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목요일 저녁, 서진 본가 가족 식사』
“다친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나는 수장고 문을 잡은 채 물었다. 이헌은 작업대에 놓인 서류를 돌아봤다.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확인되면 연락 주세요. 제가 판단할 수 있게요.”
“그러겠습니다.”
나는 복도로 나왔다. 문이 닫히기 전에 이헌이 내 수첩을 가리켰다.
“견적서는 도서관 담당자에게 바로 보내셔도 됩니다.”
“내일 보내겠습니다.”
나는 수첩을 가방에 넣고 승강기 버튼을 눌렀다.
◈
주원이 본가 대문 앞에서 차를 세웠다. 서울 북쪽 언덕을 올라오는 동안 히터를 틀어 둔 탓에 볼이 따뜻했다.
“아버지가 어려운 얘기 해도 그냥 웃어. 밥 먹으러 온 거니까.”
“어려운 얘기는 어떤 건데요?”
“결혼하고 어디 살 거냐, 뭐 그런 거.”
주원이 차 안 거울을 보며 머리를 눌렀다. 나는 무릎에 놓은 갈색 가죽 가방과 과자 상자를 들었다. 안쪽 주머니에 장갑과 바늘이 있었다. 집을 나서기 전까지 책을 고치다 와서 손톱 밑에 풀 자국도 남아 있었다.
“긴장했어?”
“처음 뵙는 자리니까요.”
“할아버지는 별말 안 하셔. 엄마한테만 잘하면 돼. 그치?”
주원은 먼저 내려 대문 옆 버튼을 눌렀다. 나는 손등으로 치마의 접힌 곳을 폈다.
문이 열리고 정원이 보였다. 돌길 끝에 2층 양옥이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경란이 내 손에 든 상자부터 봤다.
“빈손으로 오라니까.”
“차랑 드실 수 있는 걸로 골랐어요.”
경란은 상자를 받아 안쪽에 놓았다. 진주 귀걸이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흔들렸다.
“주원아, 할아버지 모셔 와. 나경이는 이리 오고.”
주원이 복도로 사라졌다. 경란은 내 소매와 치맛단을 차례로 보고 식당으로 데려갔다.
식탁에는 여섯 자리의 그릇이 놓여 있었다. 경란이 한쪽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넌 여기 앉아. 주원이는 네 옆.”
내 맞은편 자리는 비어 있었다. 물잔만 채워져 있고 수저는 종이 받침 위에 놓여 있었다.
“삼촌도 오시나요?”
“조금 늦는다는구나. 먼저 먹으라고 했어.”
나는 가방을 의자 옆에 내려놓았다. 식탁 아래에서 가방끈이 발목에 닿았다.
석진이 들어오며 손목시계를 봤다. 은테 안경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우리 며느릿감 왔구나. 집 찾기는 어렵지 않았고?”
“네. 주원 씨가 데려와 주셨어요.”
“앞으로 자주 올 텐데 길부터 익혀야지.”
석진은 웃으며 내 옆을 지나갔다. 나는 의자를 당기다 말고 다시 섰다. 복도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천천히 오세요. 안 달아나요.”
강태수 회장은 주원이 잡으려는 팔을 빼고 혼자 걸어왔다.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윤나경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은 내 얼굴을 잠깐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요.”
◈
국에서 김이 올라왔다. 회장이 수저를 든 뒤에야 경란이 내 앞의 접시를 밀어 줬다.
“먹어 봐. 주원이가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거야.”
“엄마, 지금도 좋아해.”
주원은 생선살을 집어 내 접시에 놓았다.
“자기도 먹어.”
나는 고맙다고 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맞은편 의자는 그대로 비어 있었다. 주원이 물을 따르려고 일어서자 빈자리의 물잔까지 눈에 들어왔다.
석진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작업실은 혼자 하나?”
“직원 한 명하고 같이 합니다. 대학 동기예요.”
“책 고치는 데도 사람이 많이 필요한가?”
“책마다 달라요. 물에 젖었으면 펼치기 전에 말리는 일부터 해야 해서요. 그동안 다른 책을 맡을 사람도 필요하고요.”
“그냥 붙이면 되는 게 아니구나.”
주원이 젓가락으로 자기 접시를 짚었다.
“나경 씨 손에 상처 있는 거 봤어. 바늘도 쓰더라고.”
나는 왼손 검지를 조금 접었다. 실에 눌려 생긴 굳은살이었다.
“오래된 자국이에요.”
회장의 숟가락이 국그릇 가장자리에 닿았다. 맑은 소리가 났다. 나는 말을 멈췄다.
회장은 왼손으로 그릇을 잡으려다 놓쳤다. 손끝이 떨리면서 국그릇 한쪽이 들렸다. 나는 옆으로 기울어진 그릇 밑을 받쳤다. 뜨거운 국물이 가장자리까지 올라왔다가 가라앉았다.
회장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릇을 받침 가운데에 놓고 물기가 묻은 자리를 냅킨으로 닦았다. 손을 거두자 회장이 내 손가락을 봤다.
“뜨겁지 않나.”
“괜찮습니다.”
회장은 내 대답을 듣고 그릇을 조금 당겼다. 주원이 자기 물잔을 옮겨 자리를 넓혔다.
“이거 좀 멀리 둘게요.”
경란이 입을 열려다 내 손에 들린 냅킨을 봤다. 나는 젖은 면을 안으로 접어 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회장은 다시 수저를 들었다. 아무도 그릇 이야기를 더 하지 않았다.
“고친다는 게 어디까지 되나.”
회장이 나를 보며 물었다.
“어떤 책인지 봐야 알 수 있어요.”
“오래된 장부도 하나?”
“종이 상태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달라요. 글씨를 보존하면서 묶인 곳을 고칠 수는 있습니다.”
“글씨가 지워지기도 하나?”
“물을 잘못 쓰면 그럴 수 있어요. 먼저 작은 부분을 확인합니다. 표지와 안쪽 종이에 다른 처리가 필요할 수도 있고요.”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국을 떴다. 나는 더 설명하지 않고 밥을 한술 먹었다.
벽시계를 봤을 때 약속한 시간에서 30분이 지나 있었다.
현관 쪽에서 문 닫는 소리가 났다. 나는 물잔을 내려놓았다. 경란이 식당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왔나 보다.”
이헌이 문 앞에 섰다. 검은 재킷 안에 셔츠를 입고 있었다. 수장고에서 접혀 있던 소매가 손목까지 내려와 있었다.
“늦었습니다.”
“일은 끝났고?”
석진이 묻자 이헌이 짧게 답했다.
“네, 형님.”
주원이 젓가락을 든 손으로 빈자리를 가리켰다.
“삼촌, 여기. 우리 벌써 먹고 있었어.”
이헌이 내 맞은편에 앉았다. 식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쳤다. 나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안녕하세요, 삼촌.”
“잘 지내셨습니까.”
“네.”
나는 밥그릇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수장고에서 나눴던 말은 주원도 들을 수 없는 곳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헌이 물잔을 잡는 손을 보자 내가 쥔 수저에 힘이 들어갔다.
“서로 인사는 했지?”
석진이 내게 물었다.
“네. 약혼식에서 뵀습니다.”
주원이 내 대답 뒤에 말을 붙였다.
“삼촌이 재단 책도 맡겼대요. 나경 씨 작업실에.”
경란이 나를 봤다.
“그랬니?”
“견적서를 보냈어요. 도서관 담당자분하고 일정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헌이 물잔을 내려놓았다.
“상태 확인은 끝났습니다. 나머지는 도서관에서 진행할 겁니다.”
나는 이헌이 말하는 동안 접시에 남은 생선 가시를 골랐다. 살을 다 떼고도 젓가락 끝으로 같은 자리를 건드렸다.
◈
식사가 이어지자 경란은 결혼식장 이야기를 꺼냈다. 주원이 호텔 연회장 사정을 설명했고, 석진은 듣는 동안 손목시계를 한 번 봤다.
“사돈은 요즘도 공장에 매일 나가시나?”
내 젓가락이 멈췄다.
“네. 거의 매일 가세요.”
“이제 현장 일은 사람들한테 맡기셔도 될 텐데.”
“오래 하신 일이라 직접 보셔야 편하시대요.”
석진은 생선 접시를 주원 쪽으로 밀었다.
“한번 뵈어야겠어. 전화로만 얘기하니 서로 바쁘다는 말밖에 못 하네.”
“아버지께 말씀드릴게요.”
“공장 땅이 참 좋더구나.”
나는 입안에 남은 밥을 삼켰다. 석진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길도 잘 나 있고, 서울에서도 멀지 않고. 그 넓은 땅을 그렇게 놀리기엔 아깝지.”
“공장은 돌아가고 있어요.”
말이 짧게 나왔다. 주원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젓가락을 받침에 내려놓고 다시 말했다.
“일하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쓰지 않는 땅은 아니에요.”
석진의 입가에는 웃음이 남아 있었다.
“그건 알지. 더 잘 쓸 방법도 있지 않겠느냐는 거야. 우리 집안은 가진 걸 그냥 두는 법이 없어서.”
“어떻게 쓰신다는 말씀이세요?”
주원이 물병을 들던 손을 멈췄다. 경란이 내 앞에 놓인 반찬 접시를 봤다.
“나경아, 식사 식겠다.”
나는 석진을 보고 있었다. 석진은 안경을 고쳐 썼다.
“결혼하면 한집안인데 해윤 일도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지. 사돈 혼자 애쓰시는 것보다야 낫잖니.”
“아버지가 부탁하신 일이 있나요?”
“아직 구체적인 얘기를 한 건 아니야.”
아직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폈다. 아버지가 공장을 떠날 때마다 작업복 주머니를 확인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사무실 열쇠와 수첩을 넣었는지 꼭 만져 봤다.
“공장 일은 아버지한테 먼저 물어봐 주세요.”
석진이 나를 보다가 작게 웃었다.
“그럼. 오늘은 가족끼리 밥 먹다가 해 본 얘기지.”
나는 수저를 들지 않았다.
맞은편에서 이헌이 회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장부는 아직 서재에 있습니까?”
회장이 물잔에서 손을 뗐다.
“있지.”
“지난번에 묶인 데가 벌어졌다고 하셨잖습니까. 윤나경 씨가 한번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석진이 이헌을 봤다. 이헌은 회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도 물어보던 참이다.”
회장이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처음 사업할 때 쓰던 거야. 펼치면 종이가 빠져.”
나는 무릎에서 손을 올렸다.
“떨어진 종이는 따로 모아 두셨어요?”
“장부 안에 끼워 뒀지.”
“그럼 옮기실 때 세우지 마세요. 상자에 눕혀서 옮기는 게 좋아요.”
“여기서 고칠 수는 없나?”
“가능한지 먼저 볼게요. 장비가 필요한 작업이면 말씀드리고요.”
회장은 식탁 끝에 놓인 호출 버튼에 손을 뻗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멈췄다.
“지금 가져오시면 식탁에는 놓지 않는 게 좋겠어요. 국물이나 기름이 묻을 수 있어서요.”
회장이 버튼에서 손을 뗐다.
“그럼 다른 날 보지.”
“네. 시간 정해 주시면 오겠습니다.”
“주원아, 날짜 맞춰 드려라.”
“네. 나경 씨 바쁜 거 확인하고요.”
주원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지 않고 내게 눈짓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밥그릇 옆의 물잔이 비어 있었다. 맞은편에서 이헌이 물병을 들었다가 주원 쪽에 내려놓았다.
주원이 내 잔을 채웠다.
나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잔 너머로 이헌이 젓가락을 잡는 게 보였다. 이헌은 더 말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칠 무렵 회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일어서자 회장은 의자 옆에 놓인 내 가방을 봤다.
“도구도 갖고 다니나?”
“조금만요. 가벼운 수선은 밖에서도 할 수 있어서요.”
“다음에 올 때 가져와요.”
“네. 장부를 보고 필요한 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장은 주원보다 먼저 식당을 나갔다. 나는 의자를 밀어 넣었다. 맞은편에서도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자 이헌이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주원이 내 가방을 집어 들면서 그 사이를 가렸다.
“가자. 데려다줄게.”
나는 주원에게 가방을 받아 어깨에 걸었다.
◈
현관에서 구두를 신는데 경란이 따라 나왔다.
“장부 보러 오는 날엔 나한테도 연락해. 아버님 외출하실 수도 있으니까.”
“네. 미리 연락드릴게요.”
“작업한다고 식사 거르지 말고. 얼굴이 좀 말랐네.”
경란은 내 코트 깃에 붙은 실을 떼어 냈다. 회색 실이었다. 작업실에서 달고 온 모양이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현관을 나섰다.
주원이 차 문을 열었다. 가방을 무릎에 놓고 앉자 본가 현관이 앞유리 너머로 보였다. 이헌은 나오지 않았다.
주원이 운전석에 타서 안전띠를 맸다.
“아버지 얘기는 너무 신경 쓰지 마. 원래 땅 얘기 좋아하셔.”
“저희 공장인데요.”
“알아. 그래서 나도 좀 그랬어.”
주원은 시동을 건 뒤 히터 바람을 줄였다. 나는 가방 손잡이에 말려 들어간 안감을 손끝으로 뺐다. 주원은 차를 출발시키지 않고 휴대폰 화면부터 확인했다.
검정 휴대폰은 문 옆 수납칸에 넣었다. 주머니에서 하나를 더 꺼냈다. 흰색이었다.
나는 가방에서 손을 뗐다. 주원은 흰 휴대폰을 뒤집어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삼촌이랑 원래 아는 사이야?”
(6화 끝)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오전, 본가 회장님 장부 원본 수선』『수요일, 회장님 장부 원본 볼 수 있어요.』수요일 아침, 본가 현관 앞에서 문자를 다시 읽고 화면을 껐다. 가방 안에는 얇은 종이와 붓, 실을 나눠 넣은 상자가 있었다. 금속 도구는 천으로 감쌌다.문이 열리자 이헌이 안쪽에 서 있었다.“추웠죠.”“오래 안 기다렸어요.”이헌의 눈이 내 가방으로 내려갔다. 나는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도구가 있어서 제가 들게요.”“네. 계단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현관 바닥에 녹은 눈이 묻어 있었다. 이헌이 발로 매트를 당겨 물기를 가렸다. 나는 그 위에서 신발을 벗었다.코트를 벗자 목에 건 실이 옷깃에 걸렸다. 반지가 나오기 전에 손가락으로 눌러 넣었다. 이헌은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회장님 혼자 계세요?”“지금은요. 서재에 계십니다.”복도 끝에 문이 열려 있었다. 이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서재 안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회장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신문 한쪽이 접혀 있었고, 안경은 그 위에 벗어 뒀다. 내 인사를 받은 회장이 가방부터 봤다.“그 안에 다 들었나.”“장부 상태를 보고 더 필요한 건 말씀드리겠습니다.”“뜯어서 새로 만드는 건 싫어.”“기존 실을 살릴 수 있으면 살리겠습니다. 새 종이도 필요한 자리에만 붙이고요.”회장이 신문을 밀어 놓았다.“앉아서 기다리게.”나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저녁 성탄 장터』다은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우리 손을 봤다. 나는 이헌의 손에서 손가락을 뺐다. 다은이 붕어빵 봉투를 접었다.“나경아.”“응.”“이분, 내가 아는 그분 맞아?”이헌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강이헌입니다.”“서진그룹 실장님이요?”“네.”다은이 내 왼손을 봤다. 회색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이헌의 오른손에도 같은 장갑이 있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다은이 천막 기둥 옆으로 비켰다. 나도 따라갔다. 이헌은 지나가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우리 옆에 섰다.“나경이랑 할 얘기가 있는데요.”다은이 이헌에게 말했다. 평소 거래처 전화를 받을 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오늘은 제가 데려가도 되죠?”이헌은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은이랑 갈게요.”“알겠어요.”이헌이 별 장식 봉투를 내밀었다. 받으려는데 다은이 손을 뻗었다.“그건 제가 들게요.”봉투가 다은에게 넘어갔다. 나는 이헌의 오른손을 가리켰다.“장갑은요.”이헌이 장갑을 벗어 내게 줬다. 나는 빈 장갑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손바닥이 닿았던 안쪽이 아직 따뜻했다.다은은 그걸 보고 입술을 눌렀다.“차는 안 타도 돼요. 저희 집 가까워요.”“네. 조심히 가세요.”이헌은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오후 작업 마감, 저녁 성탄 장터』코트 소매를 펴다가 작업실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주원이 문 앞에서 했던 말이 일주일째 걸렸다.원하는 건 꼭 갖는 사람.나는 가방 안쪽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이헌이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입구에서 기다릴게요. 늦어도 괜찮아요.』답을 쓰려는데 문자가 하나 더 왔다.『작업 끝내고 와요.』나는 작업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장터 입구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목도리를 고쳐 매는 동안 앞에 선 아이가 아버지에게 안겼다. 아이 어깨 너머로 이헌이 보였다.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내가 손을 들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줄 바깥으로 걸었다.“많이 기다리셨어요?”“방금 왔어요.”“얼마나 방금인데요?”이헌이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8분이요.”“그건 방금 아닌데요.”“그럼 조금 기다렸어요.”이헌이 내 가방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제가 들게요. 오늘 도구는 안 가져왔어요.”“알겠어요.”손이 곧 내려갔다. 나는 빈손이 된 이헌의 손등을 보다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지난번에는 시집을 사이에 두고 앉았고, 그 전에는 서류를 펼쳐 놓았다. 오늘은 꺼낼 종이가 없었다.“어디부터 볼까요?”이헌이 안내판을 봤다.“윤나경 씨 가고 싶은 데요.”“이런 데 자주
『오늘 일정: 12월 7일 토요일, 주원 씨 집에서 신년 행사 준비』현관 앞에서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초인종 옆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손을 들었다가 코트 소매부터 내렸다.어제 석진 앞에서 접어 쥐었던 손수건이 주머니 안에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빨았는데도 다림질할 틈이 없었다. 손수건 모서리를 밀어 넣고 초인종을 눌렀다.안에서 냄비 뚜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잠깐만요.”주원이 문을 열었다. 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끈 한쪽이 풀려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생각보다 일찍 왔네.”“약속한 시간인데요.”주원이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봤다.“그러네. 들어와요. 슬리퍼는 거기.”현관에 여자 구두는 없었다. 신발장 위에는 검정 휴대폰과 열쇠가 놓여 있었다. 나는 구두를 벗어 나란히 붙이고 갈색 가방을 들었다.“코트 줘요.”“제가 걸게요.”주원이 옷장 문을 열어 줬다. 빈 옷걸이에 코트를 걸고 돌아서자 탄 냄새가 났다.주원도 코를 찡그렸다.“아, 불.”주원이 주방으로 뛰어갔다. 나는 가방을 식탁 의자에 놓고 따라갔다.◈프라이팬 한쪽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주원은 불을 끄고 뒤집개로 계란을 들어 올렸다. 밑면이 검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이거 원래 이렇게 빨리 타요?”“불이 너무 셌어요.”“영상에서는 센 불로 시작하던데.”“계란 붓기 전에 줄여야 해요.”주원은 싱크대 옆에 세워 둔 휴대폰을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이헌이 내 의자 옆에서 손을 내렸다.“주원이 약혼녀입니다, 형님.”나는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무릎 위 파일이 기울어 견적서 모서리가 밖으로 나왔다. 집게를 눌러 종이를 밀어 넣었다.석진은 이헌을 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색 손목시계 위로 셔츠 끝을 당겼다.“알지.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식사 중이었니?”“마쳤습니다.”나는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헌은 탁자에 남은 서류를 모았다. 내 휴대폰은 화면을 아래로 향한 채 놓여 있었다.석진이 문 쪽으로 비켜섰다.“나가는 길이면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주원이한테 듣는 것보다 직접 듣고 싶은 게 있어서.”“여기서 하셔도 됩니다.”이헌이 말했다.석진은 손목을 내린 채 웃었다. 열린 문 밖으로 조현석의 책상이 보였다.나는 휴대폰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괜찮아요. 말씀 듣고 갈게요.”이헌이 나를 봤다. 나는 가방 안에 파일을 세워 넣고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 의자와 탁자 사이를 빠져나오려는데 이헌이 길을 비켜 줬다.손등 사이가 10cm쯤 남았다. 나는 그 손을 지나 문으로 갔다.◈조현석이 옷걸이에서 내 겉옷을 꺼냈다.“견적서는 받으셨습니까?”“네. 감사합니다.”나는 겉옷을 입고 가방끈을 어깨에 걸었다. 조현석은 내 방문증을 보고는 회수함 쪽을 가리켰다.“내려가실 때 저기에 넣으시면 됩니다.”“잠깐 이야기하고 내려갈게요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사진을 더 키우자 서명의 테두리가 깨졌다. 나는 화면을 원래 크기로 돌리고 납품 확인서를 옆에 놓았다. 창가에서 다시 봐도 펜이 들어간 자리는 달랐다.“그렇게 보면 눈 아파.”다은이 작업대에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휴대폰을 거치대에 세웠다.“원본을 봐야겠어. 복사하면서 없어진 부분도 있을 테니까.”“어제 그 서류?”“응. 아버지가 안 썼다는 거.”다은은 확인서가 구겨지지 않게 찻잔을 멀리 옮겼다.“혼자 가서 따지지는 말고.”“오늘은 물어보러 가.”나는 시집 견적서를 출력했다. 표지 보강과 책등 수선, 본문 세척을 나눠 적은 종이였다. 아래쪽에 작업 전 확인이 필요하다는 문장을 넣고 서명했다.다은이 출력물을 보다가 내 가방을 봤다.“그런데 견적서는 보내도 되잖아.”파일 집게를 누르던 손을 멈췄다.“사진을 직접 보여 주려고.”“사진도 보낼 수는 있고.”나는 집게를 닫았다. 다은은 더 묻지 않고 파일 모서리를 맞춰 줬다.휴대폰에는 아침에 받은 이헌의 답장이 있었다.『점심 무렵에 오면 됩니다. 조 비서에게 말해 둘게요.』그 아래에 내가 보낸 답이 붙어 있었다.『시집 견적서 가지고 갈게요.』나는 화면을 끄고 납품 확인서를 별도 파일에 넣었다. 견적서와 섞이지 않게 가방 안쪽에 세워 넣은 뒤 앞치마를 벗었다.◈전략기획실 앞에서 방문증을 다시 확인했다. 이름 아래에 방문 목적이 적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