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가 누군지 고민하고 있을 때 전미자가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너무 많이 한 것 같네. 은서야, 승재가 너한테 준 건데 그냥 가져. 아무튼 전에도 선물 한 번 사주지 않았잖아. 그저 너한테 주는 보상이라고 생각해.”그녀의 말에 고은서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아니에요, 할머니. 전에도 많이 받았어요. 액세서리도 포함해서요.”비록 그녀가 직접 산 것들이지만 곽승재의 카드를 긁었으니 어찌 보면 그가 선물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서운에서도 그녀에게 판다 팔찌를 선물한 적이 있다.“하나라도 더 가지면 뭐 어때.”그러나 전미자는 이내 무언갈 알아차리고 그녀에게 물었다.“승재한테 직접 돌려주는 대신 왜 나한테 가져온 거야? 승재가 또 널 화나게 했어?”“아니요. 그저 우리 사이에 이런 귀중한 선물을 받는 게 알맞지 않은 것 같아서요.”고은서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두 사람이 한창 얘기 나누고 있을 때 밖에서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방금 그 엔진 소리 곽승재 차 엔진 소리였어?’그날 저녁 곽승재가 그녀에게 뺨을 맞은 후로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이 시간에 할머니 집엔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곽승재가 거실로 들어왔다.그는 평소처럼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확실히 다른 남자들과 달리 남다른 매력을 뿜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고 고은서를 무시한 채 전미자한테만 인사했다.“할머니.”“너 이 자식! 넌 은서가 안 보여? 인사할 줄도 몰라?”전미가 그를 비난했다.곽승재는 그제서야 고은서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물었다.“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브로치 돌려주러 온 거야. 네 선물 받는 게 난처하대.”전미자가 고은서 대신 대답했다.“넌 선물을 은서한테 직접 줄 것이지 왜 택배를 보내고 난리야.”“저도 잘 몰랐어요. 그냥 경매가 끝난 후 주민기한테 맡겼어요.”전미자는 덤덤한 곽승재를 보면서 순간 말
“그래서 나한테 물어보게 있다던 건 뭔데?”고은서가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전에 네 어머니가 엄청 훌륭한 퍼퓨머라고 하시면서 너도 네 어머니 재능을 물려받았다고 하시던데 혹시 비슷한 사례를 들어본 적 있냐 해서. 승연이를 안정시킬 향을 제작해줄 수 있을까?”그러나 고은서는 이런 일을 오늘 처음 듣는 것이었다.퍼퓸 제작도 상응한 난도가 있는 법. 보편적인 커스텀 향수라면 고객들이 말해주는 요구에 따라 시도해보겠지만 곽승연의 상황은 어찌 손을 댈래야 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곽승연 씨에 관해 아는 것도 없고 또 무얼 좋아하는지도 몰라서 약간 곤란할 것 같아.”고은서가 사실대로 말했다.“알겠어.”고은서는 아쉬워하는 곽승재를 보면서 위안해주려고 하다가 이내 타당치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말을 도로 삼켰다.“별다른 일 없으면 먼저 가볼게.”“응.”고은서는 자신의 차에 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곽승재는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차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전미자 있는 거실로 들어갔다.“은서는 갔어?”전미자의 물음에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일부러 시간까지 짜내서 돌아와서는 왜 또 그렇게 덤덤하게 구는 거야? 그리고 브로치는 왜 주민기가 보냈다고 거짓말을 한 건데?”전미자는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할머니, 저한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대요. 심지어 제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싫어해요. 제 모든 행동이 고은서 눈에는 그저 집착일 뿐이라고요.”곽승재가 답했다.“그러니까 전에 잘해주라고 할 때 잘해줄 것이지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지금 둘 사이가 이렇게 된 게 알고 보면 다 네 탓...어휴.”전미자는 풀이 죽은 곽승재를 보면서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네 아버지가 며칠 전에 사람도 집안도 다 괜찮은 여자애 한 명이 있다고 나한테 널 대신 설득해 달라고 하던데 진짜 더는 기회가 없다 싶으면 한 번 만나봐.”“저 절대 다른 사람이랑 결혼 안 해요! 정략결혼은 더더욱 하지 않을 거고요.”곽승재가 결연한 태
‘전에 은혜를 넘보지 말라고 경고한 이후로 쓸데없는 생각은 이미 접은 줄 알았는데 왜 또 구질구질하게 은혜한테 들러붙지 못해 안달이 난 거야?’고은서는 고은혜를 위안하면서 더는 원지훈이랑 애인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시끄러우면 그저 무시하라고 말했다.전화를 끊은 후, 고은서는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최근 원지훈이랑 두 번 정도 통화했는데 별로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했다.백승엽도 해외 전문가한테서 치료를 받는다고 하지만 골든 타임을 놓치는 바람에 기나긴 치료료정을 거치고도 오랫동안 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아마 남은 인생을 휠체어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백유미는 회사 징벌을 받고 원래 자리는 내놓았지만 여전히 판주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범가온 말로는 요즘 별다른 일 없이 조용히 보낸다고 한다.백씨 기업에서 밀고 있는 프로젝트도 아직까지는 흠을 드러내지 않았다.하지만 고은서는 어딘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원지훈이 예상 밖으로 일을 너무 쉽게 해결하는 것 같은데. 그리고 백유미도 자신을 엿먹인 사람이 민시후라는 걸 알면서도 가만있는다고? 원지훈은 그렇다 쳐도 적어도 나한테는 반격해야 하는 거 아니야?’고은서는 원지훈한테 연락해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원지훈은 한참 지나서야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세요?”고은서는 원지훈이 긴장해 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누구한테도 꿀리지 않는 뻔뻔한 성격을 가진 그는 고은서와 대화할 때 예의는 지키는 편이었지만 그의 말투로부터 항상 거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얼마 전에 전화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왜 긴장하고 있는 거지? 찔리는 곳이라도 있나?’고은서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별일은 아니고 너 은혜한테 고백했다며?”“저도 그럴 자격 없는 거 알아요. 그런데 제가 만나본 여자애 중에서 제일 좋은 거 어떡해요. 그저 기회라고 달라고 그런 거예요. 게다가 누나도 저에 관해 거의 꿰뚫고 있잖아요. 저 은혜한테 진짜 진심이에요. 절대 전처럼 이상한 생각 품고 그러는 거 아니란 말이에요.
원지훈이 난감해하며 말했다. “백씨 기업 책임자도 누나랑 같은 생각이에요. 그런데 상대방 측에서 계약서를 수정하지 않으면 위약금을 내더라도 계약을 실행하지 않겠다면서 아무튼 손해를 보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면서 막무가내로 나오고 있다니까요.”고은서는 이 계약을 이대로 망치는 걸 원치 않았다. 계약이 성사되어야만 백씨 기업을 제대로 무너뜨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상대방에서는 대체 왜 그러는 거지?’원지훈은 자신도 모른다면서 요즘 이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했다. 또 행여나 백유미한테 들키기라도 할까봐 부사장을 함부로 설득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지금 유일한 방법은 직접 상대방을 찾아가서 이러는 원인을 캐내는 거예요. 그래야 일이 쉽게 해결될 수 있어요.”원지훈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틀린 소리는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내가 더 고려해보고 이틀 후에 정확한 답을 줄게.”“저도 고민 끝에 생각해낸 방법이에요. 상대방이 너무 강하게 나와서 저도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요. 게다가 중요한 건 더 끌다가 백유미한테 들킬까 봐 걱정이에요.”원지훈이 조급해하며 말했다.“저 백씨 가문을 빨리 망가뜨리고 싶어요. 그런데 이번 기회를 잃게 되면 또 다른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요.”“알겠어.”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화를 끊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정말 이 일 때문에 이상하게 군 거라고?’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민시후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민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고은서, 동물원 수속이 거의 다 완성되었는데 지금 시간 있어? 네 사인이 필요한데 내가 데리러 갈게.”이 일에 관해 고은서는 이미 대책을 생각해냈다.“내가 생각해 봤는데 동물원을 나 혼자 경영하기에는 무리일 것 같아. 그래서 안전하게 ZY 그룹 명의로 하는 건 어때?”고은서가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그럼 내가 부담 가질 필요도 없잖아. 행여나 망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
“고은서, 이게 그렇게 난감해할 문제야?”고은서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민시후가 짜증을 내며 물었다.‘비록 어이없는 요구이기는 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선물 가격에는 요구가 있어?”고은서가 다시 확인했다.‘너무 비싸면 주기 싫은데.’“없어. 성의 없는 선물만 아니면 돼. 고은서, 너도 고씨 집안 아가씨잖아. 왜 이렇게 인색하게 구는 거야?”민시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인색한 게 뭐가 어때서? 전생에 정신병원에 갇혔을 때 손에 돈만 있었으면 그렇게 하찮게 남은 인생을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그녀는 이번 생만큼은 돈을 아끼며 살 생각이었다.그런데 이런 말을 민시후한테 함부로 해서는 안 되었다.“알겠어. 내가 진짜 진심을 다해서 널 위한 선물을 준비할게.”“당연히 그래야지.”민시후가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답했다.고은서는 이 틈을 타 원지훈에 관한 얘기를 꺼내면서 자신의 의문스러움을 말했다.그녀가 선물을 준비하겠다고 약속해서일까, 민시후는 아주 흔쾌히 돕겠다고 나섰다.“걱정하지마. 내가 조사해볼게.”고은서는 마음이 한결 놓이는 것 같았다.저녁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박지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은서, 너 민시후한테 남다른 감정 품고 있는 것 같은데.”“남다른 감정?”“문제가 생기면 민시후한테 다 얘기해주잖아. 민시후를 엄청 신임하고 있는 것 같은데.”“사업 파트너로서 서로 신임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했다.“곽승재를 이렇게 신임해 본 적 있어? 이 일을 곽승재한테도 알려줄 거야?”“아니!”고은서가 단호하게 부인하며 고개를 저었다.‘말도 안 되는 소리. 곽승재랑 백유미 사이 관계만 생각해도 이런 일을 곽승재한테 얘기할 리가 없잖아. 전에 여러 번 내 편을 들어줬다고 해도 백유미는 여전히 잘살고 있잖아.’“이거 봐. 이렇게 중요한 일을 곽승재한테는 안 알려주면서 민시후 하나만은 엄청 굳게 믿고 있잖아. 이게 남다른 감정을 가지도 있다는 표현이지.”박
“은서야, 너 곽승재랑 결혼하고 이혼한 것도 다 네 집념 때문에 그런 거잖아. 따지고 보면 너도 연애 경험이 전혀 없는 모쏠과 마찬가지야. 진짜 사랑인지 무엇인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잖아.”“민시후와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네 편을 들어주고 널 관심해주는 걸 봐서는 연애 상대로 꽤 괜찮을 것 같은데. 만약 곽승재한테 진짜 미련 남지 않았다면 민시후한테 기회를 한 번 주면서 너도 진정한 연애를 시도해보는 건 어때?”박지연이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그러나 고은서는 전혀 새겨듣지 않았다.‘민시후처럼 종일 껄렁대며 기분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어떻게 믿어. 날 좋아한다고 해도 그저 날 놀리는 게 재밌어서 생긴 일시적인 감정이겠지.’고은서는 민시후한테 놀림 받기 싫었다.“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해. 어제 온승준이 일자리를 너희 병원으로 옮겼다며? 어떻게 된 거야?”고은서가 화제를 바꾸었다.박지연이 다니고 있는 병원은 사립병원이었다. 대우가 나쁜 편은 아니었으나 온승준이 원래 다니던 대학병원과 비하면 차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온승준이 다니던 대학병원은 해성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많은 환자가 소문 듣고 찾아갈 정도로 전국적으로 이름난 병원이었다.의사와 간호사들도 그 대학병원에 취직하지 못해 머리를 쥐어짜는 와중에 온승준이 갑자기 이직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나도 우연하게 병원 동료들이 얘기하는 걸 들은 거야. 진짜 우리 병원으로 이직했는지 안 했는지는 귀찮아서 알아보지도 않았어.”박지연이 덤덤하게 답했다.“이혼한 게 후회되어서 너랑 같은 병원에 다니면서 네 마음을 다시 돌리려는 거 아니야?”“설령 진짜 우리 병원으로 이직했다고 해도 병원 측에서 높은 연봉을 내걸면서 데려오려고 한 거겠지.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이유가 있겠지. 내가 뭐라고 일을 자기 생명처럼 아끼는 사람을 이직하게 만들어.”박지연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그녀는 자신의 분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온승준은 직장 일 외의 모든 일에 관심이 없었다.사랑이든 집안
조수연은 자신이 온승준에 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어릴 적부터 고집이 셌는지라 누군가를 위해 자존심을 꺾는 일은 절대 없었다.그 누군갈 위해 이런 이성적이지 못한 결정을 내린 적도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지금까지도 온승준이 박지연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혜린과 잘 지내보라는 자신의 말에 화가 나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박지연과 같이 살면서 얼마나 큰 트라우마가 생겼겠어. 나는 그것도 모르고 금방 해탈한 애한테 새 여자를 만나보라고 강요하기만 하고. 얼마나 싫었겠어. 다 내 탓이야.’“엄마가 다신 다른 여자 만나보라고 강요하지 않을게. 혜린이랑도 거리 두면서 너무 가까이 지내지 않을게.”조수연이 온승준을 계속 달랬다.“승준아, 병원에서 널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너도 알고 있잖아. 너만 원한다면 꼭 다시 받아줄 거야. 그러니까 원래 병원으로 돌아가.”그러나 온승준은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았다.“어머니, 아까도 말했지만 저 안 돌아갈 거예요.”“그 여자가 있는 병원에 가기만 해 봐. 이젠 너 같은 아들 없는 셈 치고 살 테니까!”조수연은 더는 화를 참지 못하고 호통쳤다.“어머니, 아버지랑 돌아가서 일찍 쉬세요. 그리고 제 결정은 변하지 않아요.”온승준이 미간을 어루만지며 말했다.“이런 불효자식 같으니라고!”온범준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온승준을 때리려고 할 때 조수연이 그를 막았다.“승준아, 지금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것 같은데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도록 해.”온범준과 조수연이 떠난 후 온승준은 서재로 갔다.그는 책상 옆에 있는 솔로라는 글자가 새겨진 강아지 인형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그 인형은 금방 결혼했을 때 박지연이 산 인형이었다. 당시 그녀는 포장도 뜯지 않은 채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에게 애교를 부렸다.“여보,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나한테 꼭 행복하게 살라고 당부하셨는데 여보랑 결혼한 이후로 이미 너무 행복한걸.”박지연은 그의 어깨에 기댄 채 그의 귓가에 가까이 대고
이튿날, 온승준은 정식 직원이라는 신분으로 이레 병원에 출근했다.서로 알고 지내던 교수 한 명이 그를 데리고 병원을 둘러보면서 병원 직원들에게 그를 소개해줬다.입원처로 가보고 싶다는 온승준의 말에 교수는 또 그를 데리고 외과 입원처로 향했다.외과 간호사실을 지나갈 때 마침 다른 간호사들과 서류를 확인하고 있는 박지연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그와 눈이 마주친 박지연은 멈칫하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옆에 있던 간호사와 하던 말을 계속 이어갔다.이를 본 온승준은 강렬한 실망감에 휩싸이면서 발이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승준 씨, 왜 그래요?”“아무 일도 아니에요. 가시죠.”교수의 물음에 온승준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수간호사님, 방금 새로 오신 의사분 너무 멋있지 않아요? 그런데 수간호사님을 빤히 바라보던 것 같던데, 혹시 아는 사이세요?”간호사 한 명이 호기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모르는 분이에요.”박지연은 아주 덤덤하게 답했다....점심시간.온승준은 교수의 밥약을 사양하고 병원 구내식당으로 갔다.그는 점심밥을 챙기고 아주 눈에 띄는 자리를 골라 앉았다.업계에서 꽤 이름 있었는지라 그를 알아보고 놀라 하며 인사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온승준은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지만 애써 예의 바르게 같이 인사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온승준은 그제야 동료들과 수다 떨면서 구내식당에 들어서는 박지연을 보았다.“지연아.”온승준이 먼저 주동적으로 인사했다.그의 옆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박지연을 바라보았다.“방금 들어온 간호사랑 아는 사이예요?”누군가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러나 온승준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수간호사님, 여기 같이 앉으실래요?”또 다른 누군가가 박지연을 향해 인사하며 말했다.“아니요. 저는 동료들과 함께 먹을게요.”박지연은 웃으면서 사양하고는 함께 온 간호사들과 배식 창구로 걸어갔다.온승준은 원래부터 인간관계 처리에 능하지 않았고 철면피하게 누군가에게 질척거리는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