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준이 그녀를 설득하려고 할 때 갑자기 뒤에서 육현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형수님! 헤헤, 죄송해요. 또 잘못 불렀네요.”육현석은 웃으면서 휘청이는 곽승재를 부축하며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은서 씨, 저희도 오늘 술 마셨는데 차 안 가져와서 혹시 은서 씨 차에 같이 가면 안 될까요?”“그냥 차 부르세요.”고은서가 단칼에 거절했다.“형이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래요.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어깨가 아프고 위도 아프다고 하는데 기사가 오려면 한참 기다려야 되잖아요. 그런데 기사가 이미 떠났다고 하니까 중도에 만나게 되는 즉시 내릴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육현석이 설명하면서 어떻게서든 그녀의 차에 타려고 했다.고은서도 더 이상 거절하기 난감해졌다. 그래서 그녀는 유성준을 먼저 보내려고 했다.“오빠, 일찍 들어가서 쉬세요.”유성준은 육현석이 일부러 그런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고은서를 더는 난감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지라 비아냥거리려던 말을 꾹 참고 애써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 집 들어가게 되면 문자해.”고은서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육현석은 곽승재를 뒷좌석에 앉히고 자신은 재빨리 조수석으로 달려가 앉았다.“형이 술만 마시면 저한테 짜증 내고 그러는데 혹시라도 저를 때릴까 봐 무서워서 조수석에 앉은 거예요. 그런데 여자한테는 손대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특히 은서 씨한테는 절대 그럴 리가 없으니까 맘 편히 먹고 얼른 앉아요.”“...”횡설수설하는 육현석을 보며 고은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뒷좌석에 앉았다.차가 출발한 후 육현석은 자신의 기사한테 연락해 합류할 장소를 정했다.곽승재는 조용하게 창가에 머리를 대고 손으로 이마를 받친 채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그를 비추었는데 왠지 모르게 고독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느껴졌다.“평소에는 주량이 좋은 사람인데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은지 엄청 급하게 마시더라고요. 그래서 더 빨리 취한 것 같아요.”고은서는 자연스레 시선을 다
“이거 놔!”고은서는 팔꿈치로 곽승재의 가슴팍을 찌르면서 소리쳤다.“스읍.”곽승재는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서운에 있을 때 곽승재가 그녀를 지키기 위해 또 한 번 상처를 입은 걸 떠올린 고은서는 순간 흠칫했다.곽승재는 이 틈을 타 그녀를 더 세게 껴안으면서 말했다.“은서야, 날 밀어내지 말아줘. 나에게 한 번만 기회를 더 줘...”술기운이 느껴지는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얼굴 가까이 와닿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죽이고 있었다.‘설마 방금전에 내가 레스토랑에서 한 말 때문에 자극이라도 받은 건가? 대체 왜 이러는 거야?’그녀의 주변은 온통 곽승재 몸에서 나는 설송향으로 물들었다.불편함을 느낀 고은서가 그를 밀어내면서 말했다.“이거 좀 놔.”“싫어. 놓으면 또 날 버리고 갈 거잖아. 그러면 더는 널 볼 수 없게 되잖아.”곽승재는 얼굴을 그녀의 품에 기댄 채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앙탈을 부렸다.“은서야, 보고 싶었어.”그는 고은서 없이 보내는 일분일초가 너무 괴롭게 느껴졌다.비록 며칠 동안 함께 서운에서 지내고 또 몇 시간 전에 금방 만나고 지금 함께 뒷좌석에 앉아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마음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곽승재는 그녀의 이름을 계속 부르면서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술을 마신 원인 때문인지 고은서는 온몸이 뜨거워 나는 것 같았다.“곽승재, 술 마셨다고 함부로 행동하지마. 안 취한 거 다 알고 있으니까.”고은서가 발버둥 치면서 곽승재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는 고집을 부리면서 아예 그녀를 들어 올리면서 자신의 다리에 앉혔다.덕분에 두 사람은 부득이하게 마주 보게 되었고 또 곽승재가 고은서를 손으로 잡고 있는 바람에 두 사람은 거의 맞붙어 앉아 있게 되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체온이 점점 높아지면서 그의 말 못 할 부위가 이상해지는 걸 느꼈다.‘이러다가 진짜 큰일 나겠어.’고은서는 곽승재의 상처를 관심할
“저리 비켜...”고은서는 온몸에서 전율이 느껴지는 듯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하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허세를 부리는 아기 고양이처럼 느껴졌다.욕망을 애써 억누르고 있던 곽승재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아래로 잡아당기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은서야, 너무 보고 싶었어. 진짜 더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보고 싶었어...”단단한 무언가에 손이 닿은 고은서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곽승재의 손을 뿌리치면서 화를 냈다.“변태 새끼!”“은서야, 너도 하고 싶잖아. 참지 말고 날 한 번 믿어봐.”곽승재의 뜨거운 숨결이 고은서의 목에 와닿았다.그의 말이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그녀는 술을 마신 자신이 너무 미웠다.‘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어. 그럼 곽승재의 유혹에 이렇게 쉽게 넘어갈 리도 없었을 텐데.’자신의 몸을 더듬는 곽승재의 손길에 고은서는 더는 참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의 저항은 이젠 무용지물이 되었고 심지어 곽승재에겐 크나큰 유혹으로 느껴졌다.곽승재가 그녀를 깨물 때 고은서는 수치스러움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곽승재, 그만해...”그녀의 울먹이는 소리에 고개를 든 곽승재와 눈이 마주친 고은서는 순간 흠칫했다. 그의 눈빛은 온통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목소리도 평소보다 더 매혹적이게 느껴졌다.“은서야, 아파? 내가 더 부드럽게 해줄게.”고은서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싫어.”곽승재는 단번에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그녀는 몸에 힘이 풀리면서 거의 그의 품에 기대어 있었는데 두 볼은 빨간 홍조를 띠고 있었고 그를 바라보는 울망울망한 두 눈엔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마치 자신을 가지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러나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거절하고 있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진심으로 거절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취하지 않은 자신이 너무 미웠다.사실 계속 이어간다고 해도 고은서는 그를 밀어내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그렇게 되면 고은서를
고은서는 곽승재의 장난스러운 말투와 눈빛으로부터 자신의 현재 모습이 얼마나 낭패한 지를 예상할 수 있었다.그녀는 오늘 셔츠와 정장 치마를 입었는데 곽승재 때문에 단추가 풀리면서 속옷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가슴 쪽에 아주 선명한 이빨 자국까지 생겼다.고은서는 자신의 이런 모습이 너무도 창피했다.그녀는 생각을 포기하고 얼굴을 곽승재 가슴팍에 묻은 채 그의 외투를 잡아당기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려고 했다.곽승재는 고은서의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그는 그녀를 안은 채 엘리베이터 올라 아주 자연스럽게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이내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반응하고 조심스레 고은서에게 물었다.“몇 층이야?”고은서의 대답을 들은 곽승재는 버튼을 누르는 시늉만 하고 또다시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올렸다.곽승재의 욕망은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고 심지어 다시 들끓어 오를 기세를 보였다. 이를 가까이 감지한 고은서는 그를 쏘아보며 화냈다.“이상한 생각 그만 좀 해!”그러나 곽승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내가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사람이 지금 내 품에 안겨 있는데 나도 어쩔 수 없어.”코끝은 온통 곽승재의 특유한 설송향으로 가득했고 귓가에는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얼굴이 또다시 화끈 달아올랐다.‘곧 집이니까 조금만 더 참으면 돼.’두 사람은 고은서 집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친밀한 자세를 계속 유지했다.지문을 누르고 집 문을 열리자마자 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그러나 곽승재가 핑계를 둘러대면서 그녀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나 목말라.”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곽승재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집에 들어선 고은서는 황급히 곽승재를 밀어내고 자신의 가슴 부위를 손으로 막았다.“물 저기 있... 우웁!”곽승재는 고은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장롱 쪽으로 밀어붙이며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방금전의 키스와 달리 그의 다급함과 미련이 깊이 느껴지는 키
그리고 고은서의 차에 타기 위해 미리 기사를 다른 곳으로 보냈던 것이다.중도에 먼저 튄 것도 곽승재와 고은서에게 단둘만의 시간을 마련해주려고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그래도 다행히 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았네.”육현석이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박지연도 따라 감탄했다.“정말 의리 있는 친구네.”“당연하지.”육현석이 자랑스러워하며 답했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갈 떠올렸는지 화제를 바꾸었다.“지연아, 혹시 형수님이 말한 결혼 선물이 뭔지 알아? 승재 형한테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아서 그러는데 넌 알고 있어?”박지연은 주문 제작 팔찌에 관한 일을 육현석에게 알려줬다.“내 생각인데 은서가 곽승재한테 마음이 흔들린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마음에 든다고 해도 거절했을 거야.”“정말이야? 형수님과의 더 빠른 재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형한테 더 노력하라고 전해야겠네.”두 사람은 수다를 한창 떨었는데 극락에 달한 박지연은 얘기하면 할수록 소주랑 삼겹살이 땡겼다.전화를 끊은 후 박지연은 샤워하고 있는 고은서를 재촉하러 가려고 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그녀의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시어머니라는 네 글자를 보자마자 박지연은 순간 기분이 잡쳤다. 그녀는 고민 끝에 폰을 무음모드로 설정했다.고은서는 샤워를 하고 냉수 두 잔을 들이켜고서야 방금 욕망 때문에 들끓어 오른 체온이 점차 내려가는 것 같았다.‘술을 처음 마신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네. 아까 지연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진짜 곽승재한테 덮쳐들었을 거야. 그런데 외롭다고 남자를 갈망할 나이도 되지 않았는데... 설마 몸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고은서는 박지연에게 비웃음 받을 준비를 하면서 그녀를 찾으러 방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박지연은 덤덤한 표정을 하고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지연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고은서가 걱정하며 물었다.“별일 아니야. 온승준 엄마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받지 않았거든. 그랬더니 문자로 날 비난하더라고.”그 말을 들은 고은서는 박지연의 폰을
박지연은 고은서의 격려하는 눈빛을 받으며 통화버튼을 눌렀다.“지연아, 엄마가 너한테 전화했었어?”온승준이 물었다.하지만 박지연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내일 언제 시간이 돼? 우리 얘기 좀 하자.”온승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내일은 확실하지 않지만 지금은 시간이 있어. 너 어디 사는 거야? 내가 갈까?”박지연은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은 9시, 이른 것도 늦은 것도 아닌 시간이었다.온승준은 언제 바빠질지 모르니, 얘기할 거면 지금 하는 게 맞았다.“좋아.”박지연은 온승준과 라이트 문 아파트 근처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출발하기 전 박지연은 대충 얼굴을 닦고 외투를 걸쳤다. 옆에서 고은서는 그녀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걱정하지 마.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난 전적으로 지지할 거야.”내심 박지연이 전생의 비극에서 벗어나길 바랐지만, 만약 이게 박지연의 선택이라면 고은서는 그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녀는 카페에 도착했다.커피를 주문할 때 박지연은 습관처럼 온승준이 좋아하는 커피와 디저트를 주문하려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결국 삼켰다.그녀는 도우미도 엄마도 아니기에 다시는 그를 돌보고 희생하는 역할을 맡고 싶지 않았다.자신이 좋아하는 블랙커피와 작은 케이크를 주문한 후 박지연은 멀리서 온승준의 모습을 발견했다.그는 편안한 얇은 니트 외투에 검은색 캐주얼 바지를 입고 날씬한 몸매를 뽐냈다. 코끝에 걸쳐진 은색 테가 달린 안경은 금욕적이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박지연과 온승준은 소개팅에서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박지연이 소개팅에서 실수로 커피숍에 앉아 있던 온승준을 소개팅 상대라고 착각한 거였다.그 전에 박지연은 온승준에 대해 조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뛰어난 심장외과 의사였고, 잡지 인터뷰에도 나왔던 사람이었다.박지연은 자신의 운이 믿기지 않아 급히 다가가 자신을 소개하며 말했다.“저는 건강하고 성격 밝고 활발한 사람이에요. 결혼할 준비가 다 됐어요.”어떤 말에 설득됐는
“전화 안 받았어. 어머님이 뭐라고 했는지는 직접 보면 알 거야.”박지연은 휴대폰 메시지를 열어 온승준 앞에 휙 던졌다.온승준은 메시지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첫 문자만 봐도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는 원래 이런 잡다한 일들을 싫어해서 결혼하고도 이런 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박지연은 유능하고 성격도 좋았기에 모든 일을 철저하게 챙겨서 그가 신경 쓸 것 없이 모든 것이 잘 돌아갔다.부모님은 그들의 갑작스러운 결혼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박지연에게서 딱히 흠을 잡을 수 없었다.온승준은 처음에 모든 것이 이렇게 순조롭게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박지연이 이혼하자고 했다.온승준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말씀이 너무 거칠었네. 내가 엄마한테 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할게.”박지연은 온승준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았기에 조용히 웃었다.“됐어, 더 이상 당신 힘들게 하지 않을게. 어차피 부모님도 나를 좋아하지 않으시니 더 이상 잘 보일 필요도 없잖아. 시간 내서 우리 이혼 절차 진행하자.”온승준은 손끝으로 안경을 정리하며 말했다.“지연아,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거야?”“엄마는 전에 우리에게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우리의 삶은 우리가 결정하라고도 하셨고. 아마 그동안 네가 집에 안 들어오고 전화를 받지 않아서 화가 나셨을 거야.”온승준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지연아, 나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학술 보고서도 마무리해야 하고. 투정 그만 부려. 예전 일은 내가 미안해. 사과할게.”박지연은 온승준한테 이렇게 투정을 부린 적이 없었다. 늘 자기 혼자 억지로 풀어내고 끝냈지만, 이번엔 달랐다.온승준이 미안하다는 말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이 사태가 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었다. 번거로운 상황을 피하기 위해 그는 자세를 낮추는 걸 선택했다.박지연은 그날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 결혼 증명서를 받았을 때의 행복감을 떠올리며 이혼하려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박지연이 뒤를 돌아보자 예상치 못하게 육현석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그는 손에 알루미늄 호일로 감싼 꼬치와 맥주 몇 병을 들고 있었다.전에 그들이 수다 떨 때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수다는 꼬치와 맥주가 더 잘 어울려.”‘설마 그 말을 기억하고 특별히 나를 위해 사 온 건가?’“지연아, 여기서 뭐 해?”육현석이 그들 앞에 다가와서 그녀 옆에 있는 온승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이분은?”“온 닥터, 내 남편이야.”그리고 박지연은 반대로 온승준에게도 소개했다.“내 친구 육현석이야.”“아, 온 선생님 반갑습니다!”육현석은 한 손을 비우고 온승준에게 악수를 청했다.온승준은 육현석의 재벌 도련님 인상이 물씬 풍기는 외모와 손에 들려 있는 꼬치와 맥주를 보고는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그럼에도 그는 예의 바르게 손을 내밀며 형식적으로 악수했다.“반갑습니다.”“온 선생님, 오늘 지연이랑 우리 형수님 고은서랑 술 한 잔 하려 했는데, 함께 하실래요?”육현석이 너그럽게 초대했다.온승준은 워낙 낯선 사람과 과도한 사교를 좋아하지 않았고, 쓸데없는 대화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그는 정중히 거절하고 박지연에게 말했다.“난 학술 발표 준비가 남아서 먼저 가볼게.”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온승준이 떠난 뒤 박지연은 육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육현석, 네 마음은 고맙지만 나 방금 막 식사를 마쳤고 은서도 술을 꽤 마셔서 더는 못 마셔.”육현석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그럼 네가 술 마시고 싶을 때 다시 약속 잡자.”“고마워.”박지연은 진지하게 말했다.육현석이 여자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여자를 유혹하는 데도 능숙한 사람임을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을 기억하고 실천한 것에 감동받았다.육현석은 고맙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기에 웃으며 말했다.“친구 사이에 거리감 느끼게 왜 그래. 그럼 난 가볼게. 내일 병원 운동장에서 보자!”“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