렸다.“주원이 약혼녀입니다, 형님.”나는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무릎 위 파일이 기울어 견적서 모서리가 밖으로 나왔다. 집게를 눌러 종이를 밀어 넣었다.석진은 이헌을 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색 손목시계 위로 셔츠 끝을 당겼다.“알지.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식사 중이었니?”“마쳤습니다.”나는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헌은 탁자에 남은 서류를 모았다. 내 휴대폰은 화면을 아래로 향한 채 놓여 있었다.석진이 문 쪽으로 비켜섰다.“나가는 길이면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주원이한테 듣는 것보다 직접 듣고 싶은 게 있어서.”“여기서 하셔도 됩니다.”이헌이 말했다.석진은 손목을 내린 채 웃었다. 열린 문 밖으로 조현석의 책상이 보였다.나는 휴대폰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괜찮아요. 말씀 듣고 갈게요.”이헌이 나를 봤다. 나는 가방 안에 파일을 세워 넣고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 의자와 탁자 사이를 빠져나오려는데 이헌이 길을 비켜 줬다.손등 사이가 10cm쯤 남았다. 나는 그 손을 지나 문으로 갔다.◈조현석이 옷걸이에서 내 겉옷을 꺼냈다.“견적서는 받으셨습니까?”“네. 감사합니다.”나는 겉옷을 입고 가방끈을 어깨에 걸었다. 조현석은 내 방문증을 보고는 회수함 쪽을 가리켰다.“내려가실 때 저기에 넣으시면 됩니다.”“잠깐 이야기하고 내려갈게요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사진을 더 키우자 서명의 테두리가 깨졌다. 나는 화면을 원래 크기로 돌리고 납품 확인서를 옆에 놓았다. 창가에서 다시 봐도 펜이 들어간 자리는 달랐다.“그렇게 보면 눈 아파.”다은이 작업대에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휴대폰을 거치대에 세웠다.“원본을 봐야겠어. 복사하면서 없어진 부분도 있을 테니까.”“어제 그 서류?”“응. 아버지가 안 썼다는 거.”다은은 확인서가 구겨지지 않게 찻잔을 멀리 옮겼다.“혼자 가서 따지지는 말고.”“오늘은 물어보러 가.”나는 시집 견적서를 출력했다. 표지 보강과 책등 수선, 본문 세척을 나눠 적은 종이였다. 아래쪽에 작업 전 확인이 필요하다는 문장을 넣고 서명했다.다은이 출력물을 보다가 내 가방을 봤다.“그런데 견적서는 보내도 되잖아.”파일 집게를 누르던 손을 멈췄다.“사진을 직접 보여 주려고.”“사진도 보낼 수는 있고.”나는 집게를 닫았다. 다은은 더 묻지 않고 파일 모서리를 맞춰 줬다.휴대폰에는 아침에 받은 이헌의 답장이 있었다.『점심 무렵에 오면 됩니다. 조 비서에게 말해 둘게요.』그 아래에 내가 보낸 답이 붙어 있었다.『시집 견적서 가지고 갈게요.』나는 화면을 끄고 납품 확인서를 별도 파일에 넣었다. 견적서와 섞이지 않게 가방 안쪽에 세워 넣은 뒤 앞치마를 벗었다.◈전략기획실 앞에서 방문증을 다시 확인했다. 이름 아래에 방문 목적이 적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