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가 허겁지겁 달려오며 말했다.“환자 안색이 너무 안 좋습니다. 다시 응급실로 보내서 의사 선생님에게 보여야 합니다.”곽승재는 백유미를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너무 아픈 나머지 백유미의 입술은 백지장처럼 하얘졌으며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괜찮아. 아버지부터...”간호사는 그녀의 병상을 응급실로 밀고 갔다. 곽승재는 재빨리 바닥에 있는 백승엽을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유미야, 유미야. 너 왜 그래? 너 아빠를 놀라게 하지 마!”백승엽은 비틀거리며 백유미의 병상을 쫓아갔다.곽승재는 백승엽이 다시 쓰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를 부축하여 같이 앞으로 걸어갔다.고은서는 제 자리에 선 채, 손바닥의 아픔이 찌릿찌릿 전해져왔다.그녀의 남편인 사람이, 박지연이 아주 확신하며 말한 이혼하기 아쉬워한다는 곽승재가 지금, 아주 조급하게 백유미를 따라갔다. 심지어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더구나 고은서가 아픈지 걱정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피 한 방울이 바닥에 뚝 떨어졌다. 고은서는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상처를 꾹 누르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녀는 주민기가 주차해놓은 방향으로 가지 않고 병원의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택시를 잡고 떠났다.“아가씨, 어디로 가실 건가요? 괜찮으세요?”기사님은 고은서가 한참 동안 말이 없는 것을 보고 재차 물었다.고은서는 피로 붉게 물든 휴지를 보면서 말했다.“아무 진료소나 가주세요.”기사님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뻔했다.‘여기가 병원인데 왜 나오자마자 또 진료소를 가려는 거지?’“병원은 접수 절차를 밟을 게 너무 많아요.”고은서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진료소가 더 편해요.”기사님은 고은서의 말을 믿었다.“아가씨가 다행히도 저 같은 현지인을 만나서 여기 부근에 24시간여는 진료소가 있다는 것을 알지, 아니면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문을 여는 진료소가 어디 있어요?”“감사합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님이 말한 진료소에 도착했다. 고은서는 기사님에게 만 원을
고은서는 애써 미소를 짓고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런 놈은 좀 내버려 둬야 해요. 아내가 다쳤는데도 곁을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한테 가 있다니!”여의사는 고은서에게 약을 발라주고는 또 붕대로 그녀의 손바닥을 빙 둘러쌌다.“물이 닿지 않게 조심하시고 제때 약을 발라주세요. 안 그러면 흉터가 져서 보기 흉해요.”“고맙습니다. 알겠어요.”고은서가 비용을 지급할 때,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그녀는 여전히 전화를 끊어버리고 곽승재의 카톡을 차단하기까지 했다.예전의 그녀라면 절대 곽승재를 차단하기 아쉬워했을 것이었다. 그때는 생각하기만 해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였다.하지만 지금, 차단하면 차단했지, 아무렇지도 않았다.어떤 일들은 그저 마음먹기 어려울 뿐이지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데 2초밖에 걸리지 않았다.진료소에서 나온 고은서는 바로 택시를 불러 예원 별장으로 갔다.곽승재가 박지연에게 연락해 민폐를 끼칠 것을 방지하기 위해, 차 안에서 그녀는 미리 박지연에게 메시지를 남겼다.[지연아, 나 어깨가 아픈데 약을 안 챙겨서 먼저 들어가 볼게. 너랑 온 닥터 두 사람 오붓한 시간 보내.]메시지를 남긴 뒤, 고은서는 핸드폰에 반짝이는 전화번호를 보며 아예 핸드폰을 꺼버렸다.저녁에는 길에 차가 적었기에 낮에 올 때보다 시간이 적게 걸렸다.대략 한 시간 반 뒤에 고은서는 예원 별장에 도착했다.뜻밖에도 이미숙이 아직 안 자고 있었다.“사모님, 도련님과 같이 단체워크숍에 가신 거 아니셨습니까? 왜 갑자기 돌아오셨습니까? 조금 전 도련님이 전화해서 사모님을 물어보셨습니다.”고은서는 이미숙에게 길게 설명을 늘어놓을 기분이 아니었다.“놀다가 지쳤어요. 밖에서 자는 것이 너무 불편해서 먼저 돌아왔어요. 아줌마, 저 먼저 들어가서 쉴게요. 그 누가 전화를 해도 절대 저를 부르지 마세요.”“네.”이미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고은서는 침실로 걸어 들어가 토끼 모양의 무드 등을 보고는 바로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방문을 잠근 뒤, 고은서는 침대에 웅크린 채 조
비록 외할아버지의 몸 상태가 아직 건장한 편이지만 고은서는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고은서는 외할아버지가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이 있으면 바로 전화해 달라고 특별히 오춘식에게 당부했었다.고은서는 오춘식의 전화인 것을 보자마자 바로 긴장되었다.“아저씨, 외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아니야, 괜찮아.”오춘식은 고은서를 달래주었다.“어르신께서 오늘 옛친구를 만나러 외출할 거라고 하셨어. 아마 며칠 정도 지내다가 올 거 같은데 네가 걱정할까 봐 미리 너한테 알리는 거야.”“외할아버지가 어디로 가는데요? 무슨 친구를 만나는데요? 왜 미리 저한테 얘기해 주시지 않으셨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어제 결정하신 거야. 어르신께서 해찬시로 가신다고 하셨어. 엄청 오랫동안 못 본 옛친구가 아파서 문병하러 가시는 거라고 했어. 이번에 못 보면 앞으로 영영 볼 기회가 없을 것 같다고 얘기하셨어.”‘해찬시!’고은서는 갑자기 떠올랐다. 전생에서 외할아버지는 해찬시로 갔을 때 사고를 당해서 다리를 치었다.그때 외할아버지는 별로 아프지 않아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해찬시에서 돌아오고 나서도 상세한 검사를 받아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화초에 물을 주던 도중 다리가 갑자기 아파서 돌바닥에 쓰러지게 되었다.병원에 실려 가서 검사를 해보니 그제야 다리에 신경이 손상되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가장 좋은 치료 시기를 놓친 데다가 쓰러지면서 분쇄 성 골절까지 초래하게 되어서 아무리 치료한다고 해도 외할아버지의 다리는 더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그저 영원히 휠체어에 앉아 있어야 했다.“은서야, 걱정하지 마. 내가 어르신을 잘 보살필게.”오춘식이 말했다.“별다른 일이 없으면 이만 끊을게. 난 어르신을 도와 짐을 마저 싸야 해.”“아저씨, 언제 출발하세요?”고은서가 물었다.“오후 2시 비행기를 예약할까 해. 점심을 먹은 뒤 바로 공항으로 가면 되잖아.”“그럼, 외할아버지 신분증을 저한테 보내주세요. 제가 비행기 표를 예약해드릴게요.
고은서는 웃었다.“그래. 넌 꼭 그 생각을 유지하길 바라.”박지연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왜 얘기가 나한테로 넘어왔어? 아직 네 얘기가 끝나지 않았잖아.”“더 얘기할 게 뭐가 있어. 백유미의 목적은 승재로 하여금 내가 심보 악랄한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것이잖아. 지금 백유미가 목적을 이뤘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이 났지. 어차피 나는 승재랑 이혼할 거니까 그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난 전혀 상관없어. 됐어. 나 진짜 급해. 끊어!”박지연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 고은서는 전화를 끊어버렸다.드레스 룸에서 옷 몇 벌을 꺼내고 또 여행용 화장품 세트를 넣은 뒤, 고은서는 캐리어를 닫고 화장실로 갔다.다행히 다친 곳이 왼손 손바닥이어서 세수하는 데 별 지장이 없었다.세수를 마치자마자 밖에서 이미숙의 목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일어나셨습니까?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고은서가 문을 열자, 이미숙이 밖에 서 있었다.“사모님, 손이 왜 그렇습니까?”이미숙은 이상함을 눈치챘다.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별문제 아니에요. 아줌마 먼저 내려가 있어요. 저도 금방 내려갈게요.”“그리고 승재한테는 제 손 얘기하지 마세요.”고은서가 또 말했다.이미숙은 이해가 안 갔다.“사모님, 다치셨습니까? 왜 도련님한테 얘기하지 말라는 겁니까? 도련님께서 어젯밤에 사모님이 돌아오신 것을 안 뒤, 도련님도 돌아오셨습니다. 게다가 저한테 사모님의 상황까지 물어보셨습니다.”고은서가 대답했다.“그저 조금 까진 것뿐이에요. 지금은 이미 다 나았어요. 말할 필요가 없어요.”고은서는 곽승재의 그 어떤 관심도 필요 없었다. 그녀에게 너무 쓸데없는 것들이었다.이미숙이 내려간 뒤, 고은서는 또 자신을 한바탕 꾸몄다. 시간을 보니 이미 아홉 시 반이 되었다.외할아버지 집으로 가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외투를 왼손에 걸친 채, 오른손에 작은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아래층에는 곽승재가 보였으며 의외로 아직 집에 있었다. 그는 때마침 소
‘돌아오라고?’예원 별장이 정말로 고은서의 집인 것처럼 말했다.곽승재의 이런 아무 의미 없는 질문에 고은서는 마음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바로 떠났다.주방에서 나온 이미숙은 급급히 고은서를 불렀다.“사모님, 어디 가십니까? 아직 아침도 안 드셨습니다.”“제가 시간이 빠듯해서 아침을 못 먹을 거 같아요.”말을 마친 뒤 고은서는 문을 나섰다.고은서는 어깨가 채 낫지 않은 데다가 손바닥까지 다쳐서 직접 운전을 하기에는 무리였다.그녀가 핸드폰을 꺼내 들어 콜택시를 부르려고 한순간, 곽승재가 집 안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와 알 수 없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외할아버지댁까지 데려다줄게.”“아니...”“외할아버지의 얼굴도 볼 겸, 드릴 물건도 있어서 그래.”고은서가 거절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곽승재는 그녀에게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제기했다.이때 주민기는 비싼 보양식 선물 박스를 몇 개 들고나왔으며 이미숙은 그녀에게 줄 도시락을 두 통 들고 나왔다.“사모님, 아무리 시간이 급하다고 해도 아침을 안 먹으시면 안 되십니다. 이 안에 디저트들을 준비해 놨습니다. 차 안에서 배 좀 채우시기를 바랍니다.”기사님은 차를 그들의 앞에 세웠다.고은서는 재차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민기가 선물 박스와 그녀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는 것을 지켜보고는 이미숙이 주는 도시락을 건네받고 뒷좌석으로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예원 별장을 나섰다.차 안에서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으며 분위기는 조금 이상했다.기사님은 운전에 집중하느라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주민기는 이런 분위기가 조금 어색했다.그는 심지어 후회되었다. 곽승재는 그더러 사물함에서 선물 박스를 조금 챙기라고 했지, 반드시 꼭 같이 가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주민기는 물건만 놔두고 핑계를 대서 몸을 빼기 조금 난처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덩그러니 바보처럼 차 안에서 이 정적을 즐기게 되었다.또 한창 지났을 때, 주민기는 고은서가 주동적으로 입을 열기는 불가능하다는
곽승재가 물었다.“왜 운호 산장에 돌아가지 않은 건데?”고은서는 대답하기 싫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그러자 곽승재의 표정이 굳어지며 불쾌한 기색이 감돌았다.“약을 바꿔치기 한 일이 너랑 관련이 있는지는 일단 내버려두고, 네가 아저씨를 차서 허리를 다치게 했으면 그렇게 무책임하게 가버리면 안 되는 거 아니야?”그 말을 들은 주민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큰일 났다.곽 대표가 이렇게 말하면 둘 사이가 더 어색해질 텐데.아니나 다를까 고은서는 그 말에 참고 있던 화가 폭발했다.“내가 뭘 잘못했는데? 네가 병원에 오라 해서 왔건만. 꼬치꼬치 캐묻고는 그것도 모자라서 이젠 돌아도 못 가게 하는 거야? 아주 그 자리에서 나한테 죄명을 씌워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었나봐? 아저씨랑 백유미한테 무릎 꿇고 사과라도 해야 한다는 거야?”“...”곽승재는 그녀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주민기는 이 상황을 도저히 지켜볼 수 없어 운전기사에게 급히 신호를 보냈다.어서 칸막이를 내려야만 이 불똥이 자신에게 튀지 않을 테다.칸막이가 내려가자 곽승재도 억누르고 있던 분노를 더는 참지 못했다.“고은서, 지금 이 상황에서도 네가 억울하다는 거야?”“약봉지에 네 지문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어? 아니면 약국에 가기 전에 백유미가 나타난 데에 화가 난 적도 없다고 말하는 거야?”역시 곽승재는 이미 지문 검사를 했던 것이다.“백유미는 GS그룹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야. 이사 자리에 있는 것도 그만한 실력이 있어서고. 본사에 와서 원하는 자리를 고르라고 기회를 줬는데 네가 거절했잖아. 그런데 지금 와서 또 백유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설치고. 대체 원하는 게 뭐야?”곽승재가 물었다.“그쪽이랑 거리 두는 게 내가 원하는 거라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아는데?”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네가 서류에 도장 찍는 걸 미루면서 애매하게 구니까 백유미가 계속해서 이런 자극적인 행동을 하는 거잖아!”“자기 몸과 생명을 걸고 장난칠 사람이 어디 있어?”“있잖아. 백
곽승재의 걱정이 담긴 목소리는 고은서의 귀에 비웃음처럼 들릴 뿐이었다. 고은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떻게 된 거라뇨? 자갈이나 깨진 유리가 살 속으로 박힌 것 같은데 짚이는 군데 없어요?”의사가 고은서 대신 대답했다.곽승재는 그제야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혹시 쓰레기통 위에 있던 방화용 자갈에?”고은서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의사는 그녀를 타이르듯 말했다.“아가씨, 손을 이렇게 다쳤으면 조심했어야죠. 겨우 아물어가던 상처가 다시 찢어져서 얼마나 아프겠어요. 괜히 고생을 두 번 하잖아요.”“아내가 다친 줄 몰랐습니다. 내가 너무 세게 잡았어요.곽승재는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의사는 고개를 들며 곽승재를 쳐다보았다.“아내라면서 다친 것도 모르셨어요?”평소 자신감 넘치던 곽 대표도 그 순간 의사의 한 마디에 얼굴이 뜨거워졌다.그는 헛기침하며 변명하듯 말했다.“당시 상황이 좀 급해서요.”“그럼 현장에 있었다는 얘기네요? 그런데도 아내가 다친 걸 몰랐어요?”의사는 더 놀란 듯 물었다.“아내가 다친 것보다 더 급한 일이 뭐가 있길래요?”곽승재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고은서는 그런 그를 보며 속이 시원했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곽승재 대신 해명해 주었겠지만, 지금은?잘 됐다. 이렇게 당해도 싸지.“혹시 강제로 결혼하신 건 아니죠? 평소에도 저렇게 무관심한가요?”의사는 조심스레 고은서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런 셈이죠.”비록 맞선으로 만난 건 아니지만 곽승재가 그녀와 결혼한 건 할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지금 진료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험담하는 겁니까?”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리며 의사에게 말했다.“환자 진료나 제대로 보시죠.”의사는 다시 한번 곽승재를 훑어보았다. 그의 큰 키와 기품 있는 외모를 보며, 작게 속삭였다.“아가씨, 남편 고를 때 이렇게 겉만 멀쩡한 사람 말고 진짜로 잘
“됐어. 쓸데없는 말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을 끊었다.“네가 의사라도 돼? 알면 뭐 어쩔 건데. 상처가 저절로 낫는 것도 아니고.”곽승재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지금의 고은서는 마치 온몸에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 같았다. 지금 상대로는 제대로 대화할 수조차 없었다.결국 곽승재는 이 주제를 접고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냈다.“이거 받아.”고은서는 웃음을 터뜨렸다.“뭐야, 보상이라도 해 주려는 거야?”이전에 고은서가 그에게 ‘10만 원 한 달 패키지’ 라 조롱했던 일이 있었기에 곽승재는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곽승재는 차분하게 말했다.“너희 외할아버지와 같이 지방에 동행할 시간이 없으니까 여행에 필요한 모든 비용은 내가 부담할게.”고은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필요 없어. 우리 집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런 돈은 필요 없어.”고승아가 ‘우리 집’이라 콕 집어 말하자 곽승재는 그 사이에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속에서 불쾌함이 밀려왔지만 곽승재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물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면 되겠네?”그 말을 듣자마자 고은서는 잽싸게 카드를 낚아챘다.지금은 장난처럼 말했지만 혹시라도 진짜 화가 나서 따라오겠다고 하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니까.어차피 준다는데 안 받을 이유는 없었다.곽승재는 그녀의 속내를 읽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몇십 분 후, 차는 고은서의 집에 도착했다.고은서는 왼손에 외투를 걸친 채 작은 가방을 들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고준석은 이미 마당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은서는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할아버지!”“은서야, 네가 할아버지랑 같이 해찬시에 가고 싶다고 할 줄이야. 예전에는 기후가 너무 건조하다고 싫다고 하더니.”고준석은 놀란 듯 물었다.고은서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충분히 수분 보충할 스프레이랑 마스크팩도 챙겨왔다고요. 그냥 외할아버지랑 같이 있고 싶어서요.”두 사람은 손을 잡고 웃으며 얘기 나누고 있었다. 그때 곽승재가 보따리를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