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시은을 향한 경각심을 낮출 수 없었던 고은서는 그녀한테서 연락이 오자마자 녹음 공능을 켜두었다.그러나 여시은이 이리도 눈치 빠르게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은서 씨, 화났어요? 아니면 정말 저를 오해한 거예요? 저는 은서 씨를 계속 친구라고 생각했는데.”여시은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제가 하도 멍청해서 여시은 씨의 경지에 이르기는 불가능할 것 같네요. 여시은 씨 친구가 될 자격도 없고요.”“은서 씨, 너무 겸손해하지 않아도 돼요. 멍청하다뇨? 퍼퓸 제작 솜씨도 훌륭한 데다가 유일 투자 은행까지 운영하고 있잖아요. 심지어 해성 10대 청년상 수상자이면서 왜 그러는 거예요. 아, 맞다. 어제 연회에서 발언하는 사진을 봤는데 너무 이쁘고 멋지던데요. 저 엄청 부러워했는데.”고은서는 여시은이 갑자기 왜 그 얘기를 꺼내는지 의문이 들었다.“부러워할 필요가 있나요. 시은 씨 능력으로 마음만 먹으면 뭐든 다 해낼 수 있는데. 심지어 저보다 백배 정도 더 훌륭하게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죠.”“과찬이에요.”여시은이 웃으면서 말했다.“제가 무슨 능력이 있어요. 유일하게 은서 씨보다 훌륭한 점이라면 운인 것 같네요. 저 대신 모든 걸 다 해줄 수 있는 아빠가 있어서 굳이 노력하지 않고서도 이 세상 많은 사람들보다 더 좋은 생활을 만끽할 수 있는 운이랄까요? 그저 간혹 심심할 때가 있어서 은서 씨 같은 사람과 지내면서 더 많은 걸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지금 나한테 좋은 아빠를 두었다고 자랑하는 거야?’확실히 이 방면에서는 고은서는 전혀 비길 자격이 없었다.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 어머니도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고 고준석마저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었다.인내심이 바닥난 고은서는 더는 여시은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제가 바빠서 이만 끊어야 할 것 같네요.”전화를 끊은 후 얼마 되지 여시은한테서 문자가 왔다.[은서 씨, 나중에 회사에 또 연회가 있으면 저도
여시은은 방긋 웃으면서 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예요. 절대 계획에 차질이 생길 없으니까 시름 놓고 돌아가셔도 돼요.”...고은서는 퇴근하자마자 라이트문으로 돌아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녀는 눈처럼 새하얀 몸뚱이에 아주 이쁘장하게 생긴 고양이 한 마리를 보았다.고양이를 그녀를 향해 야옹 하면서 다가와 다리에 자신의 몸을 비볐다.순간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린 고은서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어루만져 주었다.그러나 이내 고양이가 전에 곽승재가 자신에게 보내준 사진 속의 고양이 퀸이라는 걸 발견했다.전보다 많이 자란 데다가 털도 예전보다 훨씬 길어졌는데 눈동자는 바다처럼 푸르렀는데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이뻤다.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퀸의 머리를 더 어루만져 주었다.그러다 문뜩 생각이 들었다.‘퀸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설마...’고은서의 한참 생각하고 있을 때 맞은편 집에서 익숙한 남자 한 명이 걸어 나왔다.“퀸.”곽승재는 고양이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땅에 쪼그리고 앉아 고양이를 어루만지고 있는 고은서와 눈이 마주쳤다.가녀린 몸매에 뽀얀 피부를 가진 고은서가 흰 고양이를 어루만지고 있는 모습이 유독 아름다워 보였다.그러나 고은서의 눈빛은 그를 보자마자 차가워졌다.이를 본 곽승재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나면서 표정이 굳어졌다.“나와 연관된 건 다 싫다며. 그런데 왜 퀸을 안고 있는 거지?”곽승재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고은서는 멈칫하더니 이내 퀸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퀸이 품에 꼭 안긴 채 더 어루만져 달라고 그녀의 손가락을 살랑살랑 핥기 시작했다.새끼 고양이 앞에서 차마 마음이 독해질 수 없었던 고양이는 앞으로 다가가 직접 퀸을 곽승재 손에 쥐여주고는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왜 여기 있는 거야?”“내 집인데 있으면 안 돼?”고은서는 열린 문 사이로 그의 집 안을 살짝 흘겨보았는데 다행히도 마재경은 보이지 않았다.‘전에 아줌마는 마재경이 이사 갔다고 했는데 곽승재는 왜 여기에 있
곽승재는 자신을 경계하는 고은서를 보면서 입술을 달싹이다가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퀸을 안고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어이없어졌다.‘대체 왜 저러는 거야? 정말 머리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마재경과 알콩달콩하더니 동거할 집을 따로 구한 거 아니었어? 왜 계속 여기에 있는 건데? 정 안되면 예원 별장으로 가면 될 것을 왜 굳이 여기에 있는 거냐고?’고은서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집으로 들어갔다.그러나 차마 퀸이 굶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고은서는 이미숙한테 우유를 대신 가져다주라고 말할 예정이었는데 마침 그녀가 집에 없었다.전화해 물어보니 장보고 잃어버리고 안 가져온 채소가 있어서 다시 가지고 가는 길이니 배고프면 국을 먼저 먹고 있으라고 그녀에게 말했다.고은서는 고민 끝에 우유를 들고 곽승재의 집 문을 두드렸다.곽승재는 퀸을 집 안에 두고 혼자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야?”고은서가 안을 들여다보니 퀸이 배고픈 탓인지 계속 물을 할짝거리고 있었다.“우유 달라며!”그녀가 우유를 건네주며 말했다.그러나 곽승재는 아주 단호하게 거절했다.“필요 없어. 이미 사람 시켜 사료랑 우유를 가져오게 했어. 아마 곧 도착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일부러 이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내가 방금 전에 거절했다고 본인도 나를 거절한다는 거야?’“싫으면 말고.”‘좋은 마음으로 우유를 가져다줬더니 찬물이나 끼얹고 난리야.’고은서는 씩씩거리며 뒤돌아 가려고 했다.그러나 곽승재가 갑자기 그녀를 붙잡고 집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벽에 밀어붙였다.그의 따뜻한 체온이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고은서가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보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탁하는 소리와 함께 우유도 땅에 떨어졌다.“곽...”고은서가 화를 내려고 하던 찰나 곽승재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그는 미리 계획이라도 한 것처럼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잡고 깍지를 끼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뒤통수를 잡고 진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서로 숨결이
고은서는 그 일로 곽승재의 뺨까지 내리쳤었다.‘그러니까 내가 마재경을 해치려 할까 봐 다른 곳으로 옮겨준 게 아니라 내 말을 듣고 정말 라이트문에서 쫓아냈단 말이야?’곽승재는 고은서의 표정 변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기억났으면 계속해도 되지?”그는 고은서에게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또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곽승재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둘러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목을 부축한 채 방금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또다시 숨이 막혀온 고은서는 부득이하게 고개를 들고 그의 키스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키스가 끝난 후, 고은서는 곧 질식할 것만 같았다.곽승재의 몸은 점점 더 뜨거워 났고 그곳도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이를 발견한 고은서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곽승재, 당신 정말 변태야?”그녀의 발그스름한 얼굴과 촉촉한 입술을 바라보고 있던 곽승재는 욕구가 억누를 수 없을 만큼 거세져 가는 것 같았다.“은서야, 난 그저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정말 곧 터질 정도로 네가 그리웠어...”곽승재는 말하면서 또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그러나 고은서는 더는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던지라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잊지 마. 우리 이미 이혼한 사이야. 게다가 당신도 새로운 여자가 생겼잖아. 선 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고은서는 애써 덤덤한 척하면서 말했다.곽승재는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고은서의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아니면 무언갈 떠올렸는지 그는 이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눈빛도 점점 어두워졌다.마침 퀸이 뒤에서 야옹거리는 바람에 고은서는 그 틈을 타 곽승재를 밀어냈다.“얼른 놔.”그는 고은서를 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면서 뒤로 한발 물러서더니 끝내는 그녀를 놓아주었다.고은서가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할 때 뒤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 이건 네가 나한테 진 빚이야. 난 그저 마땅하게 돌려받을 뿐이고. 절대 집착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어.”고은서는 그의 말에 응
발신자는 다름 아닌 송민준이었다.“민준 씨, 무슨 일이죠?”“민아한테서 들었는데 새 폰을 거절했다면서요?”고은서는 이내 웃으면서 답했다.“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요. 그저 폰일 뿐인데 여분으로 둔 폰이 하나 더 있어서 그냥 그 폰을 쓰면 돼요.”“제가 폰에 손이라도 댔을까 봐 걱정되어서 그러는 건가요?”송민준이 갑자기 예상치 못한 질문을 투척했다.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확실히 걱정되긴 했지.’그녀는 지금까지도 송민준이 어떤 사람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어떨 땐 위험하게 느껴지다가도 간혹 젠틀한 면을 보일 때도 있었다.그러나 폰만은 마음 놓고 받을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어보면 나더러 어떻게 대답하라는 거지?’“장난이에요.”고은서가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송민준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폰은 거절했으니 다른 선물로 골라볼게요. 어떻게서든 제 고마움을 전달하고 싶어서요.”“민아를 봐서 도와준 건데 괜찮아요. 민아 오빠만 아니었더라면 아마 상관하지도 않았을 거예요.”고은서가 사실대로 말했다.“제가 민아 덕분에 살았네요. 시간 편할 때 민아도 불러서 같이 밥 한 끼 먹죠.”고은서는 흔쾌히 승낙했다.송민준은 이어 어젯밤에 도주한 세 사람이 이미 경찰에 잡혔는데 응당한 벌을 받게 될 거라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고은서에게 전해주었다.전화를 끊은 후 텔레파시라도 통한 건지 이내 박지연한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누구랑 통화하고 있었어? 계속 부재중이라고 뜨던데.”고은서는 송민준이랑 통화하고 있었다면서 어젯밤에 있었던 일까지 다 그녀에게 알려주었다.박지연은 이내 걱정하면서 다친 곳은 없냐고 물었다.그녀는 괜찮다는 답을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 진짜 절에라도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자꾸 재수 없는 일만 생기는 거야?”“시도 때도 없이 이런 사고가 자꾸 생기는데 나도 왜 이렇게 재수 없는지 모르겠어. 보살님한테 빌어서 해결될 일이라면 네가 대신
고은서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깜짝 놀랐다.“정말 절에 가는 거야?”“당연하지. 마침 육현석도 시간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 같이 절에 가서 간절하게 빌고 주변에서 놀다 돌아오자. 일도 쉬면서 해야지.”박지연이 답했다.‘육현석도 같이 가는 거구나. 쉬는 게 아니라 그냥 데이트하러 가는 거겠지.’“난 굳이 두 사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은데.”“괜찮아. 너도 이젠 습관 될 때가 되지 않았니?”박지연이 웃으면서 말했다.“...”고은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녀는 박지연과 시간을 정한 후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그러나 뜻밖으로 곽승연과 마주치게 되었다.품에 퀸을 안고 있는 걸 봐서는 아마 곽승재 집에서 나온 듯했다.“언니! 언니도 여기 살아요?”곽승연은 그녀를 보자마자 무척 기뻐했다.‘따지고 보면 승연이를 못 만나지도 꽤 됐네.’곽승연의 상태는 전보다 훨씬 좋아졌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눈에 띄게 좋아하며 총총 달려왔다.“응. 승연이는 여기에 왜 온 거야?”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엄마가 오늘 바빠서 같이 못 있어 준다고 나갔는데 마침 오빠를 너무 오래 못 본 것 같아서 기사님 차에 오빠 찾으러 온 거예요.”곽승연의 말하는 속도도 전과 달리 많이 빨라졌다.마침 곽승재가 집에서 걸어 나왔다.그는 고은서를 보고 입술을 달싹이더니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틀 전의 키스를 떠올린 고은서도 그한테 별로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승연아, 언니는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그러자 곽승연이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언니, 어디 가는 거예요?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고은서는 전에 편한 시간에 그녀를 데리고 놀러 가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아무튼 박지연이랑 육현석 두 사람과 나가는데 승연이를 데리고 가도 괜찮겠지?’“승연이 데리고 어디 갈 생각이었어?”고은서가 곽승재를 향해 물었다.“판주에 처리할 일이 생겨서 사무실에 데려가려고.”곽승재가 덤덤하게 답했다.‘굳이 휴식일에 동생을 데리고
고은서는 곽승재의 표정 변화를 눈치챘지만 그에게 더 설명해줄 생각은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연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곽승재도 고은서에게 있어서 곽승연이 본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었다.아마 누가 곽승연을 데리러 올지 물어도 고은서는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다.곽승재는 그저 퀸을 품에 안은 채 우두커니 서서 고은서와 곽승연이 엘리베이터에 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언니, 오빠도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엘리베이터에 오르자 곽승연이 소곤대며 말했다.“아니야, 너희 오빠는 일이 바빠서 안 가고 싶을 거야.”이윽고 곽승연이 또 물었다.“언니랑 오빠는 다시 화해할 거예요?”곽승연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작게 웃고는 곽승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대답했다.“승연아, 언니가 말했지? 언니랑 승연이 오빠의 관계가 어떻든지 우리 둘 사이의 우정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고 말이야.”곽승연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어느새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고 고은서는 곽승연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고은서는 데리러 온다던 박지연이 도착했는지 몰라 연락을 하려고 핸드폰을 꺼낸 찰나에 마침 검은색 차 한 대가 천천히 접근하는 것을 발견하였다.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송민준이었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송민아였다.“짜잔! 놀랐지?”송민아는 냉큼 조수석에서 내려 고은서를 놀래줬고 덕분에 고은서는 어리둥절한 채 송민아에게 물었다.“여긴 어떻게 온 거야?”“어떻게 오긴, 당연히 너 데리러 왔지!”송민아가 해석을 덧붙였다.“지연 언니가 같이 참배하러 가자고 연락이 왔었는데 오빠도 시간이 빈다길래 같이 왔어!”알고 보니 박지연이 송민아도 함께 부른 것이었다. 고은서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다면 박지연이 남자친구를 챙기느라 자신을 챙기지 못할까 봐 송민아를 부른 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여긴 누구야?”송민아는 얌전하고 순한 곽승연을 보고 물었다.고은서는 웃으며 곽승연을 그들에게 소개해주었다.“승연이라고 해. 곽승재 여동생이야.”
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마 그럴 일 없을 거야. 곽승재 말로는 회사에 급히 볼 일이 있다고 그랬거든.”박지연은 흥하고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제일 좋기는 오지 말았으면 해. 최근에 그 인플루언서랑은 아직도 안 헤어졌지? 오기만 해, 뭐가 됐든 내가 그 사람을 보고도 욕을 참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고은서는 작게 웃고 대답했다.“가자, 현석 씨가 표를 샀대.”육현석은 표를 손에 쥐고 다가왔고 송민준은 일행들에게 줄 물과 기도할 때 사용하게 될 향을 사 들고 다가왔다.“송민준 씨가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귀한 쉬는 날에 우리랑 같이 절에 오는 고생을 찾아서 한다는 게 말이 돼?”박지연은 또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한번 흘기고는 대답했다.“그래, 네 말대로 지금 나한테 눈이 멀어서 다른 건 다 안중에도 없어서 내가 어딜 가든 다 따라오나 봐. 어떻게 좀 만족스러운 대답인가, 박지연 씨?”“...”박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때마침 육현석이 다가온 덕분에 둘의 대화는 그쯤에서 마무리될 수 있었다.절은 엄숙하고 고요했으며 종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절에 들어서니 거대한 고목 몇 그루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들은 바에 의하면 이 절은 당나라 때부터 존재해왔다고 한다. 몇 번의 격변을 겪으며 예전만큼 성대하지는 못하나 여전히 그 명성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발길이 끊기지 않는 곳이었다.박지연과 육현석이 앞장섰다.송민아와 곽승연은 생각보다도 더 성격이 잘 맞는 것 같았다. 모든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고 심지어는 땅에 떨어진 은행나무 잎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둘이 딱 붙어 관찰하고 다시 걸어가곤 했다.그리고 고은서와 송민준이 제일 뒤에서 함께 그들을 따라갔다.고은서는 가장 영험하고 중생을 두루 보살핀다는 X신전에 도착해서 평안등 하나를 띄웠다.그러면서 타국에 있는 민시후가 무탈하게 수술을 마치고 얼른 몸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랐다.신전에서 나왔을 때 송민준이 고은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