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가 담담하게 말했다.“설령 곽승재가 직접 이 프로젝트를 담당한다고 해도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야. 난 이미 아무 감정도 없거든.”민시후는 여전히 불안해하며 말했다.“우리 다른 프로젝트로 바꾸자. 신재생에너지 쪽도 괜찮아 보이잖아.”“신재생에너지도 좋지. 하지만 왜 제인 제약을 포기해야 해?”고은서가 말을 이었다.“네 말대로 곽승재가 나 때문에 이 프로젝트에 끼어든 거라면 내가 신재생에너지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끼어들지 않을까? 그럼 우린 매번 다 된 프로젝트를 포기하게?”민시후가 태연하게 답했다.“너를 양보하는 것만 아니라면 프로젝트는 상관없어.”고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세상에 소문난 난봉꾼인 민 도련님이 이런 순진한 연애 바보였다니.”민시후가 고은서에게 다가가 중점만 잡아내며 말했다.“고은서, 네 말은 우리 사이가 연인 관계라는 거지?”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장난하지 말고 인제 제약 프로젝트는 포기할 수 없어.”고은서가 결정을 내리며 말했다.“송민아한테 계약서와 계획서를 수정하게 하고 내일 투자부 직원들을 모아 회의를 열 거야.”판주 투자은행과 공동투자를 하더라도 제인 제약은 매우 좋은 프로젝트였다. 고은서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민시후는 고은서를 바라보며 다소 아쉬운 듯 말했다.“그렇다면 내일 회의는 내가 주재할게. 나도 직접 참여해야겠어.”고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민시후, 최근에 다쳐서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을 텐데 이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그건 안 돼. 곽승재는 교활한 사람이야. 방심하고 있을 수는 없지.”민시후는 단호히 거절했다.그 말을 들은 고은서는 웃기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좋아. 네 말대로 하자. 그럼 난 먼저 사무실로 돌아갈게.”고은서가 돌아가려고 하자 민시후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잠깐만.”“왜?”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이따 네 외삼촌 생일 파티에 가야 하잖아. 옷 좀 골라줘.”민시후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걸
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고은서, 함정 파려고 하지 마. 내가 사기꾼도 아니고 어떻게 널 가르쳐?”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동안 한 직원이 부러워하며 말했다.“대표님, 여자 친구분과 사이가 정말 좋아 보이네요.”“저는...”“말 잘하네. 전부 다 살게.”기분 좋아진 민시후가 큰손다운 기질을 발휘했다. 그 말에 직원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은서는 해명하려 했지만 끼어들 수 없어서 그냥 포기했다.민시후는 그런 고은서를 보며 더욱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옷을 갈아입고 액세서리와 메이크업을 하자 두세 시간이 지나갔다.고은서는 거울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문적인 손길이 그녀의 모든 장점을 부각해 놓았다.민시후는 흰색 정장을 입고 머리를 뒤로 빗어 올린 채 나타났다.다른 사람이 입는다면 소화하기 힘든 스타일을 민시후가 입으니 타고난 고급스러움과 매혹적인 느낌을 발산했다.두 사람은 출발 시간이 되어갈 즘 준비를 끝마쳤다.민시후의 비서는 여러 개의 선물을 들고 그들을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다.고국성의 생일 파티는 오성급 호텔에서 열릴 예정이었다.운전기사가 호텔 정문에 차를 세우자 곧 호텔 직원들이 다가와서 차 문을 열어줬다.차에서 내린 민시후가 고은서를 향해 팔을 내밀며 팔짱을 끼라는 신호를 보냈다.비록 파티에 걸맞은 행동일 뿐이지만 오늘 파티는 고씨 집안 모든 사람과 친분이 있는 친구들과 고객들이 모이는 자리였다.고은서가 민시후와 팔짱을 끼고 들어가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것은 뻔했다.“민시후, 오늘 외삼촌 생일이니 그분이 주인공이야. 우리가 주목받는 건 좀 아닌 것 같아.”고은서는 어제 박지연이 흥분하며 했던 말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리고 말조심해 줘.”자신이 한 말들이 민시후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라는 걸 안 고은서가 덧붙였다.“오해하지 마. 네가 예의를 모른다고 강조하는 게 아니라 그저 어색한 상황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아서 그래. 너를 향한 내 마음에 확신이 생긴다면
갑작스러운 힘에 고은서는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그녀는 갑작스럽게 넓은 품에 안기게 되었다.익숙한 향기가 풍겨오자 고개를 돌린 고은서는 곽승재임을 확인했다.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린 것인지 곽승재는 어두운 표정을 한 채 싸늘한 눈빛으로 민시후를 응시하고 있었다.“누구 허락받고 만지는 거야?”곽승재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민시후도 싸늘한 표정으로 답했다.“무슨 상관인데? 너는 왜 고은서를 당기는데.”그 상황을 본 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에서 벗어나 민시후 옆으로 서서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여기 있어?”고은서의 물음에 곽승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세심하게 꾸민 고은서는 평소보다 더 빛났다.심플하면서도 정교한 디자인에 몸에 맞는 흰색 드레스는 그녀를 완벽하게 감쌌다.드레스는 무릎까지 내려왔고 그녀의 가냘프고 흰 작은 다리가 드러났다. 그런 고은서의 모습은 마치 요정 같았다.흰색 정장을 입은 민시후와 함께 서 있으니 두 사람은 잘 어울리며 보기 좋았다.하지만 곽승재는 가슴 한편에서 묘한 답답함과 불편함을 느꼈다.“삼촌 생일이라 초대받아서 왔는데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어?”곽승재가 차갑게 말하자 고은서는 콧방귀를 뀌었다.작년에 아직 이혼하지 않았을 때 그녀는 곽승재와 함께 외삼촌 생일 파티에 참석하려 했으나 곽승재는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었다.그런데 이혼하고 나서 곽승재는 이제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되는 곳에 와있었다.정말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웠다.“고은서, 왔으면서 왜 들어오지 않고 여기 서 있어?”그때 고은혜가 연회장에서 나와 고은서에게 인사를 건넸다.동시에 고은혜는 민시후와 곽승재를 발견했다.민시후는 흰색 정장을 입고 굉장히 잘생기고 매혹적인 모습이었고 곽승재는 전형적인 검은색 고급 정장을 입고 차가우면서도 잘 생겼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고은혜는 두 사람을 보고 상황을 짐작하고는 조심스럽게 고은서에게 물었다.“둘이 어떻게 같이 온 거야? 싸우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네.”고은서는 고은혜를 흘깃 쳐다
“아니요, 은서 정말 능력 있어요.”“할아버지.”곽승재는 더 이상 듣지 않고 고준석을 부르며 고국성 부부에게 인사를 건넸다.“삼촌, 생신 축하합니다. 제가 준비한 작은 선물인데 받아 ㅜ세요.”곽승재는 고국성에게 자수정 상자를 건넸다.단은숙이 고국성을 대신해 선물을 받아 열어보았고 그것은 고국성이 좋아하는 고급 담배통이었다.고국성도 선물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고맙다. 승재야. 마음 많이 써주었구나.”“삼촌이 좋아하실 것 같아 지난번 경매에서 보고 괜찮은 것 같아 바로 사 왔어요.”곽승재도 담담히 웃으며 답했다.“은서야, 너는 무슨 선물 준비했어?”곽승재가 자연스럽게 고은서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그를 째려보았다.‘일부러 이러는 거야!’그녀가 준비한 선물도 담배통이었는데 백화점에서 산 것이어서 곽승재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곽승재가 먼저 선수를 친 상황에서 그녀는 준비한 선물을 자신 있게 꺼내 보일 수 없었다.“저희가 준비한 선물은 너무 커서 들고 다니기 어려워요.”민시후가 고은서의 기분을 눈치채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었다.민시후가 눈빛을 보내자 운전기사가 선물을 들고 들어왔다.고급 영양제뿐만 아니라 술, 담배 그리고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들어 있었다.고국성은 예술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우아함을 자랑하고 싶어 했고 특히 이런 고급스럽고 보기 드문 그림을 좋아했다.“시후, 안목이 좋네. 이 그림 정말 마음에 들어.”고국성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호칭마저 바꾸며 기쁜 마음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고국성이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좋은 선물이구나. 이제 외삼촌한테 효도할 줄도 아네.”고은서는 민시후의 도움에 감사했다.하지만 곽승재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는 고은서가 이런 자리에 민시후를 데려올 줄도 몰랐고 민시후가 이렇게까지 철저히 준비할 줄도 몰랐다.선물 경쟁에서 민시후는 완벽히 승리한 셈이었다.민시후는 고국성에게 그림을 선물했을 뿐만 아니라 단은숙에게 피부에 좋은 영양제를 고준석에게는 고급 옥돌
고은서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온화한 표정을 한 유성준이 서 있었다.“성준 오빠.”고은서가 웃으며 그를 불렀다.유성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민시후를 보았다.“이분은 네 친구야?”“네. 민시후예요.”민시후가 유성준을 향해 신사답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유성준도 신사답게 답례하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시후 씨.”두 사람이 잠시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고국성이 민시후에게 다가왔다.“시후야, 골동품에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저기 내 친구도 전문가야. 같이 얘기 나눠 보지 않을래?”고은서는 외삼촌의 이런 제안이 민시후를 불편하게 만들까 봐 대신해 거절하려던 찰나 민시후가 답했다.“좋아요.”민시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삼촌께서 제가 너무 문외한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좋습니다. 은서야, 나 먼저 저기 가 있을게. 나중에 다시 올게.”가기 전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말하고 유성준을 향해서도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민시후와 고국성이 자리를 뜨자 유성준이 민시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은서야, 저 사람이 지난번에 네가 나한테 말한 사람이지?”고은서는 유성준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씁쓸함을 느끼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 입을 열었다.“성준 오빠, 미안해요.”“바보같이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유성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시후 씨는 잘생기고 품격도 좋고 너를 아껴주는 것 같아. 네가 끌리는 것도 이해가 돼.”“성준 오빠도 좋은 사람이에요. 저를 지켜주려 한 오빠의 마음과 노력에 정말 감사해요.”고은서가 여전히 미안한 마음을 담아 말을 이었다.“더 이상 저에게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다른 여성분을 찾아보세요.”“널 기다리는 건 시간 낭비가 아니야. 하지만 너에게 부담을 주려는 생각은 없어. MQ가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 나도 이 마음에 대하여 제대로 고민해 봐야겠지.”고은서가 얼른 답했다.“MQ일은 천천히 해도 괜찮아요. 오빠 마음이 더 중요하죠.”“은서야, 몇 년이라는 시간 동안 너를 기다리는 것에 습관
질투가 밀려오자 곽승재는 마음 한편이 저릿해 났다.육현석이 전화에서 얘기했던 대로 고국성에게 예의를 다하기 위해 연회를 끝까지 참석하려고 돌아왔지만 고은서와 민시후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자 곽승재는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기분이 들지 않아 다시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떴다.“은서야, 곽 대표님 가셨어.”유성준이 말하자 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까 갔잖아요.”“다시 왔어.”유성준이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어쩌면 착각일 지도 모르지만 꼿꼿한 자세를 한 평소와 달리 그의 뒷모습은 어딘가 처량해 보였다.“곽 대표님처럼 강한 성격을 가진 분이 참지 못하고 자리를 뜬 걸 보면 너와 시후 씨가 함께하는 모습이 적잖은 충격을 안겨준 거겠지.”유성준은 자신을 위로하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이렇게 생각하면 나한테 기회가 오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네.”고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유성준은 씁쓸한 마음을 거두고 업무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네가 여시은 씨를 위해 제작한 향수 샘플, 여시은 씨가 아주 만족스러워했어. 그분이 또 우리한테 고객을 소개해 줬는데 MQ에서 새로 영입한 조향사가 경험이 부족해서 네가 함께 만나봤으면 하는데 이번 주에 시간 될까?”MQ를 위해 맞춤 향수 라인을 개척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 고은서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그 후 유성준은 여시은과의 프로젝트는 거의 끝나고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모든 것이 마무리될 것이라고 얘기해 주었다.업무 이야기를 하니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고 민시후가 고은서를 찾으러 왔을 때는 이미 30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이제 곧 식사가 시작되니 가서 앉자.”민시후가 자연스레 말하자 고은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성준 오빠, 오빠도 외할아버지랑 함께 앉지 않을래요?”유성준은 민시후를 잠시 보고는 부드럽게 거절했다.“괜찮아. MQ 중요 고객분들도 오셨으니 그분들과 함께 있어야 할 것 같아.”고은서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민시후
고은서는 고준석의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곽승재가 개인적으로 할아버지를 찾아뵈었다고?’T국에서 있었던 일을 솔직히 얘기할 수 없었던 고은서는 단지 의외의 사고가 발생해 곽승재가 다쳤다고만 했다.“너 때문에 다친 거야?”고준석이 묻자 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네.”“넌 전혀 감동하지 않은 거야?”고준석이 놀라며 물었다.지난 생이었다면 곽승재가 총을 막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대신해 작은 상처라도 입었어도 감동했을 것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이 상황이 피곤할 뿐이어서 간략하게 답했다.“할아버지, 당시 상황이 복잡해서 한두 마디로 설명해 드리기 어려워요.”고준석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은서야, 나는 네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 사람을 좋아해서 새로운 인연을 이어 나갔으면 좋겠다.”고은서도 고준석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절대 곽승재 심기를 어지럽히려고 민시후의 마음을 받아주려는 게 아니에요.”고준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우리 은서 이제 다 컸네.”얼마간 이야기를 나누자 밖의 연회도 마무리 되어 갔다. 고은서는 바로 고준석을 차에 태우고 민시후를 찾으러 연회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그는 바로 그녀의 등 뒤에 있었다.민시후는 술을 많이 마셨는지 취한 기색이 보였다.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잖아.”“여기 있잖아.”고은서가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얼마나 마신 거야? 취했어?”지난번 클럽에서 민시후와 곽승재가 내기했을 때 고은서는 민시후가 술을 잘 마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주량을 보니 내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안 취했어.”민시후가 고은서의 생각을 눈치채고 말했다.“나 술 잘 마셔. 너무 오래 안 마셔서 상태가 안 좋을 뿐이야.”고은서는 취한 사람과 논쟁을 이어가지 않기로 했다.“알았어. 너 술 잘 마셔. 가자. 바래다줄게.”민시후가 고은서의 옆
화가 나면서도 억울한 감정을 느낀 민시후는 고은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나도 좀 봐주면 안 될까? 나도 조금이나마 좋아해 주면 안 돼?”마음이 약해진 고은서는 민시후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유성준이 나한테 몇 번 고백하긴 했지만 다 거절했어. 방금전에 얘기하길 점차 내려놓고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애를 찾을 거래.”그 말을 들은 민시후는 이내 희망으로 가득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은서, 날 위해서 유성준의 고백을 거절한 거야?”고은서는 전에도 유성준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번에 명확하게 거절한 이유는 민시후한테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아마도?”“맞으면 맞다고 하면 되는 거지. 아마도가 뭐야.”민시후는 그녀의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은근히 만족했다.“고은서, 다들 널 은서라고 부르던데 나도 그렇게 불러도 돼?”고은서는 조마조마해 하는 민시후의 눈빛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냥 칭호일 뿐인데 네 마음대로 해.”“은서야.”민시후가 새로운 칭호를 그녀를 불렀다.“응.”고은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줬다.“은서야.”민시후는 또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꽉 잡았다.둘 외에 아무 사람도 없는 이 시간, 달빛과 유유히 불어오는 밤바람 때문인지 민시후의 목소리가 매우 유혹적이고 부드럽게 느껴졌다.사랑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고은서를 바라보는 민시후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이내 진한 키스라도 할 것 같았다.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술기운 때문일까. 고은서는 민시후를 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갑자기 멀리서 차 경보 소리가 들려왔다.소리가 하도 커서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사삭 깨졌다.고은서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려던 생각을 접었다.고은서는 무슨 상황인지 확인하러 오는 아파트 경호원을 보며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민시후를 향해 입을 열었다.“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돌아가서 쉬어.”민시후는 약간 실망하기는 했지만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