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터가 도로 나오면서 고은서에게 전했다.“민 도련님께서 지금 시간이 없으니까 할 얘기가 있으시면 내일 사무실에 하라고 하십니다.”고은서는 웨이터의 말을 무시한 채 바로 룸 안으로 들어갔다.“민시후, 나와 봐.”그녀는 곧장 민시후 앞에 다가가 말했다.그는 한창 친구들과 재미나게 놀고 있었는데 마침 주사위로 승부를 가릴 때라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하하. 민 도련님, 확실한가요?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시지 그러세요. 이번 판엔 저희도 만만치 않은데 말이에요. 지게 되면 이 상에 있는 술을 절반은 혼자 다 마셔야 해요.”“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열기나 해.”“좋아요. 민 도련님이 원한다면 우리 같이 열도록 해요. 원하는 만큼 다 마시게 해드릴 테니까요.”“하나, 둘, 셋...”“민시후!”같이 주사위를 공개하려던 찰나, 스피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말 안 들려? 당장 나랑 나가서 얘기 좀 해.”그러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다 마이크가 있는 쪽으로 쏠렸는데 그 자리에는 아주 단아한 옷차림을 한 아름다운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그녀는 분노가 섞인 눈빛으로 민시후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민 도련님, 이 이쁜 아가씨는 누구예요? 설마 여기까지 민 도련님 따라온 거예요?”옆에 있던 부잣집 도련님 한 명이 물었다.“역시 우리 민 도련님 매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이렇게 이쁜 아가씨도 쫓아오고 말이야.”“그러니까. 생김새랑 기질만 봐서만 웬만한 연예인들보다 훨씬 나은 것 같은데.”“다 닥쳐.”민시후는 한마디 호통을 치고는 휘청거리며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고은서도 마이크를 내려놓고 따라 나갔다.“무슨 일인데?”민시후가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물었다.복도의 등이 예상 밖으로 밝은 덕분에 민시후의 얼굴이 꽤 잘 보였는데 그는 평소처럼 껄렁대며 웃는 대신 일부러 그녀를 멀리하는 듯한 서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너 요즘 왜 회사에도 안 나오고 내 전화도 안 받는 거야?”“진 비서한테서 못 들었어? 나 요즘 바빠.
담배를 빼앗긴 민시후는 어쩔 수 없이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놀았다.그는 방금전에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천천히 뱉어내면서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 그날 밤 나한테 실망감을 느끼지 않았어?”“아니.”고은서가 단호하게 부인하면서 고개를 저었다.“네가 술 마시고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어.”그러자 민시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내가 다른 여자랑 알몸으로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걸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한치의 분노와 실망감도 느끼지 않은 게 고작 날 믿기 때문이라는 거야?”고은서는 그의 미소가 약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민시후는 이내 헛웃음을 쳤다.“만약 곽승재가 똑같은 일을 당했다면 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곽승재가 가슴에 다른 여자한테 긁힌 손톱자국을 하고 그 여자랑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는데 이유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 났다.아마 과거의 고은서였다면 울부짖으면서 달려들어가 따졌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목격하고도 홱 돌아 나가버릴 가능성이 더 컸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가 자신에게 이런 물음을 물어보는 이유를 알아차렸다.‘내 반응이 너무 평온해서 오해하고 있는 건가?’고은서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민시후는 그녀가 지금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만약 곽승연이었다면 넌 아마 화를 내며 달려가 싸대기를 날리고 울면서 달아났겠지.”민시후는 고은서 대신 답하면서 담뱃갑 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그날 저녁 모함당한 건 맞아. 하지만 그 또한 내가 자초한 거야. 내가 전에 그 여자들을 건들지만 않았으면 걔네도 이런 일로 날 성가시게 만들진 않았겠지.”담배 연기 때문에 민시후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스캔들이 퍼지면서 사람들도 다 날 당해도 마땅하다고 평가하더라. 전에 여자들과 노는 걸 하도 좋아해서 말이야. 네가 날 좋아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겠지. 나도 이런
고은서가 민시후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너 진짜 바보야? 내가 믿는다고 했잖아. 어떻게 그런 일로 너에 관한 생각이 바뀌겠어?”“맞아. 나 바보야.”민시후가 다시 능글맞은 모습으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은서야, 나 좀 더 혼내 줘.”고은서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급할 거 없잖아. 그보다 며칠 동안 왜 날 피한 건지 말해줘. 포기할 생각이었다면 왜 그냥 솔직히 말하지 않은 거야?”민시후는 내심 찔려하며 답했다.“네가 신경 쓸까 봐 그랬어. 나도 신경이 쓰였거든. 속으론 이제 너한테 더 이상 매달리지 말아야지 했는데 미련이 남아서... 하루라도 더 시간을 끌고 싶었어. 네가 정말 나한테서 마음을 돌렸다면 자연스레 실망스러워하며 더 이상 나를 신경 쓰지 않을 거로 생각했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민시후를 향해 눈을 흘겼다.“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처리하려고 하다니 정말 다정하고 특별하네.”“은서야, 미안해.”민시후가 이쁜 눈을 반짝이며 정중하게 사과했다.“다음에는 그러지 않을게.”고은서는 일부러 화난 척하며 말했다.“다음이 또 있어?”“아니! 없어.”민시후가 고은서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아무리 정신을 잃었다고 해도 립스틱 자국은 상대방이 손으로 묻힌 건 아닐 거야. 정말 괜찮아?”민시후의 긴장한 표정을 보며 고은서의 마음은 또다시 약해졌다.‘자신만만하고 거침없던 사람이 내 앞에서 말 한마디도 조심스럽게 하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다 이렇게 비굴해지는 걸까?’복도 조명이 민시후의 요염한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의 눈빛은 반짝였고 머리 위로는 마치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고은서가 발을 살짝 들고 민시후의 입에 입맞춤하고는 이러면 다른 사람의 흔적이 없어진다고 하려던 찰나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두 분, 방은 이쪽입니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두 명의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두 사람은 바로 곽승재와 송민준이었다.두 사람은 깔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었는데 한 명은 차가운 분위기
민시후의 표정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지만 고은서의 충동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그녀는 조금 전 행동을 이어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민시후가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민시후, 미안해.”“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다 눈치 없이 지금 나타난 저 두 사람 때문이지.”민시후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이건 나중에 두 배로 받아낼 거야.”고은서가 이마에 전해지는 따스한 감촉에 고개를 들자 민시후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신속히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갑자기 배가 고프네. 얼른 뭐 좀 먹으러 가자.”그는 서둘러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고은서는 멍하니 서 있었다.‘설마 민시후가 부끄러워하는 건가? 늘 다른 여자를 옆에 끼고 사랑을 장난처럼 여기던 사람이?’...VIP 룸 안에서는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곽승재는 권하는 술을 거절하지 않고 모든 잔을 통쾌하게 비워냈다.곽승재처럼 주량이 세지 않았던 송민준은 우아한 태도로 술잔을 비워내며 분위기를 맞추고 있었다.상업계 유명 인사가 이렇게 친근하게 행동하자 분위기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몇 차례 술을 비운 후 자리에는 취기가 돈 사람이 많아졌다.그 와중에도 곽승재는 여전히 태연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송민준은 곽승재 옆에서 우아하게 잔을 들고 그를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곽 대표님, 오늘 이 자리 곽 대표님께서 연 대표님께 말씀드려서 저를 부르신 거죠?”곽승재는 부정하지 않고 맑은 유리잔을 들어 안에 담긴 갈색 액체를 한 번에 비웠다.“연 대표님 ST 그룹과 협력한 적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해성 시장에 진출하려 하고 마침 송 대표가 해성에 있으니 또 다른 협력의 기회가 될지도 모르니까요.”송민준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ST 그룹과 협력한 사람은 셀 수조차 없이 많습니다. 연 대표님께서 직접 자기소개를 한다고 해도 누군지 기억하지 못하죠. 제가 여기에 온 건 연 대표님께서 곽 대표님도 온다고 했기 때문이에요.”곽승
“곽 대표님, 저는 그냥 평범한 사업가일 뿐입니다. 해성에 온 것도 단순히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함인데 곽 대표님이랑 시후의 끊임없는 의심에 견디기 어렵네요.”송민준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앞으로 궁금한 점이 있거나 제 협조가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아는 대로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추측하거나 근거 없이 의심하는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랍니다. 죄송하지만 곽 대표님. 저는 일정이 있어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말을 마친 송민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얼마 지나지 않아 곽승재는 주민기가 보내온 문자를 확인했다.[대표님, 확인해 보니 송 대표님은 해외 유학 이력이 없습니다. 대표님처럼 대학 졸업 전에 회사 업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송 대표님과 백유미 씨 사이에는 어떠한 접점도 경제적인 거래나 통화 기록도 없었습니다.]이 모든 것은 곽승재의 예상대로였다.곽승재가 송민준을 의심하는 이유는 연 대표가 ST 그룹과 협력한 적이 있다는 점에서였다.또한 송민아의 가정부가 누군가에게 매수당해 고은서에게 약을 먹이려고 한 행동 때문이었다.이 두 가지를 종합해 곽승재는 송민준을 시험해 보기로 한 것이다.만약 그의 소행이 아니라면 오늘 이 자리는 단순한 비즈니스 만남이었을 것이고 송민준과 관련이 있다면 앞으로 경거망동하며 고은서를 위협하지 말라는 경고였다.곽승재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육현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형, 어디야? 술이나 마시자.”육현석이 억울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나 너무 힘들어. 지연이한테 민시후의 스캔들을 얘기한 뒤로 지연이가 나한테 화가 잔뜩 나서 대꾸도 안 해줘.”곽승재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자 육현석이 울상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형, 나 진짜 과장 하나 안 보태고 들은 대로 얘기했는데 지연이는 내가 강 건너 불구경한다고 생각하나 봐. 심지어 날 나쁜 놈이라고 하더라니까! 민시후가 고생하는 걸 보며 솔직히 속
고은서는 일부러 뺨 이야기를 꺼냈다.그녀는 민시후가 당황해하며 곽승재 이야기를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말할 줄 알았지만 민시후는 잘생긴 얼굴을 앞으로 내밀며 예상과는 다른 행동을 보였다.“때려도 돼.”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왼쪽이 너무 잘생겨서 못 때리겠어?”고은서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민시후가 얼른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렸다.“그럼 오른쪽 때리면 되겠다.”고은서는 그의 머리를 손으로 밀어내며 말했다.“됐어. 얼굴이 너무 두꺼워서 때리면 손 아플 것 같아.”민시후가 자기 손을 내밀며 말했다.“그럼 내 손 빌려줄게. 그러면 네 손은 안 아플 거 아니야.”고은서는 다시 한번 말문이 막혔다.‘역시 민시후야. 매번 예상을 벗어나네.’고은서는 나중에 상황을 보며 처리하겠다는 생각으로 때리지 않고 임시 보관하기로 했다.죽을 다 먹고 난 뒤 민시후는 고은서를 라이트문 아파트까지 데려다주었다.데려다준다는 표현보다는 같이 왔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민시후는 술을 마셔서 운전할 수 없었기에 고은서가 운전해서 온 것이다.차를 주차하고 나니 민시후의 운전기사는 이미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운전기사도 왔으니 이제 그만 가. 내일 회사에서 보자.”고은서가 민시후에게 인사를 건넸다.“뭐가 그렇게 급해? 평소엔 이렇게 적극적이지 않더니...”민시후가 아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돼? 너 더 보고 싶단 말이야.”고은서는 민시후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민 도련님. 며칠 동안 나 안 보고도 잘 살던데?”민시후는 억울한 표정으로 답했다.“잘 못 지냈어. 매일 너무 보고 싶었어. 전화도 몇 번이고 들었다가 다시 비서한테 던졌다니까? 은서야, 어떡해. 네가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아.”민시후는 진지한 표정을 한 채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그가 꼭 애정을 갈구하는 큰 강아지 같아 고은서는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을 느끼며 민시후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알았어. 며칠 동안 힘들게 지냈다는 거 믿어줄게. 하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고은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곽승재는 아무 말도 없이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검은 그의 눈동자에는 분노, 질투, 고통 그리고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가득 차 있었다.그 시선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위압적이었다.고은서는 점점 더 두려워졌다.곽승재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는 그의 감정이 폭발 직전임을 의미했다.얼마 전 만났을 때 그녀가 민시후에게 입을 맞추려고 하던 모습 그리고 조금 전 민시후가 보내온 보고 싶다는 문자를 목격했으니 지금의 곽승재는 건드리기 어려운 상태였다.고은서는 조용히 뒤로 물러서며 조심스럽게 얘기했다.“곽승재, 너 술 많이 마셨어. 주민기한테 연락해서 기사 불러줄까?”곽승재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싸늘한 표정을 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눈빛은 마치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 깊고 어두웠다.고은서는 곽승재를 잘 알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그를 자극하는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면 그는 정말로 폭발할 수 있었다.힘으로 보나 속도로 보나 곽승재와 비할 수는 없었다.고은서는 뒤로 더 물러서며 곽승재를 부드럽게 타이르려 했다.“곽...”말을 꺼내려는 순간 곽승재가 갑자기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짝!고은서는 그가 또다시 강제로 자신을 안으려 한다고 생각해 반사적으로 그의 뺨을 때렸다.맑고 높은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바닥이 곽승재의 얼굴에 닿았다.곽승재는 그러려는 의도가 없었지만 겁에 질린 고은서의 손은 누구보다 빠르게 곽승재의 뺨을 내리쳐 잘생긴 그의 얼굴에 손자국을 남겼다.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순간 얼어붙었다.곽승재의 표정은 폭풍 전야의 먹구름처럼 어두워졌고 가슴은 거칠게 오르내리며 그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눈에 띄는 분노가 그의 이성을 집어삼킬 듯했다.고은서는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너... 너 뭐 하려는 거야!”그녀는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내가 뭘 하고 싶을 것 같아?”곽승재가 이를 악물며 물었다.어둡고 사납게 빛나는 두
경계하는 고은서의 모습을 바라보며 곽승재의 눈빛에는 혼란스러움이 소용돌이쳤다.그는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끝내 모든 말을 삼키고 말았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방어적인 모습을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자료를 건넸다.고은서는 자료를 받으면서 곽승재가 이제까지 빈손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민시후의 메시지를 보느라 정신이 팔렸었고 곽승재가 옆에 있다는 것도 그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다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곽승재가 건넨 자료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고은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곽승재의 분위기는 여전히 무거워 고은서는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곽승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비상문을 열고 자리를 떴다.고은서는 그 자리에 서서 곽승재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곽승재는 술을 꽤 많이 마셨는지 발걸음이 다소 흔들렸고 뒷모습은 처량해 보이기도 했다.이내 비상 통로는 고요해졌고 하얀 센서 등의 불빛과 공기 중에 떠도는 은근한 술 냄새만 남아 있었다.곽승재가 완전히 떠난 뒤에야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민시후 때문에 적잖이 자극을 받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고? 의외네...’비상구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 고은서는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자료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박지연은 당직이어서 집에는 고은서뿐이었다.바로 그 때문에 감정을 알 수 없는 곽승재를 마주하며 고은서는 집에 들어가는 것도 망설였다.물 한 잔을 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은 뒤 고은서는 소파에 앉아 곽승재가 건넨 자료를 펼쳤다.그녀는 자료가 제인 프로젝트와 관련된 것일 거라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안에는 며칠 전 민시후가 여씨 가문 파티에서 누군가에 의해 함정에 빠졌던 사건에 대한 조사 보고서가 적혀 있었다.보고서에는 그날 밤 민시후가 심씨 성을 가진 여자에 의해 함정에 빠졌다는 증거가 적혀 있었고 이 모든 일을 뒤에서 꾸민 사람은 다름 아닌 민시후의 형, 민시현이었다.고
고은서가 누가 사주했는지 밝히면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재경은 아직 경찰서를 떠날 수 없었다.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했고, 명확한 결론이 나온 후에야 책임 감경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곽승재는 변호사를 불러 진전 상황을 체크하도록 했다. 나머지 일은 경찰에 맡기고 그들은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한바탕 분주히 보낸 후, 곽승재가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고은서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정문에 도착한 고은서는 마침 경찰서에 온 여시은과 마주쳤다.그녀는 이전과 같은 실내복 차림에 창백한 얼굴로, 집사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를 발견한 순간 분노를 쏟아냈다.“고은서, 아빠를 다치게 한 것도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오히려 나를 모함해?”“허튼소리로 아빠를 현혹시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고은서는 살짝 놀랐다. 물론 여시은의 발악이 아니라 여재훈의 처사 때문이었다.그녀가 마재경의 말을 녹음해 여재훈에게 보내긴 했지만, 여재훈이 직접 여시은을 경찰서에 보낼 만큼 정의로운 선택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약간의 존경심이 생겼다.외할아버지라면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고은서, 이번 이간질은 너무 지나쳤어.”여시은이 억울하다는 듯 울분을 토했다.“지난번 리셉션에서도 일부러 나를 모함하고. 대체 무슨 심보야?”이 순간까지도 억울한 척하는 여시은, 그녀를 바라보던 고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잠깐만.”여시은은 곁에 있던 중년 남자에게 뭐라고 말한 뒤, 헐떡이며 고은서를 쫓아왔다.“똑바로 말해봐. 나한테 왜 이러는지?”여시은은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 더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고은서는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매일 이러면 지치지도 않아? 머리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 여기서 미친 사람처럼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여시은은 여전히 가슴을
이전에는 여시은이 이렇게 억울해하고 화를 내면 쫓아가서 좋은 말로 달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진 듯 소파에 지친 몸을 던졌다.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말을 잘 듣고 사랑스럽던 딸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아이가, 먹고 노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였을까?잠시 후, 여시은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어디 가려고?”여재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시은은 서운하고 답답하고 슬픈 표정이었다.“남의 말 한두 마디로 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의미가 없잖아요. 전혜라 아줌마를 찾아갈 거예요.”여재훈은 여전히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도 갈 수 없어. 내가 널 경찰서로 보낼 거니까.”“아빠, 그게...”여시은은 또 한 번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심지어 몸도 휘청였다.“남의 이간질에 넘어가 저를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경찰서로 보내시겠다고요?”갈라진 목소리, 붉어진 눈시울, 떨리는 입술, 누가 봐도 연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었다.여재훈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눈을 감았다.“시은아,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해.”여시은은 캐리어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아빠, 저는 고은서를 습격하라고 사주한 적 없어요. 정말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요. 제발 믿어주시면 안 돼요?”여재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여시은을 외면했다.“나는 증거를 믿어. 네가 아니라면 경찰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두지 않을 거야.”“그냥 저를 겁주는 거죠? 사실은 저를 믿는 거 맞죠?”여시은은 그 자리에 선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아니에요. 요 며칠 집에만 있었고 어디도 가지 않았어요.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어요...”여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음성 파일을 여니 울먹이는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말할게. 다 말할게... 여시은 측 사람들이 너를 습격하라고 시켰어...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큰돈을 주겠다며 너를 따끔하게 혼내주라고 했어. 피를 보면 더 높은 보수를 주겠다고...][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도 했어... 그들은 내게 ‘이미 인플루언서로는 살 수 없으니 이 돈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설득햇어...][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만... 평생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금액이었어...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한 번만 용서해 줘...]음성은 여기서 끊겼다.여재훈이 직접 스피커폰 모드로 음성을 틀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여시은도 모든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음성이 끝나자, 워낙 얼어붙은 모습이던 여시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이 동그래졌다.“아빠, 이건...”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짜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여재훈이 사정없이 따귀를 때린 것이다.“시은아,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악랄한 아이가 됐어?”여재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친 손에 너무 힘을 줘서인지 그녀를 가리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 손에...”여시은도 여재훈의 팔에 피가 스며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서러움을 잊은 채 여재훈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가자, 여재훈은 몸을 뒤로 피하며 호통쳤다.“고은서 씨를 모함하고 고양이를 학대하고 도우미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살인 청부까지 해? 너 정말 무법천지구나.”여시은의 한쪽 뺨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눈빛은 놀라움에서 두려움으로 갔다가 다시 걱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여재훈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엄하게 꾸짖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손찌검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실망으로 싸늘해진 여재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시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아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죠? 다 거짓말로만 들리겠죠?”여시은은
도우미가 여재훈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러네. 미화언니, 손이 왜 그래?”박미화는 손을 살짝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에서 일하다가 부주의로 나뭇가지에 긁혔습니다.”“어제는 누군가가 할퀸 거라고 했잖아?”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박미화는 고개를 숙인 채 동료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고, 이내 눈치를 알아챈 그 도우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감지한 여재훈이 엄숙하게 물었다.“집사는? 직원이 다른 사람과 싸워서 상처를 입은 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집사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집사에게 혼날까 봐 겁에 질린 박미화는 더 이상 거짓말하지 못했다.“사실 누구랑 싸운 것도, 할큄 당한 것도 아닙니다. 며칠 전, 아가씨를 부르러 올라갔을 때, 부주의로 아가씨 손톱에 긁힌 것입니다.”“아, 미화언니 손등을 그렇게 만든 게 나였어요?”여시은은 급히 일어나 박미화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손등을 호호 불어주기까지 했다.“아팠겠다. 정말 내가 그랬어? 나는 왜 기억나지 않지?”박미화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때 아가씨는 감정이 많이 격해져 있었어요. 무슨 억울한 일이 있는지 줄곧 울고 있었죠. 제가 아가씨의 손을 잡고 달래던 중에 아가씨의 손톱에 긁힌 거예요. 사소한 일이라 아가씨가 걱정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그랬구나.”여시은은 머리를 탁 치며 후회스럽게 말했다.“난 정말 몰랐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이제야 알게 되니 너무 미안하잖아.”박미화는 고개를 저었다.“아가씨가 요즘 기분이 안 좋고 아프기도 하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여재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다친 지 2~3일이나 지났는데 약을 바르지 않았어?”박미화는 약을 발랐지만 자꾸 일을 하니 상처가 빨리 낫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하지만 여재훈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