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민시후는 송민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쓸데없는 말로 얼버무릴 생각하지마.”민시후의 목소리가 한없이 차가웠다.“얼마 전에 고은서랑 밥 먹을 때도 송민아를 데리고 우리 앞에 나타났잖아. 그리고 이번에 날 모함하려고 든 이 여자도 십분 간격을 두고 당신이랑 똑같은 찻집에 나타났어. 그리고 전에 고은서랑 옥방에서도 만났다며. 이 많은 일이 다 우연이라고? 그게 말이 돼?”“시후야, 다 아주 일상적인 일이잖아. 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다는 거야?”송민준은 단아한 자세로 자리에 앉은 채 나긋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그리고 자꾸 고은서 씨 얘기를 하는데 설마 내가 고은서 씨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는 거야? 예쁘게 생긴 건 인정할게. 민아를 친구로 사귀면서 잘 지내는 걸 봐서는 의리도 있고 사람도 꽤 괜찮아 보였어. 하지만 우리가 서로 알고 지낸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게다가 하마터면 네 매형이 될 뻔한 사람인데 내가 왜 네가 좋아하는 여자를 넘보겠어.”송민준이 차근차근 설명했다.“레스토랑에서 만나고 옥방에서 만난 건 정말 다 우연이야. 어제도 진짜 파트너 만나러 간 거고. 이런 이유로 날 의심한다는 게 너무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민시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젯밤의 일은 여러모로 이상하기 그지없었다.그래서 민시후는 그 여자가 송민준이랑 같은 찻집에 나타났다는 걸 조사해내자마자 순간 송민준이 꾸민 일이라는 직감이 들었다.평소에 만나기도 어려웠던 사람이 갑자기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다는 게 너무 의심스러웠다.그 여자가 자신의 행적을 숨김없이 말했더라면 그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서 넘어갔을 것이다.그러나 그녀가 행적을 숨기려 하는 바람에 일이 범상치 않다는 게 수면 위로 드러났다.“어젯밤 일 나도 전해 들었어. 그런데 내가 널 해칠 이유가 없잖아. 민아도 이젠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내가 굳이 손해를 보면서 이런 모험을 해야 했을까? 그리고 은서 씨도 명석한 분이어서 널
웨이터가 도로 나오면서 고은서에게 전했다.“민 도련님께서 지금 시간이 없으니까 할 얘기가 있으시면 내일 사무실에 하라고 하십니다.”고은서는 웨이터의 말을 무시한 채 바로 룸 안으로 들어갔다.“민시후, 나와 봐.”그녀는 곧장 민시후 앞에 다가가 말했다.그는 한창 친구들과 재미나게 놀고 있었는데 마침 주사위로 승부를 가릴 때라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하하. 민 도련님, 확실한가요?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시지 그러세요. 이번 판엔 저희도 만만치 않은데 말이에요. 지게 되면 이 상에 있는 술을 절반은 혼자 다 마셔야 해요.”“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열기나 해.”“좋아요. 민 도련님이 원한다면 우리 같이 열도록 해요. 원하는 만큼 다 마시게 해드릴 테니까요.”“하나, 둘, 셋...”“민시후!”같이 주사위를 공개하려던 찰나, 스피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말 안 들려? 당장 나랑 나가서 얘기 좀 해.”그러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다 마이크가 있는 쪽으로 쏠렸는데 그 자리에는 아주 단아한 옷차림을 한 아름다운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그녀는 분노가 섞인 눈빛으로 민시후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민 도련님, 이 이쁜 아가씨는 누구예요? 설마 여기까지 민 도련님 따라온 거예요?”옆에 있던 부잣집 도련님 한 명이 물었다.“역시 우리 민 도련님 매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이렇게 이쁜 아가씨도 쫓아오고 말이야.”“그러니까. 생김새랑 기질만 봐서만 웬만한 연예인들보다 훨씬 나은 것 같은데.”“다 닥쳐.”민시후는 한마디 호통을 치고는 휘청거리며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고은서도 마이크를 내려놓고 따라 나갔다.“무슨 일인데?”민시후가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물었다.복도의 등이 예상 밖으로 밝은 덕분에 민시후의 얼굴이 꽤 잘 보였는데 그는 평소처럼 껄렁대며 웃는 대신 일부러 그녀를 멀리하는 듯한 서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너 요즘 왜 회사에도 안 나오고 내 전화도 안 받는 거야?”“진 비서한테서 못 들었어? 나 요즘 바빠.
담배를 빼앗긴 민시후는 어쩔 수 없이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놀았다.그는 방금전에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천천히 뱉어내면서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 그날 밤 나한테 실망감을 느끼지 않았어?”“아니.”고은서가 단호하게 부인하면서 고개를 저었다.“네가 술 마시고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어.”그러자 민시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내가 다른 여자랑 알몸으로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걸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한치의 분노와 실망감도 느끼지 않은 게 고작 날 믿기 때문이라는 거야?”고은서는 그의 미소가 약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민시후는 이내 헛웃음을 쳤다.“만약 곽승재가 똑같은 일을 당했다면 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곽승재가 가슴에 다른 여자한테 긁힌 손톱자국을 하고 그 여자랑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는데 이유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 났다.아마 과거의 고은서였다면 울부짖으면서 달려들어가 따졌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목격하고도 홱 돌아 나가버릴 가능성이 더 컸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가 자신에게 이런 물음을 물어보는 이유를 알아차렸다.‘내 반응이 너무 평온해서 오해하고 있는 건가?’고은서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민시후는 그녀가 지금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만약 곽승연이었다면 넌 아마 화를 내며 달려가 싸대기를 날리고 울면서 달아났겠지.”민시후는 고은서 대신 답하면서 담뱃갑 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그날 저녁 모함당한 건 맞아. 하지만 그 또한 내가 자초한 거야. 내가 전에 그 여자들을 건들지만 않았으면 걔네도 이런 일로 날 성가시게 만들진 않았겠지.”담배 연기 때문에 민시후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스캔들이 퍼지면서 사람들도 다 날 당해도 마땅하다고 평가하더라. 전에 여자들과 노는 걸 하도 좋아해서 말이야. 네가 날 좋아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겠지. 나도 이런
고은서가 민시후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너 진짜 바보야? 내가 믿는다고 했잖아. 어떻게 그런 일로 너에 관한 생각이 바뀌겠어?”“맞아. 나 바보야.”민시후가 다시 능글맞은 모습으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은서야, 나 좀 더 혼내 줘.”고은서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급할 거 없잖아. 그보다 며칠 동안 왜 날 피한 건지 말해줘. 포기할 생각이었다면 왜 그냥 솔직히 말하지 않은 거야?”민시후는 내심 찔려하며 답했다.“네가 신경 쓸까 봐 그랬어. 나도 신경이 쓰였거든. 속으론 이제 너한테 더 이상 매달리지 말아야지 했는데 미련이 남아서... 하루라도 더 시간을 끌고 싶었어. 네가 정말 나한테서 마음을 돌렸다면 자연스레 실망스러워하며 더 이상 나를 신경 쓰지 않을 거로 생각했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민시후를 향해 눈을 흘겼다.“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처리하려고 하다니 정말 다정하고 특별하네.”“은서야, 미안해.”민시후가 이쁜 눈을 반짝이며 정중하게 사과했다.“다음에는 그러지 않을게.”고은서는 일부러 화난 척하며 말했다.“다음이 또 있어?”“아니! 없어.”민시후가 고은서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아무리 정신을 잃었다고 해도 립스틱 자국은 상대방이 손으로 묻힌 건 아닐 거야. 정말 괜찮아?”민시후의 긴장한 표정을 보며 고은서의 마음은 또다시 약해졌다.‘자신만만하고 거침없던 사람이 내 앞에서 말 한마디도 조심스럽게 하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다 이렇게 비굴해지는 걸까?’복도 조명이 민시후의 요염한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의 눈빛은 반짝였고 머리 위로는 마치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고은서가 발을 살짝 들고 민시후의 입에 입맞춤하고는 이러면 다른 사람의 흔적이 없어진다고 하려던 찰나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두 분, 방은 이쪽입니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두 명의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두 사람은 바로 곽승재와 송민준이었다.두 사람은 깔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었는데 한 명은 차가운 분위기
민시후의 표정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지만 고은서의 충동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그녀는 조금 전 행동을 이어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민시후가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민시후, 미안해.”“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다 눈치 없이 지금 나타난 저 두 사람 때문이지.”민시후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이건 나중에 두 배로 받아낼 거야.”고은서가 이마에 전해지는 따스한 감촉에 고개를 들자 민시후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신속히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갑자기 배가 고프네. 얼른 뭐 좀 먹으러 가자.”그는 서둘러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고은서는 멍하니 서 있었다.‘설마 민시후가 부끄러워하는 건가? 늘 다른 여자를 옆에 끼고 사랑을 장난처럼 여기던 사람이?’...VIP 룸 안에서는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곽승재는 권하는 술을 거절하지 않고 모든 잔을 통쾌하게 비워냈다.곽승재처럼 주량이 세지 않았던 송민준은 우아한 태도로 술잔을 비워내며 분위기를 맞추고 있었다.상업계 유명 인사가 이렇게 친근하게 행동하자 분위기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몇 차례 술을 비운 후 자리에는 취기가 돈 사람이 많아졌다.그 와중에도 곽승재는 여전히 태연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송민준은 곽승재 옆에서 우아하게 잔을 들고 그를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곽 대표님, 오늘 이 자리 곽 대표님께서 연 대표님께 말씀드려서 저를 부르신 거죠?”곽승재는 부정하지 않고 맑은 유리잔을 들어 안에 담긴 갈색 액체를 한 번에 비웠다.“연 대표님 ST 그룹과 협력한 적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해성 시장에 진출하려 하고 마침 송 대표가 해성에 있으니 또 다른 협력의 기회가 될지도 모르니까요.”송민준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ST 그룹과 협력한 사람은 셀 수조차 없이 많습니다. 연 대표님께서 직접 자기소개를 한다고 해도 누군지 기억하지 못하죠. 제가 여기에 온 건 연 대표님께서 곽 대표님도 온다고 했기 때문이에요.”곽승
“곽 대표님, 저는 그냥 평범한 사업가일 뿐입니다. 해성에 온 것도 단순히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함인데 곽 대표님이랑 시후의 끊임없는 의심에 견디기 어렵네요.”송민준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앞으로 궁금한 점이 있거나 제 협조가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아는 대로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추측하거나 근거 없이 의심하는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랍니다. 죄송하지만 곽 대표님. 저는 일정이 있어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말을 마친 송민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얼마 지나지 않아 곽승재는 주민기가 보내온 문자를 확인했다.[대표님, 확인해 보니 송 대표님은 해외 유학 이력이 없습니다. 대표님처럼 대학 졸업 전에 회사 업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송 대표님과 백유미 씨 사이에는 어떠한 접점도 경제적인 거래나 통화 기록도 없었습니다.]이 모든 것은 곽승재의 예상대로였다.곽승재가 송민준을 의심하는 이유는 연 대표가 ST 그룹과 협력한 적이 있다는 점에서였다.또한 송민아의 가정부가 누군가에게 매수당해 고은서에게 약을 먹이려고 한 행동 때문이었다.이 두 가지를 종합해 곽승재는 송민준을 시험해 보기로 한 것이다.만약 그의 소행이 아니라면 오늘 이 자리는 단순한 비즈니스 만남이었을 것이고 송민준과 관련이 있다면 앞으로 경거망동하며 고은서를 위협하지 말라는 경고였다.곽승재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육현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형, 어디야? 술이나 마시자.”육현석이 억울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나 너무 힘들어. 지연이한테 민시후의 스캔들을 얘기한 뒤로 지연이가 나한테 화가 잔뜩 나서 대꾸도 안 해줘.”곽승재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자 육현석이 울상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형, 나 진짜 과장 하나 안 보태고 들은 대로 얘기했는데 지연이는 내가 강 건너 불구경한다고 생각하나 봐. 심지어 날 나쁜 놈이라고 하더라니까! 민시후가 고생하는 걸 보며 솔직히 속
고은서는 일부러 뺨 이야기를 꺼냈다.그녀는 민시후가 당황해하며 곽승재 이야기를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말할 줄 알았지만 민시후는 잘생긴 얼굴을 앞으로 내밀며 예상과는 다른 행동을 보였다.“때려도 돼.”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왼쪽이 너무 잘생겨서 못 때리겠어?”고은서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민시후가 얼른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렸다.“그럼 오른쪽 때리면 되겠다.”고은서는 그의 머리를 손으로 밀어내며 말했다.“됐어. 얼굴이 너무 두꺼워서 때리면 손 아플 것 같아.”민시후가 자기 손을 내밀며 말했다.“그럼 내 손 빌려줄게. 그러면 네 손은 안 아플 거 아니야.”고은서는 다시 한번 말문이 막혔다.‘역시 민시후야. 매번 예상을 벗어나네.’고은서는 나중에 상황을 보며 처리하겠다는 생각으로 때리지 않고 임시 보관하기로 했다.죽을 다 먹고 난 뒤 민시후는 고은서를 라이트문 아파트까지 데려다주었다.데려다준다는 표현보다는 같이 왔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민시후는 술을 마셔서 운전할 수 없었기에 고은서가 운전해서 온 것이다.차를 주차하고 나니 민시후의 운전기사는 이미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운전기사도 왔으니 이제 그만 가. 내일 회사에서 보자.”고은서가 민시후에게 인사를 건넸다.“뭐가 그렇게 급해? 평소엔 이렇게 적극적이지 않더니...”민시후가 아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돼? 너 더 보고 싶단 말이야.”고은서는 민시후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민 도련님. 며칠 동안 나 안 보고도 잘 살던데?”민시후는 억울한 표정으로 답했다.“잘 못 지냈어. 매일 너무 보고 싶었어. 전화도 몇 번이고 들었다가 다시 비서한테 던졌다니까? 은서야, 어떡해. 네가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아.”민시후는 진지한 표정을 한 채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그가 꼭 애정을 갈구하는 큰 강아지 같아 고은서는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을 느끼며 민시후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알았어. 며칠 동안 힘들게 지냈다는 거 믿어줄게. 하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고은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곽승재는 아무 말도 없이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검은 그의 눈동자에는 분노, 질투, 고통 그리고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가득 차 있었다.그 시선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위압적이었다.고은서는 점점 더 두려워졌다.곽승재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는 그의 감정이 폭발 직전임을 의미했다.얼마 전 만났을 때 그녀가 민시후에게 입을 맞추려고 하던 모습 그리고 조금 전 민시후가 보내온 보고 싶다는 문자를 목격했으니 지금의 곽승재는 건드리기 어려운 상태였다.고은서는 조용히 뒤로 물러서며 조심스럽게 얘기했다.“곽승재, 너 술 많이 마셨어. 주민기한테 연락해서 기사 불러줄까?”곽승재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싸늘한 표정을 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눈빛은 마치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 깊고 어두웠다.고은서는 곽승재를 잘 알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그를 자극하는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면 그는 정말로 폭발할 수 있었다.힘으로 보나 속도로 보나 곽승재와 비할 수는 없었다.고은서는 뒤로 더 물러서며 곽승재를 부드럽게 타이르려 했다.“곽...”말을 꺼내려는 순간 곽승재가 갑자기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짝!고은서는 그가 또다시 강제로 자신을 안으려 한다고 생각해 반사적으로 그의 뺨을 때렸다.맑고 높은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바닥이 곽승재의 얼굴에 닿았다.곽승재는 그러려는 의도가 없었지만 겁에 질린 고은서의 손은 누구보다 빠르게 곽승재의 뺨을 내리쳐 잘생긴 그의 얼굴에 손자국을 남겼다.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순간 얼어붙었다.곽승재의 표정은 폭풍 전야의 먹구름처럼 어두워졌고 가슴은 거칠게 오르내리며 그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눈에 띄는 분노가 그의 이성을 집어삼킬 듯했다.고은서는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너... 너 뭐 하려는 거야!”그녀는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내가 뭘 하고 싶을 것 같아?”곽승재가 이를 악물며 물었다.어둡고 사납게 빛나는 두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