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집안끼리 사이가 좋았던 걸 봐서라도 이 삼촌을 한 번만 용서해 줄 수 없을까? 삼촌이 잠시 정신이 나갔던 거야.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을게...”성동욱의 머리에는 이미 흰머리가 꽤 섞여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비굴하고 애처로웠다.아무리 가여워 보이는 사람이라도 미워할 구석은 있기 마련이었다.고은서는 성동욱이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는 단지 결과가 이렇게 심각할 줄 예상치 못했을 뿐이었다.만약 단순한 경범죄 처벌 정도에서 끝났다면 아마 그는 여전히 기세등등했을 것이다.한 번 용서해 주면 다음번에는 더 악랄한 짓을 저지를 게 뻔했다.그래서 고은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마땅한 벌을 받아야 했다.그 후 고은서와 송민준은 경찰서에서 간단한 진술을 마쳤다.회사에 돌아가 다른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데 마침 박지연에게서 연락이 와 그녀를 데리러 오겠다 했다.하여 고은서는 민시후의 제안을 거절했다.민시후도 굳이 고집부리지 않고 송민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송 가주, 오늘 은서 도와줘서 고마워. 차 한잔 살게.”송민준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신경 쓰지 마.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뭐.”“그래도 한잔하자. 마침 할 얘기도 있어.”민시후가 말하자 송민준은 한 번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이지.”고은서는 민시후가 송민준과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몰랐지만 적어도 그가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믿었다.그때 박지연이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고은서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넨 뒤 밖으로 향했다....조용한 찻집.송민준은 직접 정성스레 차를 우리고 있었다.그는 평소에도 차 마시는 것을 즐겼기에 차를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여유로운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시후야, 무슨 얘기 하려고?”송민준이 여유롭게 물었다.민시후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송민준을 바라보며 싸늘한 기색을 띠었다.“오늘 은서한테 페인트를 부린 일, 네가 사주한 거지?”송민준은 그 말을 듣고는 마치 우스
민시후가 송민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송 가주. 네 말은 이제 내게 신뢰를 잃었어. 내가 아는 너라면 평소에 절대 먼저 나서서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아. 그런데 왜 굳이 그 사람들이랑 함께 여재훈 씨를 만나러 갔고 왜 은서랑 그렇게 가까운 곳에 서 있었던 거야?”민시후의 질문에 송민준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가볍게 마셨다.“시후야, 넌 날 너무 과대평가하네. 나는 어디까지나 해성에서 겨우 자리 잡은 사업가일 뿐이야. 여재훈 씨처럼 배경이 탄탄한 사람과 인맥을 쌓고 싶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닌가? 나도 예외는 아니야. 그리고 은서 씨랑 얼마나 가까운 위치에 서 있었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송민준은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은서 씨가 위협받는 걸 본 순간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본능적으로 도왔을 뿐이야.”“우리 송 가주가 언제부터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었지?”민시후는 비웃듯이 말했다.“내가 기억하기로는 예전에 한 여자가 네 앞에서 기절했을 때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잖아.”송민준은 북성에서 손에 꼽히는 일등 신랑감으로 외출할 때마다 여자들의 접근을 피할 수 없었다.그날도 순진하면서도 요염한 분위기를 풍기는 한 여자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그러다 갑자기 저혈당이 온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랬는지 모를 일이지만 곧장 송민준을 향해 쓰러졌다.그러나 송민준은 조금의 연민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무심하게 한 발짝 물러났다.같은 엘리베이터에 있던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얼굴은 땅에 처박혔을지도 몰랐다.이 장면을 직접 목격한 민시후는 그때부터 송민준은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인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또한 그에겐 평범한 감정조차 없다고 생각했다.민시후의 비꼬는 말에도 송민준은 신경 쓰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그 여자들이랑 은서 씨는 다르지.”그 말을 들은 민시후의 눈빛이 한층 차가워졌다.“너 정말 은서한테 다른 마음을 품은 거야?”“시후야, 오해야.”송민준은 온화하고 담담하게 말했다.“내 말은 은서 씨랑
송민준은 담담하게 민시후를 몇 초간 바라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시후야, 너는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어. 내가 말했잖아. 은서 씨가 훌륭한 사람인 건 맞지만 다른 감정을 품지는 않았어. 할 말은 다 했고 차도 마셨으니 난 이만 가볼게.”그렇게 말하며 송민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송 가주. 앞으로 은서에게서 멀리 떨어져. 그리고 송민아를 빌미로 은서에게 다가가지도 마.”민시후가 다시 한번 경고했다.송민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지만 눈가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시후야, 아저씨랑 형을 봐서라도 네 태도는 문제 삼지 않겠지만 앞으로는 근거 없이 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우지 마.”송민준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마치고 찻집을 떠났다....고은서는 박지연과 함께 차를 타고 유일 투자은행으로 돌아가고 있었다.운전은 육현석이 맡았다.차 안에서 고은서는 성동욱이 페인트를 뿌린 사건에 관해 이야기했다.박지연이 놀라며 말했다.“성동욱 짓이었어? 나는 백승엽이 시킨 줄 알았지!”육현석이 얼른 말했다.“승재 형이 있는 이상 백승엽이 함부로 나서지는 못하지. 전에 T 국에서도 승재 형이 경고했고 게다가 백유미 일까지 터졌으니 백승엽도 정신없을걸?”박지연이 콧방귀를 뀌었다.“백승엽의 뒤에 곽승재 아버지가 있으니 곽승재의 경고는 무시하지 않겠어?”육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 백승엽은 결국 외부인에 불과하지. 아버님이 아무리 그래도 백승엽을 위해서 승재 형이랑 계속 대립하지는 않을 거야.”“정말?”박지연이 여전히 불신의 눈초리를 비췄다.“전에 T 국에서도 백유미를 위해서 급히 갔잖아. 지금은 그룹에서 곽승재에게 압력을 넣고 있고. 그렇게 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렇게 좋은 것 같지 않은데?”박지연의 말에 육현석이 헛기침했다.“아버님 성격이 좀 세시긴 하지만 이번에 승재 형에게 압박을 가한 건 백씨 가문 때문이 아니야.”박지연은 육현석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그렇다고 해도 곽승재 아버지도 참 웃기네. 백
육현석이 곽승재와 백유미의 관계를 해명하자 박지연은 그의 의도를 금세 파악했다.“곽승재가 백유미를 그렇게 챙기는 게 그냥 감정적으로 고마워서 그런 거라고?”박지연은 육현석의 설명을 믿지 않는 듯 바로 반박했다.“곽승재는 백유미를 판주 투자은행의 이사로 임명하고 백씨 가문 산업도 많이 도왔어. 그것만으로도 보답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곽승재는 백유미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백유미가 다치면 병원에 데려가고 또 백유미 때문에 은서를 의심했어. 이건 감사한 마음을 넘어선 거잖아.”육현석도 박지연의 말을 듣고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그는 고은서 앞에서 곽승재를 좋게 말하려던 의도였으나 오히려 상황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박지연이 말한 부분들이 고은서가 계속 마음속으로 신경 쓰고 있었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제일 큰 문제는 곽승재의 행동에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었다.이렇게까지 말이 나온 이상 더 큰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육현석은 끝까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결국 육현석은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지연아, 은서야. 나는 형을 변호하려는 게 아니야. 하지만 형에게 백유미는 단지 형을 도와준 사람일 뿐이었어. 형은 처음부터 백유미의 의도를 의심한 적이 없었지. 그리고 억지로 한 결혼 때문에 은서 네 마음을 부정하고 너를 밀어냈던 거야. 게다가 백유미가 일부러 너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었기에 여러 상황이 맞물려서 그렇게 반응한 것뿐이야.”육현석이 말을 이었다.“형도 너 때문에 속상해하며 나에게 몇 번이나 찾아왔어. 형은 단지 일을 처리하려 했을 뿐인데 너는 왜 계속 형에게 거리를 두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괴로워했지. 은서야, 형이 적절한 대처를 못 한 건 맞지만 백유미에게는 이성적인 감정이 전혀 없었어. 형이 좋아한 사람은 너뿐이야. 전에는 자존심 때문에 그걸 부인했지만 천천히 마음을 인정했지. 하지만 그때 네가 마음을 접었어.”육현석이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은서가 회의실에 도착했을 때 곽승재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그러나 그는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고 손에는 처리하지 못한 메시지가 담긴 스마트폰을 쥐고 있었다.그의 얼굴은 고된 일정을 나타내듯 미간은 찌푸려지고 얼굴에는 짙은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고은서는 육현석에게서 곽승재가 제인 제약 프로젝트로 인해 주주들의 압박을 받고 있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GS 그룹 다음 분기 실적의 상승을 약속했다고 들었다.그로 인해 최근 거의 매일 같이 야근하고 있다고 했다.“은서야, 볼일은 다 끝났어?”고은서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중 곽승재가 눈을 떴다.시선이 마주치자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에 또렷한 눈이 반짝였고 목소리에는 낮고 유혹적인 톤이 섞여 있었다.고은서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왜 아직 안 갔어? 할 말이라도 있어?”“저녁 안 먹었지? 옆에 가서 뭐라도 좀 먹을래?”곽승재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제안했다.고은서도 저녁을 먹지 않았지만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 밖에 나갈 시간이 없었다.“괜찮아. 배 안 고파.”하지만 곽승재는 굽히지 않았다.“그럼 음식 좀 배달시킬게.”곽승재는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음식을 많이 보내라고 지시했다.“직원들도 아직 저녁 못 먹었을 거 아니야. 다 같이 먹자.”곽승재가 말을 덧붙였다.고은서는 이미 주문된 음식이었으므로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얼마야? 송금해 줄게.”곽승재가 깊은 눈동자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은서야, 나랑 그렇게 내외하지 않아도 돼.”“나눌 건 나눠야지. 우리가 무슨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네게 빚질 수는 없잖아.”곽승재는 고은서의 목소리에서 불쾌함과 짜증을 느꼈다.하지만 곽승재는 화내지 않고 오히려 그게 좋은 신호라 생각했다.그는 고은서가 그에게 무관심하고 냉정하게 반응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 정도 불만을 가지는 것이 더 나았다고 느꼈다.하여 곽승재는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현금으로 줘. 지난번에 준 치료비랑 합쳐서 적금하면 되겠다.”고은서는 잠시
곽승재는 고은서를 바라보며 속에 있는 실망감을 감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은서야, 널 돕는 건 시간 낭비가 아니야.”고은서는 갑자기 짜증 내며 답했다.“곽승재, 정말 이럴 필요 없어. 난 당신한테 감정이 식었어.”곽승재는 잠시 침묵한 후 단호하게 말했다“알아. 네 선택을 존중할 거라고 말했잖아. 네 결정에도 간섭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너를 좋아하고 널 위해 움직이는 건 내 선택이고 내 권리야. 그걸 네가 막을 수는 없어.”고은서는 말로 다 하지 못할 느낌을 받았다.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곽승재는 근처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주문했는데 직원들은 음식을 보고 고은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대표님 정말 통이 크시네.”직원들은 모두 큰 책상에 둘러 앉아 함께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곽승재도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앉았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곽승재를 알고 있었고 고은서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고은서 옆자리를 그에게 양보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좋아하는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많이 먹어. 요즘 살이 많이 빠졌더라.”고은서가 그를 경고하듯이 바라보자 곽승재는 더 이상 음식을 집지 않고 대신 고은서에게 물과 휴지를 건넸다.“대표님, 곽 대표님 정말 다정하시네요.”한 직원이 부러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두 분 정말 너무 보기 좋으세요. 저도 모르게 응원하게 되네요.”곽승재의 외모도 자신감 있는 분위기는 다른 사람들이 다가가기 어렵게 했다.하지만 그런 사람이 고은서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은서가 말한 여직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보는 사람마다 응원하다가는 큰코다칠 거예요.”“몰라요. 너무 보기 좋은 걸 어떡해요! 곽 대표님, 힘내세요! 저희가 열심히 응원해 드릴게요.”곽승재는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노력할게요.”“와!”곽승재의 대답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고은서의 반응을 기대했다.“다들 그만 떠들고 밥이나 먹어요.”고은서는 직원들의 호들갑을
곽승재가 태연히 답했다.“목적지가 같은 데 왜 같이 안 가? 너랑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잖아.”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결국 운전대는 곽승재의 손으로 넘어갔다.그가 내세운 이유는 고은서가 하루 종일 피곤하게 돌아다녔으니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기서 운전하는 건 피로 운전이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했다.차에 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주인혁의 연락을 받았다.주인혁이 명운의 광고 모델로 활동하고 나서 두 사람의 연락은 줄어들었다.주인혁의 매니저가 좋은 배역을 따내 촬영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전생에서 주인혁은 가요계에서만 발전하고 영화계거나 드라마계에는 들어가지 않았었다.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왜 마음을 바꿨는지는 몰라도 고은서는 그를 응원했다.“인혁 씨, 촬영은 다 끝났어요?”고은서가 물었다.“아니요. 아직 촬영 중이에요.”주인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고 부드러웠다.“누나, 오늘 회사 개업했다면서요? 죄송해요. 이제야 소식을 들어서 축하 화환도 보내지 못했네요.”고은서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괜찮아요. 촬영이 중요하죠.”“며칠 뒤에 해성에 돌아가는데 밥이라도 한 끼 살게요.”고은서가 장난스럽게 답했다.“팬도 많은 가요계 왕자인데 함부로 밥을 어떻게 먹어요. 혹시나 팬들에게 사진이라도 찍히는 날에는 팬들이 저를 괴롭힐지도 몰라요.”“누나, 놀리지 마세요. 노래하고 연기하는 것도 직업일 뿐이에요. 사생활까지 다 빼앗길 순 없죠.”주인혁은 마음이 급했다.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농담이에요. 촬영 잘하고 해성으로 오면 연락해요.”“네.”주인혁은 전화를 끊기 아쉬운 듯 다시 말했다.“누나, 바빠도 몸 잘 챙기세요. 너무 무리하지 마요.”“내가 누나인데 그런 건 동생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고은서가 장난스럽게 답했다.“걱정하지 마요. 신경 쓸게요.”주인혁이 잠시 멈칫하여 말했다.“누나, 지금은 제가 크게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그래요. 인혁 씨도 몸 잘 챙겨요.”전화를
고은서는 잠시 생각한 후 거절했다.“고맙지만 매일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돌볼 시간이 없을 것 같네.”곽승재가 차분히 답했다.“그럼 아주머니가 계속 여기 남아서 돌봐주면 되겠네.”고은서가 고개를 저었다.“좋아한다고 해서 꼭 소유해야 하는 건 아니야. 그냥 가끔 보는 걸로 만족할게.”곽승재는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이미숙이 차를 가져와 고은서와 곽승재에게 각각 한 잔씩 건넸다.고은서는 작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이미숙에게 말했다.“며칠 동안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다 나았으니 짐 정리하셔서 승재랑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셔도 돼요.”그 말을 들은 이미숙이 급히 말했다.“사모님, 저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예원 별장에는 이미 가정부가 많이 있어서 제가 없어도 괜찮아요. 예전에도 말씀하셨잖아요. 같이 나와서 돌봐달라고. 저 여기 남아도 괜찮을까요?”고은서는 예원 별장을 나오기 전 이미숙을 설득한 적이 있었다.그녀는 신중하고 음식도 잘하고 나쁜 습관도 없었다.하지만 이미숙은 그녀가 곽승재를 사랑한 과거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지금에 와서 집에 남긴다면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할 것이고 어쩌면 그녀의 행방을 곽승재에게 이를지도 몰랐다.“네 일정 알기는 쉬워. 아주머니가 아니더라도 알아낼 방법은 많아.”고은서의 생각을 눈치챈 곽승재가 담담히 말했다.“잘 생각해 봐. 아주머니를 남기고 싶으면 앞으로 네가 월급을 주면 돼. 주 비서에게 계약 해지 하라고 통보할게.”곽승재는 공사를 구분해서 말했다.“사모님, 사모님과 지연 아가씨 두 분 모두 출근해야 하잖아요. 스스로 돌보기도 어려우니 제가 남으면 두 분 잘 도와드릴 수 있어요.”이미숙의 말에 고은서도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지금까지 밥은 항상 박지연이 하고 있어 그녀도 부담스러운 참이었다.적당한 가정부를 찾고 싶었던 차에 이미숙이 자발적으로 남고 싶다고 하니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그럼 아주머니가 수고해 주세요.”“감사합니다. 사모님!”이미숙은 기뻐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