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하지 않고 되물었다.“내가 무슨 일을 숨기겠어.”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그럼 곽승재가 왜 계약 체결 현장에 안 왔는지 생각하고 있는 거야?”판주 투자은행이 이번 계약에 끼어든 건 곽승재가 일부러 그런 것이라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민시후도 이 점을 못마땅해하며 신경 쓰고 있었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달래길 바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럼 내가 곽승재를 생각하고 있다고 쳐.”고은서는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고은서, 너!”민시후는 예상대로 화를 냈다.“왜 화를 내? 네가 먼저 얘기 꺼낸 거잖아.”고은서가 묻자 민시후는 말문이 막혔다.고은서는 끝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이런 대답 듣기 싫으면서 왜 먼저 말을 꺼내는 거야? 말하고 나서 스스로 감당도 못 하면서 자업자득 아니야?”민시후는 고은서가 농담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그녀의 얼굴을 잡고 마구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민시후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은서야, 나 화난 거 아니야. 그냥 네가 곽승재와 많은 시간을 함께한 과거가 부러울 뿐이야.”‘그게 부러워할 만한 일인가?’고은서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과거는 많지만 아름다운 건 없었어.”고은서는 모든 복잡하고 어두운 감정들을 털어내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생각하고 있던 건 곽승재랑은 상관없는 일이야.”마침 웨이터가 음식을 내오자 고은서가 다시 말했다.“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일단 먹자.”대화 이후 고은서는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듯 보였다.민시후는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알고 싶었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음식은 정교하고 맛있었고 강변 야경은 아름다웠다.두 사람은 와인을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시간이 지나 있었다.웨이터가 후식으로 디저트를 가져오자 고은서는 얼른 한입 베어 물었다.달콤하지만 느끼하지 않은 맛이었다.“은서야, 나한테 할
민시후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고은서는 미소 지었다.“늘 생각해 온 일이야. 다만 ZY에서 프로젝트를 몇 개 더 완성하고 경험과 자금을 충분히 쌓은 후에 말하려고 했어.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명운도 상장을 앞두고 있고 제인 제약 계약도 체결되었잖아. 내 손에 새로운 프로젝트로 없으니 준비를 시작해도 될 것 같아.”“잘됐네. 마침 백씨 가문 산업 중에 금융 관련 사업도 있었으니 이번 인수 절차가 끝나면 네가 이어받아서 함께 운영하면 되겠다.”민시후가 제안했으나 고은서는 정중히 거절했다.“백씨 가문 산업은 ZY 그룹 프로젝트야. 내가 혼자 독점하는 건 아닌 것 같아.”“백씨 가문을 파산시킬 수 있었던 건 네 덕이야. 난 그냥 인수를 도와주려고 한 거지 ZY 그룹에 합병시킬 생각은 없었어.”그 말에 고은서는 약간 감동했지만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ZY 그룹에서 손을 댔으니 당연히 가져가야지. 이전에 약속했던 대로 비율에 따른 수익만 나눠줘.”고은서의 단호한 태도에 민시후는 한발 물러서며 인수가 완료된 후 다시 논의하자고 했다.이로써 두 사람은 잠정적으로 합의를 보았다.“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 게 이것 때문이야?”이때 강바람이 불어와 물결이 일렁였다.고은서는 반짝이는 강 건너편의 네온사인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졌다.“민시후, 앞으로 한동안 많이 바빠질 거야. 그래서 일 외의 것에 신경 쓸 시간은 없을 것 같아.”“그래서?”민시후가 뜻을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고은서가 시선을 돌려 민시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답했다.“그래서 이전에 약속했던 건 지키지 못할 것 같아.”“잠시만이라는 거야? 아니면 이대로 끝이야?”민시후가 묻자 고은서가 잠시 멈칫하다 답했다.“이대로 끝내자. 우리 다시 친구 해.”“고은서, 며칠 전만 해도 나를 믿는다고, 나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민시후의 목소리에서 감정의 동요가 느껴졌다.고은서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했다
모진 말로 밀어내려 했음에도 아직 포기하지 않는 민시후의 모습을 보며 고은서는 감동했다.그만큼 민시후가 감정을 중요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고은서는 그가 가족과의 갈등을 일으킬까 봐 걱정되었다.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이어 남은 가족들까지 멀어지는 걸 고은서는 보고 싶지 않았다.민시현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면 두 형제간의 다툼은 불가피할 것이다.그래서 고은서는 결국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다.“민시후, 네 형이 나를 찾아온 건 맞아. 하지만 나한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고 오늘 너한테 얘기한 건 모두 내 결정이야. 예전에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쫓아다녔는지 너도 잘 알잖아. 나는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아. 내 결정이 아니라면 아무도 나를 강요할 수는 없어.”민시후는 고은서의 말을 이해했다.민시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기사 보낼 테니 타고 가. 나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바래다주진 못하겠다.”말을 마친 민시후는 바로 자리를 뜨려고 했다.고은서는 민시후가 뭐 하려는지 바로 눈치채고 외쳤다.“민시후, 형 찾으러 가지 마. 내 결정은 그 사람과 아무 관계도 없어.”하지만 민시후는 대답 없이 그대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고은서는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민시현의 번호가 없었던 고은서는 고민 끝에 송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은서 씨?”송민준은 약간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고은서는 민시후가 민시현을 찾으러 갈 수도 있다고 하며 상황을 설명했다.“송민준 씨, 민시현 씨한테 민시후 좀 막을 수는 없는지 연락 좀 해주세요.”송민준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단호하게 답했다.“알겠습니다. 바로 연락드릴게요. 소식 있으면 알려드리겠습니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송민준은 약속대로 먼저 연락을 해왔다.“어제 시후는 아버지한테 불려서 북성으로 갔어요. 오늘도 해성으로 돌아오지는 못할 거예요. 은서 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저씨가 겉으로는 시후한테 엄한 듯해 보여도 속으로는 많
고은서도 절친한 친구로서 초대 명단에 포함되었다.저녁 무렵, 육현석이 차를 몰고 그녀들을 데리러 왔다.평소보다 더 격식 있는 차림을 한 육현석을 보고 고은서는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육현석, 안 지 꽤 오래됐는데 이렇게 정식적인 복장을 한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네?”육현석은 박지연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어쨌든 여자 친구의 친구를 처음 만나는 자리니까 이미지 신경 써서 좋은 인상 남겨야지.”고은서는 이전까지 육현석이 놀고먹는 것만 좋아하고 일에 관심 없는 부유한 집 자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곽승재와 사이가 좋았기에 전생에 그녀는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지만 육현석은 항상 그녀를 피했다.그러나 환생하고 나서 더 이상 그에게 잘 보이려 애쓰지 않자 오히려 육현석이 그녀와 곽승재의 사이를 돕기 위해 많은 조언을 해줬다.그래서 고은서에게 육현석은 EQ가 뛰어나고 여성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하지만 육현석이 박지연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보며 고은서는 자신이 편견이 있었음을 느꼈다.육현석은 박지연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그의 모든 행동은 EQ가 아닌 마음을 따른 결과였다.“너는 항상 멋졌어. 아름 언니도 마음에 들어 할 거야.”박지연이 육현석을 위로했다.“지연아, 너도 항상 이뻐.”육현석도 칭찬으로 답했다.“그만 좀 해! 여기 아직 사람 있잖아.”고은서가 닭살 돋은 팔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난 그냥 혼자 운전해서 갈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있다가 정말 닭이 되겠어.”박지연이 가볍게 헛기침했다.“그만하고 같이 가자.”육현석이 신사답게 두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었다.“아가씨들, 타시죠.”도아름과의 약속 장소는 해성에서 특색있는 한식당이었다.도착 후 박지연은 도아름에게 정식으로 육현석을 소개했다.육현석은 예의 바르게 도아름과 악수하며 선물을 건넸다.“나는? 왜 나는 선물이 없어?”박지연이 얼른 육현석을 감쌌다.“두 사람은 자주 만나면서 무슨 선물이야.”고은서가 불만을 터트렸다.“박지연 씨, 지금
곽 대표라는 호칭을 들은 고은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룸 밖에서 매니저처럼 차려입은 남자가 곽승재를 예의 있게 안내하고 있었다.곽승재는 검은색 수제 정장을 입고 안에는 간단한 흰 셔츠를 매치해 섬세하고 잘생긴 외모를 자랑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곽승재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향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고은서는 지난밤 그에게 손을 댄 일을 떠올리며 시선을 피했다.“승재 형?”육현석도 곽승재를 발견하고 꽤 놀란 듯 그를 불렀다.곽승재는 육현석을 바라보며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물었다.“너희들이 왜 여기 있어?”“지연이 친구들 만나러 왔어. 형도 아는 사람일걸? 도아름 씨라고.”육현석이 도아름을 소개했다.고가승재는 그제야 박지연과 도아름을 바라보며 예의 있게 인사했다.“지연 씨, 도 대표님.”박지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도아름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곽 대표님, 오랜만이네요. 혹시 괜찮으시면 저희랑 같이 식사하실래요?”도아름이 곽승재를 초대했다.“그래. 형. 어차피 모르는 사람도 없고 같이 먹자.”육현석도 맞장구를 쳤다.곽승재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없는 고은서에게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답했다.“됐어. 고객과 약속이 있어서.”말을 마친 곽승재는 매니저의 안내를 받으며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지연아, 은서야. 나 정말 형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나도 형이 여기 고객 만나러 올 줄은 몰랐다고.”곽승재가 자리를 뜨자 육현석은 곧바로 해명했다.“정말?”박지연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육현석은 진지하게 답했다.“정말이야. 너랑 은서가 승재 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그런데 왜 굳이 일부러 불러서 분위기를 흐리겠어?”고은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박지연이 답했다.“그래. 이번엔 믿어 줄게.”“걱정하지 마, 지연아. 네 허락 없이 먼저 승재 형을 부르는 일은 없을 거야.”육현석이 맹세하자 박지연은 그의 태도에 만족해하며 답했다.“우리도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백유미가 먼저 자살 시도를 하고 곽승재는 그 후에 수술을 받았는데 그런 졸렬한 변명이 통할 거로 생각하나?”박지연은 아무렴 믿지 않을 거라는 표정을 지었다.육현석이 머쓱한지 코를 만지며 답했다.“승재 형 그 얘기 할 때 꽤 슬퍼 보였어. 난 거짓말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정말 친동생보다 더 친한 사이네.”육현석과 박지연은 티격태격 말다툼을 시작했고 그 사이 도아름은 생각에 잠겨 있는 고은서를 바라보았다.도아름은 T 국에서 고은서가 겪었던 일과 백유미의 몇몇 추문 그리고 그녀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은서야, 괜찮아?”도아름은 고은서가 슬퍼하는 줄 알고 걱정스레 물었다.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괜찮아요.”“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곽 대표가 일부러 너를 슬프게 하려 했을 것 같지는 않아. 아마 그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을 거야. 은서야, 화해를 강요하려는 건 아니지만 감정이라는 건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법이야. 난 네가 막다른 길에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긍정적으로 앞을 바라보면 돼.”고은서가 담담히 웃으며 답했다.“저도 알아요.”전생에 곽승재에게 자신을 구하려는 마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상관없었다.하지만 그가 싸늘한 말투로 죽고 싶으면 죽으라고 말한 건 사실이었고 그녀도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아름 언니, 저 회사 차리면 주주로 들어오실래요?”도아름은 흔쾌히 승낙했다.“우리 명운을 알아보고 투자했으니 나도 참여해야지.”“나도 참여하게 해 줘!”육현석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나도 할래. 난 그냥 주주로만 있을게. 경영이나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는 조건으로.”“그 정도로 날 믿어도 돼? 혹시 손해 보면 어쩌려고?”“그럴 리가! 난 네가 큰돈을 벌 거라는 예감이 들어!”“그럼 네 말대로 되길 빌게!”식사를 마친 후 고은서는 육현석에게 박지연을 데려다주라고 했고 그녀는 도아름과 함께 명운으로 가서 전문가들과 회사를 설립하는 일에 대해 간단
고준석은 고은서의 불쾌한 표정을 알아채고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승재가 먼저 약속 잡고 나랑 바둑 두러 온 거야.”고은서가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그 사람 집에 자주 와요?”‘전에는 이렇게 한가해 보이지 않더니...’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일주일에 한두 번은 와. 바쁘면 안 와도 된다고 했는데 나랑 바둑 두는 게 좋다며 굳이 오더라. 심지어 네가 싫어할까 봐 너한테는 말하지 말라더라.”‘내가 싫어할 걸 알면서도 온다고?’고은서가 더 말하려는 순간 곽승재가 이미 집 안으로 들어섰다.곽승재는 그녀를 보고 약간 놀라는 듯했지만 곧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왔다.하지만 그는 고은서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할아버지, 저 왔어요.”곽승재는 고준석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승재 왔니? 앉아라.”고준석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번에도 녹차로 줄까?”“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곽승재는 자연스럽게 고준석 옆 의자에 앉았다.이를 본 고은서는 자리에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할아버지, 저는 조향실에 좀 있다가 올게요.”“과일차 마시고 싶다며? 지금 아주머니가 준비하고 있어.”“준비되면 조향실로 가져다 달라고 해주세요.”고은서는 말을 마치고 거실을 떠났다.“애도 참.”고준석이 한숨을 내쉬며 곽승재에게 말했다.“승재야, 은서 원래 저런 성격이니까 네가 이해해 줘.”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깊은 눈으로 고은서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고준석은 곽승재가 고은서를 붙잡으려 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 문제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은서의 마음은 스스로 선택해야 할 몫이지.’최근 곽승연을 위해 조향한 아로마 캔들의 효과는 괜찮은 편이었다. 기분도 한층 안정된 모습을 보인 터라 고은서는 이를 더 개선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두세 시간이 지나 있었고 어깨를 주무르며 거실로 돌아왔을 때 곽승재는 이미 떠나고 고준석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은
고은서는 조향실에서 일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때로는 너무 늦어져 집에서 자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곽승재가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 집 근처에서 머물렀을 가능성은 작았다.나아가 고은서는 지난번 곽승재를 이유 없이 오해한 일이 떠올라 사과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고은서가 승낙하자 운전기사는 다시 곽승재를 설득하며 직접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곽승재는 그제야 천천히 차에 올라탔고 차 안으로 밤공기와 담배 향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그는 고은서 옆에 앉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곽승재의 운전기사는 차 문을 닫고 고은서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이혁재는 바로 출발했고 차는 다시 질주하기 시작했다.차 안에서 곽승재는 먼저 고은서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또한 그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정말 차가 고장 나서 어쩔 수 없지 동승한 것처럼 보였다.“지난번 민시후와 관련된 일은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었어. 오해해서 미안해.”복수해야 할 것은 확실하게, 잘못도 제때 인정하는 것이 고은서의 원칙이었다.지난번 GS 그룹에서 그녀는 시시비비도 제대로 가리지 않고 곽승재를 비난했고 며칠 전 그가 찾아왔을 때도 오해하여 그에게 손찌검까지 했다.고은서의 충동임이 틀림없었다.그녀의 사과를 들은 곽승재는 살짝 비웃는 듯한 소리를 냈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가방에서 현금 뭉치를 꺼냈다.“이거 받아.”지난번 M 국에서 노숙자에게 쫓기고 나서 고은서는 현금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데 익숙해졌고 마침 쓸모가 생겼다.곽승재는 그녀가 내민 돈을 보고 눈빛을 가늘게 떴다. 그의 표정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치료비에 대한 보상이야.”그녀는 곽승재를 몇 번이나 때렸고 비록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약이라도 발라야 했을 테니 보상으로 돈을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곽승재의 차분했던 표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은서, 이렇게 대충 넘어가려고?”그의 목소리는 억눌린 분노와 서운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아니면?”고은서는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