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해찬시에 있던 거에 비해 유성준은 조금 야위었지만 특유의 따듯한 분위기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게 했다.“할아버지, 성준 오빠.”고은서가 기뻐하며 두 사람을 불렀다.“은서 왔어?”유성준의 얼굴에도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고은서가 그들 앞에 다가가 고준석의 옆에 앉아 유성준에게 물었다.“성준 오빠, 해성에는 MQ에 취직하려고 온 거야?”“성준이는 먼저 MQ에서 1년간 도와주고 그때 가서 상황 봐가면서 다시 정하려고 한다.”고준석이 답했다.유성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당분간 외국에 가고 싶지 않네. 마침 할아버지가 초대해 주셔서 왔지.”유정길을 생각하자 고은서의 기분도 조금 가라앉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성준 오빠, 고인의 명복을 빌어요. 앞으로 해성에 머물면서 저희를 가족으로 생각하세요.”“예전에 투정만 부리던 은서가 이제 다 커서 사람 위로할 줄도 아네.”유성준이 웃으며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그러게 말이야.”옆에 있던 고준석도 맞장구를 쳤다.“은서도 다 커서 집안 사업에 신경 쓰기도 해. 계속 믿을만한 사람을 영입해야 한다고 하더니 성준이 네가 들어오면 은서도 마음 놓을 수 있겠지.”고은서는 자신의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고 가감 없이 드러냈다.“맞아요! 하지만 성준 오빠를 MQ의 부대표로 임명하면 왠지 인재를 낭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유성준이 온화하게 웃으며 답했다.“에이 그럴 리가. 너랑 할아버지가 실망하지 않으면 다행이지.”그들이 정다운 얘기를 나눌 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아마 네 외삼촌 일행일 거야.”고준석이 말을 이었다.“은서야, 네 삼촌도 성준이를 알고 있어. 성준이가 MQ에 들어가면 어차피 다 마주하게 될 사이이니 불러서 같이 저녁 먹으려고. 미리 친해지면 좋잖아.”고은서도 이해하고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을 들여서 외삼촌을 불안하게 하는 것보다 정당하게 유성준을 영입하면 모두가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이내 고은혜를 포함한 고은서의 외삼촌
‘곽승재가 왜 여기에 온 거지?’“외할아버지, 곽승재도 부르셨어요?”고은서가 고준석에게 물었다.고준석은 허허 웃으면서 대답했다.“오후에 승재한테서 문안 전화가 왔었는데 너도 오고 하니까 와서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말을 꺼내 봤지. 그러니 오겠다고 하더구나.”고준석은 지금도 고은서와 곽승재가 이혼하는 걸 원치 않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보름이 지나도록 고은서와 곽승재 사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묻지 않을 리가 없었다.곽승재를 이 자리에 부른 것도 아마 두 사람 사이에 미련이 남아있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귀찮아 죽겠어. 곽승재는 대체 언제 사인하려는 거야. 끌면 끌수록 더 번거로워지는데.’고은서는 민시후와 합작할 충동까지 들었다.공식적인 담판을 하고 온 듯 곽승재는 화이트색 셔츠와 검은 정장 차림을 하고 걸어들어왔다. 평소와 별다름 없는 차림이지만 온몸에서 시선을 이끄는 범상치 않은 기품이 느껴졌다.곽승재는 고은서를 힐끗 한 번 스쳐보고는 예의 바르게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는 아주 태연하게 유성준에게 말을 걸었다.“오빠도 해성에 오셨네요?”유성준은 나긋하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응, 오후에 금방 도착했어.”“승재야, 마침 잘 왔어!”고국성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성준이가 얼마 안 있으면 MQ에 정식 직원으로 들어올 거야. 해성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네가 잘 보살펴줘.”고국성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가 답했다.“물론이죠. 듣기로는 전에 계속 해외에 있었다고 하던데요?”곽승재는 무심코 물었다.“네. 이젠 안 가려고요. 아무래도 고향 땅이 더 좋은 법이니까요.”유성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곽승재는 더는 묻지 않고 웃으면서 머리를 살짝 끄덕였다.“서 있지만 말고 얼른 다들 앉아. 은서야, 앉아서 뭐해? 승재가 앉게 얼른 일어나.”단은숙이 고은서를 비난하듯 말했다.다른 자리도 많았지만 다 고준석과 멀리 떨어진 자리들이었다. 단은숙의 의도는 아주 명확했다. 곽승재
“누구야 그 남자? 민시후야? 아니면 유성준인가?”고은서는 약간 어이없었다.‘이건 또 무슨 소리야. 민시후만으로도 말이 안 되는데 유성준은 왜 나오는 거야?’곽승재는 고은서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말을 이어갔다.“유성준이 해외에서 꽤 잘나가는 거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MQ에 들어가서 네 삼촌 조력을 한다고? 목적이 뻔하잖아.”고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방금전에 아주 확실하게 답해준 거로 알고 있는데, 못 알아들은 거야?”곽승재는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말했다.“해외로 가지 않는다고 해도 왜 하필 해성으로 온 걸까?”곽승재는 유성준이 고은서를 위해 MQ로 들어갔다고 믿고 있었다.그러나 고은서는 해친시에서 유성준과 두 번 정도 만난 이후로는 서로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곽승재의 말을 도무지 믿어줄 수가 없었다.“내가 다시 한번 말하는데 우린 곧 이혼할 사이야. 쓸데없는 점유욕은 집어치워.”고은서는 짜증 난다는 듯 말하고는 작업실을 나갔다.곽승재는 그녀로부터 오는 향긋한 냄새에 입술을 살짝 오므리다가 그녀 뒤를 따라 나갔다.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식탁 앞에 도착했다.다들 원형 식탁 앞에 착석했고 이어 고은혜도 방에서 나왔다.그녀는 곽승재를 보자마자 전에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 어색해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인사도 하지 않았다.“은혜야, 예절 없게 왜 이래. 형부를 봤으면 인사해야지.”단은혜가 약간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고은혜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부.”곽승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승재야, 은서야, 얼른 와서 앉아.”고준석은 왼쪽에 남겨둔 자리를 가리키며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고은서가 고준석 옆에 붙어 앉고 곽승재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저녁은 꽤 푸짐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고국성은 술까지 꺼내 들고 유성준과 곽승재에게 따라줬다.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고국성은 자신의 회사 경영 경험을 쉴 새 없이 털어놓았고 유성준은 옆에서 타이밍에 맞추어 맞장구를 쳐주었다.
고은서는 듣자마자 재빨리 대신 거절했다.“할아버지, 여기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그냥 돌아가서 쉬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고준석이 말했다.“없다니? 전에 네가 산 그 많은 옷들이 아직도 옷장에 있지 않느냐.”“...”확실히 전에 옷을 많이 사두긴 했었다.어느 날 이곳에 묵게 될 때 갈아입을 옷이 없는 상황을 대비해 여러 벌 사두었었다. 하지만 곽승재는 전에 한 번도 고준석 집에 묵은 적이 없었다.“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아서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고요.”고은서가 다른 이유로 다시 둘러댔다.“그래?”고준석이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고은서는 경고하는 눈빛으로 곽승재를 노려보았다.‘같이 밥 먹는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여기에 묵을 생각은 절대 하지마!’곽승재는 고은서를 힐끗 보더니 고준석에게 말했다.“확실히 처리할 일들이 남아있긴 해요.”고은서가 그의 말을 듣고 속으로 은근 좋아할 때 곽승재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온라인으로 처리하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잘됐구나. 그럼 힘들게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렴.”고준석은 허허 웃으면서 결정을 내렸다.“할아버지, 저도 오늘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갈래요.”고은혜가 말했다.“너 내일 학교 가는데 왜 갑자기 할아버지 집에서 자겠다는 거야. 얼른 집으로 돌아가!”단은숙이 명령조로 말했다.고은혜는 입을 삐죽거리며 반박했다.“엄마, 평소에 시도 때도 없이 할아버지 환심 사게 자주 곁에 있어줘라고 했었잖아. 오늘 할아버지 말동무가 되어주겠다는데 왜 그러는 거야.”“환심을 사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 설득해서 지금 해외로 가려고 그러는 거잖아!”고은혜가 벌떡 일어서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엄마, 고집 좀 그만 부려. 나 스무 살이야, 이제 어른이라고. 할아버지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겠다는 일쯤은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너!”단은숙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얼굴이 빨개졌다.“그만해. 은혜가 자고 가겠다는데 그렇게 하게 해. 애도 다 컸는데 너무 엄하게 대하지
고준석은 고은서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은서야, 승재를 방으로 안내해줘. 그리고 갈아입을 옷도 준비해서 전해주고.”고은서는 못마땅했지만 할아버지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너도 올라가 봐. 은서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너한테 아직도 마음은 있어.”“감사합니다, 할아버지.”곽승재는 이어 위층으로 따라 올라갔다.고은서의 방으로 다가가 보니 방문이 열려있었는데 고은서는 방 안 드레싱룸 구석에서 곽승재 옷을 찾고 있었다.고은서 방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방은 아주 소녀소녀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핑크색 벽지와 침구 용품, 심지어 화장대까지 다 연분홍색이었다.침대 위에는 여러 가지 인형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침대 머리맡에는 학창시절 사진이 놓여 있었다.사진 속의 그녀는 복스러운 얼굴에 보는 사람의 기분도 함께 좋아질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그러나 곽승재의 인상 속의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렇게 웃은 적이 없었다.대부분 조심스럽게 행동하거나 질투하거나 불만스러운 모습뿐이었다. 함부로 웃지도 화를 내지도 못했었다.결혼한 후로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던 고은서의 말을 떠올린 곽승재는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그러나 예전의 그녀와 비겼을 때 이 모든 게 사실이라는 걸 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이거 받아!”고은서는 힘겹게 찾아낸 옷 여러 벌을 곽승재에게 던져주었다.옷더미 안에는 잠옷과 수건, 그리고 셔츠도 있었다. 구석에 보관해둔 탓에 접힌 흔적이 있긴 했으나 옷 질량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또 아주 깨끗했다.고은서가 사들인 후 열심히 씻어서 다려 놓은 게 분명했다.“객실은 옆방이야. 사용인들 시켜서 침구 용품 다 새것으로 바꿨으니까 오늘은 그 방에서 쉬면...”“고은서, 그때 당시 나랑 결혼한 이유가 뭐야?”곽승재가 고은서의 말을 끊고 물었다.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하던 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이 결혼이 너한테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없다는 걸 너
“전에 백유미가 운호 산장에서 알레르기 일으킨 일을 조사해봤는데 약국의 실수로 일어난 일이래. 너랑 전혀 무관한 일이야.”그 말을 듣자마자 고은서의 주의력이 곽승재에게로 쏠렸다.백유미가 과민한 일이 약국 탓일 리가 없다. 백유미의 자작극이 분명했으니 말이다.“누가 조사한 거야?”고은서가 물었다.“승엽 아저씨가 직접 조사했어.”곽승재는 오후에 있었던 일을 고은서에게 간단히 알려줬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얘기를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날 모함하려고 들더니 왜 갑자기 백승엽과 함께 말을 바꾸는 거지?’“내가 조사해봤는데 성아연과 백유미가 서로 연락하고 있는 건 맞지만 그날 저녁 백유미를 찾아간 건 성아연 혼자의 뜻이야.”곽승재는 차근차근 말을 이어갔다.‘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네.’고은서는 순간 모든 걸 깨달았다. 일이 곽승재에게 들키는 게 무서워서 먼저 손을 써서 억울한 캐릭터를 만들려는 심보였다.‘전생에 날 귀신도 모르게 죽인 사람이 아니랄까 봐. 확실히 총명하긴 하네.’“성아연한테서 어떤 사과를 원하는지 말만 해.”곽승재가 말했다.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보며 말했다.“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지? 이 일을 꾸민 사람은 백유미인데 왜 성아연이 나한테 사과해야 하는 거지? 사과해야 하는 사람은 백유미야.”“백유미와 성아연 사이에 아무런 경제적인 거래도 없었어.”곽승재가 답했다.“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백유미가 시켜서가 아니라 성아연 혼자 모든 걸 꾸몄다는 거야?”고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냉소를 흘렸다.고은서가 화날 거라는 걸 알고 있던 곽승재가 차근차근 그녀를 달랬다.“내가 백유미 편을 들어준다고 생각 드는 거라면 육현석한테 한 번 더 조사해보라고 맡길게. 너도 육현석이 지금 널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육현석이 널 가짜 서류로 널 속일 일은 없을 거잖아.”고은서는 점심에 육현석한테서 걸려온 전화가 떠올랐다.그가 했던 말을 결론 지어 보면 곽승재가 아직도 날 많이 관심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꺼
곽승재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오르고 있는 듯했다. 고은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은서, 전에는 백유미가 신고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만약 백유미가 신고하려거든 상처받는 건 너뿐이야.”곽승재가 말했다.고은서는 눈길을 돌리고 답했다.“내가 어떻게 되는 당신이랑 상관없는 일이야.”곽승재는 고은서의 턱을 잡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넌 내 아내야. 네 일이라면 다 나랑 상관있는 일이라고.”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그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얼마 지나지 않으면 난 당신 아내가 아니야.”“고은서, 난 이혼할 생각이 없어.”곽승재가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네가 집에서 나간 후로 적응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네가 다른 남자랑 있는 모습을 볼 때도 마음이 불편해. 나 너한테 감정이 생긴 것 같아.”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왔다.전생에 그녀가 바라고 바라던 그 말을 지금 이렇게 곽승재 입으로 듣게 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전생의 곽승재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기 싫어했으니 말이다.이번 생만큼은 이혼하고 곽승재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는데 갑자기 자신에게 감정이 생겼다는 말을 들으니 너무도 우스웠다.‘전생의 내가 참 비참하기도 했지.’“넌 날 사랑해서 나랑 결혼한 거잖아. 그럼 지금에 와서 꼭 이혼할 필요도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봤으면 좋겠어. 우리 서로에게 한 번씩 기회를 줄 수는 있잖아.”곽승재가 그녀에게 이혼하지 말자고는 여러 번이고 말했었지만 지금처럼 사랑까지 얘기 하면서 간절했던 적은 없었다. 아마 진짜 이혼하기 싫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자존심으로 이렇게 끌어가면서 이혼을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나...”쿵.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무언가가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고은혜가 문앞에 쪼그리고 앉아 부딪친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나, 나 아무것도 못 들었어. 금방 문앞에 도착한 거야!”고은혜가 황급히 변명했다.“얘기 나눠.”
고은서는 고은혜를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네 마음속에선 원지훈이 괜찮은 사람이야?”‘원지훈 조건으로 고씨 집안 기사가 되려고 해도 어림없는데 괜찮다고?’고은혜는 고은서의 말투가 약간 거슬렸다.“당연히 곽승재랑은 비교가 안 되지. 그런데 곽승재보다 더 출중한 사람이 원래 얼마 되지도 않잖아. 게다가 원지훈 집안도 사업하는 집안이고 또 본인도 요즘 창업하고 있는데 회사 규모도 나쁘지 않고 머리고 꽤 영리하고. 누가 알아, 언젠가는 우리 MQ까지 넘어서는 존재가 될지.”고은서는 절대 그가 MQ를 넘어서는 일이 없다고, 그의 회사가 곧 망한다고 알려주고 싶었다.“원지훈 조건은 그렇다고 쳐. 그런데 결혼 상대를 찾을 때는 적어도 상대방이 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고려해 봐야 할 거 아니야. 조건만 보고 인품을 안 보는 건 아니지 않아?”고은혜는 입을 삐죽거리며 반박했다.“전에 귀걸이 사건도 나한테 설명했어. 친구가 자신을 속인 거래, 원지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그리고 너한테 보낸 문자도 그저 내에 관해 알고 싶어서 그런 거래. 게다가 나 지금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또 원지훈은 내가 원하는 거라면 다 해주고 사람 달랠 줄도 아는데 왜 애인으로 알맞지 않다는 거야? 성아연도 나한테 이런 남자가 쥐락펴락하기 쉽다고 나한테 어울린다고 했어.”“성아연?”고은서는 중점을 잡아냈다.“언제 성아연이랑 친해진 거야?”고은혜는 고은서의 표정이 갑자기 싸늘해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네가 성아연이랑 절친인 건 알겠는데 내가 성아연이랑 친해지면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고은서가 답했다.“이젠 절친이 아니야. 그보다 어떻게 연락이 닿은 거야? 성아연이 너한테 먼저 연락했어?”고은혜는 전미자 할머니 생신날에 MQ가 큰 합작을 이뤄낸 게 성아연 아버지 성동욱 덕분이라고 이실직고했다.“엄마가 성씨 집안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성아연을 우리 집에 여러 번 초대했었어. 저번에 마침 나도 집에 있어서 자연스레 내 카톡 추가해서 심심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친구에게 부탁해 적절한 시기에 감시 카메라를 끊어놓도록 준비해두었다.하지만 여시은이 먼저 참지 못하고 로비의 카메라를 꺼버린 것이다.고은서가 감히 감시 카메라의 확인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시은 역시 감시 카메라를 조작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측했다.“만약 여시은이 참고 끝까지 널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개업식이 끝난 후 대형 스크린에 공개할 계획이었어.”곽승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네가 앞서 백스테이지 주위를 둘러본 것도 동영상을 공개할 준비를 했던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이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리고 향수로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쿠아까지 학대했어. 내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시은이가 인내심을 가졌다고 해도 난 개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 시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에서 쿠아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를 자극했고 다시 같은 수법을 쓸 참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시은이가 파려던 함정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곽승재는 고은서가 준비를 해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고육지계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펼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다.고은서가 바닥에 넘어져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곽승재는 정말로 여시은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여운 척 한 거 아니야. 백유미와 여시은이라는 고수들 덕분에 나도 한 수 배웠을 뿐이지.”백유미의 과거 행동을 떠올린 곽승재는 가슴을 죄는 듯한 자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진지하게 사과했다.“은서야, 미안해.”무심코 흘린 말에 곽승재가 사과하는 모습을 본 고은서는 잠시 당황했다.“사과할 필요는 없어. 당신도 백유미 씨에게 속았을 뿐이잖아. 어쨌든 ‘목숨의 은인'
“시은아!”영상 속 장면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재훈은 걱정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어서 따라가서 시은이를 보호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돼!”부하들이 여시은의 뒤를 쫓아 나간 뒤 여재훈은 스크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시은에게 직접 확인한 뒤 여은서 씨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고은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여 대표님, 제가 은서 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곽승재가 말했다.송민준 역시 함께 가겠다고 전했다.여재훈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개업식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킨 이상 누구라도 축하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고은서 일행이 떠나자 여재훈은 참석자들에게 직접 사과하며 홍보팀에 현장 수습을 지시했다.호텔 앞 광장에서 곽승재와 송민준의 운전기사들이 각각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송민준은 고은서를 배웅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번거로울 텐데 제가 은서 씨를 모시고 가겠습니다.”송민준은 자기가 고은서의 파트너로 왔기 때문에 그녀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했다.곽승재는 송민준의 이런 친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은서를 안아 들어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오므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택권을 고은서에게 넘겼다.고은서는 당연히 송민준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오빠, 오늘은 고마웠어. 오늘 승재 오빠의 차를 타고 갈게. 어차피 길도 같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고은서의 반응에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곽승재는 고은서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깨끗한 외투를 꺼냈다.차 안에 앉자 곽승재는 고은서의 어깨
여시은은 고은서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갑자기 왜 또 농장 일을 다시 꺼내는 거지?’여시은은 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하고 분했다.“은서야, 왜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를 물에 빠뜨렸다고 그래? 네가 나를 밀었잖아! 내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또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여시은은 여재훈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저는 항상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아요... 은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속상해요...”여시은의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에 여재훈은 점차 진지해졌고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고은서 씨, 시은이가 은서 씨를 물에 빠뜨렸다는 증거라도 있어요?”“물론 있죠.”고은서는 이미 곽승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송민준이 보낸 영상을 찾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은서가 진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이때 곽승재가 제안했다.“여 대표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보면 진실이 명백해질 테니 나중에 왜곡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미리 준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고은서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증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여시은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여시은은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이미 개업식 시간이 다 됐는데 계속 이러쿵저러쿵하며 일을 벌이다니! 고의로 우리 개업식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아빠, 오늘 이분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쫓아내는 게 낫겠어요!”“여시은 씨, 말씀이 참 지나치군요.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송민준이 여재훈보다 먼저 입을 열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
고은서는 얼굴과 몸이 온통 와인으로 범벅이 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와인은 그녀의 얼굴 결을 따라 드레스 위로 떨어졌고 머리카락에도 많이 튀었다. 그리고 젖은 앞머리 몇 가닥이 이마에 붙어 고은서를 더욱 가여워 보이게 했다.고은서는 놀란 듯 눈동자에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괜찮아요?”그 순간 곽승재와 송민준이 동시에 고은서를 향해 급히 다가왔다.곽승재가 송민준보다 한발 앞서 도착해 고은서를 부축하며 다급하게 물었다.고은서는 몸을 살짝 떨면서 두려움을 겨우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네, 괜찮아요.”누군가 물티슈를 건네자 곽승재는 서둘러 고은서의 얼굴을 닦아주었다.여시은은 텅 빈 와인 잔을 들고 테라스에서 고은서와 멀지 않은 곳에 떡하니 서 있었다.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평소 감정을 잘 숨기던 여시은도 고은서의 이런 행동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사이 로비의 음악은 멈췄고 상황을 보려는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었다.“은서야, 괜찮아? 어떻게 넘어진 거야?”여시은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고은서의 앞에 다가가며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하지만 고은서는 여시은을 보더니 놀란 기색이 역력했고 몸까지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곽승재는 고은서를 안정시키듯 감싸며 여시은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여시은 씨, 대체 무슨 일이죠?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송민준이 곽승재보다 먼저 여시은에게 질문하고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고은서에게 걸쳐주려 했다.그러나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곽승재가 재킷을 받아 고은서에게 걸쳐주었다.“시은아!”소식을 접한 여재훈이 급히 달려왔다.“아빠!”여재훈을 본 여시은은 든든한 빽이라도 생긴 듯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으윽...”여재훈이 여시은을 달래기도 전에 고은서가 타이밍 좋게 아픔을 참는 소리를 냈다.“왜요? 아파요?”고은서에게 재킷을 걸쳐주던 곽승재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다른 한 손으로 팔꿈치를 문지르는 동작을 했다.곽승재가 고은서의 팔을 살펴
이런 수법은 백유미도 쓴 적이 있었다.안타깝게도 여시은은 백유미처럼 곽승재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수작은 곽승재에게 통하지 않았다.아마 고은서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탓인지 여시은의 시선이 마침 고은서에게로 향했다.고은서는 입가의 비웃음을 다 감추지도 못한 채 여시은과 눈을 마주쳤다.여시은의 눈빛이 차가워졌지만 고은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에 들고 있던 주스를 한 모금 마시더니 여시은에게 잔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기분 좋게 앞쪽 테라스로 걸어갔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이런 식으로 도발을 당한 적이 없었기에 참지 못하고 따라올 것으로 생각했다.역시나 고은서가 테라스에 도착지 얼마 되지 않아 뒤에서 여시은의 목소리를 들려왔다.“은서야, 왜 혼자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어? 송 대표님은?”여시은은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있었고 목소리는 여전히 달콤했다.고은서는 잔을 내려놓으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여시은 씨, 매일 이렇게 연기하느라 피곤하지 않으세요? 아니면 제가 여시은 씨처럼 건망증이 심한 줄 아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이런 태도를 보일 줄 몰랐는지 환했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은서야, 지난번에 아버지께서 우리 둘 사람을 불러 화해시켜줬잖아. 왜 아직도 화를 내고 있어?”여시은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슬픈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은서야, 너에게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쿠아가 사고를 당해서 이미 하늘나라로 갔어.”고은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쿠아가 죽었다고?’여시은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쿠아가 연못에 빠져 사고를 당했어. 연못에 금붕어들이 많이 있었는데 쿠아가가 놀면서 잡으려다가 빠진 모양이야. 내가 발견했을 때는 쿠아가 이미 물 위에 떠 있는 상태였어. 내가 직접 건져 올렸지만 쿠아의 몸이 이미 굳어버린 거 있지. 눈도 뜨인 채로 털은 전부 젖어서 몸에 붙어 있었어. 정말 안됐지...”고은서는 알고 있었다. 여시은이 일부러 이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을.그리고 쿠아가 물고기를 잡다가
곽승재는 현재 판주 투자은행에 있지만 감히 그를 얕보는 사람은 없었다.그는 곽씨 가문의 장손이자 곽씨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판주 투자은행에 간 것도 일종의 시련으로 여겨질 뿐이다.앞으로의 곽씨 그룹은 여전히 곽승재가 이어받게 된다는 것도 모두가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람들 속에 둘러싸인 곽승재는 평소처럼 검은색의 양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키가 크고 훤칠한 체구에 빼어난 외모는 마치 이곳이 그의 무대가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여시은과 여재훈 역시 그에게 다가가 친근하고 허물없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주변에서는 곧장 수군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왔다.“곽씨 가문과 여씨 가문이 혹시 좋은 일이라도 생기는 거 아니에요? 저렇게 친밀하게 대화하는 걸 보면 마치 한 가족 같잖아요.”“아직도 모르셨어요? 여씨 가문이 이번 투자은행의 개업을 순조롭게 하게 된 것도 곽 대표님이 뛰어다니며 큰 도움을 줬다잖아요!”“얼마 전까지 곽 대표님이 연예인과 스캔들 난 거 아니었어? 요즘은 소식이 뚝 끊겼던데... 아마도 정략결혼 얘기가 오가면서 그런 여자들은 정리한 모양이네.”“솔직히 곽 대표님과 여시은 씨는 그야말로 천생연분이죠. 진짜 결혼하면 주가가 어디까지 치솟을지 가늠이 안 가네요!”“그러게 말이야. 얼른 주식 좀 사둬야겠다...”주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은서는 담담한 미소만 지었다.여시은이 곽승재와 결혼할 마음이 굉장히 확고한 모양이었다. 곽승재에게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여론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으니까.하지만 고은서는 그런 것에 한 치도 관심이 없었다.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있었다.KK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한 고은서는 홀로 로비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찾아온 몇몇 동업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곽승재 역시 고은서를 발견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두 사람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만 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여시은이 눈치채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살짝 어두운 그림자가
여시은은 몇몇 귀부인들에게 고은서를 소개했다.고은서도 예의 바르게 그녀들에게 인사를 나눴다.“시은아, 이분이 바로 네가 말했던 요즘 사업을 크게 성공시키고 관청에서 상까지 받은 그 친구야?”화려한 옷을 입은 한 귀부인이 물었다.“네, 언니. 은서는 정말 뛰어난 사람이라 제가 본받을 만한 점이 많아요. 우리 회사도 은서 회사처럼 잘 운영될 수만 있다면 너무 만족할 것 같아요!”여시은은 과장된 어조로 대답했다.“고은서 씨가 뛰어난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굴은 참 예쁘네.”이혜화로 불리는 사람이 이렇게 평가했다.“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니까. 자기 장점을 잘 파악하고 이용하다니! 우리 세대는 따라갈 수 없는 것 같아.”다른 한 귀부인이 감탄했다.고은서는 눈앞의 여자들의 말하고 있는 의도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성과가 얼굴 덕분이라는 얘기였다.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언니들이 이루신 지위와 성과에 비하면 제가 이 얼굴로 얻은 작은 성과는 비교도 안 되죠. 앞으로는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언니들에게 많이 배워야겠어요.”고은서의 자기 비하와 아첨이 섞인 말을 들은 이혜화 일행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이때 여시은이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언니들, 은서가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말재주도 좋고! 제가 이렇게 훌륭한 분을 언니들에게 소개해 드리길 잘했죠?”고은서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제 생각에 더 대단한 분은 시은인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는 노력과 투쟁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하지만 시은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성공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예를 들어 제가 투자은행에서 오래 일하면서 크고 작은 만찬회도 많이 참석했지만 언니분들과 같은 귀한 분들을 만날 기회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 시은의 개업식에서 이렇게 많은 언니를 한자리에 모이게 하다니 시은의 인맥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는걸요.”고은서는 살짝 한숨을 쉬며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서 시은이가 저를 부러워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