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되지!”민시후가 이내 좋아하면서 답했다.“손에 있는 일을 다 끝내자마자 해성으로 돌아갈게.”“...”어이가 없어진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박지연한테 같이 밥 먹자고 연락했다.그러나 박지연이 처리할 일이 있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다음에 다시 약속 잡기로 했다.박지연은 오늘 온범준이 할 얘기가 있다고 조수연 병실로 올 수 없냐고 하는 전화를 받았다.“할 말은 이혼하기 전에 이미 다 한 거로 알고 있는데요. 저는 그쪽이랑 할 얘기가 더는 없는데요.”박지연이 거절했다.그러자 온범준이 이레 병원 원장이 온승준이 두 병원을 바삐 오가는 걸 보고 조수연을 이레 병원으로 옮겨주겠다고 얘기했다고 말했다.박지연은 이내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직접 만나러 가든지 혹은 이레 병원에서 만나든지 두 가지 선택뿐이었다.박지연은 당연하게도 직접 만나러 가는 걸 선택했다.그녀는 가기 전에 온승준한테 연락했는데 수술 중인지 전화를 받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문자를 남기고 조수연이 있는 병원으로 홀로 갔다.병실로 들어가기 전에 박지연은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여러 번 한 다음 허리를 곧게 펴고 아주 떳떳한 자태로 걸어 들어갔다.그러나 예상 밖으로 온범준과 조수연은 전처럼 그녀를 향해 비아냥거리지 않았다.“지연이 왔니?”온범준이 아주 평온한 말투로 먼저 인사했다.이를 본 박지연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온범준은 수많은 제자를 아래에 둔 교수로서 뼛속까지 오만함으로 차 넘치는 사람이었다.이혼하기 전에 조수연처럼 그녀를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항시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를 깔보는 자태를 하고 있었다.그러나 오늘따라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먼저 인사를 한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아무리 그래도 어른인데 인사하면 받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조수연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저를 왜 찾으신 거죠?”박지연도 똑같은 말투로 되물었다.조수연은 박지연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온범준과 오늘 절대 화를 내
조수연의 어이없는 요구를 들은 박지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온 교수님, 사모님,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재능이 있으신가 봐요? 아니면 제가 아직도 더 확실하게 설명해 드려야 하는 건가요?”박지연이 그들을 보면서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저 온승준이랑 재혼할 생각이 없어요. 온씨 집안 며느리로 다시 들어갈 생각이 없단 말이에요. 이성 친구가 있으면 안 되고 술도 마시면 안 되고 대들어서도 안 된다는 요구를 차마 못 들어주겠네요. 그리고 저 사직하고 애 낳을 생각 없어요. 이런 영광은 다른 사람한테 주는 게 더 합당할 것 같네요.”“너!”조수연의 얼굴이 삽시에 일그러졌다.박지연과 정면으로 다투기 시작해서부터 그녀는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마음속에 쌓인 분노도 사그라든 적이 없었다.자기 아들과 이미 이혼했다고 해도 박지연을 향한 그녀의 분노와 증오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박지연과 고은서한테서 엿 먹었을 뿐만 아니라 박지연한테 협박까지 당했다는 걸 떠올릴 때마다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게다가 지금 온승준과 재혼할 기회를 준다는데도 이렇게 거만하게 나오다니.조수연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박지연, 네 같은 여자가 뭐라고! 우리 승준이랑 재혼하게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하며 감지덕지해도 모자랄 판에 지금 무슨 꼬장을 부리고 있는 거야? 집안을 좀 한 게 어때서. 나를 몇 번 보살펴준 게 어때서. 왜 자꾸 이렇게 시시하게 구는 거야? 지금 네가 했던 일들을 다 눈감아준다고 하는데도 뭐가 불만이야?”“눈감아줘서 정말 고맙네요. 하지만 저는 뒤끝이 심한 사람이라 그냥 넘어가 주지 못하겠네요.”박지연이 반박했다.“저를 등에 업고 집으로 데려간다고 해도 손절할 정도로 역겹거든요.”“이년이 정말! 어른한테 버릇없이 그게 무슨 태도야!”조수연은 더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전에는 얌전한 척하더니 이혼하자마자 본성을 드러내는 것 좀 봐. 승준이가 너랑 이혼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평생 속아서 살 뻔했네.”아직 이성
온승준이 박지연에게 설명하려고 할 때 그녀는 이미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그는 더는 그녀를 쫓아갈 수 없다는 걸 깊이 깨달았다.병실에서부터 복도까지의 거리만이 아니었다.두 사람 사이의 마음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었다....박지연이 병원에서 나왔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진 상태였고 각양각색의 불빛들이 도시 전체를 빛내고 있었다.병원 맞은편에 있는 아파트 주민들도 하나둘씩 불을 켜기 시작했다.그녀 또한 자신의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 줄 가족을 갈망했었다.온승준과 결혼한 이후로 그녀는 시부모님을 자신의 친부모님처럼 생각하고 모셨다.부모를 일찍 여의는 바람에 이 또한 어릴 적 느껴보지 못한 부모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비록 시부모님이 그녀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진 않았지만 진심으로 대한다면 언젠간 자신을 받아들일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따뜻한 인심을 기대했었다.그러나 모든 게 다 그녀의 갈망뿐이었다.방금전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짓누르려는 조수연을 보며 박지연은 깜짝 놀랐다.심지어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득의양양한 눈빛이 섬뜩하게 느껴졌다.아까 그 광경을 떠올릴 때마다 박지연은 등골이 오싹해났다.‘이 년 동안 그렇게 열심히 며느리 역할을 했는데도 내가 단 한 번도 마음에 든 적이 없었던 거야? 어떻게 날 저 정도로 미워할 수가 있지...’박지연은 고개를 들고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지연아.”바로 이때,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육현석이었다.그의 옆에는 아주 단아한 귀부인 한 명과 선물 박스를 들고 있는 기사가 있었다.육현석은 그녀를 향해 다가오면서 말했다.“이분은 내 어머니셔.”그리고 뒤돌아 자신의 어머니인 김세라를 향해 박지연을 소개했다.“엄마, 이분은 박지연이야.”“안녕하세요, 아주머니.”박지연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김세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온화하게 웃으면서 말했다.“만나서 반가워, 지연아. 현석이가 네 얘기를 많이 했었거든.”옆에 있던 육현석은
박지연은 진지하게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보면서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고은서 외에 이처럼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육현석이 처음이었다.“쇼핑몰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날 부른 거 아니야.”박지연은 오늘 온승준 부모님이 자신을 병원으로 부른 이유와 방금전 병실에서 있었던 일을 육현석에게 알려줬다.육현석은 이내 박지연의 말에서 중점을 짚어냈다.“그러니까 너랑 온승준을 재혼시키기 위해 널 병원으로 부른 거란 말이지?”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온승준이 아까 널 쫓아왔다면 진짜 재혼할 생각이었어?”육현석이 긴장해 하며 물었다.그러나 박지연은 단호하게 부인했다.“아니.”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어갔다.“나를 선택해주지 않아서 속상해하는 게 아니야. 그저 이 년 동안 내가 온씨 집안 사람들에게 퍼부은 진심이 수포로 돌아갔다는게 우스우면서도 속상해서 그러는 거야.”육현석은 속으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연아, 너무 속상해하지 마. 손해를 본 건 그쪽 사람들이니까.”‘내가 널 더 잘 아껴줄게.’육현석이 속으로 한 마디 더 보태었다.지금 이 상황에서 이런 애매한 말을 해보았자 역효과가 일어날 거라는 걸 육현석은 잘 알고 있었다.박지연은 감동을 받은 동시에 저도 모르게 겁이 났다.그래서 그녀는 하소연 대신 육현석을 김세라한테로 가보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아주머니께서 기다리시겠어. 얼른 가 봐. 난 먼저 돌아갈게.”“내가 데려다줄게.”“아니. 나 진짜 괜찮아. 혼자 돌아갈 수 있어. 얼른 볼일 봐.”박지연이 황급히 거절했다.“쇼핑몰에서 있었던 일로 널 나무란 건 아니지만 태도가 악렬한 걸 봐서는 인품이 그다지 좋지 못한 사람인 것 같은데 굳이 엄마랑 병문안 갈 필요도 없을 것 같아. 내일 변호사를 보내서 상응한 배상금만 주면 돼. 지연아, 잠깐만 기다려줘.”육현석은 이내 로비로 들어가 김세라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차키를 들고 다시 나왔다.“엄마는 다른 기사한테 부탁했으니까 우린 이만 가자.”“안
박지연은 육현석의 말에 기분이 은근히 좋았다.그는 그녀의 어떤 모습도 마다하지 않고 다 좋게 봐주곤 했다.“고마워.”박지연이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우리도 언젠가 서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을 정도로 좋은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어.”육현석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박지연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을 의미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인사치레를 하지 않는 사이라면 친구보다 더 친밀한 사이여야 했다.갑갑해 난 박지연은 차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박지연한테서 병원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고은서는 노발대발했다.“진짜 자아 감각이 너무 좋은 거 아니야? 분명히 너한테 비는 입장이면서도 왜 그렇게 거만하게 구는 거래? 파렴치해도 정도껏 해야지! 지연아, 정말 일찌감치 이혼하고 그 집에서 나와서 다행이야. 그런 사람들이랑은 같이 사는 게 아니야.”박지연도 고은서와 똑같은 생각이었다.‘정말 다행이야.’“오늘 육현석 어머니랑 만났다며. 어때? 좋은 분이신 것 같아?”고은서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전생에는 육현석 어머니와 만날 일이 없었던 고은서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했다.“그냥 간단히 인사만 했는데 엄청 온화하시고 친절하신 분 같아. 아주 단아해 보였는데 너무 큰 거리감이 느껴지진 않았어.”박지연이 이실직고했다.“와. 그럼 뭘 더 고민하는 거야. 얼른 육현석 고백을 받아들이고 사귀어!”고은서가 재촉했다.그러나 박지연은 따라 장난치는 대신 약간 망설이는 듯했다.“육현석이 엄청 좋은 건 사실인데 내가 함부로 넘볼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박지연은 진심이었다.사실 병원 앞에서 그녀는 그와 얘기를 나누면서 저도 모르게 자비감이 생겼다.온승준도 꽤 훌륭한 사람이긴 했지만 그와 있으면서 박지연은 단 한 번도 자비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은서는 약간 의아해했다.‘박지연이 자비감을 느낀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너 지금 사귀고 난 후에 또 이별하게 될까 봐 그러는 거지? 지연아, 이게
박지연이 폰을 들고 확인해 보니 온승준한테서 온 문자였다.[지연아, 나 전에 만났던 카페에 있는데. 우리 얘기 좀 나누면 안 될까?]옆에 있던 고은서도 그 문자를 보았다.“만나러 갈 거야?”박지연은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가서 얘기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할 말은 이미 다 했지만 온승준한테 확실하게 재혼할 생각이 없다고 더는 온씨 집안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말해줘야지.’“내가 같이 가줄까?”고은서가 걱정하면서 물었다.“혼자 가도 괜찮아.”박지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온승준은 워낙 성격이 냉담한 편이어서 먼저 시비를 걸면서 그녀를 난감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박지연은 외투를 하나 걸치고 온승준이 말한 카페로 갔는데 그는 이미 자리에 앉아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지연아.”온승준이 그녀를 향해 먼저 인사했다.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커피랑 디저트 시켰는데 얼른 먹어 봐.”온승준이 어색해하며 말했다.박지연은 전과 똑같은 커피와 디저트를 보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자세한 부분을 관찰할 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보살필 줄도 모르는 게 아니었어. 그저 나한테 시간 낭비하기 싫었던 거야.’“지연아, 오늘에 있었던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할게. 또 너랑 다툴 줄은 생각 못 했어...”온승준이 피곤하다는 듯이 말했다.온범준은 분명히 그에게 박지연한테 사과하려고 그녀를 부른 것이라고 하면서 그가 그녀와 재혼하는 걸 더는 막지 않겠다고 했었다.그러나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그런 광경을 목격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박지연이 고개를 들고 온승준을 살펴보았는데 그의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고 옷도 구깃구깃해진 데다가 무척 피곤해 보였다.이토록 낭패한 그의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평소의 그는 옷차림을 아주 신경 쓰면서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인상을 주곤 했었는데 지금은 마치 타락한 천사 같은 면모를 한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과거의 박지연이라면 아마 마음 아
온승준이 황급히 답했다.“어머니 정서가 안정되면 너한테 사과하라고 내가 잘 얘기해볼게.”“필요 없어.”박지연이 사양했다.“온승준, 내가 원하는 건 너와 너희 가족들이랑 거리를 두면서 조용히 지내는 거야. 이렇게 나한테 집착하는 걸 원한 게 아니라고. 내가 했던 여러 가지 행동들 때문에 다들 네가 재혼하겠다고 말만 꺼내면 내가 쉽게 돌아설 거라고 오해한 것 같은데 난 너에게 목맬 생각이 없어. 나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난 한 번 결정 내리면 절대 마음을 바꾸지 않아. 사랑할 땐 내 전부를 퍼줄 수 있지만 손 놓겠다고 마음먹기만 하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아.”“지연아...”“자책할 필요 없어. 적어도 난 후회 없이 널 사랑했었으니까.”‘비록 내가 일방적으로 사랑한 거지만.’박지연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온승준, 이런 의미 없는 일은 더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너랑 재혼할 생각 없어. 너랑 더는 엮이고도 싶지 않아. 넌 좋은 의사가 맞지만 좋은 남편은 아니었어.”“지연아, 이후로 선물도 사주고 네 친구들과 함께 밥도 먹고 이모 집도 같이 가줄게. 또 따로 요구하는 게 있어? 얼마든지 말해. 내가 다 고칠게.”온승준이 다급하게 말했다.종래로 자신의 감정을 표달하지 않던 온승준치고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아무것도 요구하는 게 없어. 날 위해 고칠 필요도 없어.”박지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넌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 네 성격 자체가 사랑에 대해 큰 욕망이 없고 담담한 편이잖아. 하지만 난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고 슬퍼해 줄 사람이 필요해. 네가 아무리 고친다고 해도 내 요구에 도달할 수 없단 말이야. 난 너와의 결혼 생활을 유지해 가기 위해 내 모든 열정과 진심을 퍼부었어. 더는 네가 개변할 때까지 기다려줄 생각 없어. 네 가족들의 비위를 맞춰줄 생각도 없고.”“그럴 필요 없어. 우리끼리 지내면서 더는 우리 부모님 눈치 보지 않아 돼. 만나기 싫으면 만나지 않아도 돼. 응?”온승준
곽승연이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은서를 향해 언니라고 불렀다.고은서는 이곳에서 곽승연과 마주칠 줄을 생각 못 했는지 약간 의아해했다.곽승연 옆에는 서연정도 함께 있었는데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모습을 본 듯했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어색해 났다.곽승재와 민시후가 서로 아는 사이였기에 그녀는 민시후를 따로 소개하지 않고 곽승연과 서연정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어머니, 동물원엔 어쩐 일로 오셨어요?”“승연이가 아기 동물들을 보고싶어 해서 바람도 쐴 겸 온 거야.”서연정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오늘 친구랑 함께 와서 같이 돌진 못할 것 같아요. 여기 환경도 꽤 괜찮고 한데 승연이랑 좋은 시간 보내다 가세요.”고은서가 뒤돌아 민시후를 한 번 보고는 서연정에게 말했다.“알겠어.”서연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승연아, 언니가 오늘은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아. 며칠 후에 향도 갖다 줄 겸 본가에 들를 건데 그때 다시 게임하면서 같이 놀자.”“응.”곽승연은 아쉬워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이를 본 고은서는 며칠 전에 산 옥토끼를 꺼내 건네주면서 그녀를 달랬다.“이건 언니가 너한테 주려고 산 선물이야.”곽승연은 이내 옥토끼를 쥐고 이리저리 만져보면서 좋아했다.“은서야, 얼른 친구한테로 가 봐. 승연이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옆에 있던 서연정이 입을 열었다.“네.”고은서는 그제서야 민시후와 함께 다른 곳으로 향했다.“나 아무 사람한테 화낼 정도로 옹졸한 사람이 아니야.”민시후가 찌뿌둥해 하며 말했다.‘설마 어머니랑 승연이한테 자신을 소개해주지 않았다고 삐진 거야?’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이미 누군지 알고 있는데 굳이 소개해줄 필요 있어?”“의미가 다르잖아.”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 거야. 지금이라도 다시 가서 소개시켜줄게.”“됐어. 나중에 신분이 더 레벨업 되면 널 데리고 직접 곽씨 가문에 방문하러 갈 거야.”고은서는 그 광경이 차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