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곧 쓰러질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끝이 새하얘질 정도로 곽승재의 옷소매를 잡고 집요하게 그를 막았다.곽승재는 순간 멈칫했다.반면 백유미는 호수에서 발버둥 치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쳤고 휠체어는 이미 호수에 잠몰 되었다.“얼른 백유미 씨를 좀 구해주세요! 곧 죽는 다고요!”옆에 있던 간병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의사와 간호사도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다들 간병인의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신고하면서 백유미를 호수에서 꺼낼 나무 막대기를 찾았다.“승재야...”백유미가 곽승재의 이름을 부르더니 이내 버티지 못하고 가라앉으려고 했다.이를 곽승재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고은서의 손을 뿌리치고 호수로 뛰어들었다.백유미를 향해 헤엄치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환자분!”간호사의 부름 소리와 함께 고은서는 그대로 쓰러졌다....고은서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박지연이 마침 옆에서 물을 따르고 있었다.“지연아.”그녀는 쉰 목소리로 박지연을 불렀다.“은서야, 깼어? 괜찮아? 불편한 곳은 없어?”박지연은 황급히 물잔을 내려놓고 고은서한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련한 눈빛으로 박지연을 바라보았다.박지연 또한 고은서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은서야, 우린 아직 젊잖아. 기회도 이번뿐만이 아닐 거야...”고은서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꼭 감았다.사실 그녀도 이미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이나 희망을 품고 기적이 일어나길 기대하고 있었다.그러나 기적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내 지키지 못한 탓에 아이가 사라졌어.’“은서야, 이러지 마... 우선 네 몸 건강이 첫째야.”박지연은 마음이 아파 오면서 고은서와 같이 눈물이 흐를 뻔했다.똑똑.바로 이때, 누군가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고은서가 다시 눈을 뜨자마자 걸어들어오는
고은서는 수술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이를 악물었다.“백유미는 지금 어디 있어?”“곽승재 덕분에 살긴 했는데 폐에 물이 너무 들어간 탓에 응급실에 들어갔어. 아직 깨어나진 않았고.”박지연은 고은서를 부축하며 엄숙하게 말했다.“고은서, 네가 백유미를 증오하는 건 알겠는데 다신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돼. 백유미가 진짜 죽기라도 하면 너도 끝이야. 백유미 같은 인간 때문에 네 인생까지 망칠 필요는 없잖아.”“그런데 내 아이를 죽였잖아!”고은서는 백유미가 자신을 향해 비아냥거리는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알겠어, 알겠어. 우선 진정해.”박지연은 흥분해 하며 몸을 바들바들 떠는 고은서를 달랬다.고은서가 진정이 된 후 박지연은 그녀를 병상에 다시 앉히고 물을 따라줬다.“물이라도 마시면서 분노를 가라앉혀봐.”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면서 거절했다. 그녀는 지금 아무것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박지연은 물잔을 고은서 입가에 가져다 대며 그녀를 달랬다.“조금이라도 마셔. 그러면 위도 덜 아플 거야.”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몇 모금 마셨다. 따뜻한 물을 마시자 몸도 따라 따뜻해지는 듯했다.박지연은 고은서를 부축해서 병상에 눕히면서 말했다.“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우선 몸부터 챙겨. 그리고 흥분해 하지 말고. 모든 게 다 백유미 짓이라면 꼭 널 망가뜨리는 게 목표일 거야.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널 망가뜨리려 할 거야. 넌 절대 그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돼. 알겠어?”고은서는 북받쳐 오르는 살기를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백유미가 더는 연기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고은서를 향해 비아냥거리는 건 바로 일부러 그녀를 자극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녀의 멘탈을 뒤흔들어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이 분명했다.‘그런데 무슨 이유로 곽승재를 타이밍에 맞춰서 불러온 거지?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목적이었던 거야. 악독한 년!’고은서는 박지연에게 밥을 부탁한 뒤 민시후에게 연락했다.민시후는 그녀가 변호사 일 때문에 그러는
곽승재 어머니, 서연정 여사였다.고은서와 서연정은 영상통화로만 한두 번 인사를 나눈 사이였다. 별다른 교류는 없었다.그러나 서연정과 곽현수는 정식으로 이혼만 하지 않았을 뿐, 사실 이혼한 사이와 별다른 점이 없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별거 중이었고 전미자 생일에도 해성으로 돌아오지 않은 걸 보아서는 아마 결혼생활에 대해 이미 마음을 접은 게 분명했다.고은서는 서연정이 자신을 이해해 줄 거라 믿고 그녀에게 이혼하는 걸 도와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전화를 건 것이었다.잠시 후, 서연정이 전화를 받았다.고은서는 예의 바르게 그녀에게 인사부터 했다.“어머니, 저 고은서입니다.”서연정은 약간 의아했다.“안녕하세요. 저한텐 무슨 일로 연락한 거죠?”“갑작스럽게 연락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머니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겨서 이렇게 연락하게 되었습니다.”고은서의 허약한 목소리로부터 간절함이 느껴졌다.“저 곽승재와 이혼하고 싶습니다.”서연정은 또 한 번 의아했다.“무슨 일 있었나요? 정서가 약간 불안정한 것 같은데.”서연정이 온화한 목소리로 나긋하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교양이 있는 지적인 여자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방금전까지 애써 정서를 억누르고 있던 고은서는 자신을 관심해주는 서연정의 말을 듣자마자 약간 울컥했다.“저...”서연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감정을 추스르길 기다렸다.“사정이 좀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곽승재랑 이혼하려고요.”고은서는 쉰 목소리로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전에 곽승재가 할머니 생신이 지나면 이혼서류에 사인해준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사인해주지 않고 있어요. 심지어 이젠 저를 협박하면서까지 이혼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리고 할머니가 저를 무척 아끼는 건 사실인데 저랑 곽승재 사이에 오해만 존재할 뿐 이혼할 정도까진 아니라고 생각하고 계세요. 게다가 할머니도 연세가 있으셔서 이런 일로 할머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어머니께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어요.”서연정은 그녀의 말을
서연정의 결혼생활도 마찬가지로 행복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온종일 병상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그녀의 몸이 너무 허약한 탓에 마음이 놓이지 않는 박지연은 그녀의 곁을 계속 지켰다.이튿날, 의사가 회진을 돌면서 그녀에게 주의할 점을 전달하고 떠난 후 고은서는 돌아가 쉬라고 박지연을 달랬다.“나 혼자 누워있어도 돼. 일이 있으면 간병인 부르면 되는 거고.”“나 절대 안 가. 내가 모를 줄 알아? 너 지금 괜찮은 척하지만 어제저녁 내내 자지 못했잖아.”고은서의 눈빛에는 아직도 원망이 남아있었다. 이를 알아본 박지연이 그녀를 달랬다.“날 보내고 백유미 찾으러 가려고 그러는 거지?”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제저녁 그녀는 눈을 감을 때마다 핏덩어리가 되어 사라진 자신의 아이와 백유미의 비아냥거리는 모습이 아른거려 차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그녀는 백유미를 향한 원망과 증오를 도무지 억누를 수가 없었다.“고은서, 잘 생각해 봐. 백유미가 전에 네가 무슨 일을 하든 다 모르는 척하면서 억울한 척 연기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자신이 한 짓을 인정하면서 비아냥거렸겠어.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어?”박지연은 어제저녁 힘겹게 고은서의 입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캐냈다. 그녀는 고은서가 유산한 게 다 백유미 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하마터면 뒤로 쓰러질 뻔했다.박지연은 목적을 이루지 못한 백유미가 겁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병원에서 고은서를 직접적으로 해치려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백유미가 전에 썼던 수단으로는 더는 널 해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는 거야. 그래서 지금 방법을 바꿔 네 멘탈을 뒤흔들려고 하는 거라고. 고은서, 비통함에 깊이 빠져있어서는 안 돼. 몸 회복 잘하는 게 우선이야. 백유미 같은 악독한 사람도 언젠간 벌을 받게 될 거야.”박지연이 말을 보태었다.“하늘이 벌을 내리지 않으면 내가 직접 벌을 줘야지.”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은서야...”“됐
백승엽의 말을 들은 사람은 카메라와 마이크를 고은서를 향해 들이밀었다.고은서는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허약한 몸을 일으키면서 박지연에게 물었다.“지연아, 괜찮아?”“괜찮아.”병상 옆에 놓인 테이블에 부딪힌 박지연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저으며 애써 고은서 옆으로 다가갔다.“봐봐요. 이 여자가 그런 악독한 일을 저질러 놓고도 나를 무시하면서 사과할 마음도 없어 보이잖아요.”백승엽은 울컥거리면서 말했다.“우리 유미가 어릴 때부터 개미 한 마리조차 밟지 않을 정도로 착했는데 이 악독한 여자 때문에 여러 번이고 죽음의 고비에 처했었다고요. 어제도 마찬가지로 우리 딸이 운이 좋아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미 익사했을 거예요.”백승엽의 말을 들은 기자들과 매체인들은 카메라를 더 가까이 들이댔다.“다 저리 꺼지지 못해!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분명히 당신 딸이 먼저 우리 은서를 유산하게 만들었잖아요. 그리고 당신들도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요. 그렇지 않으면 신고할 거예요!”박지연이 고은서 앞에 막아서면서 그들을 향해 호통쳤다.“신고해!”백승엽은 무서워하기는커녕 큰소리로 울부짖었다.“어제 우리 딸이 호수에 빠질 때 엄청 많은 목격자들이 있었어. 나도 어제부터 신고하고 싶었거든. 우리 딸을 다치게 해놓고 책임은 져야지! 고의상해죄로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고의상해죄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기자들과 매체인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야망으로 가득찬 눈길로 고은서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면 간단한 사랑 문제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기사에 몇 마디만 추가하면 여론을 더 크게 몰고 갈 수도 있었다박지연도 마찬가지로 이 부분을 생각했다.현재 백유미가 고은서를 유산하게 만들었다는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투약한 간호사도 찾지 못한 상황이었고 또 그 간호사를 찾았다고 해도 백유미와 꼭 연관이 있다고는 보장할 수 없었다.이 일이 기사로 퍼지게 되면 여론이 고은서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쏠리게 될 것이다.“이봐요.
백승엽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그냥 답하면 될 것을 나한테 물어볼 것이 뭐가 있다고 그러는 거죠? 혹시 다른 속셈이라도 품고 있는 건 아니죠? 그렇지 않으면 이런 수단으로 우리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그러는 거예요?”고은서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어떤 태도로 그쪽의 물음에 대답할지를 결정할 만큼 아주 중요한 물음이라서요. 따님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제 물음 하나쯤 대답해주는 건 괜찮지 않나요?”백승엽은 고은서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장에 있는 기자들과 매체인들을 보며 순간 그까짓 물음 하나쯤을 대답해준다고 큰일이 나겠냐는 자신감이 생겼다.“대답 못 해줄 게 뭐가 있겠어요. 내가 당신처럼 물음 하나에 쩔쩔맬 줄 알아?”고은서는 기세등등한 백승엽의 모습을 보며 화내기는커녕 태연하게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백승엽 씨, 방금전에 착한 따님분께서 마음씨 좋게 저를 구해줬는데 제가 은혜도 모르고 따님을 해치려 했다고 했죠?”“그래요! 목격자랑 다른 증거들도 다 있으니까 순순히 인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제가 대체 왜 그랬을까요?”고은서가 되물었다.“거참, 어이없는 질문이네. 제가 그쪽 생각을 어떻게 알아요.”백승엽이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다른 분들은 알고 계시나요?”고은서는 병실에 있는 기자들에게 물었다.그들은 서로 마주 보면서 어리둥절해 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은서만 빤히 바라보았다.박지연도 고은서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은서가 이미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냈기에 이렇게 담담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할 말이 뭔지나 얘기해!”백승엽이 성가시다는 듯 그녀를 재촉했다.고은서는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다 모르시나 보네요. 그러면 확실히 제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아마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죽이려 하는 게 아니
기자들은 더 몰두해서 두 사람의 표정을 촬영했다.“승재가 네 남편인 게 뭐가 어때서. 유미랑 승재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는데 사이가 좋은 게 정상이 아니야? 너 하나 때문에 인연을 끊기라고 해야 한다는 거야?”백승엽은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당연히 불가능하죠. 사이가 좋을 뿐만 아니라 서로 좋은 사업 파트너이기도 하잖아요. 백유미 씨를 위해 GS 그룹 슬하에 있는 판주 투자은행을 직접 수매할 정도로 친한 사이인데 제가 어떻게 인연을 끊으라고 하겠어요.”백승엽은 고은서의 말 속에 있는 함정을 발견하지 못하고 계속 나불거렸다.“우리 딸이 그럴 만한 능력과 가치가 있다는 걸 의미하지. 유미를 데려가겠다는 회사가 얼마나 많은데, 승재가 유미를 자기 회사에 남기려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야?”“백승엽 씨, 곽승재 씨가 조건도 훌륭하고 또 백유미 씨한테 이토록 잘해주는데 두 사람 혹시 오래전부터 눈이 맞은 사이는 아닌가요? 저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해도 자신도 모르게 곽승재 씨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닌가요?”고은서는 백승엽에게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이런 상황에서 백유미 씨가 저를 처리해버리고 싶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여길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제가 봤을 땐 충분히 가능해요. 본인이 제삼자이면서도 조강지처를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제삼자라고 여길 수도 있죠.”박지연이 이내 말을 보태었다.고은서는 처음부터 차근차근 백승엽을 유도해 백유미와 곽승재 두 사람 사이의 부정당한 관계를 인정하게끔 만들 생각이었다.모든 걸 깨달은 박지연은 옆에서 자연스레 고은서를 도왔다.제삼자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백승엽은 순간 당황해하며 변명했다.“누가 제삼자라는 거야! 입을 삐뚤어도 말은 바른대로 해야지. 명예훼손으로 신고할 줄 알아. 유미랑 승재는 그냥 친구 사이라고!”“그냥 친구 사이라면서 방금전에는 왜 은서가 당신 딸을 질투한다고 한 거죠? 모순되지 않나요?”박지연이 물었다.“백승엽 씨, 백유미 씨께서 곽승재 씨가
고은서의 뜻을 알아차린 박지연은 백승엽의 밀치는 힘을 따라 자연스레 옆에 있는 테이블을 향해 넘어지더니 허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듯 신음소리를 냈다.고은서도 따라 겁먹은 듯 뒤로 피하는 바람에 백승엽은 허탕을 쳤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백승엽은 고은서가 피하려고 하자 더 악을 쓰며 그녀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아악!”“그만 하세요!”고은서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병실 문 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병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검은 수제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심상치 않은 기품을 내뿜고 있는 곽승재였다.“승재야, 네가 여긴 웬일이야?”백승엽은 이내 고은서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곽승재를 향해 미소 지으며 물었다.기자들은 다급하게 카메라를 곽승재를 향해 돌렸다.곽승재는 그들을 무시한 채 고은서를 향해 재빨리 다가갔다.얼굴이 창백해진 고은서는 두려운 눈길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는데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미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고 심지어 입고 있던 환자복마저도 꾸깃꾸깃 해졌다.“괜찮아...”곽승재 입을 열자마자 고은서는 몸을 반대편으로 돌리면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대화를 거절하는 듯 그를 등졌다.“승재야, 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다 고은서가 날 모함하려고 이러는 거야.”백승엽이 변명했다.곽승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백승엽을 째려보고는 병실 안에 있는 기자들과 땅에 넘어진 채 허리를 부여잡고 있는 박지연을 둘러보았다.“아저씨, 지금 뭐 하는 거죠?곽승재의 말에서는 분노가 느껴졌다. 백승엽도 그가 화났음을 감지했다.아무리 어릴 때부터 자라는 걸 봐온 아이라고 해도 백승엽은 곽승재를 볼 때마다 무언의 위압감을 느꼈다.“내가 다 설명해줄게.”백승엽은 말하고는 뒤돌아 기자들을 내쫓으려 했다.“나가, 나가. 다 나가라고. 찍을 게 뭐가 더 있다고 그러는 거야!”“수고비를 따로 준다고 했잖아요. 돈은 주셔야죠.”쫓겨난 기자 한 명이 불만을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